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관촉사 은진 미륵불

2013. 3. 20. 23:12문화재

 

 

 

(국보 제323호, 2018년 지정) 

논산 관촉사 은진 미륵불

 

이른 일요일 아침, 오후에 비 소식은 있었지만 무작정 논산으로 향했다.

요즘의 날씨만큼 흐린 마음 탓일까. 도화살이 뻐친탓일까.

동서울터미날에서 홀로 논산행 첫차를 타니 2시간 반 정도 걸렸다.

 첫차라서 그런가 버스는 반도 차지 않았다. 관촉사는 터미날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터미널에서 약 20분 정도 거리. 시내버스도 20분 정도로 운행되고 있었다.

돌아와 생각하니 사실 은진 미륵불에 대해서는 옛날 들어보았지만

관촉사라는 절을 찿아 간다는 것은 무슨 홍두깨같은 생각이었다.

그리 알려진 사찰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절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은진미륵불의 가호가 아닐까.

 

사찰 안내서도 그래서 그런지 그 사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고려 말 목은 이색(1328~1396)이 남긴 시와

조선 중엽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의 ‘은진(恩津) 불우조(佛宇條)’에서 관련된 기록을 볼 수 있다.

보다 자세한 연혁은 1743년(영조19년) 경내에 세워진 <관촉사사적비명>에 들어 있다.

그러나 이들 기록도 석조보살입상에 대한 이야기로 일관할 뿐 사찰 창건에 관한 언급은 거의 없다.

 

그렇다고 창건에 대한 유추가 완전히 불가능한 이야기만은 아니고

은진미륵이 968년 (고려 광종19년)에 조성되기 시작했으므로 적어도 이 무렵부터 사찰이 존재했다고 불 수 있다.

 

관촉사가 역사의 무대에 자신을 드러낸 것은 석조미륵보살입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

 

 

 

날은 흐리고 사찰은 단청을 새로 칠하려는지, 요사체를 늘이는 것인지 공사 중이라 어수선했다.

딱히 눈여겨 볼 것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미륵불의 미소는 밝았다.

천진한 듯 소탈한 그 맑은 미소. 그 미소를 따라 미륵의 화림원을 꿈꾸며 걸어 보았다.

중생의 이 흐린 마음을 미륵불의 가피로 맑아지길 합장드리며...

 

 

 

 

 

 일주문을 가는 길에 제일 먼저 이 조각상이 눈에 들어온다.

조금 조잡하기는 하지만 이 형상이 바로 밀교의 HUM의 진리를 도식한 상징에서 비롯된 것임을 바로 느껴졌다.

 

<옴마니 밤메훔>이라는 6자 광명진언을 도식(圖式)한 이것은

특히 밀교(密敎)에서 부처와 진리를 상징하는  도식인데

아래에서부터 형상을 보면 사각형, 원, 원추꼴, 초생달형, 그리고 불꽃형으로 되어있다.

 많은 의미가 있지만 한두 가지만 보면 지수화풍공(地水火風空)의 5대를 상징하며

또 위로부터 선정불인 대일여래, 거울과 같은 지혜를 가진 아촉여래,

 촉각(觸角)의 총체를 상징하는 보성여래, 식별하는 지혜를 상징하는 무량수여래,

모든 것을 성취하는 것을 상징하는 불공성취여래,

그리고 이들 5부처의 총체적 의미를 나타내는 것을 상징한다.

 

 

 

 

관촉사 일주문이다. 일주문의 경계는 바로 속(俗)과 비속(卑俗)인데

 

관촉사 일주문 안은 천왕문까지 상점과 마을이 들어서 있다.

 

부처와 중생이 불이(不二)이기 때문일까?

 

 

 

천왕문이다. 천왕문 바로 앞에 부처만큼 나이드신 할배 한분이 매표를 하고 있었다.

 

사천왕이 표 검수를 하듯 눈을 부릅뜨고 지키고 계신다. 

 

 

 

 

 

 

 

 

관촉사(爟燭寺)의 사명유래

미륵불상(佛像)이 완성된 지 21일이 되자 37일 동안 백호 미간에서 서기(瑞氣)가 뿜어져 나왔는데

 중국 송나라 때 지안이라는 대사가 그 서기(瑞氣)를 보고 그 서기를 따라 이곳에 내려와서 불상에 참배하고

중국 기주 땅에 큰 불상이 있는데 동쪽을 향하여 서 있으며

그 광채가 때를 같이하여 서로 응하니 이로부터 관촉사라고 명명한다고 했다.

 

 

 

 

사천왕문을 지나면 명곡루다. 무슨 요사체인가 했더니 명곡루다. 현판이 뒤에 있었다.

 

 

돌을 쌓아 담을 만들었다. 산사의 고즈넉한 맛을 느끼며 명곡루를 들어선다.

 

 

 

 

 

대광명전이다. 공사중인 모양이다. 어수선하다.

대광명전(大光明殿)은 대적광전(大寂光殿), 비로전(毘盧殿), 화엄전(華嚴殿)등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대적광전은 연화장세계(蓮花藏世界;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연꽃으로

 壯嚴(장엄)된 세계)의 교주인 비로자나불을 본존불로 모신 법당이다.

 

 

 

 

 

  (법당 앞의 주련들)

<대적광전> <대광명전>이라고 할 때는 삼신불(노사나불, 비로자나불,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것이 보통이고,

 <비로전> <화엄전> 안에는 비로자나불 한 분만을 모시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적광전 안에 봉안되는 삼신불로는 비로자나불, 아미타불, 석가모니불을 봉안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선종의 삼신설에 따라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원만보신 노사나불,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의 삼신을 봉안하는 경우가 많다.

 

 

 

지혜의 광명(光明)을 태양의 혁혁(赫赫)한 광명에 비유하여 대광명(大光明)이라 한다.

 태양의 광명이 널리 시방세계를 비추는 것과 같이 불지(佛智)의 광명은

능히 삼세(三世)시방(十方)을 두루 비추는 까닭에 이렇게 이름한다.

 

 

 

석가여래가 과거 염부제의 국왕이 되었을 때 대광명왕이라 일컬었는데

관촉사의 주불은 수인이 지권인을 한 것으로 보아 비로자나불 즉 대일여래를 모신 전각인 것이다.

 

 

 

대광명전은 2층 건물로 1층은 정면 5칸, 측면 4칸, 2층은 각각 3칸, 2칸을 이루고 있는 구조로

 안팎이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다.

또 하나의 특징은 밖에선 2층이나 안에서 보면 통층(通層)으로 되어있다.  

 

 

   

 

윤장대

한 바퀴 돌리면 경전을 한번 독송한 것과 같은 공덕을 지녔다는 윤장대는

업장소멸사상과 함께 요즘 여려 사찰에서 자주 보인다.

관촉사 윤장대도 최근에 만들어진 시설물인 모양이다.

 

 

미륵전(彌勒殿)

석조대 미륵보살 입상 정면에 위치하고 있다.

장대석(長臺石)으로 쌓은 석조기단 위에 주초석을 놓고 원형기둥을 사용하여

 정면 4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의 건물로 동남향으로 세워져있다.

오늘 쪽에는 신중탱화가 모셔져 있다.

건물 내부는 따로 부처를 모시지 않고 모두 우물마루를 깔았고

뒤편에 불단을 조성하여 좌우에 인등을 안치하였으며,

북벽 전체에 유리창을 설치하여 미륵전 안에서 미륵보살입상을 보면서 예불을 올릴 수 있도록 하였다.

 

 

                                  뒤에서 본 미륵전. 앞의 석탑이 있고 그 앞에 미륵불이 있다.

 

 

 

 

 

 

 

 

 

 

 

 

범종에는 비천상을 암각했다.  

 

 

 

반향의 울림을 높이기 위해 법종 밑에는 이런 구멍을 만들어 두는 것이 상례다.

 

 

미륵불상 앞의 전경이다.

 

 

삼성각

 

 

관촉사 석탑(石塔)

미륵전과 석등 사이에 있는 석탑의 높이는 3.43m로 고려시대에 조성된 석탑으로

지금은 4층이지만 원래는 5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2018년 국보 제323호로 승격되었다.) 

 

 

미륵불조성경위

보물 제 218호 지정된 관촉사(爟燭寺) 석조(石造)미륵보살(彌勒菩薩) 입상(立像)은

논산시 관촉동 반야산 중턱인 경내에 모셔져 있다.

 

 

 

조선 영조17년(1743)에 세워진 관촉사(爟燭寺)사적비에 의하면

고려 광종19년(968) 충청도 은진(恩津) 땅에 반약산(盤藥山 지금의 반야산)에

고사리를 뜯던 두 아낙네 어디선가 아기 우는 소리가 들려 그곳으로 가보니

 커다란 바위가 솟아올랐다고 한다. 괴이한 이 광경을 보고 놀란 아낙네는

 집으로 돌아와 가족에게 이야기 하자 사위가 이 사실을 관가에 보고 하게 되었고

마침내 황제의 귀에 들어가자 황제는 이는 하늘에서 불상을 조성하라고 내린 보낸 바위라 결론짓고

혜명대사에게 명하여 100여명의 석공과 더불어 37년의 공사 끝에 목종3년(1006년) 완공했다고 한다. 

 

 

 

 

화강암으로 조성 된 미륵불은 관촉사사적비에 의하면

신장은 55척5촌, 몸 둘레는 30척, 귀의 길이는 9척, 미간은 6척,

입의 크기는 3척 5촌, 화광이 5척, 갓높이가 8척, 갓의 큰 도래가 각각 11척,

작은 도래가 각각 6척 5촌, 연꽃 대궁이 11척으로 황금으로 도금하고 혹은 자금으로 장식했다고 한다.

(척(尺)은 촌(寸)의 10배이며, 척은 1m의 1/3에 해당한다.) 

 

 

 

미륵불(彌勒佛)은 메시아로서 널리 알려진 미래불(未來佛)이다. 

범어로는 Maitreya. 자씨(慈氏)라 번역한다.

이름은 아일다(阿逸多) 번역하여 무능성(無能勝) 이라 하고

혹은 아일다(阿逸多)가 성(姓)이고 미륵(彌勒)이 이름이라고 한다. 

 

 

 

부처보다 먼저 입멸(入滅)하여 도솔천 내원(內院)에 태어나서

 사천세(인간수명으로는 56억7천만년에 해당)를 지난 뒤

인간에 하생하여 화림원(華林園), 용화수(龍華樹) 아래서 정각을 성취할 것으로 수기된 보살이다.

미륵이 때로는 보살로, 때로는 불(佛)로 불리게 되는 것은 미륵이 도솔천을 주재하고

그 곳에서 항상 설법하고 있는 입장으로 볼 때는 미륵보살이라 부르는 것이 타당하고,

 또 그의 하생(下生)의 입장에서 보면 미륵불이 되기 때문이다

 

 

 

사회가 불안할 때는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지상 낙원의 세계를 꿈꾸게 된다.

이러한 혁명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 알맞은 복음적인 부처님이 바로 미륵불이다.

후삼국 시대의 궁예가 스스로를 미륵이라 자칭한 것은 그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미륵불은 석가모니불이 미처 제도하지 못한 중생들을 모두 구제하기 위하여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이 약속된 보살이며 이 불(佛)이 봉안된 불전을 용화전(龍華殿)이라고 부른다. 

세월 탓인지, 관리가 안 된 것인지 국보로 지정된 은진미륵불의 파손이 안스럽다. 

 

 

관촉사 은진미륵불의 수인(手印) 

손에 지팡이나, 꽃등을 들고 있는 것을 계인(契印) 혹은 인계(印契)라고 하며,

아무런 것을 들고 있지 않은 것을 수인(手印)이라고 분리한다.

우리나라 불상에서 대표적인 계인으로는 지팡이를 든 지장보살,

수인으로는 부처님의 항마지인(降魔指因), 비로자나불의 지권인(智拳印) 등인데

 은진의 미륵불은 꽃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본다면 계인에 속한다고 불 수 있는 데 그 수인은 좀 특이하다.

 

 

 

 

불교에서 인(印)은 인계(印契), 인상(印相), 계인(契印) 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지두(指頭)를 사용하여 각가지 형(形)을 만들어 법덕(法德)의 표지를 삼는 것이다.

소지(小指)부터 차례로 세어서 대지(大指)에 이르며 이는 지수화풍공(地水火風空)의 5대가 되며

또는 좌수(左手)는 정(定)이 되고 우수(右手) 혜(慧)가 된다.

이 좌우의 십지(十指)는 갖가지 인상(印相)이 된다.   

 

 

밑에서 처다보면 보탑의 균열을 보수한 부분이 보인다.

이는 고려 제8대 현종(顯宗 재위1009~1031년) 때 거란의 침입하자

강조에게 30만 대군으로 이를 방어하게 하였으나 실패하여 나주로 몽진(蒙塵)을 떠난 비참한 역사가 있다.

추격하는 거란군은 막강했으나 강을 만나자 물길에 익숙치 못해 발이 묶였다.

그때 강 하구 쪽에서 갓을 쓴 선비 한분이 바지를 걷어 올리고 훌훌 강을 건너고 있었다.

이를 본 거란 장수는 옳다구나 하고 군사들에게 그곳으로 도강(渡江)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그 곳으로 들어간 군사는 모두 강물에 빠져 익사했다고 했다.

장수는 속은 것이 화가 나서 그 선비를 잡아 칼로 베었는데 선비는 어디로 사라지고

한 귀퉁이가 잘려 진 빈 갓만 덩그런 히 남았다고 한다.

그 선비가 바로 나라를 구하기 위해 화신한 미륵보살이라고 한다.

 관촉사 은진미륵의 보관을 보면 잘려진 곳을 이어붙인 곳이

그때의 거란장수의 칼부림으로 잘려진 갓이 바로 미륵보살의 보관이라고 한다.

 

 

 

 

 

 

 

 

 

 

 

 

 

 

 

관촉사 사적비(事蹟碑)

관촉사 경내 미륵보살 입상의 좌측에 세워져 있다.

비의 측면에 관촉사(爟燭寺)사적명(事蹟銘)이라 큰 글씨로 새겨 있고

 비문 내용은 석불을 조성하게 된 경위와 오랑캐가 쳐들어왔을 때

스님으로 화신하여 나라를 구한 일, 후일에 석불과 절 주변을 보수 정비한 내용 등이 새겨져 있다.

 

 

 

 

 

 

 

 

석조불단(石造佛壇))

미륵보살 입상 바로 정면에 설치된 석조불단은 전체길이730cm, 높이 94cm, 폭이 100cm이다.

이 불단은 제작수법으로 보아 창건 당시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옆으로 긴 형태로 설치된 것으로 다른 곳에서는 보기 드문 특이한 시설물이다.

지대석과 면석, 갑석으로 구성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