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제75호 창녕 송현동 마애여래좌상과 송현동 고분군

2020. 1. 14. 20:51문화재

보물 제75호 창녕 송현동 마애여래좌상과 송현동 고분군

창녕 화왕산(해발 756m) 군립공원 자하곡 입구에서 왼쪽에 보이는

우뚝 솟은 2층 건물이 대한불교 천태종 창화사(彰華寺)이고

 청화사의 옆으로 등산로가 나 있다.

등산로를 따라 50m 정도 오르면 오른쪽에 보물 제75호로 지정된

창녕 송현동 마애여래좌상이 있고 왼쪽에는 사적 제514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이 있다.

 

 

 

 

@화왕산 군립공원 입구에 보이는 이 건물은

창녕 대한불교 천태종 창화사(彰華寺)의 대불보전(大佛寶殿)으로

200210월에 낙성식을 한 전면 5, 측면 3칸의 주심포 팔작지붕을 한 2층 건물이다.

눈을 부릅뜬 거대한 2기의 석조 금강역사가 가람을 지키고 있다.

 

 

나라연금강

 

 

 

 

밀적금강

 

 

 

 

 

 

 

 

창화사 옆 소로를 따라 조금 오르면 보호각이 나오고 그 보호각 안에 마애여래가 봉안되어 있다.


 

 

 

 

 

 

창녕 송현동 마애여래좌상(昌寧松峴洞磨崖如來坐像보물 제75

송현동 마애여래좌상은 최대 폭 296, 높이 152규모의 자연 암반을

반원형으로 다듬어 광배(光背)처럼 보이게 하고, 그 가운데에 두드러게 고부조한 마애여래좌상이 다.

 전체적으로 풍만감이 있어 보인다.

 

 

 

 양 무릎 폭이 넓어서, 육계(肉髻 끝과 무릎이 거의 정삼각형에 가까운 구도를 형성하고 있으며,

이목구비의 일부가 훼손되어 있을 뿐 보존상태는 대체로 양호한 편이다.

 

마애여래좌상 표시판 옆에 대한불교 법화종 화왕산 미륵암이란 안내판이 병렬되어 있는데

이 마애여래좌상이 미륵불인지는 정립되지 않는다.

#1920년 간행된 '대정 6년도 고적조사보고(大正六年度古蹟調査報告)'에 의하면

송현동마애여래좌상에 대한 간략한 보고와 사진이 수록되어 있는데.

1917년의 조사내용에 따르면 마애불은 <미륵불>로 지칭되고 있으며

 원위치에서 이동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사 당시 마애불은 이미 풍화로 인하여 마멸이 진행된 상태였으며, 보호각이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불상의 전체 높이는 148, 두부 높이는 59, 두부 폭은 36, 어깨 폭은 83,

무릎 높이는 24, 무릎 폭은 125의 규모이며, 조각의 두께는 17~25이다.

광배는 별도로 새겨져 있지 않으며

현재 공양단에 가려져 확인이 어려우나 하단에 앙련의 연화대좌의 흔적이 희미하게 보인다.

 

 

 

 

부처가 지니는 지혜의 상징인 흰 털[白毫]이 있던 흔적이 이마에 있으며,

이를 제외하면 파괴나 마멸된 곳이 없이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불상의 얼굴과 신체는 군더더기 없이 단정하게 처리되었다.

적절한 신체 비례와 안정감 있는 자세가 돋보인다.


 

 

  

머리에는 큼지막한 상투 모양의 육계(肉髻)가 돌출되었고,

둥근 얼굴에는 이목구비가 단정하게 묘사되어 온화한 인상을 풍긴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새겨지지 않았고, 둥글게 벌어진 어깨는 듬직하게 보인다.

그러나 가슴과 배의 구분이 없고 인체의 굴곡도 나타내지 않았으며,

몸은 평면적으로 처리되었다. 튼튼해 보이는 팔은 짧지만

 편안하게 무릎 위에 두어 손끝이 땅을 향한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했다.

이 수인은 석가모니가 악귀를 물리치고 깨달음을 얻는 순간을 상징한다.

 

 

 

두 발은 가사로 덮여 드러나 있지 않다.

 

 

법의(法衣)는 편단우견(偏袒右肩)으로 비교적 얇은 옷은 신체에 밀착되었고,

형식적으로 처리된 계단식의 옷 주름이 일정한 간격으로 얕게 새겨졌다.

 밋밋하고 굴곡이 없는 신체와 간소한 옷 주름이

이 불상을 단정해 보이게 만들지만 자연스럽거나 사실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양감이 충실하게 표현된 얼굴, 안정감 있는 비례, 얇게 밀착된 옷 등에서

석굴암 본존불 계열의 양식을 이어받은 작품으로 보이지만,

그보다는 훨씬 사실성이 줄어들고 이상적인 신체를 구현하려는 의지도 보이지 않아서

신라 하대인 9세기 이후의 조각으로 판단된다.

 

 

 

 

자연석을 활용한 일종의 마애불로 입체감이나 사실성은 떨어지지만,

신체 비례가 안정감이 있고, 균형이 잘 잡혀 있다.

양감이 줄어든 모습과 간략하게 처리된 옷 주름 묘사 등

이 불상의 특징은 신라 하대 이후 각 지방에서 불상의 조각이 이뤄지며

지방화하는 모습을 짐작하게 해준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창녕 교동과 송현리 고분군

시대: 고대/삼국/가야

문화재 지정: 사적 제514

건립 시기: 가야 시대, 5세기 중반6세기 전반

면적: 216,360

소재지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송현리 20-1

 

 

 

 

 

@창녕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진한의 12개 나라 중 하나인 불사국으로, 비사벌이라고 불리던 곳이다.

송현동 무덤들은 크게 2개 지역으로 나누어진다.

1 지역은 목마산 기슭에서 서쪽으로 80여 기의 무덤이 있던 큰 무덤들이었으나,

지금은 16기 정도만이 남아 있다.

 

 

 

2 지역은 송현동 석불이 있는 부근에 20여 기 정도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대부분이 논으로 변하여 원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무덤은 겨우 몇 기 정도이다.

근처의 교동 무덤들과 가까이 있어 무덤의 구조와 유물의 성격이 거의 같다고 여겨진다.

교동 무덤과 함께 1918년에 발굴되어 많은 양의 유물들이 발견되었는데,

유물 중 일부는 행방을 알 수 없게 된 것도 있다고 한다.

1963121일에 사적 제81호로 지정되었다가 2011728일에 지정 해제되고

사적 제514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으로 재지정되었다. 면적은 216,360이다.

 

 

이 고분군은 1917년 일본인 학자 이마니시今西龍에 의해 처음으로

수십여 기가 분포하는 것이 보고되었다.

본격적인 조사는 2001년 경남문화재연구소에 의해 지표조사가 시행되어

21기의 고분이 분포하고 있는 것이 확인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확인된 고분 가운데 제27호분에 대해서는 정비복원을 위한 시굴조사가 시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제6·7호분은 유구의 중요성이 인정되어

 학술적인 정밀발굴조사로 전환되었고 조사도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가 담당하게 되었다.

 발굴조사는 2004420일부터 2006324일까지 3차에 걸쳐서 330일간 실시되었다.

 

 

 

 

송현동 고분군은 지금까지 소개된 고분의 구조와 축조기법

그리고 돌방 내부에서 출토된 유물의 특징을 참고하면,

 5세기 중반에서 6세기 전반 사이에 축조된 창녕지역의 유력한 지배자의 무덤으로 판단된다.

 이 고분군은 창녕지역과 신라와의 관계, 일본열도와의 교류 관계를 해명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