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연곡사의 보물 (제2부)

2019. 11. 9. 22:43문화재

지리산 연곡사의 보물 (2)

<승탑(僧塔)>은 고승의 사리(舍利)나 유골을 안치한 석조물이다.

탑이 주로 사찰 안에 있는 반면, 승탑은 사찰 밖에 있다.

부두(浮頭포도(蒲圖불도(佛圖), 묘탑, 사리묘탑 등 여러 가지로 표기되는데,

원래는 불타(佛陀)와 같이 붓다(Buddha)를 번역한 것이라 하고

또는 솔도파(率屠婆, stupa), 즉 탑파(塔婆)의 전음(轉音)이라고도 한다.

 어원으로 본다면 불타가 곧 부도이므로 외형적으로 나타난 불상이나 불탑이 바로 부도이며

 더 나아가 승려들까지도 부도라 부르기도 한다.

 

우리 나라에서 묘탑, 즉 부도라는 용어로

승려의 사리탑을 가리키는 실례는 신라 하대부터 보이고 있다.

872(경문왕 12)에 건립된

대안사적인선사조륜청정탑비(大安寺寂忍禪師照輪淸淨塔碑)의 비문 중에

 기석부도지지(起石浮屠之地)”라는 구절은

 승려의 묘탑이 곧 부도라고 일컬어지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고려시대의 승탑(부도)은 신라식의 팔각당형(八角堂形)과 특수형(特殊形)의 두 가지로 대별된다.

 팔각당식의 부도는 신라 말기의 부도처럼 비율로 보아 대석부(臺石部)가 큰 것이 주류를 이루며

 특수형으로는 석종형(石鍾形석등형(石燈形골호형(骨壺形

석탑형(石塔形사각당형(四角堂形)의 여러 가지로 구분된다.

 

팔각당식 승탑 팔당각식 승탑은 신라 후기의 양식을 전수한 고려 초의 부도로서

경기도 양평에서 발견하여 현재 이화여자대학교가 소장한 부도(930) 1기와

연곡사의 동·북 두 승탑이 있으며, 복고 형식으로 주목되는 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

그리고 우수한 운룡문(雲龍文)의 부조로서 알려진

 고달사지 승탑 등이 팔각당식의 대표적인 부도로 남겨져 있다

 

 

 

 

연곡사 소요대사승탑 보물 제154호

 

 

 

연곡사 소요대사탑 보물 제154.

승탑의 높이는 3.6m. 평면 팔각원당(八角圓堂)의 기본형으로

8각의 지대석(地臺石) 윗면에는 낮은 몰딩 (moulding)이 있어

 하대석(下臺石)을 받고 있다. 8각으로 된 하대석도 높은 측면에는

 아무런 조식(彫飾)이 없으나 상단에는 원에 가까운 곡선을 그린 조각이 있다.

하대석은 2단 받침으로 되어 있는데,

상단에는 형태가 분명하지 않은 문양이 조각되어 있지만 하단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

 

 

(하대석)  

 

 

 

윗면은 중앙에 몰딩이 있고, 그 주위로 홈이 패어 있다.

중대석은 편구형(扁球形)인데 그 상·하에 단판연화(單瓣蓮華)가 대칭으로 돋을새김 된 특이한 양식이다.

 

 

(중대석)  

 

 

(중대석) 

상대석은 8각으로 단판 8엽의 앙련(仰蓮)이 조각되었고,

아랫면에는 2단의 각형 받침이 있으며 윗면에는 높은 호형(弧形)의 굄이 있다.

 

 

(상대석) 

탑신석(塔身石)8각으로 탑신에는

7구의 신장상과 1구의 문비형(門扉形)이 양각되어 있는데,

이 문비 안에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처럼 부도의 탑신석이나 다른 부분에 글자를 새기는 것은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 유행한 것이다.

다른 면에는 별개의 돌을 끼운 듯이 보일 정도로

아주 강한 돋을새김의 신장상(神將像)1구씩 배치하였는데 조각 수법은 세련되지 못하다.

 

 

상대석, 탑신, 옥개석 

 

 

상대석

 

 

상대석

 

 

탑신의 문비와 사천왕상

 

 

 

 

 

 

 

 

 

옥개석(屋蓋石) 역시 8각인데 추녀 끝은 얇아졌으나 아주 넓은 편이다.

옥개석 아랫면에는 높직한 받침을 중심으로 서까래가 모각되었고

 윗면의 낙수면은 급경사를 이루었다.

 각 면의 합각(合角)에는 8줄의 우동(隅棟 : 옥개석의 귀마루)이 뚜렷하며

추녀에 이르러 큼직한 귀꽃이 솟아 있다.

 

 

(탑신과 옥개석) 

상륜부(相輪部)는 앙화·복발·보개·보주가 차례로 놓여 있다.

완전한 편으로 정상면에는 8엽의 앙련으로 된 앙화(仰花)가 있고

그 위에 타원형의 복발(覆鉢)이 있는데 횡대(橫帶) 위에 꽃무늬가 조각되었다.

다시 그 위에 높직한 보개와 보주가 차례로 놓여 있다.

 

 

상대석, 탑신, 옥개석, 상륜부

 

 

 

 

 

상륜부

 

 

 

 

 

 

 

 

 

 

 

  

이 승탑에는 탑신석 1면에 逍遙大師之塔(소요대사지탑)’,

順治六年庚寅(순치6년경인)’이라는 2줄의 오목새김 명문이 있다.

소요대사는 순치 5(1649)에 입멸하였는데,

소요대사가 죽은 다음 해인 1650(효종 1)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승탑과 탑비를 별도로 세우지 않고 승탑의 탑신석이나 다른 부재에 글자를 새기는 예는

 조선 시대에 이르러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이 승탑도 그 예의 하나이다.

 

 

@소요대사 태능

태능(太能, 1562~16491121)은 조선 후기의 승려이다.

전라남도 담양 출신이며, 성은 오씨(吳氏), 호는 소요(逍遙), 법명은 태능(太能),

시호는 혜감선사(慧鑑禪師)이다. 서산대사의 전법제자(傳法弟子)이며,

 소요파(逍遙派)의 개조(開祖)이다.

 

 

(소요대사승탑 옆에 묘탑의 주인공이 알려지지 않은 3기의 묘탑 중 하나)  

 

13세에 백양산(白羊山)의 경치에 감화받아, 진대사(眞大師)로부터 구족계를 받고 출가하였다.

 그 후, 속리산과 해인사 등지에서 부휴(浮休)에게 경률(經律)을 익혔는데,

부휴의 수백 명의 제자 중, 충휘(沖徽응상(應祥)과 더불어

 법문(法門)의 삼걸이라 불릴 정도로 뛰어났다.

뒤에 묘향산으로 휴정을 찾아가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 화두를 묻고

 서로 문답한 뒤, 휴정의 의발(衣鉢)을 이어받았다.

1624(인조 2) 남한산성의 서성(西城)을 보완하였으며,

지리산의 신흥사(神興寺)와 연곡사(燕谷寺)를 중건하였다.

 

(구형승탑)  

16491121일 법문과 임종게를 말하고 세속 나이 87, 법랍 75세로 입적하였다.

 사리를 연곡사·금산사(金山寺보개산(寶蓋山) 세 곳에 나누어 봉안하고 부도(浮屠)를 건립하였다.

그를 흠모한 효종은 1652(효종 3) 혜감선사(慧鑑禪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이경석에게 비명(碑銘)을 짓게 하고, 금산사에 비를 세우게 하였다.

 

 

(탑형 승탑)

 

 

 

 

 

 

 

 

 

 

 

연곡사 현각선사 탑비 보물 제152.

귀부 높이 112, 이수 높이 75. 고려 전기의 승려 현각선사(玄覺禪師)를 기리기 위해

 979(경종 4)에 건립되었다.

현재 탑비의 주된 부분인 비신(碑身)은 임진왜란 때 없어지고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만이 남아 있다.

 

 

 

 

 

 조각 수법은 당대의 탑비 양식을 잘 따르고 있는데,

몸체에 비해 큰 귀두(龜頭)나 비좌(碑座) 4면에 새긴 안상(眼象)과 귀꽃이 특색이다.

이수 앞면 가운데에는 玄覺王師碑銘(현각왕사비명)’이라는 전액(篆額)이 음각되어 있다.

 

 

(이수부)  

 

 

(이수부) 

 

 

 

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돌과 뿔 없는 용 모양을 새긴 머릿돌만 남아 있다.

비를 받치고 있는 돌거북은 부리부리한 두 눈과 큼직한 입,

수염을 가진 용머리를 하고 있다.

등 중앙에 비를 꽂는 연결 부분인 비좌에 안상과 꽃조각이 새겨져 있다.

 

 

 

 

(비좌)  

비의 머릿돌에는 여러 마리의 용이 서로 얽힌 모습이 조각되어 있는데,

웅대하고 강건하며 사실성이 두드러진다.

 

 

기록이나 옛 탁본에 의하면 비문은 학사(學士) 왕융(王融)이 지었고,

 동정주국(同政柱國) 장신원(張信元)이 썼다고 전한다.

글씨는 2정도의 해서로 구양순체(歐陽詢體)를 바탕으로 하면서

자형을 바르게 하여, 고박한 형태미(形態美)를 나타내고 있다.

 

 

 

 

 

 

 

 

연곡사 삼층석탑 보물 제151.

연곡사 일주문을 지나 왼쪽에 있다. 화강암을 이용해 만든 석탑으로

통일신라 시대 전형적인 양식이나 기단부가 2중이 아닌 3중 기단을 지니고 있다.

탑신부는 삼 층을 유지하고 있으며 상하층 탱주가 1:1인 소형탑으로 9세기 후반 양식을 보여준다.

 

 

 

 

연곡사는 화엄사의 말사로 정유재란 때 소실된 것을 복원하였으나

구한말 의병의 본거지로 병화를 입었고 한국전쟁 때 폐사되었다가 이후 복원되었다.

탑은 일주문을 지나 법당이 위치한 석축 하단부 서쪽에 있어 일반적인 배치에서 벗어나 있다.

 석탑에 대하여 알 수 있는 문헌 등은 남아 있지 않다.

이 석탑은 3층 옥개석이 땅에 떨어져 있었던 것을 19671월 해체 수리 후 복원되었다.

이때 상층기단 자연 판석 위에서 높이 23.5가량의 동조 여래 불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석탑은 전형적인 이중 기단 석탑양식에 하나의 기단을 추가하여

 전체적으로 3중의 기단부를 지니고 있다.

하층 기단은 면석과 갑석으로 이루어졌는데, 면석은 귀틀석과 판석을 이용한 8매로 구성되었다.

갑석은 총 6매로 상면에 각출된 괴임이 없다.

 중층기단은 저석과 면석이 1돌로, 동서 면에 2매씩, 남북 면에 1매씩 ‘H’자형으로 결구 되었다.

 모서리에는 모두 우주가 있고 중앙에는 1주의 탱주를 새겼다.

갑석은 3매로 하면에는 부연이 없고 상단 중앙에 호각형의 2단 받침을 각출하여

상층면석을 받치고 있는데, 호형 받침에 비해 각형 받침은 매우 낮다.

상층기단의 면석은 남북면 좌우에 우주가 있는 면석을 놓고

동서면 중앙에 1주의 탱주를 지닌 면석을 넣은 판석으로 결구 되었다.

 갑석은 1매로 하단에 각형 부연이 있고 상단에는 각형 2단 받침으로 탑신을 받치고 있다.

갑석은 끝부분 쪽으로 완만한 경사를 주었고 모서리에 합각선이 뚜렷하다.

 

 

탑신부는 탑신석과 옥개석이 각각 1매씩 총 6매로 구성되었다.

탑신석은 모두 모서리에 우주를 새겼으며 문비 조각 등의 장식은 없다.

옥개석은 모두 하단에 4단의 층급받침을 주었으며

 상단에는 낮게 1단의 각형 받침을 두어 위층 탑신을 받고 있다.

옥개석의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가 전각부에서 경쾌한 반전을 보인다.

전각부의 모서리 좌우에 1개씩의 풍경공이 남아 있다.

상륜부는 모두 결실되었고 현재 반구형의 부재가 올라가 있으나 원래 상륜 부재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 석탑은 이중 기단에 삼 층의 탑신을 지닌 전형적인 신라석탑 양식에

하나의 기단이 추가된 매우 독특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시대의 하강에 따라 신라석탑에서 가장 큰 변화가 나타나는 것이 기단부이다.

그러나 대부분 석탑은 별도의 장대석으로 기단을 높이거나

 탑구를 두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 탑과 같이 별도의 기단부를 형성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이 같은 독특한 기단의 구성을 신라 시대

조탑경(造塔經)으로 쓰인 무구정경(無垢淨經)의 영향으로 보기도 한다.

 

 

이 석탑은 전체적인 크기나 가느다란 비례 감각에 있어

9세기 후반 신라석탑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별도의 기단을 추가하여 3중 기단을 형성한 것은

소형화를 추구하는 신라하대 석탑의 경향을 엿볼 수 있으며

나아가 당시 조탑경과 탑의 외관 변화를 유추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