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4. 13. 18:00ㆍ국내 명산과 사찰
팔공산 동화사 비로암과 마애불
비로암은 대한불교 조계종 제9교인 팔공산 동화사의 부속암자 중 하나로
동화사 동화문을 지나 경내에 들어서면 대웅전으로 가는 낮은 언덕 아래 오른쪽에 있다.
비로암의 창건은 비로암 마당에 조성된 삼층석탑에서 나온
민애왕석탑사리합기(閔哀王石塔舍利盒記)의 발원문에 의하면
경문왕(景文王 861~875년)이 죽은 민애왕(閔哀王: 재위 838~839년)의
추복(追復:한번 빼앗았던 위호(位號)를 그 사람이 죽은 뒤에 회복시킴.)을 위해
삼층석탑과 함께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보광명전(普光明殿)>
비로암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있는 큰 전각이다.
<능덕당(能德堂)>
출입이 통제되어 있어 사용처를 알 수 없었다. 비로암의 주지실인 것으로 보인다.
<대적광전(大寂光殿)>
전면과 측면이 모두 3칸인 다포식 맞배지붕 전각으로,
현판은 1793년(정조17)에 당시 은해사에 주석하시던
영파성규(影坡聖奎1728~1812)대사의 작(作)이라고 한다.
법당 안에는 보물 제244호인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을 모시고 있다.
비로암이란 편액이 붙어 있는 이 전각은 종무소를 겸하고 있다.
비로암의 현판은 경북 칠곡 출신 서예가 동애(東涯) 소효영(蘇孝永1926~2005) 선생이 쓴 것이다.
비로암 앞에는 보물 제247호 삼층석탑이 있다.
삼층석탑 좌측은 비로암 우측은 대적광전이다.
@대구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大邱桐華寺毘盧庵三層石塔)
보물 제247호 지정되어 있으며, 탑의 높이는 3.71m다.
비로암의 중심 건물인 대적광전의 앞뜰에 자리하고 있는 석탑으로,
나직한 흙단 위에 2층의 받침을 세우고 그 위에 3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올린 전형적인 신라 석탑이다.
1967년에 해체 복원 공사를 하였다. 건립 시기는 대적광전의 석조비로좌나불좌상과 같은 863년이다.
아래층 받침돌은 4장의 길고 큰 돌로 구성되었는데,
1장의 돌로 이루어진 각 면에는 바닥돌과 받침돌 면석(面石),
그리고 모서리 기둥과 가운데 기둥이 새겨져 있다.
아래층 받침돌의 덮개돌은 네모난 4장의 널돌을 붙여서 덮었으며,
윗면에는 위아래로 굴곡을 만들어 마치 별개의 널돌을 굄돌로 끼운 듯이 표현하였다.
위층 받침돌의 면석은 4장의 널돌로 조성하였으며,
각 면마다 모서리 기둥과 가운데 기둥을 돋을새김하였다.
위층 받침돌의 덮개돌은 2장의 널돌로 덮었으며,
윗면에는 아래층 받침돌과 같은 모습으로
위아래를 굴곡으로 깎아 굄돌을 마련하여 몸돌을 받치게 하였다.
탑신부(塔身部)는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조성하였다.
몸돌의 각 면에는 모서리 기둥을 새겼으며, 위로 올라가면서 약간의 체감(遞減)을 나타내도록 하였다.
지붕돌은 윗면 가운데 부분에 굄을 새겼고, 추녀는 전각(轉角)까지 직선을 이루게 하였으며,
아랫면에는 4단의 받침을 새기고서 가장자리에 가는 홈을 파서 돌렸다.
상륜부(相輪部)에는 노반(露盤) 위에 복발(覆鉢)·보주(寶珠) 등이 남아 있다.
이 석탑은 규모는 작지만 각 부분의 비례가 신라 석탑의 양식을 충실히 따른 아름다운 조형미를 갖추고 있다.
1층 몸돌 아랫부분과 아래층 받침돌의 덮개돌에 굄돌을 별개의 돌로 끼워 넣듯이 조각한 수법은
특이한 모습으로, 대체로 신라 하대에 나타나는 양식이다.
이 석탑은 1966년에 사리구(舍利具)가 도난되었지만 다행히 중요한 유물만은 수습되었다.
사리를 담은 납석제(蠟石製) 항아리에 글자가 새겨져 있어서,
이 석탑이 863년(경문왕 3)에 민애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민애왕석탑사리합기 (閔哀王石塔舍利盒記) (사진출처: 문화재청)
863년 동화사 비로암에 경문왕이 죽은 민애왕의 추복을 위해 3층 석탑을 조성하고
발원 내용을 적은 사리합(舍利盒)이다. 삼층석탑에서 나온 이 사리함은
높이 8.3㎝, 몸통 지름 11.5㎝, 아가리 지름 8.0㎝, 밑지름 8.5㎝로 재질은 납석(蠟石)이며,
863년 9월 10일에 조성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보물 제74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동국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민애왕석탑사리합기 (閔哀王石塔舍利盒記)>
민애왕석탑사리합기(閔哀王石塔舍利盒記)는 흑칠한 납석제의 원형 항아리[盒]의 외면에
가는 선으로 7자 38행의 공간을 만들고, 발원문을 해서로 음각하였다.
발원문에 따르면, 석탑은 경문왕이 죽은 민애왕의 추복을 위해 조성한 것으로,
동화사의 주지로 여겨지는 심지(心智)와 융행(融行) 대덕이 주도하였으며,
한림(翰林) 이관(伊觀)이 발원문을 지었다.
<합기의 내용>
심지는 헌덕왕의 아들로 알려졌는데, 이 경우 그는 민애왕과 4촌 형제가 된다.
그리고 민애왕과 경문왕은 하대 신정권을 열은 원성왕의 후손으로
각각 그 장자인 인겸계와 3자인 예영계가 되며, 항렬로는 조부와 손자 관계가 된다.
그런데 두 집안은 희강왕과 민애왕 사이에 벌어진 왕위쟁탈전으로 인해 서로가 인과응보를 주고받았다.
이런 점에서 본 사업은 서로의 숙원(宿怨)을 풀고자 하는 뜻이 담긴 것으로서 의의가 있다.
흥덕왕 사후 벌어진 왕위쟁탈전에서 승리한 희강왕이 먼저 왕위에 올랐으나,
흥덕왕의 조카인 민애왕이 궐기하여 그를 시해(弑害)하고 왕위에 올랐다.
이에 예영계로 희강왕의 4촌인 신무왕이 장보고의 군사를 빌려 민애왕을 시해하고 왕위에 올랐다.
이럼에도 두 집안은 혼인 관계를 통해 서로가 인척 관계에 있었다.
경문왕의 할아버지는 희강왕이지만 할머니는 추봉된 선강대왕(善康大王: 충공)의 딸로
민애왕과는 오누이가 된다. 따라서 경문왕과 민애왕 사이는 외종조부가 된다.
또 장인인 헌안왕의 왕비 역시 선강대왕의 딸로서,
헌안왕과 민애왕은 8촌이면서도 처남 매제가 된다. 이렇듯 두 집안은 애증이 얽혀 있었다.
이런 점에서 경문왕이 민애왕의 추복을 빌고, 그 사업을 민애왕의 4촌인 심지 대덕이 주재한 것은
두 집안의 화해와 결속을 위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더욱 이 사업은 경문왕대에 원성왕을 추모하는 대숭복사의 중창사업과 함께 미루어보면,
앞서 말한 두 집안의 화해를 넘어 범원성왕가(凡元聖王家)의 단합을 위한 것으로서 의의가 있다.
나아가 발원문에
“업장을 없애고 이물(利物)을 널리라는 것은 탑을 세우고 예참행도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보현행 가운데 여러 부처님께 경배하고 업장을 참회하는(禮敬諸佛 懺悔業障) 실천을 다짐한 것이다.
다음 ‘연대지업(蓮坮之業)’을 쌓고자 하였는데,
연화대좌 즉 그 대좌에 앉아 있는 비로자나불에 귀의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연화장세계 즉 비로자나 법계에 들어가고자 하는 염원을 밝힌 것이다.
이것은 탑이 위치한 비로암의 비로전에 봉안된 비로자나불상과
석탑의 조성이 보현행원신앙의 염원을 함께 담은 것임을 알려준다.
또한 “어린아이가 모래를 쌓아 불탑을 만들어 성불한 뜻을 본받아 탑을 조성한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 법화경』 방편품의 내용에서 취한 것이다.
더욱 사리호는 3개의 작은 목탑과 함께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당시 유행하던 조탑공덕경인 『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 근거하여 조성하였음을 알려준다.
이로써 이 석탑은 여러 경전의 뜻을 모아 조성한 것이 또 다른 특징이다.
그리고 이 일의 실무는 유나(維那: 사찰에서 승려들의 규율 등을 맡은 책임자)인
순범(純梵)과 심덕(心德), 그리고 영충(永忠)이 맡고,
사무는 대사 창구(昌具)가 전담하였다. 장인은 범각(梵覺)이었다.
이 사리합기는 1960년대 초 도굴되었으나, 회수된 뒤 동국대 박물관에 보관되고 있다.
또 사리호를 둘러싼 금동합 4매는 현재 대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출처:위키백과)
비로사 대적광전 법당 안에는 보물 제244호인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을 모시고 있다.
전체높이는 293cm. 불상 높이는 129cm로, 이 불상은
비로암 법당 앞에 있는 3층 석탑의 1층 탑신석에서 출토된 사리호의 명문에 의하면,
민애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그와 사촌 간인 왕사 심지(心地)가
863년(경문왕 3) 비로암의 창건과 동시에 봉안한 불상이다.
호분으로 채색되어 있으며 대좌와 광배를 모두 갖춘 완전한 불상으로
중후하면서도 안정된 구도를 보여 준다.
보물 제433호로 지정된 괴산 각연사 석조비로좌나좌상과
보물 제220호 지정된 영주 부석사의 북지리석조비로좌나불좌상과 함께
우리나라의 신라말에 조성된 대표적인 석조비로좌불좌상 의 하나로 꼽힌다.
(보물 제433호각연사 비로자나불)
(보물제220호 영주 부석사 북지리석조여래좌상)
둥근 얼굴, 작은 백호(白毫), 부드러운 곡선의 눈썹, 바로 뜬 눈, 평범한 작은 코와 입,
단순하고 간명한 귀 등 단정한 상호(相好)를 이루고 있다.
마치 고요한 선(禪)의 세계에 빠진 선사(禪師)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얼굴의 특징은 신체에도 그대로 묘사되어, 좁아진 어깨와 양감(量感) 없는 단정한 체구,
지권인(智拳印)을 짓는 두 손의 안정된 자세 등은 생동감이나 긴장감 등을 찾아볼 수 없다.
불의(佛衣)는 통견(通肩)으로, 얇게 빚은 듯한 평행의 옷 주름이 신체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다.
특히, 팔이나 앞섶에는 섬세하고 규칙적인 옷 주름이 평면적으로 묘사되어
다소 형식화되고 추상적인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길상좌(吉祥坐)를 한 다리와
무릎을 감싸고 흘러내린 옷 주름은 유려한 곡선을 이루면서 신체의 굴곡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통견의 대의(大衣) 안에는 내의를 입었고, 지권인을 결한 왼손 바로 아래에 내의를 묶은 띠 매듭이 표현되었다.
이러한 착의법(着衣法)은 봉화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및
목조광배(奉化鷲棲寺石造毘盧遮那佛坐像―木造光背, 보물 제995호)이나
밀양 무봉사 석조여래좌상(密陽舞鳳寺石造如來坐像, 보물 제493호) 등 9세기 불상에서 많이 나타나는 형식이다.
(보물 제995호 축서사 비로자나불좌상)
광배는 주형 거신광배(舟形擧身光背)로서 8세기 광배 양식과 유사하면서도 훨씬 복잡하게 표현되었다.
즉, 거신광 내에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구분하여,
화려한 보상(寶相), 당초문(唐草文), 연꽃무늬 등을 가득 배열하였다.
그리고 두광·신광의 선을 따라 구름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한 화불(化佛) 8구를 배열하였다.
두광·신광의 바깥에는 불꽃무늬를 묘사하고 가장 윗부분에는 삼존불 형태의 화불을 배치하였다.
이러한 형식의 광배는 9세기에 유행한 것이다.
대좌는 통일신라 시대에 가장 유행한 8각 삼단대좌(八角三段臺座)인데,
상대와 하대에는 연꽃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거의 원통형에 가까운 8각의 중대에는
구름무늬와 괴수문(怪獸文)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 전체적으로 화려하고 섬세한 특징을 보인다.
특히, 상대의 꽃무늬는 8세기의 연꽃과는 다른 섬세하고 화려한 것이다.
중대의 안상(眼象)에 부조된 상 역시 형태와 선에서 섬세함이 잘 표현되어 있다.
동화사 비로암의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불상과 관련된 사실이
비로암 삼층석탑 조성기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신라 말기 조각 양식의 편년에 절대적인 자료가 되는 귀중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동화사입구마애불좌상
동화사 봉황문 입구 주차장의 바른쪽에 있는 큰 암벽에 새겨진 불상이다.
이 불상은 상당히 높은 곳에 조각되어 있으며, 머리 위에는 바위가 튀어나와서 불상을 보호하고 있다.
섬세한 수법과 부드러운 감각, 자비로운 모습을 갖추고 있으며,
구름무늬의 대좌는 표현이 지극히 사실적이다. 신라 흥덕왕 때 심지가 조각한 것으로 전한다.
통일신라 시대의 마애불 좌상으로 현재 문화재 보물 제243호로 지정되어 있다. 불상의 높이 106cm,
머리와 상체는 도드라지게 새겼으나 대좌와 광배는 얕게 부각되어 있다.
소발(素髮)의 머리 위에 육계(肉髻)는 표현되지 않았다.
턱을 군살 지게 표현하여 얼굴은 비만하나 이목구비가 단정하여 중후한 인상을 풍긴다.
형식적으로 새긴 목에는 삼도(三道)가 뚜렷하며 어깨는 반듯하다.
그러나 신체에는 힘이 빠져서 8세기 불상에 보이던 생동감은 감소하였다.
얼굴은 약간 살이 찐 편으로 풍만하며 각이 진 넓은 어깨에는 통견의 법의를 걸쳤고
옷 주름은 좁은 간격으로 복잡하게 늘어져 있다.
특히 가슴 위로 보이는 대각선의 내의와 띠 매듭 등은
통일신라 말기 불상의 전형적인 법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두 손은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으며 앉아 있는 자세는 완전한 결가부좌의 모습이 아니라
오른쪽 다리를 대좌 위에 비스듬히 내려놓은 특이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광배는 2줄의 선으로 두광과 신광을 표현했으며 그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거신광의 윤곽선은 표현되지 않았다. 대좌는 앙련(仰蓮)과 복련(覆蓮)이 서로 맞붙어 있으며
이 연화대좌 밑으로는 구름무늬가 생동감 있게 표현되어 있어 마치 불상이 천상의 정토세계에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법의는 통견(通肩)이며, U자형으로 넓게 트인 가슴 사이로 군의(裙衣)의 띠 매듭이 노출되어 있다.
옷 주름은 좁은 간격의 평형으로 밀집한 옷자락 무늬로서,
이러한 옷 주름과 불의(佛衣) 형식은 9세기 불상에 흔히 나타나는 특징들이다.
팔각의 중대석(中臺石)에는 각 면에 두 개의 우주(隅柱 : 모서리 기둥)와
1구의 큼직한 안상(眼象)을 새겼는데 아래로 갈수록 너비가 넓어진다.
이러한 표현 방법은 올려다볼 때의 시각적 효과를 고려한 수법으로 보인다.
대좌는 왼쪽으로 비껴 날고 있는 구름 위에 둥실 떠 있으며,
운문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불상 전체에 생동감을 불어넣고 있다.
이 마애불상은 전반적으로 얕은 저부조로 표현되어 부드럽고 섬세한 조각기법을 보여 주고 있으나
얼굴의 굳어진 표정이나 비교적 경직된 어깨선, 장식적인 광배와 대좌의 표현 등은
통일신라 말기 불상에 나타나는 양식적 경향으로 대체로 9세기 후반에서 10세기 초의 작품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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