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거사불교의 효시 부설거사 이야기(1/2)

2016. 12. 15. 21:10붓다의 향기

한국 거사불교(居士佛敎)의 효시(嚆矢) 부설거사(浮雪居士) 이야기(1/2)

 

유마경에 보면 진심시도량(眞心是道場), 자비심시도량(慈悲心是道場), 보리심시도량(菩提心是道場) 이란 말이 있다.

진심이 도량이요, 자비심이 도량이요, 보리심이 도량이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불교의 바른 깨달음(正覺)을 성취하는 길에는 속()과 비속(卑俗)의 구별이 없고,

출가(出家)와 재가(在家)의 구별이 없다는 말이 된다.

사실 불교역사를 보면 재가불자들이 출가한 비구, 비구니나 보살들보다

더 높은 경지에 오른 사람들이 많은 것은 이를 증명한다.

그런 재가불자를 불교에서는 거사(居士)라 칭한다.

 


거사불교(居士佛敎)의 효시(嚆矢)를 말한다면

인도의 유마거사가 단연 으뜸이고, 중국의 방거사도 널리 회자하는 거사다.

우리나라에서는 윤필거사와 부설거사를 꼽지만,

윤필거사는 원효대사와 의상대사와 함께 관악산 삼막사에서 함께 수행한 분으로

야사에만 전할뿐 역사서에는 기록이 없다. 그 외에 한때 거사로 불린 사람들이 있다.

육조 혜능이 아직 출가하지 않고 황매산에서 쌀을 찧던 때 부용거사(負舂居士)로 불렸고,

 원효대사도 한때 파계(破戒)를 했을 때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 칭했지만

종국에 완전히 출가했기에 거사로 불리지 않고 두 분 모두 스님, 대사 등으로 불린다.


(유마거사)


@부설거사는 삼국시대 김제에서 활동한 승려로

성은 진(), 속명(俗名)은 광세(光世). 자는 의상(宜祥)이다.

부설(浮雪)은 그의 법명이다.



거사(居士)란 말의 시원을 잠시 살펴보면

(1)인도에서는 사성(四姓) 중 공(), ()에 종사하는 비사(毘舍) 종족의 부사를 가리키며

(2)중국에서는 학식과 도덕이 높으면서도 벼슬하지 않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며

(3) 불교에서는 보통 출가하지 않고 가정에 있으면서 불문(佛門)에 귀의한 남자를 말하며

여자는 여거사(女居士)라 칭하였다.

(4)우리나라에서는 남자가 죽은 뒤 그 법명아래 붙이는 칭호로 사용되기도 하며,

장군이나 귀인은 대거사, 사인(士人) 등은 거사라 하였으나 지금은 일반인에게도 두루 쓰인다.



부설거사는 경주 계림부(鷄林府) 출신으로 신라 선덕여왕 때 태어났다.

 20세가 되던 해에 불국사 원정선사(圓淨禪師)를 찾아가 오계(五戒)를 받고 출가하였다.

<부설전>이라는 승담전에 따르면 그는 다섯 살에 불국사 원정선사(圓淨禪師)의 제자가 되어

일곱 살에 이미 법문에 깊이 통달하였다고 한다. 불광대사전에는 15살에 출가한 것으로 나온다.

부설거사는 일찍부터 경학(經學) 경서에 눈을 떠 그 혜안이 밝았고 글도 잘 지었던 모양이다.


(변산반도의 운무)


부설은 그 후 도반인 영희(靈熙영조(靈照)와 함께 지리산과 천관산(天冠山능가산(楞伽山) 두류산 등에서

 10여년을 수행한 후에 문수도량(文殊道場)을 순례하기 위하여 오대산으로 가던 중,

전라북도 김제시 성덕면에 이르러 구무원(仇無寃)이라는 불교신자의 집에 머무르게 되었다.

당시 구무원에게는 나이 20세의 묘화(妙花)라는 무남독녀가 있었는데 말을 못 하는 벙어리였다.

이러한 묘화가 부설을 보더니 갑자기 말문이 터져 말을 하기 시작했다.



말문을 연 묘화는 부설 스님과는 전생(前生)에도 인연이 있었고,

금생(今生)에도 인연이 있으니 인과의 도리를 따르는 것이 바로 불법이라 하면서

전생과 금생 그리고 후생의 삼생연분(三生緣分)을 이제야 만났으니

죽기를 맹세하고 부설을 남편으로 섬기겠다고 하였다.

이 소리를 듣자 화들짝 놀란 부설은 승려의 본분을 들어

이는 계율에도 벗어나는 일이라 이를 받아드릴 수 없다고 거절했다.

묘화는 간청을 드리고 또 드렸지만 끝내 부설의 뜻을 꺾지 못하자 마지막 수단으로 자살을 시도하였다.

이에 놀란 부설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나로 인해 한 생명을 잃게 한다면 살생의 업을 짓고 도를 얻은 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큰 깨달음은 작은 절개에 구애되지 않는다(大悟不拘於小節) 는 말도 있지 않은가.

진정 이것이 나의 업이라면 받아드려야겠지.

중죄를 범하면 보리를 막는 줄만 알았지 여래께서 열어 두신

그 비결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只知犯重障菩提 不見如來開秘訣),

내 이제 이를 연()을 하여 그 비결의 과()을 구해보리라.

이렇게 마음이 정리되자 부설은 묘화의 청을 받아 드려 마을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정식으로 혼례식을 올렸다.



부설거사와 묘화 부인은 15년을 단란하게 살면서 아들 등운(登雲)과 딸 월명(月明)을 낳았다

 그리고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장성하자 부인에게 맡기고 초심으로 돌아가

백강 변에 초가를 짓고 참선을 하기 시작했는데,

이곳이 지금의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에 있는 망해사(望海寺)이다.


세월은 흘러 십여 년이 지났다. 보름달이 밝은 어느 가을날 십년 전에 헤어졌던 두 도반이 그의 집을 찾아왔다.

그 동안의 지난 일들을 이야기 하면서

  "우리 3인의 공부가 어느 정도의 경지에 와 있는지 시험하여 보자면서

3개에 물을 담아 보에 매달고 막대기로 때려서 깨뜨리기로 했다.


 

셋은 차례로 물병을 깨트렸다. 그런데 영희와 영조 두 분의 병은 깨어짐과 동시에 물이 땅으로 곧장 쏟아 내렸지만

부설거사의 병에 든 물은 병이 깨어져도 물은 쏟아지지 않고 허공에 고스란히 머물러 있었다.

재가자의 수행이 출가자보다 높았던 것이다.

기적 같은 이 사실에 두 분 스님은 자기들의 수행이 부설거사의 도력에 미치지 못함을 참회하며

그에게 가르침을 청하였다. 이때 설한 것이 <병쇄수현(甁碎水懸)이라고 한다.




신령스러운 빛이 홀로 나타나니 뿌리와 티끌을 멀리 벗어버리고

 몸에 본성의 진상이 삶과 죽음을 따라서 옮겨 흐르는 것은 병이 깨어져 부서지는 것과 같으며

진성은 본래 신통하고 영묘하여 밝음이 항상 머물러 있는 것은

 물이 공중에 매달려 있는 것과 마찬가지네. 그대들이 두루 높은 지식 있는 이를 찾아보았고

 오랫동안 총림에서 세월을 보냈는데 어찌하여 생과 멸을 자비심으로 돌보고 보호하며

진상을 삼고 환화를 공으로 하여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본성을 지키지 못하는가. 

 다가오는 업에 자유가 없음을 증험하고자 하니

 상심이 평등한가 평등하지 못한가를 알아야 한다오.

 그러나 오늘날 이미 그러하지 못하니 지난날의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자는 경계는 어디로 갔다는 것이며

함께 하리라는 맹세는 아득히 멀구료.

 


그들이 떠난 뒤 얼마 후 부설거사는 임종게(臨終偈)를 남기고 단정히 앉아서 입적(入寂)하였다.

부설거사의 입적 소식을 전해들은 두 도반 영희와 영조는 다시 돌아와 부설거사를 다비(茶毘)하여

거기서 나온 부설거사의 사리를 변산 묘적봉(妙寂峰) 남쪽에 안치하였다.

부설거사의 아들과 딸은 그 때 출가하여 수도자의 길을 걸었으며,

부인 묘화는 110세까지 살다가 죽기 전에 집을 보시하여 절을 만들었다고 한다.

부설거사에 관한 이와 같은 이야기는

조선 후기에 편찬한 영허대사집(暎虛大師集)안에 수록되어 있다.


 

@위의 글은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에서 인용 편집하였다.

부설거사(浮雪居士) 일가의 성도담(成道談)은 승전형식(僧傳形式)으로 소설화한 한문필사본 <부설전>이 남아 있다.

지방 유형문화재 제14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작자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이 책은 현재 변산 월명암(月明庵)에 소장되어 있다.


(월명암)

월명암은 691(신문왕 11) 부설(浮雪)거사가 창건한 절로

전라북도 부안군 산내면 중계리변산 쌍선봉(雙仙峰, 妙寂峰)에 있으며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인 선운사(禪雲寺)의 말사로 되어 있다.

조선 선조 때의 고승 진묵(震默)이 중창하여 17년 동안 머물면서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고,

1863(철종 14)성암(性庵)이 중건하였다.

1908년에 불탄 것을 1915년에 학명(鶴鳴)이 중건하였고,

1956년에는 원경(圓鏡)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국에서 몇 안 되는 산상무쟁처(山上無諍處)의 한 곳으로

 대둔산 태고사(太古寺), 백암산 운문암(雲門庵)과 함께 호남지방의 3대 영지(靈地)로 손꼽히는 곳이며,

봉래선원(鳳萊禪院)이 있어서 근대의 고승인 행암(行庵용성(龍城고암(古庵해안(海眼소공(簫空) 등이

수도한 참선도량으로 유명하다.

@산상무쟁처(山上無諍處)의 무쟁처(無諍處)는 적정처(寂靜處)와 같은 의미로,

수행하기 좋은 곳으로 일체번뇌를 끊어버리고 안주(安住)할 근거가 되는 사찰을 의미한다.


1부에 이어 2부에서 부설거사의 오도송을 비롯하여 그의 시문을 소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