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부처가 땀을 흘린다는 익산 석불사의 연동리석불좌상

2019. 11. 16. 18:42문화재

돌부처가 땀을 흘린다는 익산 석불사의 연동리석불좌상

 

석불사는 익산 미륵사지(彌勒寺址)에서 서북쪽으로 약 3km쯤 떨어진

삼기면 연동리 있는 가람으로 대웅전에 봉안된 석불이

 나라가 국난을 당할 때 땀을 흘린다는 일화를 지니고 있는 백제 시대 조성된 석불이 있다.

 

 

 

 

 

@익산 연동리 석조여래좌상으로 명명된 이 석불은

불신과 광배 그리고 대좌까지 갖춘 삼국시대의 환조불(丸彫佛)로서

국내 최대의 것이고, 광배 또한 최대로 평가되고 있다.

(환조란 조형 예술에서 표현기법의 하나로 부조(浮彫)

 한쪽에서만 볼 수 있도록 반입체로 튀어나오게 표현이지만.

환조(丸彫)는 사방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있는 완전한 입체로 표현한 것을 말한다.)

 

 

조성 시기는 6세기 말에서 7세기 초에 백제 시대에 조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사면불로 알려진 예산 화전리석조사면불상(보물 제794)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익산 연동리 석조여래좌상은 현재 보물 제4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석불의 높이는 156, 광배 326이다.

 

 

석불사의 옛 사명은 사찰 안내서에는 봉림사(鳳林寺)이며,

사찰의 창건연대는 600년경에 창건되어 12~13세기경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근거가 없고, 백제 무왕 7세기 전반에

미륵사지 창건에 앞서서 건축된 것으로 추정될 뿐 기록이 없어

창건연대는 물론 언제 폐사되었는지 알 수 없다.

현재의 석불사는 화엄종 본산으로 되어 있으며, 화엄종 종정 사찰로 알려져 있다.

 

 

 

 

 

 

 

 

 

 

 

 

@대웅전

전면 3, 측면 3칸의 일출목의 익공식, 겹처마에 팔작지붕인 전각으로

 1990년에 재건한 것이라고 한다. 법당 안에 보물 제45호인 연동리석불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필자가 방문할 때 재를 지내고 있어 포기할까 하다가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사찰을 둘러보면서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거의 3시간 동안을 쉼없이 축원을 드리는 노스님의 근력이 정말 대단하게 느꼈다.

 

 

 

출처 : 현대불교신문(2016.3.9.일자)

 

 

 

 

 

 

 

 

 

삼성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 주포식 맞배지붕으로 1995년 재건한 것이다.

칠성탱만 1935년에 제작되고 나머지는 최근에 조성된 것이다.

 

 

 

 

칠성

 

 

독성

 

 

산신

 

 

삼성각 옆에 조성된 석조약사여래상과 산신

 

 

 

 

 

 

 

 

 

 

 

 

 

 

 

 

 

 

 

 

 

 

 

 

 

 

 

 

 

 

 

 

 

 

@익산연동리석불좌상(益山蓮洞里石佛坐像)

보물 제45, 높이 156, 광배 326.

익산 연동리석불은 정유재란 이후 오랜 세월 땅속에 묻혀 있다가

1930년경 이 지역 주민의 현몽으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발견 당시 거대한 석불이기 때문에 그 자리에 누각을 세워 보존해오다가

지금의 석불사를 창건하면서 대웅전으로 옮겨 안치하였다고 한다.

 

 

 

 

보물 제4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어깨와 가슴에 마손된 부분이 있지만,

불신(佛身), 대좌(臺座), 광배(光背)까지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어서

삼국시대의 석불로 주목할 만하다.

없어진 머리는 근래 새로 만든 것이며, 머리를 제외한 불상의 현 신체 높이는 156이다.

괴체적(塊體的)인 불신에 대의의 옷 주름이 둥근 융기선으로 밀착되게 표현된 것은

중국 수 대의 불상 양식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승려 형상의 머리 부분을 뺀 나머지 신체는 당당한 어깨, 앞으로 내민 가슴,

넓은 두 다리를 지닌 균형 잡힌 몸매를 보여준다.

삼각형을 이루는 장대한 골격의 체구에는 안정감이 있으며,

가슴에 올린 왼팔은 입체감이 없고 어색하지만,

다리 위에 올려놓은 오른팔의 위치와 자세는 편안해 보인다.

 

 

 

어깨와 가슴은 마멸로 잘 보이지 않으나, 비교적 충실하게 양감을 나타냈음을 알 수 있다.

두 손이 신체와 붙어 있고, 가슴과 허리가 구분되지 않으며

법의(法義)가 얇으면서도 인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크고 분명한 손으로 당시 널리 쓰였던 시무외(施無畏여원인(與願印)을 하지 않고,

 중지와 약손가락을 구부린 특이한 수인(手印)을 하였다.

오른쪽 어깨에 살짝 걸친 대의 밑에 다시 옷을 입은 것은

소위 편삼(偏杉)을 입은 특이한 착의법으로 국내 최소 사면불로 추정되는

 예산 화전리사면석불의 본존상에서도 보인다. (본방 예산화전리 석조사면불 참조)

 

 

 

 

양어깨를 감싸고 내려온 통견(通肩)의 옷자락은 길게 내려져서 사각형의 대좌를 덮고 있는데,

이처럼 옷자락이 넓게 덮은 대좌를 상현좌(裳懸座)라고 한다.

이러한 상현좌는 부여 군수리 석조여래좌상(扶餘軍守里石造如來坐像, 보물 제329)을 비롯하여

 67세기 조각에서 볼 수 있다. 가슴에 희미하게 내의[僧却崎]와 이를 묶은 매듭의 흔적이 보인다.

옷자락은 다리 위로 U자형을 이루며 흘러내렸고

하단 좌우로는 Ω형의 주름이 대칭으로 2단씩 새겨졌다.

옷 주름은 부드럽고 유연하게 표현되어 백제 특유의 조형을 보여준다.

 

 

 

광배 중앙에는 둥근 머리 광배[頭光]가 있고 그 안에 연꽃무늬가 있다.

그 바깥쪽에는 위로 치솟는 불꽃무늬를 가득 메웠고,

머리 광배 주위에 7구의 작은 부처[化佛]를 새겼다.

두광과 신광(身光)을 갖추고, 연꽃무늬-불꽃무늬-화불로 장식한 광배는

 7세기 무렵의 삼국시대 금동 삼존불의 광배와 유사하다.

 

 

 

 

 

 

광배는 160나 되는 거대한 주형 거신광(舟形擧身光)이다.

윗부분이 약간 파손되어 있고, 선각으로 두광과 신광을 구분했다.

 두광 안에는 16엽의 연화무늬를 조각하고, 신광의 테두리에는 보주가 장식되어 있다.

광배의 가장자리에는 굵은 불꽃무늬 사이로 7구의 화불이 새겨져 있다.

이 광배는 조각 수법이 우수한 전형적인 백제 양식의 광배로,

특히 일본의 호류사[法隆寺] 금당 석가 삼존불의 광배와 표현양식이 매우 흡사하여 주목된다.

 

 

 

 

원래의 불두도 아니고 마손도 심하지만,

예산 화전리 석조사면불상, 태안 동문리 마애삼존불입상과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에 비견되는 백제의 석불로 그 가치가 높다.

 더욱이 암벽에 조각한 마애불이 아니고 완전히 독립된 입체 조각이라는 점에서

백제 석조물의 중요성을 웅변해주는 불상이다.

 

 

두광(頭光)은 연꽃무늬·빗살무늬·덩굴무늬가 차례로 새겨졌으며,

이 주위로 불꽃무늬가 외곽으로 새겨져 있다.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국보 제84) 과 친연성이 있지만

 소박하면서 박진감 넘치는 것이어서 보다 옛날식으로 평가된다

 

 

 

 

 

@백제의 불상 조각은 서산용현미마애삼존불 등에서 보듯

부드러운 신체와 옷 주름, 밝고 잔잔한 미소를 강조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는데,

익산 연동리 석조여래입상은 얼굴이 원래 것이 아니라서 단정하기 어렵지만,

불상과 대좌, 광배의 강건하면서 부드럽고 세련된 표현에서

보기 드문 600년경의 백제 불상으로 의의가 있다.

당당하고 안정감 있는 인체 묘사와 부드러운 조각 수법을 보여주는

백제의 단독 석불이며 우리나라 석불의 가장 이른 시기 예로 주목할 만하다.

 

 

이 석불에는 얽힌 전설.

정유재란 당시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가 이끄는 한 무리의 왜군이

금마지역을 거쳐 수도 한양으로 진격하던 중이었는데

갑자기 안개가 심하게 끼어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됐습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왜장이 부하를 풀어 안갯속을 살펴보라고 지시하자

부하들이 돌아와서 "안갯속에 작은 절이 있는데,

마을 사람들이 그 절에 모셔진 석불에게 왜군이 빨리 사라지기를 빌고 있다."라고 전했습니다.

 

가토 기요마사는 안개의 원인이 그 석불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한밤에 찾아갔는데, 밤인데도 석불은 광채가 나서 눈을 뜨고 보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가토 기요마사가 칼을 휘둘러 석불의 목을 베어버리자 안개가 걷혔고,

 돌아와 진격하는데 갑자기 맑은 하늘에 비가 쏟아졌습니다.

그 비에 조총이 무용지물이 되고 화약도 다 젖어 쓸모없게 되자

죽창과 낫 등으로 무장한 의병들이 왜군을 쉽게 물리칠 수 있었다고 한다.

 

 

대웅전의 지장보살

 

대웅전의 신중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