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산 동화사

2019. 4. 16. 21:10국내 명산과 사찰

팔공산 동화사

팔공산은 너무나 귀에 익은 불교 문화를 꽃피운 영산으로

신라 때는 신성한 산으로 중악(中岳), 부악(父岳), 공산(公山),

동수산(桐藪山)으로 불렸던 성산(聖山)이며, 또한 오악(五岳)의 중악(中嶽)으로

오악 중에서도 가장 신성시 여겨 온 산이다. 그 중악 기슭에 동화사가 자리하고 있다.

 

팔공산 동화사(桐華寺)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9교구 본사로

<조선사찰사료>에 의하면 493(신라 소지왕 15)

극달(極達) 스님이 창건하여 유가사(瑜伽寺)라 부르다가

 832(흥덕왕 7) 심지(心地) 대사가 중창할 때 겨울철이었는데도

절 주위에 오동나무 꽃이 만발하여 그때부터 동화사(桐華寺)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진표율사의 사상을 계승한 심지(心地) 스님이

팔공산에 와서 절을 세우니 곧 동화사 첨당(籤堂) 북쪽의 우물이 있는 곳이라는 기록이 있다.

 현존하는 건물은 대부분 영조 때 세운 것으로, 대웅전을 비롯하여 연경전.

천태각. 영산전·봉서루·심검당·응향각 등이 있으며,

이 절에 딸린 암자로는 금당암. 비로암. 내원암. 부도암. 양진암. 염불암 등이 있다.

이 절에는 6점의 보물을 비롯하여 1992년에 완성된 약사여래통일대불 등 많은 문화유산이 있다.

 

@동화사의 지정문화재로는

동화사 마애여래좌상(보물 제243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244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보물 제247동화사 금당암 동·서 삼층석탑(보물 제248

동화사 당간지주(보물 제254동화사 대웅전(보물 제1563

약사여래의 복장물(보물제1607지장시왕도(보물 제1773).

대웅전 앞 3층 석탑(보물제831), 동화사 극락전(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1

동화사 부도군(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2

동화사 수마제전(桐華寺須摩提殿,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6

동화사 염불암 청석탑(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9동화사 염불암 마애여래좌상 및

보살좌상(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4) 등이 있다.


동화사는 2개의 일주문이 있다. 하나는 동화문(桐華門)이고 다른 하나는 봉황문(鳳凰門)이다.

봉황문은 입구에 마애불이 있고 통일약사대불로 바로 올라갈 수 있고,

동화문은 대웅전을 비롯하여 동화사 전각을 둘러보기가 편하다.

지금의 동화문은 옛적 동화문이 건립된 지 30년 만에 시류(時流)에 따라

 "팔공총림동화사" 로 현판이 바뀌고 규모도 가로 10m, 1m 20cm로 새롭게 조성되었다.

현판은 진제종정 예하의 친필이라고 하며, 현판 제작은 동화사서각회의 창립자인 도영 조희곤님으로

현판 좌우에는 봉황의 기운이 서린 동화사를 대표하는 봉황을 새겨 놓았다.


(백정수금강역사/밀적금강)

팔공총림동화사의 일주문 안에는 우측에 백정수금강역사와 밀적금강역사,

 좌측에는 나라연금강과 황수구금강역사를 봉안했다.

 밀적금강과 나라연금강역사는 이왕(二王)으로 불리는 금강역사이며

백정수금강역사와 황수구금강역사는 팔대금강에 속한다.

금강역사는 인왕(仁王이왕(二王이천왕(二天王) 등으로도 불리며,

 경전에서는 금강수(金剛手), 금강밀적천(金剛密迹天), 집금강신(執金剛神),

금강신(金剛神), 인왕역사(仁王力士) 등 여러 이름으로 등장한다.

사찰에서는 서산개심사 제석범천도, 통도사 팔대금강 등 주로 탱화나, 벽화에서 볼 수 있다.

팔대금강은 불교의식집인 석문의범에 나오는 데 간략히 소개하면


(나라연금강/ 황수구금강역사)

첫째 청제재금강은 중생들의 지난 재앙을 소멸하며[消滅衆生宿災舊殃],

금강성자의 분신으로 동방신(東方神)이다.

둘째 벽독금강은 중생들의 질병과 모든 독을 없애는[破除有情瘟諸毒] 신으로 금강성자의 분신이다.

셋째 황수구금강은 모든 공덕의 주인이 되어 구하는 바를 뜻대로 이루어주는[主諸功德所求如意] 역할을 하며,

금강성자의 분신으로 방위상으로는 중앙신(中央神)이다.

넷째 백정수금강은 모든 교법을 주재하여 들끓는 번뇌를 깨뜨려 주는[主諸寶藏破除熱惱] 신이자

금강성자의 분신으로 서방신(西方神)이다.

다섯째 적성화금강은 바람처럼 빠르게 부처님을 뵙게 하는[見佛身光如風速疾] 신이며,

역시 금강성자의 분신으로 남방신(南方神)이다.

여섯째 정제재금강은 자비로운 눈으로 사물을 보고 지혜로 재앙을 깨뜨리는[慈眼示物智破災境] 신이며,

일곱째 자현신금강은 견고하고 바른 믿음을 열어 중생을 깨닫게 하는[披堅牢藏開悟衆生] 신이며,

여덟째 대신력금강은 사물에 응하여 삶을 조화롭게 하고

지혜의 싹을 자라게 하는[應物調生智芽成就] 신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 중 청제재금강, 황수구금강, 백정수금강, 적성화금강에 각각 동방, 중앙, 서방, 남방을 상징하는

 오방색인 이 명칭 앞에 붙어 있다.

북방을 대표하는 오방색인 이 이름에 붙은 금강신은 없다.


<옹호문(擁護門)>

동화사의 옹호문은 일반사찰의 천왕문과 같다. 전각 안에는 4분의 천왕이 모셔져 있다.

사천왕의 구별은 사천왕의 지물(持物)로서 대개 파악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사찰의 천왕문을 보면 경주 불국사, 팔공산 은해사, 순천 송광사와 같이

서방 광목천왕은 탑과 창을, 남방 증장천왕은 용과 여의주를, 동방 지국천왕은 칼을,

북방 다문천왕은 비파를 들고 있는 데 반하여,


(동방지국천왕/남방 증장천왕)

조계사, 하동 쌍계사, 김천 직지사나 중국 보타산 혜제사 등의 사천왕은

동방 지국천왕은 비파를, 남방 증장천왕은 칼을, 서방 광목천왕은 여의주와 용을,

북방 다문천왕은 보탑과 당()을 들고 있다.

동화사의 천왕상은 조계사의 유형을 같이 하고 있다. 이는 조성시기에 따라 달라진 것이다.





통일신라 시대와 고려 시대의 사천왕상이 들고 있는 지물은

 주로 병장기로서 칼, 화살, , 금강저(金剛杵 : 악마를 깨뜨리는 무기) 등과 같은 것이며

 북방 천왕의 경우 반드시 탑을 받들고 있지만,

 이에 반해 조선 후기로 오면서 크게 변화하여 비파, , 용과 여의주, 당과 탑으로 정형화하게 된다.

이와 같은 변화는 원대 라마교 약사칠불의궤공양법(藥師七佛依軌供養法)의 영향인 것으로 추측된다.

(본방 고창 선운사 사천왕상 참조)

(서방광목천왕/ 북방 다문천왕) 

조선 후기 사천왕상의 좌세는 특이한 편이다. 대체로 한쪽 다리를 비스듬히 올려

어그러진 얼굴과 검은 피부를 지닌 전형적인 형태의 악귀가 받들고 있다.

다른 한쪽 다리는 아래로 내리고 있거나 사람의 배 부분을 밟고 있다.





조선 시대 이전에는 주로 동물을 밟고 있는 데 반해 조선 시대에는

민간인의 형태 또는 전형적인 악귀의 모습을 취한다.

양쪽 발밑에 모두 8구의 악귀를 밟고 있는가 하면 아무것도 밟지 않고 있는 예도 있다.






봉서루(鳳棲樓)

옹호문을 지나면 바로 바깥마당 건너편으로 내정 누문(樓門)이 봉서루다.

동화사가 자리한 곳은 풍수지리에서 <봉소포란(鳳巢抱卵)>이라 하여

 <봉황이 알을 품은 지세>라 불리는 형세로 여겨졌다.

봉서루는 동화사의 누문(樓門)으로 '봉황이 깃든 누각'이란 뜻이다.

네모난 돌기둥을 세워 누문(樓門)을 만들고,

그 위에 정면 5칸의 목조 누각을 세운 독특한 건축 양식으로 세워졌으며,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가 영남도총섭(嶺南都摠攝)으로서

동화사에서 승병을 지휘했던 연고에 따라

봉서루 안에는 '영남치영아문(嶺南緇營牙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는 승()을 뜻한다. 누각으로 오르는 계단 중간에는 널찍한 자연석이 하나 놓여 있어

흔히 이 부분을 '봉황의 꼬리'라 부르며, 누각 오른쪽 귀퉁이에 있는 세 개의 둥근 돌은

 '봉황의 알'을 상징하는 것이다. 봉서루 누대 밑을 지나 절 안마당으로 들어서면

바로 대웅전이 마주 보이고 우측에 육화당이 있고, 좌측에 심검당이 있다.














봉서루 좌측에 육화당이 있다.




대웅전(大雄殿)

정면 3, 측면 3칸의 팔작지붕건물로 보물 제1563호 지정되어 있다.

건립연대는 알 수 없고, 1732(영조 8)에 중창되었다고 한다.



대웅전 축대 아래에는 한 쌍의 괘불대(掛佛臺)와 노주(露柱)가 서 있고,

축대를 오르는 층계는 정면에 반원형으로 쌓아 올렸다. 아마 근대에 보수한 듯하다.

장대석 바른층쌓기를 한 높은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는데,

휘어진 상태의 나무를 그대로 다듬은 것이 주목된다.

기둥 윗몸은 창방(昌枋)으로 결구하고 그 위에 평방을 놓았으며, 다시 그 위에 공포(栱包)를 올려놓았다.

 

공포의 짜임은 외삼출목(外三出目내이출목으로서 기둥 위는 물론 주간(柱間)에도 포를 올린 다포식이다.

살미첨차山彌檐遮의 끝은 앙서仰舌로 되어 있고,

내부에서는 아래위의 살미첨차들이 모두 판형(板形)으로 되어 있는데,

그 끝에는 날카로운 연꽃봉오리를 조각하였다.






가구(架構)는 대들보를 평주와 내고주(內高柱)에 걸고

이 보 위에 동자기둥을 세워 종보宗樑를 받쳤는데

종보의 높이에서 우물천장을 가설하였다.

천장에는 세 마리의 용과 여섯 마리의 봉황이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다.

 

내진의 어간에는 두 개의 고주를 세워 불벽을 만들었고,

불단 위에는 보개천장寶蓋天障을 만들었다.

건물의 정면 주간에는 중후한 솟을꽃살창을 달았다.

198612월 시도유형문화재 제10호로 지정되었고 20084월 보물 1563호로 승격되었다.

 



<현지안내문>

동화사는 신라 시대 때 창건된 이후 오늘날까지 8번 중창되었다.

대웅전도 여러 차례 다시 지었는데, 지금의 대웅전은

1727(영조 3)에서 1732(영조 8) 사이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절의 가장 중심적 위치에 자리 잡고 있는 대웅전은

기둥과 기둥 사이에 지붕을 받치는 여러 개의 포가 놓인 다포식 건축이다.

내부 불단 위에는 삼세불상(三世佛像)인 석가모니여래, 아미타여래, 약사여래를 봉안하였다.

그리고 그 위로는 닫집이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

특히 주목할 수 있는 것은 대웅전 정면의 문짝에 새겨진 꽃살문으로

이는 부처님께 꽃을 공양한다는 불교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또한, 가공하지 않은 아름드리나무를 기둥으로 사용하여

시각적으로 자연미와 함께 건물의 안정감도 살펴볼 수 있다.


대웅전 법당





석가모니불을 중앙에 좌측은 아미타불 우측은 약사여래를 모셨다.

대구 팔공산 동화사(桐華寺) 대웅전에 봉안된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木造釋迦如來三佛坐像)인 석가모니불좌상, 아미타불좌상,

약사불좌상은 1725(영조 1) 대웅전이 중창된 뒤 1727(영조 3)에 조성되었고,

조성과 동시에 복장불사(腹臟佛事)가 이루어져 발원문과 함께 석가모니불에 12,

아미타불에 6, 약사불에 32종의 유물이 봉안되었다.


특히 약사불에는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4~7, 지장보살본원경(地藏菩薩本願經),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정원본(貞元本) 1,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주본(周本) 25와 권63,

상지은니무상의경(橡紙銀泥無上依經)권하,

 상지은니대보적경(橡紙銀泥大寶積經)94

 7종의 귀중한 전적이 있어 별도로 보물 제1607로 지정하였다.





산신각




<조사전>

동화사를 거쳐 간 역대 고승의 영정을 봉안한 곳이다. 대웅전 뒤편 서쪽에 있으며 18세기 건물이다.

동화사를 처음 세웠다는 극달 화상과 중창조 보조국사, 사명대사, 세장, 두여,

의첨, 지화, 총륜, 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낸 석우 스님 등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칠성각


법륜을 든 치성광여래


산신






심검당(尋劒堂)

심검당이라는 이름은 '지혜의 칼을 찾는 집'이라는 뜻으로,

참선이나 불경 강설용으로 쓰이는 건물에 주로 붙이는 이름이다.

동화사 심검당은 조선 선조 38(1605)에 천령(天靈)에 의해 지어졌다.

19193.30 대구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영남 지방 학림의 승려 아홉 명이

당시 만세운동 계획을 결의하고 수립했던 장소이다.

현재의 건물은 1978년에 중건된 것으로, 동화사 승려들의 생활 주거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법화당


무위문은 영산전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영산전

영산전은 나한전, 또는 응진전이라고도 한다.

대웅전 동편 뒤 담장으로 둘러싸인 별채에 있으며,

내부에는 불경의 영산회상의 모습을 재현하여 석조 석가 삼존불을 중심으로

십육나한 상이 좌우로 열좌해 있다. 현판 글씨는 서예가 해사 김성근의 글씨이다.

맞배지붕에 겹처마 형식의 건축 양식을 갖춘 현재의 영산전은

현종 10(1669)에 학찬(學贊)이 세웠던 것을 1920년 중건하였다.

 오른쪽 요사는 조실채로 사용하고 있다.








<3층석탑>

동화사 대웅전 앞에 마치 방치한듯 놓여 있는 이 석탑은

고려 시대의 3층 석탑으로 보물 제831호로 지정되어 있다.

높이 523. 일반적인 형태의 석탑으로 2층 기단부 위에 3층의 탑신과 상륜부가 있다.

지대석 위에 낮은 하층 기단이 있는데 각 면에 우주와 탱주가 얕게 모각되어 있고, 그 위에 갑석이 있다.

 

하층 갑석은 4매의 판석으로 이루어졌는데, 윗면의 경사가 뚜렷하며 중앙에 호형과 각형 굄이 있다.

상층기단에도 우주와 탱주가 모각되어 있고, 상층갑석의 밑에는 부연이 있고

경사가 심한 윗면 중앙에는 3단 굄이 있다. 탑신부의 옥신과 옥개석은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으며

 각 층의 옥신에는 우주가 새겨져 있다.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3단이며, 낙수면의 경사가 심하고 네 귀퉁이에 반전이 심하여

전체적으로 경쾌한 느낌을 준다. 상륜부는 노반(露盤복발·보륜·보개·보주로 이루어졌는데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원래 이 탑은 기단부가 매몰되어 있었는데 19896월 기단부를 발굴·수습하는 과정에서

석탑을 해체·복원한 결과 1층 탑신의 상면 중앙 사리공에서

조선 초기의 청자 항아리 속에 고려 시대의 청동소탑(靑銅小塔수정·구슬·유리병이 들어 있는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또한, 진신사리 4과가 발견되었는데

새로운 사리장엄구를 만들어 탑 안에 다시 봉안했다.

이 석탑은 전체적인 구성이 간결하고 옥개석이 간략하게 표현된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 양식을 계승한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범종루로 내려 가면서 올려다 본 대웅전



범종루


아래에서 올려다 본 범종루다. 편액은 통일범종루로 되어 있다.


화엄당


봉서루에서 올려다 대웅전. 초파일 등준비로 부산하다.




원음각




금당암으로 가면서 돌아 본 동화사 뒤편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