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보살사 석조이존병립여래상(淸州菩薩寺石造二尊竝立如來像)

2019. 12. 28. 19:14문화재

청주 보살사 석조이존병립여래상(淸州菩薩寺石造二尊竝立如來像)

이불병좌상(二佛並坐像)은 중국에서는 북위 시대, 특히 5, 6세기에 크게 유행하였으나,

우리나라에는 그 예가 많지 않다. 이불병좌상이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견보답품(見寶塔品)의 내용 중 석가불(釋迦佛)이 다보불(多寶佛)

다보탑(多寶塔) 안에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을 도상화한 불상이다.

마애불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보물 제97호로 지정된 괴산 원풍리마애이불병좌상이고

그 외는 금동불이나 탱화로 알려져 있을 뿐이다.

 

 

청주 보살사 석조이병립여래상은 마애불로 좌상(坐像)이 아닌 입상(立像)으로

 아직 보물급으로 지정되지는 못하고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지만

이불병(二佛竝)에 관한 불상연구에 큰 가치를 지닌 불상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보살사는 청주시 남동쪽의 낙가산 중턱에 자리 잡은 청주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로

 고려 때에는 충청북도

청주의 용두사(龍頭寺: 현재는 국보 제41호로 지정된 철당간(鐵幢竿)만이 남아 있다)

 보은의 법주사와 함께 이 지역의 대표적인 대한불교 법상종 사찰이었다.

현재는 대한불교 조계종 사찰로 법주사의 말사로 되어 있다.

 

한국사찰전서에 의하면, 보살사는 신라 진흥왕 28(567)

법주사를 창건한 의신조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의신조사의 생몰연대는 알 수 없고 다만

"속리산대법주사본말사기"에 법주사 창건주로 알려져 있을 뿐

자세한 생애는 전하지 않는 신라의 고승이다

 

 

창건 이후 778(혜공왕 14)에 진표의 제자 융종이 중창했고,

918(태조 1)에 고려 태조의 5번째 아들이자 당대의 고승이었던 증통이 3번째 중창을 했으며,

1107(예종 2)에 자정이 다시 중창했다. 1458(세조 4)에는 세조의 명으로 중수했으며,

1626(인조 4)에 벽암 각성(覺性)의 제자 경특이 중수하고,

 1683(숙종 9)에 일륜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그 후 수차례의 중수가 있었다.

 

청주 낙가산 보살사의 지정문화재로는 극락보전(충북유형문화재 56)을 비롯하여

오층석탑(충북유형문화재 65), 영산회괘불(보물 제1258) 등이 있고,

당우로는 명부전, 삼성각, 수각, 요사 및 부속 건물이 있다.

극락보전은 조선 초기에 세워진 것으로 조선 선조 때에 중수되었으며,

내부에는 청주 보살사 석조이존병립여래상(충북유형문화재 24)이 있다.

오층석탑은 1703(숙종 29)에 건립된 것으로

조선 중기의 석탑 양식을 고증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보살사의 주요 전각은 삼성각, 명부전, 그리고 극락보전으로 단출하다.

극락보전 앞에는 5층 석탑이 조성되어 있다.

 

 

 

 

<극락보전>

청주 보살사 극락보전(淸州 菩薩寺 極樂寶殿)

198019일 충청북도의 유형문화재 제56

조선 초기 건물의 특징이 강하게 남아 있는 불전 건축이다.

선조(재위 15671608) 때 수리하였으며,

조선 숙종 9(1683)에 중건(重建)된 후 고종 9(1872)에 다시 지었다.

 

앞면 3·옆면 2칸의 규모이며, 공포는 다포식이며 지붕은 맞배지붕이다.

자연석으로 쌓은 2단의 기단 위에 자연석과

초창 당시 쓰였던 것으로 보이는 2단 원형 주초를 초석으로 이용하고

그 위에 원주를 세웠는데 각 기둥에는 중창의 흔적이 뚜렷하게 보인다.

우주는 평주보다 굵고 높은 편이며 두공은 치밀하게 배치하여

조선 중기의 건물양식을 보여준다.

법당 안에는 아미타 삼존불과 후불탱화가 봉안되고,

그 옆에 석조이존병립여래상(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4)과 지장보살상, 신중탱이 모셔져 있다.

(필자가 방문시 재를 지내고 있는 중이라 자세히 살펴볼 수가 없었다.)

 

 

 

<오층석탑>

보살사 극락보전(極樂寶殿) 앞에 있는 이 5층 석탑(五層石塔)

 2층 탑신(塔身)강희계미(康熙癸未)’라는 음각명(陰刻銘)이 있어

 조선 숙종 29(1703)에 건립된 것을 알 수 있다.

기단(基壇)부터 상륜부(相輪部)까지 원형이 잘 보존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주는 석탑으로 조선 후기의 석탑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이다.

19801113일 충청북도의 유형문화재 제65호로 지정되었다.

 

 

지대석 위에 하대석을 대신하는 3단의 받침이 있고

그 위에 복연화문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중대석이 생략된 단층 기단으로 볼 수 있다.

 

 

초층옥신(初層屋身)의 각면(各面)에는 양우주(兩宇宙)가 각출 되었으며

그 내면에 2개의 4각형과 내원을 음각하고 그 안에 범자를 음각하였다.

 

 

 

 

 

 

 

초층 옥개석은 1매 석으로 층급받침은 2단으로 표현되었고

전각부는 반전되지 않아 둔중한 느낌을 준다.

 

 

 

2345층의 옥신과 옥개석도 모두 1매 석으로 구성되었고 조각 수법도 초층과 같다.

 

 

상륜은 5층 옥개석과 동일 석으로 노반이 생략된 복발과 보륜, 그 위에 연봉이 장식되었다.

 

 

 

각부의 실측치는 전체 높이 348cm, 지대석 폭 170cm, 높이 7cm,

기단석 폭 143cm, 높이 55cm, 상륜 지름 25cm,

 

 

 

 

 

 

 

 

 

극락보전에는 아미타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본존이 아미타불과 협시불인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 보살상이 좌세가 특이하다.

모두 앞으로 고개를 내민 형태를 취하고 있다.

 

 

 

 

 

 

 

 

 

 

 

 

 

 

보살사 극락보전 삼존불 뒤에 탱화가 사찰안내서와 달라  검색해 보았다.

원래 후불탱화로 이 아미타극락도인 것 같고 처음 사진의 아미타탱은 새로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청주 보살사 석조이존병립여래상(淸州菩薩寺石造二尊竝立如來像)

보물 제97호로 지정된 괴산원풍리 마애이불병좌상과 달리,

1970년에 보살사 뒤쪽 경내에서 발견되어 극락보전 안에 봉안된 이 불상은

 하나의 광배 안에 두 불상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묘사한 매우 특이한 작품이다.

크기는 높이 84cm, 현재까지는 고려 시대 작품으로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4호 지정되어 있을 뿐

이존병립여래상의 조성배경 등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부드럽고 친근한 인상을 풍기는 이 불상의 머리카락은 나발이며 육계는 넓고 낮게 표현되었다.

지그시 감은 두 눈과 긴 코, 아담한 입술이 묘사되어 있는데,

향 좌측 불상의 미소가 더욱 강하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뚜렷하다.

 

 

 

가사는 통견(通肩)인데 양어깨에서 마치 목걸이를 걸친 듯 넓은 옷깃이 둥글게 흘러내려 온다.

그 사이로 노출된 가슴은 특별한 양감이 느껴지지 않지만

향우측 보살상의 경우 가운데 희미하게 가슴골을 새겨넣어 약간의 굴곡을 주고 있다.

 

 

두 불상의 수인은 동일하나 좌우대칭으로 바뀐 모습이다.

 바깥쪽 손의 손바닥을 가슴 앞 옷깃 끝 선에 맞게 들어

정면을 향하게 시무외인(施無畏印)을 결하였고,

안쪽 손은 배 앞에 두어 마치 허리띠를 잡고 있는 듯한 손 모양을 하고 있는데

손가락의 움직임을 정교하다.

 

 

허리 아래로 내려오는 가사는 두 다리 위로 각각 밀착되어 흐르다가

무릎 쪽으로 내려오면서 ‘W’자 모양의 옷 주름을 만들며

두 다리의 윤곽선을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옷자락은 다시 그 아래로 흐르는데 ‘U’자형으로 두 다리를 감싸며 마무리되고 있다.

하의는 두 다리가 서로 구분되게 표현하였고 그 끝에 희미하게 발가락이 묘사된 두 발이 보인다.

 

 

 

 

 

 

 

 

 

 

  

불상의 양식은 통일신라 시대의 전통에 충실한 편이지만,

다소 경직되게 묘사되어 있고 소맷자락은 마치 저고리를 입은 것처럼 표현되어 있어

 시대적인 변화를 함께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제작 시기는 고려 시대로 추정된다.

   

 

 

두 불상을 나란히 조성한 것은 흔히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견보탑품(見寶塔品)에 나오는 석가와 다보 두 부처의 만남을 묘사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불병좌상에 등장하는 다보여래(多寶如來)는 동방 보정세계(寶淨世界)의 교주로 보살로 있을 때,

내가 성불하여 열반에 든 뒤에, 시방세계(十方世界) 어느 곳이든

법화경을 설하는 곳에는 나의 보탑(寶塔)이 솟아 나와 그 설법을 증명하리라라고 서원하였다고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영취산(靈鷲山)에서 법화경을 설할 때 역시 보탑이 솟아 나왔다고 한다.

이 경우 대체로 불상을 좌상 형식으로 조각하였는데,

 보살사의 이존불상은 입상으로 표현되어 있어 주목된다.

 

 

명부전

 

 

지장보살을 중앙에 무독귀왕과 도명존자를 협시로 봉안했다.

좌우에는 시왕과 금강역사를 배치했다.

 

 

 

 

밀적금강이 악귀를 밟고 있는 상

 

 

 

 

나라연금강

 

 

삼성각

 

 

요사채 앞에 몇점의 수석이 전시되어 있다.

산수화를 상징하는 문양석이 마음에 들어 담아 보았다.

 

 

 

@보살사 영산회괘불탱 보물 제1258.

보살사영산회괘불탱은 길이 6.13m, 4.26m로 삼베 위에 그린 것이며,

 붉은색을 주로 사용하였고 녹색·황색 등 중간색을 넣어 밝은 화면을 보여준다.

남아 있는 글을 통해 조선 인조 27(1649)에 경기도·충청도 등지에서 활약했던

신겸, 덕희, 경윤 등이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초대형의 거대한 화면을 가득히 메운 이 불화는 괘불탱화(掛佛幀畫)로서

중앙에는 석가부처가 화면을 압도하게끔 큼직하게 그려져 있다.

현란한 키형 광배를 배경으로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에 결가부좌(結跏趺坐)의 자세로 앉아 있다.

위엄에 넘친 석가불의 모습은 근엄한 얼굴, 당당한 상체

그리고 듬직한 하체가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와 함께 뾰족한 육계(肉髻), 큼직한 계주(髻珠), 작은 코와 입보다 유난히 큼직한 눈,

물고기 모양의 도식적인 귀 등은 전형적인 당시 불상의 상호(相好) 특징이다.

 

우견편단(右肩偏袒)의 착의로 노출된 오른쪽 상체의 당당함과 상대적으로 수척한 팔,

 대의(大衣)의 옷깃에 표현된 치밀한 꽃무늬와

 발목의 연꽃잎 같은 옷깃 등은 역시 당시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부처의 무릎 아래에는 설법을 청하는 청문자(聽聞者)가 있다.

그리고 좌우 끝단에는 사천왕(四天王)2구씩 배치되었다.

불상의 두 무릎 주위로 문수(文殊)와 보현(普賢) 8대 보살과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天)이 둘러싸고 있다.

 

불상의 어깨 좌우로는 10대 제자가 개성 있는 표정으로 묘사되었다.

그 좌우로 팔부중(八部衆)이 일렬종대로 배치되었는데

모두 투구를 쓰고 위엄에 찬 모습이다

. 부처님의 머리 좌우와 위로는 화신불(化身佛)

타방세계불(他方世界佛)들이 현란한 오색구름에 둘러싸여 있다.

 

 

이처럼 대형의 화면이기 때문에 본존불을 압도적으로 크게 그렸다.

하지만 호위하는 무리, 보살 무리, 제자 무리, 청문 무리 등

일체 대중들까지도 모두 묘사되었을 뿐 아니라,

각 상은 제각기 개성 있는 상호와 독특한 몸짓을

자유자재로 그려 내었다는데 커다란 의의가 있지 않나 한다.

이 괘불탱은 승려 신겸(信謙)과 덕희(悳熙) 등이 1649(인조 27)에 그린 것이다.

신겸은 이보다 3년 후에 만들어진 청주 안심사 괘불(국보 제297)

김천 직지사 대웅전의 신중화(神衆畵)의 조성에도 참여한 인물이다.

화려하고 선명한 채색과 다양한 문양 및 중후한 형태 등

 17세기 전반 불교 회화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사진 및 자료출처: 문화재청과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