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혜목산 고달사지(高達寺址)

2019. 10. 31. 22:06문화재

여주 혜목산 고달사지(高達寺址)

고달사지(高達寺址)는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 혜목산(惠穆山: 현재명 우두산) 동쪽

정사면 넓은 대지에 위치하며, 사적 제382호로 지정되어 있다.

 

 

 

봉은사본말사지(奉恩寺本末寺誌)에 의하면

고달사(高達寺)는 신라 경덕왕 23(764)에 창건되었다고 하나 확실치 않다.

창건주 또한 미상이다.  

975년에 세워진 원종대사(元宗大師) 비문에 의하면

 당시에는 고달원(高達院) 또는 고달선원(高達禪院)으로 불렸다고 한다.

1530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고달사가 나타나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조선 초기까지 번창했으나

 1799년에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에는 폐사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고달사는 신라 구산선문 중 봉림산파를 열었던 현욱(玄昱, 787868)이 절을 중건하였고,

862(경문왕 2) 훗날 진경대사(眞鏡大師)로 불린

신라말의 고승 심희(審希)가 이곳에서 현욱의 제자가 되었다.

 

 

 

 

고려 초기에는 국가가 관장하는 3대 선원(禪院) 가운데 하나로 왕실의 보호를 받은 사찰이었다.

 고려 광종 1(950) 원감국사가 중건했고, 1233(고종 20) 혜진대사가 주지로 취임했으며

1260(원종 1) 절을 크게 확장하고 중건했다.

고려 광종 이후에는 역대 왕의 비호로 대찰(大刹)의 면모를 유지하였는데,

원종 찬유(元宗璨有)는 진경대사에게 법을 이어받은 후

고달사에서 28년간 주석하며 중창하여

고려 초 3대 사찰 가운데 하나가 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그 뒤의 역사는 자세히 알 수 없고, 그토록 융성했던 고달사가

 언제 어떻게 폐사되었는지 알 수 없으며 임진왜란 때 병화를 입은 것으로 전해온다.

 대략 17세기 후반 무렵에 폐사된 듯하다.

 

 

 

중요문화재인 고달사지부도(국보 제4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보물 제7

고달사석조대좌(보물 제8),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보물 제6)가 절터에 남아 있으며

고달사지쌍사자석등(보물 제282)은 경복궁으로 옮겨졌다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관되어 있다.

 

 

이 석조가 있던 자리가 금당지인 모양이다.

여기에서 고달사지 쌍사자석등이 발견되었으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본방 고달사지 쌍사자석등 참조)

 

 

 

 

 

 

고달사지석조

여주 고달사지에 있는 석조(石槽)는 규모가 크고 잘 다듬은 수조로서,

고려 시대 대규모 사찰이었던 고달사의 역사적 증거자료이다.

2010128일에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47호로 지정되었다.

   

고달사지 석조는 높이 98, 장변 321, 단변 149로 규격이 크고 하나의 돌을 다듬어 만들어졌다.

 평면이 기다란 사각형에 표면을 고르게 다듬었으며,

 각 면이 만나는 모서리를 안쪽으로 말려 들어간 듯한 꽃잎 모양으로 장식하여 그 정교함이 돋보인다.

모서리 부분의 꽃잎 장식은 그 윗면을 약 2정도의 귀접이를 하여 장식성이 뛰어나다.

내부는 아래쪽으로 내려가면서 밑부분을 둥글게 처리하였으며,

바닥 면 중앙에는 지름 7.5의 원형 배수공이 뚫려 있어 수조(水槽)로서의 기능성을 살렸다.

 

수조는 일정한 공간에 물을 담아 저장하거나 곡물을 씻을 때 사용되는 등 다용한 용도로 활용되었고

사찰이나 궁궐 등 규모가 크고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는 생활공간에 흔히 조성되었다.

재질은 일반적으로 돌이나 나무가 많은 편이다.

그러나 큰 규모에 석조의 모서리 부분을 화형(花形)으로 다듬은 경우는 보기 드문 사례이며

조각 수법과 고달사의 역사적 배경 등을 볼 때 고려 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달사지 석조는 고려 시대 유물로 경기도 지역에서 보기 드물게 제작 시기가 빠르고

현존하는 석조들 가운데에서도 조각적 기교와 장식성이 우수한 작품이다.

또한, 고달사의 옛 위상을 짐작해 볼 수 있는 유물로 보존할만한 가치가 높은 문화재이다.

<출처: 위키백과>

 

 

 

 

 

 

고달사지 석불대좌

보물 제8. 높이 157cm. ··하대와 지대석을 모두 갖춘

4각대좌로 보존상태가 매우 좋은 편이다.

상대석에는 겹으로 된 올림연꽃 24잎을 조각했고 그 밑에는 3단의 받침을 두었다.

중대석의 간석은 4각이며 각 면에 안상을 하나씩 가득 차게 새겼다.

 

 

하대석에는 3단 받침이 간석을 받치고 있으며,

그 밑에 겹으로 된 내림연꽃 24잎을 상대석과 같은 배열로 새겼다.

하대석 밑에는 턱이 진 각형받침 한 단이 있는데 그 측면에는 안상을 각각 4개씩 나란히 새겼다.

넓은 지대석은 대좌 전체를 안정감 있게 받쳐주고 있다.

 

 

 

 

  

이러한 유형의 대좌는 예천 청룡사석조비로자나불상(보물 제425)의 대좌 등

고려 시대의 예가 몇 점 더 전하고 있어 고려 시대에 일시적으로 유행했던 것 같다.

연잎의 형태가 좌우로 갈수록 비스듬히 배열된 것은

고려 초기 석물에서 보이는 연화무늬의 시대적 특징으로 같은 고달사지에 있는 부도에서도 보인다.

    원종대사혜진탑과 비슷한 10세기에 제작된 불상의 대좌로 추정되며,

대좌의 규모나 제작수준으로 보아 그 위에 놓였던 불상의 규모도 짐작해볼 수 있다.

 

 

 

 

 

 

 

원종대사탑비(元宗大師塔碑)

원종대사탑비(元宗大師塔碑)는 고려 초의 국사 원종대사 찬유(元宗大師 璨幽, 869~958)의 비로,

975(고려 광종 26)에 건립됐다.

고달사지 금당지와 네모난 석조대좌(石造臺座)가 있는 곳에서 서북쪽의 대지 위에 있으며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고달선원 국사 원종대사비를 받쳤던 귀부, 이수와 비신이다.

1963121일 귀부와 이수가 대한민국의 보물 제6호로 지정되었고,

 20161215일 여주박물관에 보관된 비신을 추가하여 지정하였다.

비신의 크기는 높이 291, 너비 162, 두께 31이며,

탑비의 원래 총 높이는 508cm로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이 비의 정식명칭은 혜목산고달선원국사원종대사지비이다.

 

나말여초의 고승 원종대사 찬유를 기리기 위해 세운 이 탑비는

 1915년 발견 당시 거북 받침돌과 머릿돌만이 남아 있고,

 8조각으로 깨어져 있던 비신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가

20161215일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가 비신을 제외한

 귀부와 이수만으로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되어 있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 중이던 비신을 추가 지정하고,

탑비의 비신을 복제하여 복원하고, 여주박물관으로 이관 보관되어 있다.

 

#탑비에 기록을 따르면 비문은 수국사신 김정언(金廷彦)이 짓고,

내의승지 장단열(張端說)이 전액(篆額 : 전자로 쓴 비갈이나 현판의 제액)을 쓰고,

또한 정간선을 그어서 해서로 비문도 썼으며, 각자(刻字)는 이정순(李貞順)이 하였다.

 원종은 국사였으며 법명은 찬유(燦幽), 자는 도광(道光)이며 속성은 김씨(金氏)로 계림 하남사람이다.

 비에는 원종의 가문·출생·행적 그리고 고승으로서의 학덕 및 교화·입적 등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

 

 

 

 

귀부는 높이 0.91m, 길이 3.21m

귀두(龜頭)는 눈을 부릅떠 정면을 직시하고 있는데,

눈꼬리가 길게 치켜 올라가 매우 험상궂은 모습이다.

코는 들려서 콧구멍이 깊게 표현되고 중첩된 주름이 정수리까지 이어져 있다.

 

 

 

 

 

일반형의 귀부와는 달리 입을 꽉 다물어 여의주를 물지 않은 형태이며,

길게 찢어진 입 가장자리에는 공룡의 깃과 같은 물갈퀴 형상이 조각되었고,

그 뒤로 갈기 같은 털이 머리 뒤까지 길게 뻗쳐 있다.

 

 

 

 

 

 

 

 

앞발은 귀갑 전면 양단에 가지런히 두었으나 마치 땅을 밀치고 나가려는 듯 격동적이고,

사실적으로 표현된 발톱은 땅을 꼭 누르고 있는 듯하다.

목은 그다지 길지 않아 머리가 귀갑에 바짝 붙은 느낌을 준다.

 귀갑에는 2중의 귀갑문이 정연하게 조각되었으며,

중앙부로 가면서 한 단 높게 와운문(渦雲文)을 첨가하여 장식하였다.

 

 

 

 

 

 

비신의 규모는 높이 279cm, 너비 162cm, 31cm이다.

비좌(碑座) 부분은 깊게 조각된 운문(雲文)을 장식하여 돌출시켰고,

위로 복련(覆蓮)을 정연하게 조각하였다.

비좌 위에 얹어놓은 이수의 형태는 직사각형에 가깝고

고부조(高浮彫)로 입체감을 강조하여 생동감이 넘친다.

이수 맨 아래에는 복판(複瓣)의 앙련대(仰蓮帶)를 사면에 두르고, 1단의 층급을 두었다.

 

이수는 높이 1.09m, 너비 2.33m.

 

전면에는 정중앙의 전액(篆額)을 중심으로 서로 뒤엉킨

반룡(蟠龍: 아직 승천하지 않고 땅에 서려 있는 용)

구름 사이로 배치하였다. 중앙 상단부와 우측 상부가 깨어졌으나,

좌우로 각각 2마리씩 4마리의 용을 조각한 것으로 보이는데

용의 모습은 서로 조금씩 다른 형태이다.

측면부는 용의 몸이 구름에 내비친 격동적인 모습을 조각하였고,

후면 역시 2구의 용을 조각하였다.

 

(이수부 뒤면)  

 

 

 

 

(두전과 제액)

 

 

 

 

 

 

 

 

 

 

 

 

이 귀부와 이수는 탑비에 기록된 명문에 의하여 975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귀두가 험상궂은 용두형(龍頭形)에 가깝고,

목이 짧고 정면 직시형(直視形)인 점, 이수의 표현이 격동적이며,

특히 와운문으로 번잡하게 장식한 점 등은

 통일신라 말기에서 고려 시대 초기로 진전되는 탑비 형식을 잘 보여준다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驪州 高達寺址 元宗大師塔碑) 현지 안내문

이 귀부(龜趺)와 이수()

혜목산고달선원국사원종대사지비(慧目山高達禪院國師元宗大師之碑)를 받쳤던

귀부와 비신석 위에 얹혔던 이수이다.

비는 일찍이 무너져 신석(身石)은 국립중앙박물관(國立中央博物館)에 옮겨져,

 현재는 경복궁(景福宮) 근정전(勤政殿) 서쪽화랑(西廻廊)에 진열되어 있으며,

이곳 고달선원(高達禪院) 절터에는 복원된 귀부와 이수다.

 

 

 

비문(碑文)에 의하면 원종대사(元宗大師)는 신라(新羅) 경문왕(景文王) 9(869) 13세에 출가하여

상주(尙州) 공산(公山) 삼랑사(三郞寺)에서 융제선사(禪師)에게 사사(師事)하였다.

 22세에 양주(楊州) 삼각산(三角山) 장의사(藏義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고

 23세에 입당(入唐)하여 서주(舒州) 동성현(桐城縣) 적주산(寂住山)에서

자선화상(子禪和尙)에게 사사(師事)하였으며

경명왕(景明王) 5(921)에 환국(還國)하여 봉림사(鳳林寺)에 거주(居住)하였다.

 

 

그 후 광주(廣州) 천왕사(天王寺)에서 고려(高麗) 광종(光宗) 9(958) 8월에

 90세로 입적(入寂)하니 왕이 애도(哀悼)하여 원종대사(元宗大師) 혜진(慧眞)이라 추시(追諡)하고

진영일정(眞影一幀)을 그리게 하였으며 대사(大師) 입적 후 17년에 이 비가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귀부(龜趺)는 거대한 단일석(單一石)으로 조성되고 6각 귀갑문(龜甲紋)이 장식되어 있으며

장방형(長方形)의 비좌(碑座)는 운문(雲紋)이 새겨져 있는 연화좌(蓮華座) 위에 조출(彫出)되고

 상면(上面) 둘레에는 복련문(覆蓮文)이 조출되어 있다.

네 다리와 손톱 끝의 조형은 사실적이며 예리하나

 귀두(龜頭)의 면모(面貌)는 흔히 볼 수 있는 용형(龍形)이다.

이수()는 구름과 용무늬로 장식되어 있으며

정상에는 작은 구멍이 뚫어져 있어 보주(寶珠)가 꽂혔던 흔적으로 보인다.

 

 

탑비가 있는 위쪽에 귀부부만 남아 있는 미상의 승탑비가 있다.

 

 

비좌 아래는 구름문과 귀갑문만 선명하고 귀두는 보이지 않는다.

 

 

 

 

고달사지 전경

 

 

고달사는 아직 전각다운 전각을 조성하지 못했다.

 

 

 

고달사 삼성각

 

 

고달사 극락전이다. 법당에서는 재를 지내고 있는 모양이다.

고달사 뒤편을 돌아 보았다.

 

 

석조 석가모니불과 미륵불을 조성해 놓았다. 

 

 

 

 

 

 

고달사를 나와 전각 뒤쪽의 길을 따라 원종대사승탑으로 향한다.

 

 

 

 

 

 

 

 

 

고달사에서 바라 본 고달사지 전경

 

 

 

 

 

 

 

 

 

고달사지 원종대사 혜진탑(高達寺址 元宗大師慧眞塔)

 

보물 제7. 높이 4.5m. 기단 위에 탑신을 안치하고 옥개석을 덮은 일반형 승탑으로

 8각원당형 부도의 기본구조를 따랐으나 기단부가 방형인 점이 특이하다.

 

 

 

 

 

기단부는 4매 석으로 짜인 네모난 지대석 위에 하대·중대·상대가 차례로 형성되어 있는데,

하대는 방형이고 중대석 상단부터가 8각의 평면을 보이고 있다.

하대는 복련대로서 한 면에 5판씩, 각 모서리에 1판씩,

모두 24판의 단엽(單葉) 연화문이 돌려졌는데, 수법이 매우 정돈되었다.

 

 

 

 

4()의 돌로 된 지대석 위에 24잎의 외겹 내림연꽃을 조각한 하대석이 있고,

그 위에 갑석형을 조각한 판석을 두었다.

 

 

 

중대석은 용머리를 한 거북을 중심으로 4마리 용이 구름 사이로 꿈틀거리는 모습을 부조했는데,

거북은 머리만 오른쪽으로 돌리고 몸은 정면을 향한 자세이다.

세부표현이 사실적이고 생동감이 넘친다.

 

 

 

중대석 위의 갑석은 팔각형이며 그 위에 잘록한 받침대 위로 8잎의 외겹 올림연꽃을 조각했다.

그 위에 1단의 굄이 있고, 중대석과의 사이에 갑석형의 네모난 각출 판석이 얹혀 있다.

 중대석은 한 개의 돌로 만들어졌는데, 상단부에 갑석형처럼 팔각으로 돌린 띠가 있어

 8각 평면의 의장(意匠)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신부(身部)는 이에 구애됨이 없이

 상하에 권운문(卷雲文)을 조각하였는데, 밑이 약간 넓은 편이다.

 

 

정면에는 거북 한 좌를 조각하였는데, 몸은 정면을 향하고 머리만 우향하고 있다.

 양쪽 앞발과 귀갑(龜甲) 부분이 그대로 잘 표현되어서

마치 석비의 귀부(龜趺)와도 같은 느낌을 준다.

두상은 용두(龍頭)로서 부리부리한 눈과 코·입 등의 표현이 사실적이다.

이 귀부를 중심으로 구름 속에 꿈틀거리고 있는 네 마리의 용이 부조되어 있다.

 

 

상대석은 앙련석(仰蓮石)으로 하면에는 8각의 각형 받침 2단이 각출 되었으며,

가운데는 8판의 큼직한 홑잎 연화문이 각 모서리에 한 판씩 조식 되었고,

상단은 갑석형처럼 8각의 띠가 돌려졌다. 상면에는 굄대를 마련하여 탑신석을 받치고 있다.

 

 

한 개의 돌로 조성된 8각 탑신은 4면에 문호형(門戶形)이 모각되어 있고,

다른 4면에는 사천왕 입상이 새겨져 있다.

 

 

 

 

 

 

 

 

 

 

 


8각의 탑신 4면에는 문짝을, 다른 4면에는 사천왕 입상을 조각했으며 그 위로 8각의 옥개석이 놓여 있다.

 옥개석 밑에 이중의 받침을 새겨 서까래를 대신했다.

추녀는 수평이나 여덟 모서리에 귀꽃을 달아 약간 위로 반전되어 있다.

옥개석의 윗면에는 기왓골의 표현이 없고 8개의 우동이 표현되었으며

정상부에 이르는 경사도 완만하다.

 

 

 

상륜부에는 8각 노반과 꽃 모양이 조각된 복발,

귀꽃이 화려한 팔각의 보개, 보륜과 보주를 얹었다.

옥개석도 한 개의 돌로 다듬은 8각형인데,

하면부에 연목(椽木: 서까래) 등의 모각은 없으나,

호형(弧形)을 중심으로 상하에 낮은 받침이 있고,

이를 중심으로 넓고 높은 또 한 단의 받침이 있어 연목을 대신하고 있다.

 

 

 

추녀는 수평이나 전각에 이르면서 상향(上向)하였고,

특히 여덟 귀퉁이의 전각은 반전이 큰 편이며,

그 위에는 삼산형(三山形) 고사리 모양의 귀꽃이 조각되었다.

낙수면에는 기왓골이 없으나 각 면의 합각에 우동(隅棟: 옥개석의 귀마루)이 표시되었으며,

경사는 완만한 편이다. 정상부에는 석형처럼 8각의 띠를 돌리고 상륜부를 받치고 있다.

 

 

 

 

상륜부는 8각의 노반과 화문이 조식된 복발 위에 보개를 얹었으며 보륜과 보주까지 남아 있다.

보개는 81석으로 옥개석의 형식과도 같이 여덟 귀퉁이 전각에는

삼산형 고사리모양의 귀꽃이 원각되어 있고 낙수면도 완만하다.

보주는 함주(含珠)한 화염형(火焰形)이다.

 

 

이 부도는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을 기본으로 하되

하대석을 방형으로 조성하였음은 시대적인 특색이라 하겠다.

기단부 중대석의 조각은 가장 현저하게 고려 시대의 수법을 나타내었고,

각 부의 조화도 우아하고 화려하다.

 

 

이처럼 기단부의 중대석을 운룡(雲龍)으로 조식한 것은

선림원 홍각선사탑과 흥법사 진공대사탑에서도 볼 수 있는데,

여기서는 운룡만 조각하고 평면도 원형과 8각을 유지한 데 비하여,

원종대사탑 하단부도 8각이란 규범에서 벗어나고 있어 조성 시기가 내려감을 짐작하게 한다.

 

 

 

고달사지 원종대사탑의 주인공인 원종대사는 869(경문왕 9)에 출생하여

 958(광종 9)에 입적한 고승이다.

 이 승탑의 건립연대는 원종대사탑비의 비문에 의하여 977(경종 2)으로 추정되고 있다.

 

 

 

 

#비문에 의해 나말여초의 고승 원종대사 찬유(璨幽869~958)의 묘탑임을 알 수 있고,

 975(광종 26)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중대석의 조각이나 하대석의 연판 형태는 고려 초기 조각의 특색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전체 구성을 볼 때 중대석이 다소 비대해진 감이 있고,

기단부가 4각인 점은 고달사지에 있는 또 다른 석조부도가 8각 기단인 점과는 차이가 있다.

 규모나 각 부분의 비례, 장식면에서 장중함과 섬세함을 동시에 갖춘 10세기 부도의 걸작품이다.

 

 

 

 

 

 

고달사지 승탑은 본방 고달사지승탑 참조  

 

 

고설 석실묘는 승탑 위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고달사지 쌍사자석등은 별도 기술한다.

(본방 고달사지 쌍사자석등 참조)

 

 

원종대사는 고려시대 선승(禪僧)으로 성은 김씨(金氏). 자는 도광(道光).

시호는 원종대사(元宗大師), 탑호(塔號)는 혜진(慧眞)이다.

계림(鷄林)하남(河南 : 현재의 경상남도 하동) 출신. 아버지는 용()이다.

13세 때 상주 삼랑사(三朗寺)의 융제(融諦)를 찾아갔으나

융제는 그가 법기(法器)임을 알고 혜목산(慧目山)심희(審希)를 스승으로 모시게 하였다.

 

 

890(진성여왕 4) 삼각산 장의사(莊義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광주송계선원(松溪禪院)에서 심희의 권유에 따라 892년에 상선(商船)을 타고 입당(入唐)하여,

서주(舒州)투자산(投子山)의 대동(大同)에게 선을 배우고 곧 도를 깨달았다.

 

 

 

그 뒤 중국의 여러 사찰들을 유람하다가 921(경명왕 5) 귀국하여 심희를 찾아가자,

심희는 삼창사에 머물 것을 명하였다.

3년 동안 삼창사에 머물다가 고려 태조의 청에 따라

경주사천왕사(四天王寺)에 머물렀으나, 곧 혜목산을 좋아하여 이주하였다.

 

 

 

이 곳에서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여 대선림(大禪林)을 이룩하였다.

혜종과 정종은 가사(袈裟)를 내렸고, 광종은 그를 왕사(王師)로 책봉하고

 증진대사(證眞大師)라는 호를 내렸다.

광종은 또 개경 사나원(舍那院)에 머무르게 한 뒤

 3일 만에 중광전(重光殿)에서 설법하게 하고 국사(國師)로 삼았으며,

은병·은향로·수정염주·법의 등을 내렸다.

 

 

 

뒤에 은퇴하여 혜목산에서 입적하였다. 혜목산 고달사(高達寺)에 세워졌던 그의 비는

 현재 경복궁에 보존되어 있다가 여주박물관으로 이관되었다.

제자로는 흔홍(昕弘동광(同光행근(幸近전인(傳印) 500여 인이 있었다.

시호는 원종대사(元宗大師), 탑호(塔號)는 혜진(慧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