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제297호 영산회괘불탱이 있는 청주 안심사

2019. 12. 25. 19:05문화재

국보 제297호 영산회괘불탱이 있는 청주 안심사

이불병입상(二佛倂立像)이 있다는 청주 보살사를 찾아 가는 길에

국보 제297호 영산회괘불탱이 있다는 안심사를 먼저 들렸다.

이른 시간대라서 그런지 고속도로는 운무에 가려 있었다.

 

 

 

 

 

 

청주 시내에서 조금 떨어져서 그런지, 겨울의 초입이라서 그런지 사찰은 고요하고 적막하게 보였다.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法住寺)의 말사인 청주 안심사(安心寺)

사적기(事蹟記)가 남아 있지 않아 창건에 관한 자세한 내력을 알 수 없다.

 안심사고적연대표(安心寺古蹟年代表)에 따르면

775(혜공왕 11) 진표율사(眞表律師)가 창건하였다.

 

 

 

진표율사(眞表律師)가 이 절을 창건할 때

제자들을 평안한 마음으로 양성하였다고 해서 안심사(安心寺)라 하였다고 한다.

그 뒤 1325(충숙왕 12)에 원명국사(元明國師)가 중건하였고,

1613(광해군 5)에는 비로전을 중건하였으며,

1626(인조 4)에 송암(松庵)이 중수하였다. 그 뒤 한말에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창건주로 알려진 진표율사는 김제 금산사 창건주로도 알려진 신라 중기의 고승이다.

해동고승전에 의하면 진표율사는 어려서 활을 잘 쏘았는데

어느 날 논둑에서 개구리를 잡아 버들가지에 꿰어

물에 담가두고 산에 가서 사냥한 후 개구리 일은 잊고 지내다가,

이듬해 봄에 개구리 우는 소리를 듣고 생각이 나서 그곳에 가 보니

지난해에 담가 둔 그대로 버들가지에 꿰어진 채 울고 있는 개구리를 보았다 한다.

 이에 뉘우치고 불도에 뜻을 두어 12세에 금산사로 들어가

숭제법사(崇濟法寺) 밑에서 승려가 되었다는 일화를 지닌 분이다.

 

 

안심사는 진입로의 계단을 오르면 왼쪽에 선방(禪房)이 있고

오른쪽의 높은 단 위에 영산전이 서향하고 있다.

대웅전은 안쪽 깊숙한 곳에 남서향하고 있으며 대웅전의 왼쪽에는 삼성각과

세존사리탑(世尊舍利塔) 및 탑비(塔碑)가 있고

 오른쪽에 국보 제297호인 영산회 괘불탱 복제품을 괘불대에 세워놓았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과 영산전, 삼성각, 요사채 2동이 있고, 주요 문화재로는

1) 안심사 영산회 괘불탱 (국보 제297)

2) 안심사 대웅전 (보물 664)

3) 안심사 세존사리탑 (충북유형문화재 27)

4) 안심사 영산전 (충북유형문화재 112) 등이 있다.

 

 

 

영산전 충북유형문화재 제112

영산전은 1613년에 창건하였다가 풍상으로 퇴락해가는 것을 1842(현종 8)에 중수하였다.

본래 이 건물은 비로자나불을 주존으로 하는 비로전이었으나

나한전으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영산전이 되었다.

 안에는 석가 삼존불, 16나한상, 영산회 후불탱화, 신중탱화, 나한도 4, 법고, 괘불함 등이 있다.

 

 

 

 

 

  

 

 

 

 

 

 

 

 

 

이 건물은 방형의 자연 석단 위에 자연석을 다듬지 않고 주초로 썼으며,

그 위에 원주를 세웠다. 내외2출목(內外二出目) 5포작(五包作)이며,

5량가구(五樑架構), 문은 정()자 살문을 달았으며,

정면의 네 기둥에는 해서(楷書)로 된 세로글씨의 주련(柱聯)을 달았다.

 

 

@법고(法鼓)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44

사찰에서 의식용으로 쓰이는 법고로, 조선 시대 1601(선조 34)에 제작되었다.

201276일에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44호로 지정되었고, 청원 안심사에 소장되어 있다.

 

법고는 타악기의 일종인 북으로, 불교 의식에서 사용된다.

몸통은 나무로 만들고, 양쪽 북면은 동물의 가죽으로 제작된다.

법고는 사찰에서 필요한 불교 공예품이지만,

오래 보존되기 힘든 재료이기 때문에 시대가 올라가는 유물은 많지 않다.

 

안심사 법고는 통나무 내부를 파내 이음 없이 만들었고,

몸체의 표면에는 특별한 장식 없이 나무의 결을 있는 그대로 남겨두었다.

몸체에는 북을 매달기 위한 쇠고리가 있고, 북면을 몸체에 고정하기 위해 쇠못을 박아 넣었다.

가죽으로 만든 북면과 몸체의 연결 부위는 잘 남아 있어,

 고정된 형태를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북을 두드리는 부분은 한쪽 면이 파손되었고, 다른 면은 소실되었다.

 표면에는 일부 그을린 듯한 자국이 남아 있다.

법고 안쪽에 묵서로 남긴 기록을 통해, 1601(선조 34)에 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안심사 법고는 묵서명을 통해 조성 시기를 파악할 수 있으며,

북의 제작 기법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법고는 나무와 동물 가죽으로 만들어져 내구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현존하는 예는 대부분 조선 말기의 유물이다.

이를 고려하면, 이것은 17세기 초에 만들어진 유물로,

가치가 높고 조선 후기 불교 목공예품 연구의 귀중한 문화재로 평가된다.

 

 

 

 

 

@대웅전(大雄殿) 보물 제664

안심사는 속리산 법주사에 소속된 작은 사찰로서 진표율사(眞表律師)가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대웅전은 안심사의 주불전으로 언제 창건되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1979년 대웅전을 해체 수리하면서

 충청좌도청주남령구룡산안심사중수기(忠淸左道淸州南嶺九龍山安心寺重修記)가 발견되어

 1606년에 중수하였음이 밝혀졌다.

 

 

 

대웅전은 본래 정면 3,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집이었다.

그러나 여러 차례 중수하면서 측면이 3칸에서 2칸으로 줄어들었고

지붕도 팔작지붕에서 맞배지붕으로 바뀌었다.

내부에는 석가여래를 주불로 하여 좌우에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를 봉안하고 있다.

1885(고종 22)에 만든 칠성탱(七星幀), 1891년에 제작한 후불탱화가 있다.

 

 

 

 

대웅전의 초창연대는 알 수 없지만, 중수기를 볼 때 1606(선조 39) 이전부터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1626(인조 4)에는 송암대사(松庵大師)가 대웅전을 중창하였다고 한다.

1649(인조 27)에 다시 중수하였고, 3년 후에는 영산회 괘불탱(국보 제297)을 조성하여 봉안하였다.

1672(현종 13)에는 대웅전의 기와를 교체하고 지금의 영산전인 비로전을 창건하였다.

1761(영조 37)에는 보전(寶殿)의 대들보를 보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보전이 대웅전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당시 공사는 상당히 큰 공사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대웅전은 1816(순조 16)에 다시 한번 중창되었는데

이때 팔작지붕이 맞배지붕으로 개조되고 측면도 1칸이 줄어든 것으로 추정된다. 1

842(헌종 8)에는 또다시 중수가 있었고 1976년에는 기와를 교체하였다.

1979년에는 완전히 해체 보수하면서 구조적 안정성을 고려하여

배면 어칸 기둥의 상부 구조를 변경하였다. 이후에도 지붕과 석축 등 여러 차례 보수가 있었다.

 

 

안심사 대웅전은 정면 3, 측면 2칸 규모의 다포계 맞배집으로

 자연석 허튼 층 쌓기 한 기단 위에 세워져 있다.

본래는 정면 3, 측면 3칸의 팔작집이었으나 후대에 바뀐 것이다.

초석은 자연석을 사용하였으며 그 위에 민흘림이 있는 원기둥을 세웠다.

 

 

 

공포는 내외 3출목 형식인데 주상포(柱上包)와 주간포(柱間包)의 모습이 약간 다르다.

주상포의 경우 초제공부터 3제공(諸工)까지는 바깥쪽 끝이 위로 살짝 치켜든 앙서형(仰舌形)이고,

 4제공은 연봉을 조각하였으며, 4제공 위에는 대들보의 보 머리가 밖으로 빠져나온다.

대웅전 지붕에는 청기와 1매가 있다.

 

 

 

 

 

건물 내부에서 1·2제공은 하단을 둥글게 깎은 교두형(翹頭形)이며

 3·4제공은 보아지 형태로 초각(草刻)하였다.

주간포는 주상포와 유사하나 대들보 자리에 운공(雲工) 형태의 5제공을 끼워 넣었다.

건물 내부에서는 3 제공까지 교두형으로 처리하고,

 4·5제공은 연봉을 조각하였으며, 그 위에 봉두(鳳頭)를 조각한 부재를 끼웠다.

 

 

 

가구구조(架構構造)는 본래 1고주 5량 구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후대에 건물을 축소하면서 고주를 배면 어칸으로 옮기고

주심도리를 공포재 없이 직접 받도록 변경한 것으로 판단된다.

대들보 위에는 동자주를 세워 종보와 중도리를 결구하였고 종보 위에는 판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쳤다.

  정면 지붕은 서까래와 부연을 사용한 겹처마이고 배면 지붕은 서까래만 사용한 홑처마이다.

천장은 우물반자를 설치하였는데 2단으로 처리하였다. 불상 위에는 화려한 닫집을 설치하여 장엄하였다.

 

 

 

 

안심사 대웅전은 전체적으로 조선 중기 이후의 다포계 건물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정면 어칸 주상포가 힘차게 아래로 뻗은 3제공 수서(垂舌),

귀공포에서 출목이 교차하는 부분에 제공을 짜지 않은 간략한 수법,

내부와 외부의 출목 수가 같은 공포 구성 등에서 조선 초기 다포계 건물의 양식도 나타나고 있다.

 

 

(석가모니불을 본존으로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를 협시로 봉안했다.) 

또한, 이 건물은 다포집임에도 불구하고 창방 위에 평방(平枋)을 사용하지 않고

공포를 배열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외에도 가구(架構) 수법을 보면,

배면 어칸의 주간포를 생략한 것, 맞배지붕임에도 불구하고

팔작지붕에서 보이는 충량(衝樑)이 설치된 것,

중도리 위에 덧도리를 놓고 긴 서까래를 이중으로 걸친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모두 후대에 건물이 축소되고 구조가 변경되면서 나타난 변화이다.

 

 

 

한편, 배면 고주 위에는 대들보를 받치는 보아지가 밖으로 길게 빠져나와

그 위에 운공(雲工)을 두어 외목도리를 받치고 있다.

 이는 본래 수법이 아니며 1979년 보수하면서 구조의 안정성을 고려하여 보강한 것이다.

 

 

 

 

이 건물은 전체적으로 조선 중기 이후의 다포계 건축물의 특징을 지니고 있으나

부분적으로는 조선 초기의 수법도 간직하고 있다.

여러 차례 보수하면서 평면과 구조가 변경되었지만,

당시의 건축수법을 적용하고 있어 다포계 건축물의 변화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사례이다.

 조선 후기 사찰의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불전의 규모가 축소되고 구조가 변경되는 과정도 잘 보여주고 있다.

<자료출처: 위키백과>

 

 

@안심사 괘불대

괘불을 소장하고 있는 가람에는 으레 괘불대가 있다.

그런데 안심사의 괘불대는 일반 사찰에서 볼 수 없는 면석에 사천왕상을 부조한 것이 특이하다.

 

 

 

 

 

 

 

 

 

 

 

 

 

 

 

 

 

 

 

@세존사리탑 충북유형문화재 제27

삼성각 앞에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7호로 지정된 세존사리탑과

 세존사리비, 신라 시대의 석조여래좌상, 석탑 부재 등이 있다.

세존사리탑은 진표율사가 창건 당시 석가의 진신사리를 봉안했다고 전해지는 것으로,

조선 말에 탑의 행방이 묘연하던 차에 구룡산에서 발견되어

1881(고종 18)에 구천동으로 옮긴 뒤

1900(광무 4)에 광우(廣祐등원(等元)이 다시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사리탑의 높이는 2m, 너비는 2.6m이며,

비의 높이는 2m, 너비는 60, 두께는 25이다.

세존사리탑은 그 구성이 1층의 지대석(地臺石) 위에

팔각형 하대석(下臺石)을 놓아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원형(圓形) 석종형(石鐘形)의 탑신을 세우고

그 위에 보주형(寶珠形) 상륜부(相輪部)를 얹은 형태이다.

전형적인 조선 후기의 부도(浮屠)이다.

그 옆에는 세존사리비(世尊舍利碑)가 세워져 있다.

사리탑 옆에는 신라 시대로 추정되는 목이 없는 석조여래상이 1기가 있다.

 

 

 

 

 

삼성각

 

 

@대웅전 옆에 국보 제297호 안심사 영산회괘불탱의 복사본을 전시해 놓았다.

탱화의 원래 색이 아닌 녹색으로 변질되어 있어 <문화재청>의 사진을 펌하였다.

 

 

 

 

청주 안심사 영산회 괘불탱(淸州 安心寺 靈山會 掛佛幀)은 조선 효종 2(1652)에 제작된 탱화로

석가불이 영취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묘사한 영산회상을 그린 괘불이다.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불교 그림이다.

안심사에 있는 이 괘불은 길이 7.26m, 4.72m의 크기로,

본존인 석가불을 중심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비롯하여

설법을 듣기 위해 모여든 여러 무리와 석가를 호위하는

 범천과 제석천, 사천왕상 등이 대칭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상단부) 

괘불의 구도는 키 모양의 광배(光背)를 지닌 석가불 좌상을 중앙에 두고,

아래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그 주위에 사천왕이 둘러싸고,

그 위에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天)

그리고 상단에 14명의 제자, 용왕과 용녀, 팔부신중,

타방불(他方佛) 등이 에워싼 군도식(群圖式) 구도이다.

 

 

(하단부) 

보개(寶蓋)를 갖춘 낮은 사각 연화대좌에 결가부좌한 석가불은

오른쪽 어깨가 드러난 우견 편단(右肩偏袒)의 법의(法衣)를 걸치고,

손가락을 땅으로 향하게 하여 마귀를 물리치는 의미를 지닌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취하고 중앙에 앉아있다.

길어진 팔과 손의 처리 등 세부적인 표현은 세련되지는 못하지만,

각진 얼굴에 이목구비가 큼직해 근엄해 보이며,

전체적인 신체비례는 안정되어 있다. 광배에 있는 화려한 꽃무늬장식은

석가불을 강조하며 돋보이게 한다.

위로 갈수록 석가 주변의 무리를 점점 작게 묘사해 상승효과를 나타내었다.

 채색은 주로 홍색과 녹색을 사용하였는데 두텁게 칠해

밝은 느낌을 주지 못하며 부분적으로 덧칠을 한 흔적도 보인다.

 

 

 

그리고 반원형의 옷자락이 대좌 앞으로 늘어져 있다. 둥근 얼굴은 근엄하며,

넓은 어깨와 팔, 손 등에 부피감이 느껴진다.

안정된 신체의 석가불을 장식한 광배는 연당초 문양으로 화려하다.

대좌 앞에 마주 선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은 각기 연봉오리와 여의(如意)를 들고 있고,

사천왕은 무인(武人)의 갑옷을 입고 다양한 보관(寶冠)을 쓰고 있고,

상단 좌우에 배치된 범천과 제석천은 천의(天衣)를 입고 두 손은 합장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복사본이다) 

진홍색의 굵은 테두리로 구획된 키형 광배는 내부에 연주문(連珠文)과 잔잔한 꽃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각 존상의 옷은 홍색이 주조 색이고, 두광(頭光)은 모두 녹색으로 처리되어 있으며

 얼굴에는 황색과 흰색이 많이 사용되어 특징적이다.

 

 

채운(彩雲) 역시 명도가 높은 옅은 색이어서 전체적으로 밝은 화면이다.

이러한 장식무늬, 채색의 경향, 채운의 모습 등은 17세기 중엽 불화의 특징적인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제자상과 사천왕상의 얼굴에 음영을 가하고 있는데,

특히 제자상의 얼굴은 유난히 명암을 강조하여 부자연스럽게 보인다.

 본존의 근엄한 얼굴과 건장한 형태, 복식 및 채색의 기법 등에서

 같은 지역인 청주시 보살사 영산회괘불탱(보물 제1258)과 공통된 양식을 볼 수 있다.

 

 

조선 효종 2(1652)에 신겸(信謙덕희(德熙지언(智彦진성(眞性

신율(信律삼인(三印경원(敬元명계(明戒혜월(惠月)9명의 승려가 그린 안심사의 괘불은

같은 지역 청주의 보살사 괘불(인조 27, 167-49, 보물 제1258)

조성된 지 3년 후의 작품으로, 구도상 비슷한 점이 있어

17세기 중엽 충청지역의 불화연구에 도움을 주는 귀중한 작품이다.

다른 영산회상탱에 비교해서 협시보살 이외에 보살들은 그려지지 않았지만

제자들이 14명으로 증가한 점이 독특하며,

17세기 불화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불화로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