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연곡사의 보물 (제1부)

2019. 11. 9. 16:35문화재

지리산 연곡사의 보물 (1)

지리산 피아골의 연곡사는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에 번창했던 선종사찰로

도선국사, 현각선사 소요대사 등 많은 고승 대덕이 배출한 가람이다.

연곡사는 경내에 국보급 문화재로 지정된 2(동승탑:국보 53,북 승탑:국보 54)

보물급으로 지정된 삼층석탑(보물 151), 현각선사 탑비(보물 152), 동승 탑비(보물 153),

소요대사탑(보물 154) 등의 석조물이 유적으로 남아 예적에는 대가람이었음 말해주고 있다.

 

 

 

 

 

 

 

 

 

보물 제153호 연곡사 동승탑비

 

 

 

연곡사 동 승탑비 보물 제153호

보물 제153. 높이 1.2m. 1963121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연곡사는 545(신라 진평왕 6)에 연기조사가 창건한 절로,

신라말부터 고려 초에 이르기까지 선도량으로 유명했던 곳이다.

동부도 앞 서쪽에 자리하고 있는 이 비는 현재 비신(碑身)은 임진왜란 때 없어지고

거북 모양의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만이 남아 있다.

 

 

 

귀부는 네 다리를 사방으로 쭉 뻗어 마치 납작 엎드려 있는 듯한 모습을 연상케 한다.

귀부의 등 중앙에는 장방형의 비좌(碑座)가 설치되어 있는데,

 

 

 

비좌의 네 측면에 구름무늬가 고부조(高浮彫)로 장식되었으며,

그 윗면 주위로는 복판(覆瓣)의 연꽃무늬를 새겼다.

비좌의 측면에 고부조로 구름무늬를 새기는 일은 매우 드문 일이다.

 

 

 

고개를 똑바로 쳐들고 있는 귀두(龜頭)는 떨어져 나간 것을 다시 붙여놓은 것으로

 본래의 모습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비록 용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사실성이 결여되어 신라 시대의 귀부에 비하여 기량이 떨어진다.

거북의 등 문양 또한 신라 시대와는 다르게 6각의 갑문(甲文)이 아니고

 파상곡선(波狀曲線)으로 이루어진 새의 날개깃 모양[조익형(鳥羽形)무늬]으로 조각되어 있다.

 

 

귀부 위에 얹혀 있는 삼산형(三山形)의 이수 역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이수와는 달리 운룡(雲龍)으로 장식되어 있지 않고

고부조의 구름무늬만으로 조식 되어 있으며,

그 정상에는 화염보주(火炎寶珠)의 형태를 조각해 놓았다.

 

전액(篆額)이 마모되어 누구의 묘탑인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석비의 주인공을 나타내는 표제기록 양식으로는 크게 제액(題額)과 두전(頭篆)으로 나뉜다.

 제액과 두전은 석비의 양식과 관계 깊다.

삼국시대에는 자연석을 가공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여 제액이나 두전이 없다.

그러다가 진흥왕순수비에 이르러서야 개석과 대석, 그리고 비신이 구별되었다.

<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568)><마운령신라진흥왕순수비(568)><감악산비> 등의 예부터는

비신(碑身)과 개석(蓋石)이 구별되었고, 대석(臺石)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제액이나 두전(頭篆)과 같은 형식의 표제개념은 아직 사용되지 않았다.

 

남국의 통일신라부터는 당의 석비문화를 수용하여 이수에 아름다운 조각과 함께 제액을 갖추게 되었고,

비신도 규정에 맞게 다듬어 찬자(撰者), 서자(書者), 각자(刻字) 등을 기록하여 전문적인 체제를 갖추었다.

제액이나 두전은 이러한 석비의 양식변천과 함께 매우 밀접하게 변모되었다.

 연곡사의 동승탑비에는 제액이 없어 부도의 주인을 알 수 없다.

 

 

 

화염보주 형태인 상륜부

 

 

 

 

 

  

이처럼 규모면에서는 보다 작고 아담해지고,

양식적인 측면에서도 여러 가지 변화를 보여주고 있는 이 부도비는

신라 시대와는 다른 고려 시대의 새로운 양식으로서 주목된다.

 

 

 

 

 

 

국보 제53호 연곡사 동승탑

국보 제53. 높이 300cm. 기단부·탑신부·상륜부가 모두 8각으로 된 8각 원당형 부도로

도선국사의 유골을 안치한 묘탑으로 추정되고 있다.

 

하대석

 

 

 

 

하대석은 세 층으로 아래 받침돌, 가운데 받침돌, 위 받침돌을 올렸다.

아래 받침돌은 두 단인데, 구름에 휩싸인 용과 사자 모양을 각각 조각해 놓았다.

가운데 받침돌에는 둥근 테두리를 두르고, 8부중상(八部衆像)을 새겼다.

위 받침돌 역시 두 단으로 나뉘어 두 겹의 연꽃잎과 기둥 모양을 세밀하게 묘사해 두었는데,

 이 부분에 둥근 테를 두르고 그 안에 불교의 낙원에 사는

극락조인 가릉빈가(伽陵頻迦)를 새겨둔 점이 독특하다.

 

중대석  

 

 

 

 

 

 

중대석은 낮은 편으로 각 면에는 안상(眼象) 안에 무기를 쥐고 있는 팔부신장상이 표현되었다.

이처럼 기단부에 팔부신장상이 나타나는 것은 9세기경의 통일신라 시대 부도에서 보이는 특징이나,

시대가 내려가면서 필부신장 대신에 주악천인상과 공양합장상으로 변했다.

 

 

상대석과 탑신괴입  

 

 

 

상대석에는 반원형의 앙련(仰蓮)을 조각하고 윗면에는 높은 탑신 받침대가 있는데,

모서리마다 둥근 마디가 있는 기둥을 세우고 그 안에 가릉빈가를 1구씩 배치했다.

 

 

 

 

 

 

 

 

 

 

 

 

탑신의 각 면에는 문비·삼족(三足)과 뚜껑이 있는 향완,

무장형(武將形)의 사천왕상 등이 얕게 조각되어 있다.

특히 문비는 장방형으로 자물쇠와 문고리가 함께 표현되었고

그 위를 화려한 꽃무늬[花紋]로 장식했는데,

이러한 문비 형식은 9세기경의 부도에 많이 나타나는 장식문양이다.

사천왕상은 무기를 들고 천의를 나부끼며 허리를 살짝 틀어 변화를 주면서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탑신, 옥개석, 상륜부) 

 

 

(옥개석과 상륜부)

 

 

 

옥개석에는 목조건축의 2중 서까래와 기왓골이 정교하게 모각되어 있으며,

추녀의 끝부분이 약간 위로 올라가 경쾌한 느낌을 준다.

상륜부는 날개를 편 봉황·앙화(仰花보륜으로 이루어졌다.

동부도는 각 부의 구조와 크기가 서로 비슷하여 안정된 비례감을 보여주며,

 각 면에 나타나는 조각상이나 장식문양이 다양하고 생동감 있게 처리되어 있어

 연곡사에 있는 3개의 부도 중에서 가장 조각 솜씨가 뛰어난 작품이다.

 

 

 

 

  

도선국사의 승탑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확실한 것은 알 수가 없으며,

일본 강점기에 동경대학으로 반출될 뻔한 위기도 있었지만, 다행히도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기단이 좀 높아 보이기는 하나 전체적으로 안정된 비례감을 잃지 않으면서

훌륭한 조각 수법을 보이고 있어 그 조성연대는 8각원당형 부도가 유행하기 시작한

 신라말 또는 고려 초기로 추정된다. 통일신라 후기를 대표할 만한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국보 제54호 연곡사 북 승탑

 

 

 

연곡사 북 승탑 국보 제54.

 높이 300cm. 네모난 지대석 위에 기단부·탑신부·상륜부가 차례로 놓인

화강암을 이용해 만든 전형적인 8각원당형 부도로 고려 초기의 승탑이다.

상륜부 일부가 파손 복원되었으나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세부표현이 정교하다.

 양식으로 보아 같은 경내에 있는 동 승탑을 본떠 만든 것으로 보인다.

 

북 승탑은 탑에 대한 기록이나 구전이 남아 있지 않아 누구의 탑인지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경내에 고려 초에 건립된

 

현각선사의 탑비(보물 제152, 979)가 남아 있어 그의 탑일 가능성이 크다.

20013월 도굴꾼에 의하여 파괴된 후 복원되었다.

이때 전면(全面)에 부착되어있던 이끼를 제거하였고

결실된 부재의 보충과 뒤바뀐 상륜부재를 바로잡았다.

 동 승탑과 양식적 유사성이 있으나 세부표현에 있어 뒤떨어져 고려 초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옥개석과 상륜부)  

탑은 팔각원당형으로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로 이루어졌으며

상륜의 일부가 결실되었다가 수리 때 추가되었다.

 

 

 

기단부는 지대석과 2단의 하대석으로 이루어졌다.

사각의 지대석을 놓고 그 위로 운룡문과 팔각의 하대석을 두었다.

 

 

(지대석과 하대석)  

 

(하대석의 귀꽃) 

하대석은 16엽의 연화문을 복련으로 새기고 여덟 연꽃의 모서리에만 귀꽃무늬를 두었다.

하대석 위에 2단의 받침을 두고 중대를 받쳤는데,

중대석 하단에도 2단의 각형 받침을 두어 총 4단의 받침으로 중대석을 받고 있다.

 

(중대석)  

중대석은 낮은 편으로 각 면 모두 안상을 새기고 내부에는 무기를 들고 있는 8구의 신장을 새겼는데,

팔부신중(八部神衆)으로 보인다. 3단 굄이 받치고 있고

 각 면의 안상 안에는 형태가 뚜렷하지 않은 조각이 장식되었다.

 

(상대석, 탑신괴임,탑신)  

 

 

 

상대석은 3단의 받침대 위에 놓았다. 상대석은 상하 2중의 연꽃을 총 16엽으로

연꽃잎에는 다시 꽃무늬로 장식하여 화려함을 더해주고 있다.

 상대석에는 앙련이 돌려져 있고 윗면의 높은 받침대(탑신괴임)가 조성되어 있다.

 

(탑신괴임)

 

 

 

상대석 위로는 비교적 높은 탑신 괴임을 두었다.

탑신 괴임은 모서리마다 중간에 둥근 마디가 있는 기둥을 세우고

그 내부에 가릉빈가 1구씩을 새겨 넣었다. 괴임의 상단으로는 낮게 3단의 괴임을 두어 탑신부를 받치고 있다.

둥근 마디의 기둥 사이로 가릉빈가가 1구씩 조각되어 있는 데

이 가릉빈가 상은 동 승탑(부도)과 같은 형태를 하고 있으나

 날개깃이 다소 도식적으로 처리되어 있어 시대가 내려가는 것으로 보인다.

 

 

 

 

 

 

 

 

 

 

 

 

 

 

 

탑신부는 문비, 사천왕상, 향로를 새겼다.

옥개석 하단 위로는 앙곡을 주어 둥글게 하고 내부에는 비천을 새겨놓았다.

 

 

(탑신괴임, 탑신, 옥개석)  

탑신의 각 면에는 문비·향완·사천왕상이 배치되어 있는데,

특히 향완은 동 부도와는 달리 악귀가 삼족의 향완을 떠받치고 있다.

 

 

 

 

 

 

 

문비

 

 

향완

 

 

 

 

 

 

 

 

옥개석에는 이중의 서까래·기왓골·막새가 모각되어 있고, 그 아랫면에는 비천이 조각되어 있다.

상륜부는 앙화 위에 날개를 편 4마리의 봉황·연화석·보륜이 차례로 얹혀 있다.

옥개석은 겹처마로, 상단은 기와골이 정교하게 표현되었는데,

막새기와 및 사래기와 등을 모각하여 사실성을 더하였다.

 

 

 

 

 

상륜부는 꽃 모양의 앙화 위로 보륜, 그리고 사방으로 날개를 활짝 편

 봉황이 조각된 보개 및 보주로 이루어졌는데 봉황의 머리는 모두 결실되었다.

이 가운데 보륜 1매는 2001년 보수 당시 새로 만들어 추가했다.

 

 

상륜부, 봉황의 머리 부분이 파손되어 있다. 

 

 

흰색 부분의 보륜이 보완된 것이다.

 

 

 

 

이 승탑은 같은 경내에 있는 동 승탑과 양식적으로 유사하면서도 다른 면을 가지고 있다.

유사한 점은 기본형과 각 부분에 새겨진 부조상들의 주제가 같다.

반면 하대석의 표현이나 옥개석 하단의 앙곡에 비천상을 새겨 넣은 점은 이 탑의 특징이다.

그러나 부조상의 조각 수법과 하층 하대석에 나타나는 구름문양이 생동감을 잃은 점 등은

동 승탑을 모방하여 만들었음을 보여주는 자료로 보인다.

 

 

 

 

승탑은 개창조(開創祖)의 탑을 가장 크고 화려하게 만든 후 이를 모방하여 만드는 경향이 있다.

 

 연곡사에 남아 있는 동 승탑과 북 승탑은 이 같은 승탑의 건립환경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사례이다.

또한, 연곡사의 승탑은 주변 지역과의 양식공유가 보여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걸친 호남지역 승탑의 양식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