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락을 찾는가?

2016. 12. 21. 20:25붓다의 향기




극락을 찾는가?


영원불변의 이 절대영역은

나의 세계다.

나의 이 세계에 온 사람은 다시는 되돌아가지 않는다.

삶과 죽음이 반복되는

이 물질의 차원으로 다시는 되돌아가지 않는다.

<바가바 기따 제 85-21>

 

깨달음을 얻겠다고, 영생을 얻겠다고, 사람들은 산으로 들로 헤매고 있다.

갖은 고행과 자기 학대를 해가며....그렇다면 도대체 깨달음을 얻어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영생불멸을 얻어서 어쩌자는 것인가....두렵기 때문이다.

검은 보자기를 뒤집어쓰고 다가오는 손님(죽음)이 두렵기 때문이다.

저 칠흑의 심연이 두려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죽음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죽음이 없는,

그리하여 빛만이 있는 한 세계를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천국에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저 바다에는 쉴새없이 파도가 일고 있다. 파도가 허연 갈기를 휘날리며 달려와서는 이내 부서져 버린다.

그러나 부서진 파도의 뒤를 이어 또 다른 파도가 힘차게 달려온다.

와서는 역시 산산조각 부서져 버리고 만다.

그렇다면 그 부서진 파도는 어디로 갔는가... 가긴 어디로 간단 말인가.

바닷물 전체가 그대로 파도인 것을. 파도 전체가 그대로 바닷물인 것을.


 

나고 죽음이 반복되는 이 덧없는 삶이란 어디로부터 비롯되었는가.

나고 죽음이 없는 저 <영원한 세계>로부터 비롯되었다.

빛만이 있는 저 영원한 세계가 굽이치니 무수한 파도가 나타나더라.

무수한 파도가 갈기를 날리며 나타나더라. 파도, 부서지니 다시 저 영원한 세계이더라.

이 누리 온통 <영원한 빛>밖에 없더라.

그러므로 그대여, 물질이니 정신이니 삶이니 죽음이니 이런 당파적인 생각을 버려야 한다.

그래야만 저 <영원한 세계> 그 자체로 굽이칠 수 있는 것이다.

 

<>이면 어떻고, <죽음>이면 또 어떤가. <물질>이라면 어떻고 <정신>이면 또 어떤가....굽이 칠 일이다.

그 눈빛이 시퍼렇게 살아서 그냥 굽이칠 일이다. 물질이면 물질인 대로, 정신이면 정신인 대로,

또 삶이면 삶인 대로, 그리고 죽음이면 또 죽음인 대로....

이곳이야말로 힘차게 살아서 굽이치는, 이곳이야말로 저 영원한 나라의 소식이 아니겠는가.

~석지현 /세속에서 깨닫는 길에서~



아시는가 벽암록(碧巖錄)의 이 말.

生也全機現(생야전기현) 死也全機現(사야전기현)

 

맹수의 왕인 사자도 토끼 한 마리 잡을 때 온 정신을 집중한다.

삶도 온 몸으로 살고, 죽음도 온 몸으로 그렇게 받아 드려라는 의미다.

죽음이 두려워 극락을 찾지만, 삶과 죽음이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파도가 바닷물이듯, 바닷물이 파도이듯

삶과 죽음도 불이(不異), 불이(不二).

둘이 다르지도 않고 둘이 하나도 아니다.

이 말을 깊이 새겨야 한다.

 

자동차의 부품이 모여 하나의 자동차가 되지만 삶은 그렇지 않다.

삶은 부분이 모여 전체가 되는 것이 아니다. 착각하지 말라.

생의 끝이 죽음이 아니고, 죽음의 끝이 생이 아니다.

감정이 개입되는 순간 단순한 것도 복잡해진다.

놓아야 한다. 놓아버려야 한다.

 

생야전기현(生也全機現) 사야전기현(死也全機現)이라면

삶인들 죽음인들 무슨 의미를 찾을 것이며

천당과 극락이 어디에 있을 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지금 여기 바로 이 순간> 새벽같이 깨어나 굽이치는 삶이 있을 뿐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