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 자유인 포대화상(布袋和尙)

2014. 5. 25. 08:47붓다의 향기

 

(보국사 포대화상)

 

대 자유인 포대화상(布袋和尙)

많은 불상(佛像) 중에서도 흔하지는 않지만 우스꽝스러운, 별난 스님이 있다.

남산만큼 커다란 배를 드러내고

그것도 배꼽까지 드러내고 발우와 포대자루를 지고 웃고 있는 스님,

정통사찰의 엄숙한 분위기와는 다른 표정을 짓고 있는 보살, 바로 포대화상이란 스님이다.

 

포대화상은 불교설화에 가공된 인물이 아니라 역사적인 인물이다. 포대화상의 이름은 계차(契此)이고

절강성(浙江省) 명주(明州) 봉화현(奉化縣) 사람이라고 한다. 일찍이 절강성 악림사(岳林寺)에 출가하여

서달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으며 호는 정응대사(定應大師)다,

사람들은 그를 장정자(長汀子), 또는 서달 포대화상이라 불렀으며 줄여서 포대사(布袋師)라고도 불렀다.

장정(長汀)이란 긴 진흙 수렁을 말하는 데 포대화상은 두서없이 아무 말이나 잘 지껄이며 다녔기에

사람들이 붙인 별호이며, 또 포대화상(布袋)이라 불린 것은

뚱뚱한 몸집에 항상 웃는 얼굴로

풍선처럼 늘어져 배로, 다닐 때는 늘 지팡이 끝에 커다란 자루(포대)를 늘 둘러메고 다녔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소림사 포대화상)

 

포대화상은 항상 웃는 얼굴이라 보기만 해도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기 때문에

포대화상 곁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몰렸으며 특히 아이들이 많이 따라 다녔다고 한다.

장정자(長汀子)라 불리듯 말이 일정치 않고 허드레 같은 말로 아무 말이나 늘어놓기도 하며

길을 가다 피곤하면 장소를 따지지 않고 어디서라도 잠을 잤다고 한다.

심지어는 엄동설한(嚴冬雪寒)에도 눈 위에서 포대자루를 베게삼아 잠을 잤다고 한다.

또한 포대화상은 무엇이든 주는 대로 거절하지 않고 받아 포대자루에 담아서 다녔고,

땅을 집으로 삼고, 하늘을 이불로 삼고서 어느 곳에서든지 벌렁 벌렁 드러누워 태평하게 코를 골며

자기도 하며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면서 세속 사람들과 같이 거리낌 없이 어울리면서

부처의 가르침을 폈다고 한다. 불교에서 흔히 말하는 모든 것을 다 놓아버린

무애(無碍)한 삶을 살다가 입적하신 스님이라 할 수 있다.

 

(비취 포대화상)

 

포대화상의 입상을 보면 언제나 지팡이에 큰 자루를 지니고 다녔는데 그 포대 속에는

아이들에게 나누어 줄 먹꺼리나 노리개 등 장난감들이 가득히 들어있었다고 한다.

마을을 돌면서 아이들과 함께 천진하게 놀면서 기쁘게 그것들을 나누어 주었다.

이는 표면적인 현상이지만 그 내면을 고찰한다면 포대화상이 탁발을 하여 받은 공양물을

포대자루에 담았다가 나누어 주는 것은 곧 세상의 슬픔을 거두어 행복으로 나누어 주는 것을 의미한다.

중생의 번뇌와 고통을 받아서 자루에 담고, 대신 포대에서 꺼내어 나누어 주는 것은

웃음과 기쁨, 희망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가 메고 다니는 포대 속에는 공양물이 아니라

중생들로부터 거두어들인 인간들의 고통과 번뇌, 괴로움이 담겨있고

또 다시 중생들에게 돌려줄 희망과 구원의 메시지가 함께 들어있는 것을 상징한 것이다.

 

 

(도선사 포대화상 배꼽을 시계방향으로 만지면 복이 온다고 해서..)

 

 

그는 약간 우스꽝스러운 행동도 했지만 실은 길흉화복과 천기에도 해박했던 모양이다.

일례로 마을 사람들이 포대화상이 나막신을 신고 나타나면 비가 올 것으로 예상하고

짚신을 신고 나타나면 비가 곧 개일 것을 알고 대비했다고 한다.

불광사 <불교대사전>에 이른 일화가 있다.

『하루는 포대화상이 탁발을 하기 위해 길을 나섰는데 앞에 스님 한분이 걸어가고 있었다.

포대화상은 말없이 졸졸 그 스님 뒤를 따라갔다. 이상하게 생각한 스님(僧)은 뒤 따라오는 사람이

누구인가 하고 돌아보았다. 스님이 고개를 돌리자 포대화상은

⌜나에게 한 푼 공양해주세요.⌟ 하고 바로 말을 건넸다.

탁발은 스님이 일반 중생들에게 하는 것인데 스님에게 공양을 하라하니 스님은 기가 찼다.

그러나 참 별난 놈이라 생각했다가 호기심도 나고 해서 어떤 근기인지를 알고 싶어졌다.

그래서 스님이 물었다. ⌜도를 얻었으면 주겠다.⌟ 승복을 입고 공양을 청했으니

밥값은 할 수 있느냐는 의미다. 그러자 포대화상은 말없이 두 손만 합장(叉手)하고 섰다.

무언가 한 소식을 한 사람 같기고 하고 아닌 것같기도 하고.. 해서 스님이 다시 물었다.

그 스님은 그 지역에서 잘 알려진 보복화상(保福和尙)이라 불리던 스님이었다. 스님이 묻기를

⌜무엇이 불법의 대의(大義)인가?⌟ 그러자 포대화상은 그 질문에 답을 하는 대신 지고 있던

포대자루를 던져버렸다. 스님이 묻기를

⌜벼(공양물)를 이같이 취급하니 다시 향상사(向上事)가 있겠는가⌟ 하니

화상은 말없이 벗어 놓은 포대자루를 다시 매고 가버렸다고 한다.

 

(삼각산 승가사 포대화상)

 

향상사(向上事)란 흔희 조사들이 말하는 말언일구(末言一句)인 셈이다. 부처의 근본 도리가 무엇인가,

부처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공양으로 받은 포대자루를 던져 버렸으니

이는 죽음도 괘의치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 것이다.

그러자 스님이 생사를 버리면 한 소식(깨달음)을 어찌 얻은 수 있겠는가 하고 되받아 물은 것이다.

다시 말해 生도 死도 모든 것을 다 버리면 그 다음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하는 의미다.

모든 것이 無요, 空이라면 불법의 참 뜻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질문을 암시한 것이다.

이 질문에 포대화상이 다시 내려놓은 포대자루를 지고 갔다는 것은 곧 활공(活空)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조주록에 나오는 방하착의 이야기와도 일맥상통한 이야기다.

 

「엄양이 조주에게 “한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았을 때에 어떠합니까?」 하니,

조주가 「방하착(放下着)하라」고 했다.

“방하착(放下着)” 이란 말은 “내려놓아라! 라는 의미다.

그러자 엄양이 「한 물건도 가져오지 않았는데 무엇을 방하(放下)합니까?」 하니,

조주가 「그러면 지고 가거라.」라고 하는 화두가 있다.

 

이 이야기는 불광사의 <불교대사전>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이를 각색한 이야기가 인터넷에 떠돌고 있다.

물론 출처를 알 수 없지만 내용이 그럴듯하여 소개한다.

 

(운남성의 까폐의 전시된 포대화상)

 

늘 포대자루를 지고 다니며 어린아이들과 놀기를 좋아하는 포대화상에게 마을 사람이 물었다.

「「스님! 우리는 스님이 매우 높은 깨달음에 도달하신 훌륭한 스님이라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장난스러운 행동은 저희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가 없습니다.

어찌하여 불법은 이야기 하지 않고 고작 아이들과 노는 데만 열중하십니까?

정말 스님께서 선(禪)에 통달 하셨다면 저회들에게 선의 진수를 보여 주십시오.」

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포대화상은 지고 있던 자신의 포대자루를 땅바닥에다 쿵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고는 이렇게 말했다. 「이것이다! 이것이 선의 진수이다! 」

사람들이 무슨 뜻인지 모르고 어안이 벙벙하여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있자,

포대화상은 이렇게 들려주었다.


(보타산 보타강사의 포대화상)


「이것이 내가 보여 주고자 하는 전부이다. 내가 짐을 내려놓았듯이 그대들도 자신의 짐을 벗도록 하라」

 그러자 사람들이 되 물었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러자 포대화상은 아무 말 없이 벗어놓은 포대자루를 다시 걸머지고는 발길을 돌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것이 바로 그 다음 일이다. 그러나 나는 짐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 짐이 나의 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제 나에게 이 세상의 모든 짐들은 단지 어린이들을 위한 장난감이 되어 버렸다.」

내려놓는다는 것은 번뇌, 망상의 온갖 알음알이를 말하고,

 어린이의 장난감이라는 것은 업이 빚어 낸 인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런 깊은 이치를 쉽게 가르쳤지만 포대화상은 때로는 사람들에게 미친 사람으로 취급 받기도 하고,

짓궂은 아이들에게는 막대기로 얻어맞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는 늘 웃음으로 받아넘겼다고 한다.

 

(보국사 포대화상)

 

 지금까지 포대화상의 작품으로 알려진 글로는 4개의 시가 전해오고 있다.

 

 

一鉢千家飯

발우 하나로 천 집의 밥을 먹고

孤身萬里遊

외로운 몸 만리에 노닌다.

靑目覩人少

여래의(청목) 눈에는 인간사 잠간이요

問路白雲頭

길을 물으니 백운의 끝이더라.

 

(도선사 포대화상)

 

騰騰自在無所爲(등등자재무소위)

늠름하고 자재하여 하는 일 없으니

閑閑究竟出家兒(등등구경출가아)

한가롭고 한가로워 출가한 장부일세.

若覩目前眞大道(약도목전진대도)

눈앞에 참된 도를 본다 하여도

不見 纖也大毫奇(불견섬야대호기)

티끌만큼도 기이하게 여기지 않으리.

 

 

 我有一包袋(아유일포대)

나에게 한 포대가 있으니

虛空無罣碍(허공무가애)

허공에도 걸림이 없어라

展開邊宇宙(전개변우주)

열어서 펴면 우주에 두루 하고

入時觀自在(입시관자재)

들어가도 걸림(자재)이 없네.

 

 

彌勒眞彌勒(미륵진미륵)

미륵이여 참 미륵이여

分身千百億(분신천백억)

천백 억의 몸으로 나투어

時時示時人(시시시시인)

때때로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었으나

時人自不識(시인자불식)

세상 사람들은 스스로 알지 못하더라.

 

마지막 이 게송은 열반송인가 보다.

<천백 억으로 몸을 나투어 보여도 드러낸 모든 분신(分身)이 하나같이 진실로 참 미륵이구나.

항상 세인에게 여러 몸으로 나타나 보여주지만 아무도 미륵임을 아는 이 없구나. >라는

이 게송을 남기고 후양(後梁) 정명(貞明) 3년(917년) 절강성(浙江省) 명주 악림사(岳林寺)에 있는

한 반석 위에 단정히 않은 채로 입적하였다.

 

(귀주 용천선사의 포대화상)

 

사람들은 이 마지막 게송을 듣고 포대화상이 미륵보살의 화현(化現)임을 알고 그의 모습을 그려서 존경하고

받들어 모시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현재 중국 사찰에서는 포대화상의 형상을

미륵불로서 많이 모시고 있는데 특히 절강성 악림사 입구에 있는 참선의 자세로 크게 웃고 있는

포대화상의 형상이 유명하다. 소불이며 미륵보살의 화신으로 모셔진 포대화상 입상 곁에는

<(포대화상의)배는 천하의 품기 어려운 일도 다 포용할 수 있고 늘 웃는 그 입은

세상의 가소로운 인간을 비웃는구나>

라는 글을 두고 있다고 하며 지금도 악림사(岳林寺)의 동당(東堂)에는

그의 전신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한다.

 

일설에는 사후에도 다른 지역에 같은 모습으로 환생하여 돌아다녔다고 한다.

마치 달마대사가 죽은 후 짚세기 한 짝만 걸치고 다녔다는 이야기와 같이.

 

(복건성 남보타사)

 

포대화상은 우리나라 전통 사찰에서는 쉽게 볼 수는 없지만

근간에 들어 포대화상에 대한 신앙과 함께 기복적인 이유에 의해 포대화상을 그린 그림이나 조각이 많이 유행하고 있는데

이는 모두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중국에서는 우리나라와 달리 포대화상이 늘 웃는 모습으로

복을 주는 소불(笑佛)이라 칭하며 미륵보살의 화신(化身)으로 숭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무풍선처럼 늘어난 포대화상의 큰 배(腹)는 행복, 행운, 풍요를 상징한다고 여기며

 넓은 포용성과 자비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一笑空中色是空(일공중색시공)

如斯之爲空乎色(여사지위공호색)

是色是空說不窮(시색시공설불궁)

相俱無眼界中(상구무안계중)

공 가운데 색 이것을 공이라 하고

공 가운데 색 이것을 색이라 하니 웃을 일이로다

이것이 색이요, 이것이 공이라 설함은 모두가 끝이 없으니

(공과 색)모두가 눈앞에(알음알이의 세계) 있는 것이 아니다.

 

이 게송 또한 포대화상의 말이다. 한 평생 무애(無碍)한 삶을 살다가 간 포대화상처럼

우리도 그리 살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흐르는 물처럼, 티 없는 푸른 하늘처럼 살다가 간 스님,

진정 대 자유인이요 대 해탈한 스님이 아닐까.

이전투구(泥田鬪狗)에 긴 하루를 보내고 있는 이 사바의 중생을 위하여

포대화상이 미륵보살이 되어 다시 재림하기를 기원해 본다.

 

(와우정사의 동자승)

 

산기슭 한 뙈기 쓸모없는 밭을

두 손 모아 쥐고 공손히 늙은이에게 물었더니

몇 번이고 팔았다가 다시 사들인 것은

송죽의 맑은 바람이 좋아서란다.

 

山前一片閑田地 叉手叮嚀問祖翁

幾度賣來還自買 爲憐松竹引淸風

~오조법연(五祖法演: ~1104)~

 

 

                                                                     

                                                                                 흐르는 곡: 깊은 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