증도가(證道歌) 제30구 과보(果報)의 시기

2024. 9. 8. 10:45증도가

 

남의 비방에 따르고 남의 비난에 맡겨두라

불로 하늘을 태우려 하나 공연히 자신만 괴로워한다.

 

<原文>

從他謗任他非(종타방임타비)

把火燒天徒自疲(파화소천도자피)

 

방(謗)은 말로 남을 훼방하고 모욕하는 것을 말하고,

비(非)는 옳지 않은 것을 옳다,

그릇된 것을 바르다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도

남의 비방이나 험담을 받게 되면

마음이 흔들리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칭찬을 받거나 남의 존경을 받게 되면

고요했던 마음이 괜시리 우쭐해지고

더욱더 흔들리게 되는 것이 중생의 마음입니다.

고려 후기 때의 고승 원감국사(圓鑑國師:1226~1292)도

순경(順境)에는 마음이 흔들린다고도 했습니다.

하물며 비방과 험담 같은 역경(逆境)을 당한 중생들이야

어찌 마음이 동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수행자는 그러한 비방이나 수모나

험담을 듣더라고 반발하여 시비를 가리지도 말고

동요하여 따라가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방을 따르고 비방에 맡겨두라고 한 것입니다.

 

<불설손타리숙연경(佛說孫陀利宿綠經)>을 보면

부처님도 이런 수모를 당한 예가 나옵니다.

외도들이 부처님을 험담하기 위해서

범지(梵志)의 딸 손타리(孫陀利)가

부처님의 설법을 듣기 위해 제타숲을

빈번히 오가는 것을 시기하여 외도들이 그녀를 죽여

곧장 제타숲의 도랑에 묻고 나서

코살라 국왕에게 달려가 부처가 살인했다고 고발한 일이나,

전차(旃遮) 바라문의 딸이 나무바가지를

치마 속에 감추어 부처님이 자기를 임신시켰다

비방한 일 등 9가지 사례가 나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비방을 받을 때도,

그것이 거짓임이 밝혀졌을 때도 침묵했습니다.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남을 비방하고

폄해하는 기술도 다양해지고 있습니다.

최근에 발발하고 있는 딥페이크(deepfake)란 것도

새로운 형태의 비방, 험담입니다.

딥페이크란 인공 지능 기술을 이용하여

사진이나 영상을 조작하는 일을 말합니다.

이 딥페이크 기술을 이용하여

순진한 학생들을 마치 포르노 주인공을 만들어 놓기도 하고,

사기꾼이나 성범죄자로 둔갑시키는가 하면,

유명인은 물론 정치와 무관한 사람도

마치 자기 지지자로 둔갑시켜 선거에 이용하기나

인기몰이에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들은 모두 분노하고 있지만

당사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일을 저질러 놓습니다.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말은 모두 사람이 알고 있습니다.

자기가 지은 업은 자기가 받는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지만 무감각하게

이런 행위들을 짓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업(業)을 지으면 과보(果報)가 있다는 말만 들었지.

인과응보에는 시기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대체로 업에 과보가 감응하는 데에는 세 가지 때가 있어서

그 시기가 같지 않습니다.

하나는 현보업(見報業)이니 이 몸이 업을 짓고

바로 그 몸이 받는 것이요,

둘은 생보업(生報業)이니 지금의 몸이 업을 지어서

다음 생에 받게 되는 것이며,

셋은 후보업(後報業)이니 이생에서

미처 다 받지 못한 것을 후후생(後後生)에

마침내 받게 되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현보업은 벼나 콩의 종류와 같이,

시간이 지나면 곧 익게 마련이고,

생보업은 보리와 밀 같은 곡식이니

해가 바뀌어야 비로소 익게 되며,

후보업은 복숭아와 자두 같은 것이라서

여러 해가 지나고 나서

마침내 열매가 맺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중생들은 생보업(生報業)과 후보업(後報業)은

내생을 믿는 것도 아니고,

설령 그렇다고 해도

미래의 일이라 알 수가 없는 것이기에

과보(果報)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현보업(見報業) 또한 당대에 받기는 하지는

지금 바로 받는 것이 아니고

다소 시간이 흘러야 하므로

교묘히 법망을 피해 가기도 합니다.

 

유마경 제자품중에

「법은 중생이 없으니,

중생의 때(垢)를 벗어났기 때문이요,

법에는 <나>가 있지 않으니

<나>라는 때(垢)를 벗어났기 때문이요,

법에는 희론이 없으니 공(空)하였기 때문이며,

법은 아소(我所)가 없으니,

아소를 초월하였기 때문이며,

법에는 분별이 없으니,

식(識)을 초월하였기 때문이며

법은 비교할 것이 있지 않으니,

상대가 없기 때문이며,

법은 인(因)에도 소속되지 않으니,

연(緣)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연(因緣)이란 예를 들면 종자가 인(因)이 되고

우로(雨露)와 농부등이 연(緣)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부처님이 침묵한 것은

이러한 일체 상을 모두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비방, 험담 등 이런 명자상(名字相)이 생기면

마음에 차별심이 일어나게 되고

차별심이 생기면 옳고 그름이 생기게 되고,

옳고 그름이 생기면 마음이 평정심을 잃어

좋은 소리에는 기분이 우쭐해지고,

나쁜 소리에는 기분이 좋지 않게 되고

또 분노가 일어나며, 이에 따라

사랑과 미움의 마음이 일어나게 됩니다.

<구마라즙>이 이르기를

「중생은 허망한 소견에 의하여 상(相)을 취하지만

그러나 법에는 상(相)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허망한 소견에 따라 상(相)을 취하면

그 결과 또한 허망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래서 고승들도 역경(逆境)이 아닌

순경(順境)에도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며,

영가 스님은

「불을 잡고 하늘을 태우려 하나

부질없이 자신만 피로해진다」라고 비유를 든 것입니다.

 

방거사(龐居士)는 게송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만물(萬物)에 무심할 수만 있다면

만물이 둘러싼들 무슨 장애가 되리오.

철우(鐵牛)는 사자후를 두려워하지 않으니,

흡사 나무 허수아비가 꽃과 새를 보는 것과 같아라.

 

나무 허수아비는 본체가 저절로 그러하고

꽃과 새도 무정(無情)하여 놀라지 않네.

마음과 경계[心境]가 여여하면 바로 이것일 뿐이니

보리도(菩提道)가 이루어지지 않음을 어찌 걱정하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