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4. 10. 22:33ㆍ국내 명산과 사찰
팔공산 파계사
이른 일요일 아침 대구 팔공산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고속도로는 정체는 없었다.
몇 해 전인가보다. 팔공산 갓바위, 은해사와 군위 삼존불 등은 돌아보았지만
귀에 익은 사찰인데도 팔공산 동화사와 파계사는 이번이 초행길이다.
팔공산이라 불리는 것은 후삼국 시대 견훤(甄萱)이 서라벌을 공략할 때에
고려 태조가 5,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후백제군을 정벌하러 나섰다가
공산(公山) 동수(桐藪)에서 견훤을 만나 포위를 당하였을 때
왕건을 모신 신숭겸(申崇謙)이 태조로 가장하여 수레를 타고 적진에 뛰어들어 전사함으로써
태조가 겨우 목숨을 구하였다고 한다. 당시에 신숭겸과 김락(金樂) 등 8명의 장수가 모두 전사하여
이를 추모하기 위해 팔공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팔공산은 또한 불교가 수용되면서부터 신라불교의 성지로서 자리매김하게 되었으며,
불교 문화를 꽃피운 영산으로 신라 때는 신성한 산으로
중악(中岳), 부악(父岳), 공산(公山), ·동수산(桐藪山)으로 불렸던 산이며,
또한 신라시대의 오악(五岳)의 하나로, 동악은 토함산, 서악은 계룡산,
남악은 지리산, 북악은 태백산이며 그 중앙에 팔공산을 중악(中嶽)으로 삼고
오악 중에서도 가장 신성시해온 산이 팔공산이다.
북쪽에는 일명 칠봉산(七峰山)으로 불리는 가산(架山)이 자리하고 있다.
팔공산은 계곡이 아름답고 산봉이 웅자하며, 부근에 사적이 많아 1980년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팔공산은 갓바위로도 유명하지만, 주변에 신라 시대의 많은 석불과 마애불 등이 산재하고 있고,
사찰로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桐華寺), 제10교구 본사 은해사(銀海寺) 등을 비롯하여
송림사(松林寺), 파계사 등 유명 고찰이 많은 산이다.
팔공산 파계사(把溪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桐華寺)의 말사이다.
사적기에 의하면 통일신라 애장왕 5년(804년) 심지왕사(心地王師)가 창건하였고,
선조 38년(1605년) 계관(戒寬)이 중창하였으며, 숙종 21년(1695년) 현응(玄應)이 삼창하였다.
팔공산 파계사는 조선의 제21대 왕 영조대왕(1694~1776)의 출생과 관계되는 사찰이다.
현응은 숙종의 부탁에 따라 세자의 잉태를 기원하며 농산(聾山)과 함께 백일기도를 하였는데,
백일기도가 끝나는 날 농산은 숙빈 최씨에게 현몽하고 세자로 다시 태어났다고 한다.
이 세자가 후에 영조로 즉위한다. 이때 숙종은 현응의 공을 높이 사서 파계사를 중심으로
둘레 40리에 걸쳐 나라에 내는 세금을 파계사에서 거두어들이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나 현응은 이를 거절하고 선대 임금의 위패를 모시게 하여 달라고 청원하여
경내에 기영각을 짓고 선조·숙종·덕종·영조 네 분의 위령을 모심으로써
당시 격렬했던 당파 싸움의 근원지가 되었던 지방 유생들의 행패를 막을 수 있었다.
그때 세워진 대소인개하마비(大小人皆下馬碑)가 현재의 사적비 부근에 있으며,
전생에 농산화상이었던 영조가 11세에 썼다는 ‘玄應殿(현응전)’이라는 현판이
지금까지 성전암(聖殿庵) 법당에 걸려 있다.
또한, 1979년 6월 파계사 법당의 관음보살상을 개금할 때
불상 안에서 영조의 어의(御衣)가 나와 학계의 관심을 끌었고, 설화의 신빙성을 더해 주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100여 평에 이르는 2층 누각인 진동루(鎭洞樓)가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0호로 지정되어 있고,
대구시 유형문화재 7호인 원통전(圓通殿) 안에는 목조관음보살좌상이 보물 제992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 동쪽에 종무소로 사용되는 적묵당(寂默堂)은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9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쪽에 설선당(說禪堂)은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7호로서 구(口)자형을 이루고 있다.
원통전 뒤쪽의 기영각은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1호로,
숙종·영조·정조 3대의 어필을 보관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필각(御筆閣)이라고 불렸으나
지금은 어필이 전하지 않는다. 그 옆으로 산령각, 그리고 응향각(凝香閣)이 있으며,
응향각 동북쪽에는 미타전(彌陀殿)이 있다.
이 밖에도 이 절에는 법당 앞에 높이 2m의 8각 석등이 있고, 숙종의 하사품인 병풍 2개와 구슬 2개가 있으며,
절 서쪽 200m 지점에는 1648년(인조 26)에 세워진 원의(圓義),
1658년(효종 9)에 세워진 전명(傳明),
1701년(숙종 27)에 세워진 현응 등 세 대사의 부도와 비가 있다.
부속암자로는 현니암(弦尼庵)·금당암(金堂庵)·성전암·칠성암(七星庵) 등이 있다.
이 중 성전암에는 조선 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현응의 영정과 벽화가 있다.
또한, 성전암은 경상북도의 3대 수도 도량 중 하나로서 널리 주목을 받고 있다.
[진동루]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0호(1984.07.25 지정)
파계사 원통전 앞에 있는 누각으로 1715년(숙종 41)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진다.
이곳은 원래 물의 줄기가 아홉 갈래고 흩어져 있다 하여
물길을 다시 모은다는 의미로 파계사(把溪寺)라 이름하였다 하며,
진동루는 파계라는 이름만으로는 이곳의 기(氣)를 제압할 수 없어
기를 진압한다는 의미로 이름하였다 한다.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2층으로
가공하지 않은 방형의 주춧돌 위에 둥근 기둥을 세우고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아래층 어칸을 통로로 하고 측간의 뒷부분을 창고로 사용하고 있으며,
2층에는 통간 우물마루를 했다. 건물의 규모에 비교해 부재가 다소 약한 감이 있다.
천장은 연등천 장이며, 문은 모두 미닫이 유리문을 달아 어색한 면이 있으나
익공 등에서 볼 때 조선 시대 중·후기 양식에 어울리는 특징을 보인다.
진동루 아래에 있는 이 구시통은 행사나 법회 때 대중을 위한 밥을 담아 두는 용기이다.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데 송광사는 비사리구시, 남해 용문사는 구유, 구시통으로 부른다.
법당 앞에는 괘불대와 배례석이 놓여 있다.
(보물제992호 파계사 목조관음보살좌상)
목조관음보살좌상 뒤편 이 탱화는 파계사의 영산회상도이다.
비단에 채색된 것으로 크기는 340×254㎝이며 현재 보물 제1214호로 지정되어 있다.
영산회상도는 석가여래가 영축산에서 제자들에게 설법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1707년(숙종 33)에 의균(義均), 성익(性益), 체환(體環) 등 6명의 화원(畵員) 비구(比丘)가 그렸다.
대군(大君) 갑술생(甲戌生) 이씨(李氏)가 왕·왕비·세자의 만수무강을 위해 시주(施主)한 왕실 발원의 불화로,
당시의 주상 전하는 숙종이며 왕비 전하는 인원왕후 경주 김씨, 세자 저하는 뒤에 경종이 되는 윤(昀)이다.
대군 이씨는 1694년에 탄생한 숙종의 4번째 아들인 연잉군(延礽君) 금(昑)으로 후에 영조가 된다.
숙종의 제1 후궁인 숙빈 최씨(淑嬪崔氏)의 소생인 연잉군은 13세 되던 해인 1707년에
원비(元妃)인 정성왕후 달성 서씨(徐氏)의 부모와 어머니인 최씨(崔氏)의 만수무강도 함께 기원하고 있다.
이외에도 이씨·민씨·김씨 등 왕실과 관계된 인물로 추정되는 인명이 열거되어 있다.
조선 후기는 대군(大君)이 주도한 왕실 불사(佛事)가 흔하지 않은 관계로 이 불화는
그 자료적인 가치뿐만 아니라 질적으로 뛰어난 작품이다.
@파계사목조관음보살좌상
원통전의 주존불로 봉안된 조선 시대의 목조관음보살좌상으로 보물 제992호로 지정되어 있다.
높이는 108㎝이다. 1976년 6월 개금불사 때 발견된 복장 발원문에
1447년(세종 29)에 중수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 불상의 조성 시기는 그 이전으로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
머리 위에는 원통형의 높은 보관을 쓰고 있는데 여러 가지 꽃무늬와
연주무늬[連珠紋] 형태의 구슬이 장식되어 있어 매우 화려하다.
관 밑으로는 앞머리가 많이 내려와 있고 보발은 양쪽 귀 옆으로 내려와 몇 가닥으로 흩어져 어깨를 덮고 있다.
얼굴은 원만한 편이며 이목구비는 잘 정돈되어 있어 부처와 같이 근엄한 느낌을 준다.
상체는 하체보다 크고 긴 편으로 장대한 면을 보여준다.
천의는 법의의 착의방식과 마찬가지로 통견으로 걸쳤는데
가슴을 많이 드러내면서 양 무릎과 오른쪽 발끝을 덮고 있고
그 아래로 물결무늬의 옷 주름이 형성되어 있다.
가슴 위로는 군의를 주름잡아 묶은 띠 매듭이 보이는데,
이러한 군의 형식은 원각사탑 부조상(1464)이나 무위사 아미타삼존벽화(1476)의 본존불 등
조선 시대 불상에 많이 나타나는 특징이다.
또한, 가슴 앞에 늘어진 목걸이와 함께 영락 장식이 양어깨를 걸쳐 두 팔과
양 무릎 위에까지 흘러내려 있어 상당히 화려하고 장식적이다.
오른손은 어깨까지 올려 밖을 향하고 있는 반면에
왼손은 무릎 위로 약간 들어 올려 안으로 향하고 있는데, 각각 엄지와 가운뎃손가락을 살짝 구부리고 있다.
이 보살상에 보이는 천의 형식이나 극도로 장식화된 보관 및 영락 장식 등은
장륙사건칠보살좌상(1395)을 비롯하여 대승사금동보살좌상(1516 개금)·
은해사운부암금동보살좌상(15세기경) 등의
조선 시대 보살상과 양식이 매우 유사하므로 조선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원통전의 이 행화는 대구 문화재 제52호로 지정된 아미타삼존도 대신 모신 것 같다.
원 파계사의 아미타삼존도 금은색 바탕 위에 금니로 그린 묵탱이라고 한다.
위 삼존도는 중앙에 아미타불을 좌후 협시로 지장보살과 약사여래를 모셨다.
@대구 파계사 아미타삼존도(大邱 把溪寺 阿彌陀三尊圖)는
대구광역시 동구 중대동 파계사에 있는 조선 시대의 불화이다.
2015년 5월 11일 대구광역시의 문화재자료 제52호로 지정되었다.
위 사진은 이를 별도 장소에 보관 관리하는 지 법당에서는 볼 수가 없어 인터넷에서 펌한 사진이다.
(위키백과에 의하면 이 작품은 도난 당한 것이라고 한다)
파계사에 소장된 이 탱화는 검은색 바탕 위에 금니로 그림을 그린 묵탱(墨幀)으로
화면 하단에 화기를 남기고 있어 1824년
체균(体均), 관보(琯普), 금겸(錦謙), 두천(斗天)에 의해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화면에는 아미타불과 관세음, 대세지보살, 그리고 아난, 가섭의 오존(五尊)만이 등장하는데
이처럼 권속이 간략화되는 현상은 19세기 불화의 특징 중 하나이다.
이 작품은 제작 시기가 200년이 채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작품의 상태가 좋지 않지만,
화기를 통해 정확한 제작연대와 작가를 확인할 수 있고, 작품의 필순이 유려한 수작이다.
@신중도
대구 파계사 신중도 및 복장유물 일괄(大邱 把溪寺 神衆圖 및 腹藏遺物 一括)은,
2015년 5월 11일 대구광역시의 문화재자료 제53호로 지정되었다.
파계사에 소장된 이 탱화는 파계사 아미타삼존도와 마찬가지로 화면 하단에 화기를 남기고 있어
1824년 관보(琯普), 체균(体均), 금겸(錦謙), 두천(斗天)에 의해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중 특히 관보와 체균은 19세기 전반 영남지방에서 활약했던 화승이다.
이 작품은 화면 전체에 오염이 심하며 언젠가 개채(改彩)의 흔적도 있어
원래의 모습에서 다소 변형되었지만, 화기뿐만 아니라 발원문을 비롯한 복장품이 잘 갖추어져 있고,
전체적으로 19세기 전반 불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응진전
[산령각]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8호(1984.07.25 지정)
산신각이라고 하기도 한다. 산신각은 산신을 봉안한 건물로
우리나라 사찰 특유의 전각 가운데 하나로 우리나라 불교의 토착화 과정을 짐작게 하는 좋은 증거가 된다.
산신은 원래 불교와 관계가 없는 토착신이나 불교의 재래신앙에 대한 수용력에 의하여 사찰 내에 봉안되게 되었다.
산신 신앙은 우리나라 특유의 산악숭배신앙과 관련이 깊지만 조선 시대 이후 차츰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신앙은 불교 본연의 것이 아니라 하여
전(殿)이라 하지 않고 반드시 각(閣)이라는 명칭을 붙이고 있다.
[기영각]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1호(1984.07.25 지정)
기영각은 영조 대왕을 위해 기도한다는 뜻으로 이름한 전각이다.
1696년(숙종 35) 현응 조사가 성전암(성전암)과 더불어 건립하였다고 전해지며
1974년과 1983년의 두 번에 걸친 보수공사가 있었다.
건물은 화강석 바른층쌓기 기단 위에 건립된 정면 3칸. 후면 2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구조양식은 덤벙초석 위에 원주를 세우고 주상에 주두와 함께 앙서와 수서를 장식한
외일출목 주심포게양식을 보이며 주두와 장식이 번잡하게 발달한
조선 후기 공포양식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하겠다. 상부 가구는 5량가이나 우물천장으로 가리어져 있다.
미타전이다. 수행도량인지 외부인 출입이 금지 되어 있다.
설선당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7호(1984.07.25 지정)
설선당은 강당으로 사용하던 건물로, 원통전을 중심으로 적묵당과 마주하고 있다.
1623년(인조 1) 계관법사에 의해 창건되어 두 차례(1646, 1725)에 걸쳐 중건하였고
1762년 지붕을 다시 잇는 공사를 시행한 후 1976년에는 대대적인 보수공사가 있었다.
이 건물은 대중식당과 강습소로 사용되고 있으며,
구조양식과 가구 수법 등이 간결하면서도 견실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초파일이 아직 한달 이상이 남았는데 벌써부터 연등이 달려 있다.
@山海崇深(산해숭심)이란 이 편액의 의미는 산과 바다는 높고 깊다는 의미로
산해(山海)는 「산해혜자재통왕여래(山海慧自在通王如來)」의 약칭으로
부처님의 높고 깊은 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된다.
아난(阿難)이 내세(來世)에 성불할 때의 이름으로, <법화경> 인기품(人記品에)
「부처님이 아난(阿難)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세에 부처가 되어 호를
山海慧自在通王如來(산해자재통여래)라 할 것이다.」라고 수기한 데서 비롯된다.
극락전
귀일당
미타전으로 들어가는 입구 만수문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미타전은 외부인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파계사 내원이다. 외부인 출입은 통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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