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제985호 청주 용화사 석조불상군

2020. 1. 3. 21:31문화재

보물 제985호 청주 용화사 석조불상군

산속이 아닌 도심 속에 자리한 청주 용화사(龍華寺)

충북 청주시 흥덕구 사직동 무심천 변에 자리한

대한불교 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말사다.

 

용화사의 상량문에 따르면 1901년 고종(高宗)의 후궁인 순빈 엄씨의 꿈에

 물에 잠겨 있는 미륵불이 나타나 구해주기를 청했는데,

청주군수 이희복도 비슷한 꿈을 꾸었다고 한다.

며칠 뒤 청주 군수에게 꿈에 본 7구의 부처를 자세히 조사해 보라는 엄비의 명이 내려와

 무심천(無心川) 풀숲에서 묻혀있는 7구의 불상을 발견해 엄비에게 보고하니,

1902년 엄비가 내탕금을 하사해 청주 상당산성(上黨山城) 안에 있던

보국사(輔國寺)를 옮겨 불상을 안치하고 용화사라고 불렀다.

이후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의 건강과 축복을 비는 원찰이 되었다.

 

 

미륵을 현몽한 엄비는 1854년 태어나 1911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대한제국 황제 고종의 후궁으로 공식 명칭이 순헌황귀비 엄씨(純獻皇貴妃 嚴氏).

불심이 깊었던 평민 출신인 그녀는 황후에 오를 수 없었지만

민비(명성황후) 사후에도 고종은 비()를 들이지 않아 그 역할을 하신 분이다.

사실상 황후 역할을 한 셈이다.

그녀의 나이 42세에 아들을 잉태하여 대한제국의 선포와 때를 같이 하여

 은을 낳았으니 그가 바로 영친왕이다.

 

 

   

용화사 창건 당시 사찰 규모는 미륵전 15, 산신각 3,

설교전 15, 요사 4칸 등으로 비교적 큰 규모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1907년부터 한동안 청주재판소로 사용되기도 한다.

1935년 화재로 법당이 전소돼 신축했으며

1950년 한국동란으로 법당이 완전히 소실되는 병화를 겪는다.  

6·25전쟁 이후 노천에 방치돼 있던 7구의 석불 상들은

 1972년 신도들이 모금하여 다시 미륵보전을 세웠고,

1993년에 그 법당을 헐고 지금의 2층 법당 용화보전을 지었다

 

 

(용화보전과 극락전으로 분산 봉안전 7구의 석조불상군)

현재 용화사 석조불상군 7기 중 3기는 1992년부터 1995년 사이에 조성한

조건물인 용화보전에 봉안되어 있고, 나머지 4기는 2008년에 재건된 극락전에 봉안되어 있다.

 용화보전은 금산사의 미륵보전 보다는 한 층이 덜한 안이 통해 있는

 2층 형태로 지어져 높이는 최고 5.5m에 이르는 장육불 등 대형 불상들과 조화를 이룬다.

석불상군 뒤로는 1000구의 작은 불상을 봉안할 수 있도록 천불감을 조성했다.

 

 

 

용화사는 이밖에도 1987년 범종루를 조성했으며,

1996년 용화보전 준공과 함께 팔각오층석탑을 세웠다.

용화보전의 양쪽 귀퉁이에는 고려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석탑 부재가 남아있다.

 

 

<용화지문(龍華之門)>

미륵보살은 석가모니불이 입멸(入滅)한 뒤 567000만 년이 되는 때,

즉 인간의 수명이 8만 세가 될 때 이 사바세계에 태어나서

화림원(華林園) 안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서 성불하여

3회의 설법으로 272억 인을 교화한다고 하는 미래의 부처님이다.

용화지문(龍華之門)의 용화는 용화수에서 따온 것으로

용화지문은 미륵보살이 강림한다는 의미를 상징한 문이다. 2층은 범종각이다.

 

 

용화보전 앞에 세워진 팔각오층석탑. 원각사의 9층탑을 모본으로 조성한 것같다.

 

 

 

 

 

<용화보전>

용화보전은 1995년에 중건되었으며 고려 시대 석불인 보물 985

7 불상 군이 모셔져 있는 용화사의 주법당이다.

정면 5, 측면 4칸 다포식 팔작지붕으로 2층으로 조성되어 있다.

7구의 불상 중 높이가 최고 5.5m에 이르는 장육불 등

대형 불상들을 모시기 위해 먼저 불상을 안치하고 그 뒤에 지붕을 올렸다고 한다.

석조7불상군 중에 키가 큰 세분의 부처님을 모시기 위해 밖에서 보면 2층이지만

안은 통층 형태로 조성되어 있다. 세분의 부처는 중앙에 미륵보살을,

왼쪽에는 석가모니불을, 오른쪽에는 약사여래가 모셔져 있고,

석가모니 상 뒤편에는 유등보살이 부조되어 있다.

용화보전 처마 모서리 끝에는 황금빛 종(요령)들이 달려있다.

용화보전 앞에는 팔각오층석탑이 세워져 있다. 용화보전을 준공할 때 함께 세웠다고 한다.

 

 

좌로부터 지장보살, 약사여래, 관세음보살, 미륵보살, 보현보살, 석가모니불, 문수보살

 

 

<미륵보살>

용화보전에 봉안된 가장 큰 불상으로 중앙에 봉안된 미륵불은

나발이 굵게 표현된 머리 위에는 유난히 높고 큼직한 육계가 놓여 있다.

얼굴은 길고 큰 편이며 가늘게 반쯤 뜬 긴 눈이나

작은 입의 표현 등에서 고려 시대 불상의 특징을 볼 수 있다.

 어깨는 둥글고 비교적 양감 있게 처리되었으나

불신은 전혀 굴곡 없이 밋밋해 커다란 기둥처럼 장대하게 느껴진다.

 

 

법의는 통견으로 걸쳤는데 두 어깨를 덮으면서 내려오는 옷 주름은

도식화된 U자형을 이루고 있다. 드러난 가슴 위에는 ''자가 새겨져 있고

그 아래로 꽃무늬가 장식된 승각기와 군의를 묶은 띠 매듭이 보인다.

두 손은 불신에 비해 큰 편으로 오른손은 가슴 위로 들어서 시무외인을 하고 있고,

 왼손은 아래로 늘어뜨려 여원인을 하고 있는데 두 손 모두 둘째손가락만 편 채 주먹을 쥐고 있다.

 

 

미륵보살과 보현보살

 

 

<석가모니불>

왼쪽 첫 번째 불상은 석가모니불로 두 번째 장대한 크기이며

상체와 비교하면 하체가 긴 편이고

다리 아래쪽은 시멘트로 보수되어 있어 약간 변형된 형태이다.

 

 

석가모니불

머리와 커다란 육계는 나발로 표현되었고, 얼굴의 이목구비나 두 손은 비교적 알맞은 크기로 조각되었다.

 법의는 통견으로 신체의 윤곽선을 따라 흘러내려 어느 정도 볼륨감이 나타나 있는데

 목 주위에서 옷깃이 한 번 접혀 있고 그 아래로 가슴을 덮으면서

 양다리에 이르기까지 물결과 같은 구불구불한 옷 주름선이 약간 도드라지게 새겨져 있다.

특히 가슴 위에 부조된 꽃무늬가 장식된 점이나

불상의 뒷면에 유등보살(油燈菩薩)로 불리는 상당한 크기의 나한상이

선각 된 점 등은 다른 불상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석가모니불과 문수보살

 

 

 

 

<유등보살>

석가모니불 뒤편에 부조된 유등보살이다.

지금까지 출토된 것을 보면 대개 광배 뒷면에 부조된 것과는 다른 형태다.

광배 뒷면에 불상이 새겨진 예로는 연꽃무늬 대좌 위에 앉아 있는

약사여래(藥師如來)를 조각한 밀양 무봉사 석조여래좌상(보물 제493)를 비롯하여

 경주 남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慶州 南山 彌勒谷 石造如來坐像, 보물 제136),

남원 만복사지 석조여래입상(보물 제43) 등으로

이러한 뒷면 불상은 매우 드문 예에 속하며,

당시 불상을 돌며 예불하던 건물의 구조적 특성 및 신앙적 배경이

주불상(主佛像)의 뒷면에도 보조적 성격의 불상을 새기게 된 이유로 생각된다.

 

 

유등보살은 석가모니불 전생에 수기를 내렸던 연등불에서 비롯된다.

연등불의 이야기를 경전에 보면 과거 일월등명불에게는 여덟 명의 왕자가 있었다.

그중 법의라는 막내 왕자가 바로 이 연등불이다.라고 한다.

증일아함경 제13권 제1에 이 부처님의 본연(本緣)에 대한 기록을 보면

과거 구원겁에 왕이 있었다. 이름을 지주(地主)라 했다. 장차 염부제를 다스리게 되어 있었다.

왕에게는 선명이라는 대신이 있었는데 왕은 염부제의 반을 나누어 주어 다스리게 했다.

선명은 후일 왕이 되어 일월광(日月光) 부인과의 사이에서 등광(燈光)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태어날 때 염부제가 돌연 금색으로 변했고 용모는 단정하여 32상을 갖추었다.

29세에 문득 깨달아 부처님이 되었다. 부왕인 선명왕은 40억의 남녀와 함께

등광불에게 나아가 가르침을 청해 법문을 들었고

이 부처님도 또한 지주왕이 있는 곳에 이르러 왕과 신하와 백성들을 위하여 설법하였다.

 왕은 그 후 7만 년 동안 사사(四事)로써 등광불과 비구들을 위해 공양하고

여래가 멸도하자 다시 7만 년 동안 부처님의 사리에 공양을 하였다.

@四事란 침구, 의복, 음식, 탕약 또는 음식, 의복, 산화(散花), 소향(燒香)를 일컫는다.

 

이러한 인연 공덕으로 나중에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여 도를 깨달아 석가모니 부처님이 된다는 얘기다.

 

 

또 이외에도 연등불과 석가모니 부처님에 관한 얘기는 상당히 많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과거 유동보살로서 인위(因位)를 닦을 때

일곱 송이의 연꽃을 연등불에게 공양하였는가 하면

연등불이 온다는 갑작스러운 말을 듣고 진흙길에

자신의 몸을 엎드려 밟고 지나가시게 한 인연도 있다.

또한, 연등불이 오자 어린 유동보살은 소꿉장난하던 깨어진 기왓장에

모래를 담아 연등불에게 공양하였더니 연등불이 흔쾌히 받으며 수기를 하였다고 하는

 매우 아름다운 설화도 전한다. 연등불(Dipamkara)은 과거 머나먼 옛적에 출현하여

현재의 석가모니불에게 미래세에 반드시 성불하여 호를 석가모니라 할 것이라는

 수기(授記)를 준 부처이시다. 정광여래(錠光如來) 또는 정광불이라고도 한다.

이를 음역하여 제화갈라(提和竭羅)라고 하며

또는 보살의 칭호를 붙여 제화갈라보살, 갈라보살 이라고도 한다.

 

 

<약사여래불>

오른손은 보병(寶甁)을 왼손에 보주(寶珠)를 들고 있는 이 불상은 약사여래로 보인다.

새로 조성된 대좌와 석질의 색상은 이질감을 느끼게 한다.

목에는 삼도가 분명하고 법의는 우견편단인 것 같은 양식을 한 통견이다.

미륵보살과 같은 가사를 둘렀지만,

오른쪽으로 흘러내리는 물결 모양을 취하고 있으며, 승각기와 군의의 매듭은 보이지 않는다.

 

 

 

 

 

약사여래와 관음보살

 

 

 

 

 

 

 

 

극락전

정면 5, 측면 3칸 다포식 팔작지붕 건물이다.

극락전은 1902년에 건립되었으나 한국 전쟁 때 소실되어 2008년에 재건했다.

극락전 내부에는 아미타불과 지장보살, 관세음보살의 삼존불과

용화사 칠불상군 중 4기인 석조 유마거사좌상, 석조 미륵보살상,

석조 보현보살과 이름이 확인되지 않은 석조 나한상 1기의 조상이 안치돼있다.

 

 

 

 

중앙에 아미타삼존불을 봉안하고 왼쪽에 유마거사와 미상의 석조상을,

오른쪽에 보현보살과 미륵보살을 모셨다.

 

 

 

중앙에 아미타불을,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을 좌우 협시로 모셨다.

 

 

 

 

 

 

 

 

 

 

보현보살과 미륵보살

 

 

 

 

 

 

 

<아미타내영도>

황금사원으로 알려진 은평구 수국사 지장전의 아미타내영도와 동일 구도의 화풍이다.

 

 

 

 

 

<삼상각>

정면 3칸 측면 1칸 다포식 팔작지붕으로

 법당 안에는 석조 치성광여래, 독성, 산신을 모시고 후불탱화가 조성되어 있다.

 

 

 

 

 

 

치성광여래

 

 

독성

 

 

산신

 

 

용화사석조불상군의 의의와 평가

청주 용화사 석조불상군의 7구 거상들은 한 사찰에 봉안된,

당대 석불거상군(石佛巨像群)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작품의 양식적 특징이나 형식적 내용 등으로 보아 고려 조각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7()의 불상들은 한 곳에서 출토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용화사 인근인 무심천 주변은 독일의 구텐베르크 활자보다 78년 앞섰다는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결>인 세계최초 금속활자본의 거점 흥덕사지가 있고,

 많은 유물이 출토된 신라말 내지 고려 초 창건되었다는 운천동 사지와

많은 금속유물이 출토된 사뇌사지가 있다. 특히

1993년 용화사 인근에서 무려 400여 점에 이르는

 사뇌사 유물이 한꺼번에 발견된 점으로 미뤄,

용화사 석불상군과 사뇌사가 연관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조계종 2대조인 진각국사 혜심(慧諶)의 어록에 따르면

고려 무신의난 때 수선사결사(修繕社結社)를 주도했던

 진각국사 혜심이 사뇌사에서 하안거를 보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러한 옛 절터들이 용화사 인근에 많았던 곳으로 보아,

여기저기 절터들에 흩어져 있던 불상들을 한자리에 모신 것이 아닌가 추측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