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왕궁리5층석탑(益山王宮里五層石塔)

2019. 11. 12. 21:19문화재

익산 왕궁리5층석탑(益山王宮里五層石塔)

백제의 대표적인 석탑을 말한다면 당연히 부여 정림사 오층석탑(국보제9)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을 꼽을 수 있지만,

익산의 미륵사지와 인접한 왕궁리 5층 석탑(국보 제289) 또한

 빼놓을 수 없는 백제의 대표적인 석탑이다.

 

 

 

익산의 왕궁리5층석탑은 국보 제289호 지정되어 있으며.

석탑의 높이는 약 8.5m로 마한(馬韓)의 도읍지로 알려진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에서

남쪽으로 2정도 뻗은 산줄기 끝의 낮은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조선 시대 말기에 간행된 익산읍지인 금마지(金馬誌)에는

 왕궁탑은 폐허가 된 궁터 앞에 높이 10장으로 돌을 쌓은 것이다.

속전에는 마한 시대에 만들었다고 한다.”고 전한다.

 

 

 

이전에는 흙으로 만든 받침을 둔 희귀한 석탑으로 알려졌지만,

1965년에 해체하여 보수하면서

원래 돌로 만든 받침을 갖추었음이 밝혀져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되었다.

    석탑의 정확한 유래는 전해지지 않지만

탑 주변에서 "왕궁사" "대관" 등의 명문기와가 수습되어

궁성과 관련된 사찰이 건립되는 과정에서 축조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국보 제289호 왕궁리5층석탑)

 

* 왕궁리 5층 석탑의 구조 *

높이 8.5m이다. 기단부에 탱주(撑柱)2개 있는 사각형 석탑이며

옥신(屋身)과 옥개석은 모두 여러 개의 석재(石材)로 구성되었다.

옥신부는 4 우주(四隅柱)와 탱주가 각출 된 중간석 등 모두 8개로 되었고,

2층은 41석으로 4, 3층 이상은 2개의 석재로 조립하였다.

옥개석은 넓은 편이며 개석과 받침이 각각 다른 돌이고 받침은 3단씩이다.

 개석은 1층부터 3층까지 8, 4층과 5층은 4석으로 구성되었다.

 

 

 

 

 

<기단부>

신라 석탑의 특징이 2단 기단에 3층의 탑신을 세운 것이라면

백제 탑의 특징은 1기단에 5층의 탑신을 올리는 것이다.

왕궁리 5층석탑의 받침돌은 돌을 쌓은 구조가 아니라,

목탑처럼 네 귀퉁이의 주춧돌 위에 각 변의 길이가 같지 않은

부등변(不等邊)8각 돌기둥을 높이 세우고서,

기둥과 기둥을 연결하기 위해서 길게 다듬은 장대석(長臺石)

창방(昌枋)이나 평방(平枋)처럼 올려놓은 모습이다.

평방 위에는 1층 몸돌을 놓았고, 아울러 받침돌의 덮개돌을 받치도록 구성하였다.

네 기둥의 중심인 가운데 부분에는 기둥 받침돌인 심초석(心礎石)이 큼지막하게 자리하고 있으며,

그 위에는 목탑의 기둥인 심주(心柱)처럼 여러 단의 네모난 돌을 쌓아 올렸다.

 8각 기둥과 네모난 돌 사이에는 막돌과 흙을 다져 메웠는데,

흙 속에서 백제 시대에 만든 기와 조각이 발견되었고,

부서진 덮개돌과 면석의 일부도 발견되었다.

파손된 면석의 각 면에는 2개의 가운데 기둥이 새겨져 있다.

 

 

보수 공사를 진행하던 중, 1층 지붕돌 가운데 부분과 심초석에서

각각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가 확인되었다.

사리장엄구를 장치한 1층 지붕돌의 돌은

백제 시대에 주춧돌로 사용하였던 돌을 다시 이용한 듯 보이는데,

 좌우에 ()’자형의 네모난 홈을 만들고서

뚜껑이 있는 금동 상자[有蓋金銅函]를 각각 안치한 상태였다.

오른쪽 금동함 안에는 금으로 만든 유개방합(有蓋方盒)이 있었고,

그 속에는 금제연화대좌(金製蓮華臺座)와 함께

연꽃 모양의 뚜껑을 갖춘 녹색 유리로 만든 사리병인 장경원저병(長徑圓底甁)도 확인되었다.

 왼쪽 금동함 안에는 금제유개장방합(金製有蓋長方盒)이 있었고,

 다시 그 안에서는 2줄의 금띠로 묶인 금으로 만든금강경(金剛經)이 발견되었는데,

펴고 접을 수 있는 절첩식(折帖式) 금구(金具)로 연결된 상태였다.

 

 

심초석에 설치된 사리(舍利) 구멍은 ()’자 형으로 조성되었는데,

동쪽 구멍에는 배처럼 생긴 광배(光背)를 갖춘 청동여래입상(靑銅如來立像)

청동방울[靑銅鈴]이 들어 있었고, 북쪽 구멍에서는 향() 등이 발견되었지만,

서쪽 구멍의 것은 일찍이 도굴당한 것으로 보인다.

 

 

 

 

 

<탑신부>

탑신부(塔身部)5층의 몸돌(옥신석)과 지붕돌(옥개석)을 올린 모습이다.

1층 몸돌은 모서리 기둥을 조각한 기둥 모양의 돌을 네 귀퉁이에 세우고서,

그 사이에 가운데 기둥을 새긴 면석을 끼워 세운 모습이다.

2층 몸돌은 면마다 1장의 돌을 세워 조립하였고,

3층 이상의 몸돌은 2장의 돌로 구성되었는데, 각각 모서리 기둥이 조각되어 있다.

  

 

 

  

13층의 지붕돌은 윗면과 밑면에 각각 4장씩 모두 8장의 돌로 조립되었고,

45층의 지붕돌은 윗면과 밑면에 각각 2장씩 모두 4장의 돌로 구성되었다.

추녀는 얇고 밑면은 대체로 수평을 이루고 있으며,

밑면 받침은 모두 3단이다.

네 귀퉁이는 가벼운 반전(反轉)을 보이는데,

전각(轉角) 아랫부분에는 풍령(風鈴)을 달려고 만든 구멍이 뚫려 있다.

지붕돌 윗면은 경사가 완만하고 전각의 반전도 적은 편이며,

꼭대기에는 윗 몸돌을 받치기 위한 돌이 끼워져 있다.

머리장식인 상륜부(相輪部)에는 노반(露盤), 복발(覆鉢),

앙화(仰花), 부서진 보륜(寶輪) 1개 등이 남아 있다.

 

 

<상륜부>

상륜부는 일부 파손되었으나 현재 노반·복발·앙화·보륜 등이 남아 있다.

 

 

 

 

 

이 석탑의 건립 시기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많은 의견이 제시되어 있다.

1965년에 보수 공사가 시작되기 전에는 지붕돌의 모습이 백제계 석탑을 따르고 있고,

탑신부의 결구(結構) 수법이나 받침 표현 방식이 신라 석탑을 따르고 있다고 하여,

통일신라 시대 초기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하지만 보수 공사를 진행하면서 받침돌의 구성 방식이나

사리장엄구의 양식 등이 확인한 뒤에는 후대까지 유행하였던

 백제계 석탑 양식에 신라 석탑의 양식을 더하여 고려 초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기도 하였다.

최근에는 심초석과 심주의 구조가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의 받침돌 구조와 일치하는 점을 들어,

백제 시대에 목탑을 석탑으로 번안(飜案)하는 과정에서 건립하였다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하였다.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에 있었던 대관사(大官寺)

백제 무왕 때 창건된 사찰로서, ‘관궁사(官宮寺)’·‘궁사(宮寺)’·

관사(官寺)’라고도 한다. 대관사는 상부대관에 있는 사찰이라는 데서 붙여진 것이고,

관궁사는 왕이 행유(行留)하는 궁사(宮寺)로 창건된 사찰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 무왕은 궁궐 안의 내원당(內願堂)으로 이 절을 창건하였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의하면 이 절은 639(무왕 40)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절의 역사 및 폐사연대 등은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이곳에 남아 있는 높이 8.5m의 균형미를 갖춘 장중한 오층석탑만이

그 역사를 간략히 알려주고 있다. 이 탑은 1965년에 해체,

복원공사를 하였는데, 그 때 탑의 기단 초석에서 출토된

순금금강경판(純金金剛經板)과 유리로 만든 사리병,

 청동여래입상 등 익산왕궁리 오층석탑 내 발견유물이

 국보 제123호로 일괄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