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 (安東 法興寺址 七層塼塔)

2018. 4. 27. 20:49문화재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 (安東 法興寺址 七層塼塔)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전탑(塼塔)은 모두 5기로 석탑이나 목조탑보다 현저히 적은 숫자다.

그 중 2기는 칠곡의 송림사 5층 전탑(보물제 189, 통일신라. 높이 16.13m)

현존 유일의 고려시대 전탑으로 알려진 여주 신륵사의 다층 전탑(보물226. 높이 9.4m ) 이고,

나머지 3기는 모두 안동시에 있다. 안동에 있는 전탑들은 모두 제작 시기가 통일신라로 확인되고 있으며,

안동 일직면 조탑리 5층 전탑(보물 제57. 높이 8.35m),

안동 동부동 5층 전탑(보물제 56. 높이 8.8m)

안동 법흥사지 칠 층 전탑으로

법흥사 7층 전탑은 현존하는 5기 중 가장 오래되고 가장 높은 전탑(塼塔)으로 알려져 있다.

 

 

 

 

@전탑은 처음 인도에서 시작하여 불교의 전파와 함께 중국에 전해져서

정광(正光) 4(523)의 축조로 전하는 숭악사(嵩岳寺) 1215층 탑을 최고(最古)로 여기고 있다.

()은 중국사람들이 즐겨 사용하던 건축자재로서 탑뿐 아니라

다른 지상의 건조물은 물론 지하에 축조하는 분묘에까지 이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일찍부터 전()을 건조물에 이용하여 522년에 죽은

백제 무령왕의 능이 연화문으로 장식된 전으로 축조되었고,

 인접한 곳에서도 문양전(文樣塼)으로 축조한 분묘가 또 발견되었으나 전탑은 건조된 흔적이 없다.

신라에서는 634(선덕여왕 3)에 축성된 분황사(芬皇寺)에 석재를 이용한 모전석탑이 있는 점으로 보아

그 이전에 이미 전탑이 건립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통일신라 시대와 고려 시대에도 건립되었으며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는

다양한 색상으로 각종의 문양을 표현한 건조물까지 출현하였으나,

현재까지는 남아 있는 전축 고분은 백제의 두 가지 예가 있을 뿐이고,

전탑도 고려 시대의 한가지 예를 끝으로 더 유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석재를 이용한 모전석탑이 오히려 성행한 점은

우리나라 국민의 전재(塼材)에 대한 기호의 정도를 말하는 듯하다.

 

 

 

@안동 법흥사지 7층 전탑은 국보 제16, 높이 17m, 기단 폭 7.75m

19621220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전탑이란 흙으로 만든 벽돌을 이용하여 쌓아 올린 탑을 말한다.

안동 법흥사지 7층 전탑은 통일신라 시대에 창건된 법흥사에 속해 있던 탑으로 추정되나,

지금은 탑 주위에 민가와 철도가 들어서 있어 사찰의 위치를 정확히 확인할 수 없다.

명칭에는 신세동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현재 탑이 있는 곳은 경상북도 안동시 법흥동 8-1번지에 있다.

 

 

 

 

 

 

 

탑은 1단의 기단 위에 7층의 탑신이 차곡히 쌓여 있다.

기단의 각 면에는 화강암으로 조각된 8부중상과 사천왕상이 세워져 있고,

기단 남쪽 면에 설치된 계단은 1층 몸돌에 만들어진 감실(불상을 모시는 방)을 향하고 있다.

지붕돌은 위아래 모두 계단 모양의 층단을 이루는 일반적인 전탑 양식과는 달리

윗면에 남아 있는 흔적으로 보아 기와를 얹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단의 윗면을 시멘트로 발라놓아 아쉬움이 남는다.

현존하는 전탑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것에 속한다.

이 탑은 1487(성종 18)에 개축된 바 있다.

 

기단(基壇)은 단층에 평면은 방형이고 현재는 지표에 팔부중상(八部衆像)

또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양각한 화강석 판석을 1면에 6매씩 세우고

남면 중앙에는 계단을 설치하였다. 팔부중상이나 사천왕상들의 조각 수법으로 보아

서로 제작연대에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배치순서도 무질서하다.

또한, 기단 상면은 비스듬히 둥글게 시멘트를 칠하여 어느 정도 원형이 보존되어 있는지 의문이다.

그 이유는 단층 기단 측면에 이렇게 많은 조상(彫像)을 배치한 예가 없기 때문이다.

 

 

 

@칠층전탑의 구조

탑신부(塔身部)는 각 층을 길이 약 28cm, 너비 약 14cm, 두께 약 6cm

진회색의 무늬 없는 전(벽돌)으로 어긋나게 쌓았다.

초층옥신은 매우 높고 남면 중앙 하반부에 화강석으로 테를 둘러 작은 감실(龕室)을 개설하였다.

내부는 위를 방추형으로 줄여 148cm의 방형 구멍이 정상에 나 있어 찰주공(擦柱孔)으로 보인다.

 2층 옥신은 초청 옥신의 높이에 비교하여 약 4분의 1로 높이가 급격히 줄었을 뿐

 3층 이상의 체감률은 심하지 않아 7층이라는 높이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다.

 

 

 

옥개석(屋蓋石)은 전탑 특유의 형태로서 처마 상하에 층단이 나타나며

처마는 수평이고 각 층 옥개의 너비는 석탑보다 현저히 감축되었다.

밑의 받침 수는 초층부터 9·8·7·6·5·3단이고,

 옥개 상면의 층단 수는 초층부터 12·10 · 9·8·7·6·5단으로

상층으로 갈수록 차츰 체감되었다. 현재 낙수면에는 극히 일부에

기와를 입혔을 것으로 보이며

전탑에 앞서 목탑이 존재하였고 전 탑은 목탑을 모방한 것임을 보여준다.

 

 

 

상륜부(相輪部)는 현재 노반(露盤)만이 남아 있으나

 <영가지(永嘉誌)>에 기록된 부 동오이(府東五里)”에 있다는

 법흥사전탑(法興寺塼塔)’이 이 전탑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법흥사전탑에 관하여

 상유금동지식이고철면납관주성객사소용집물(上有金銅之飾 李股撤面納官鑄成客舍所用什物)”이라는

 기록이 있어 원래는 금동 상륜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단층 기단 위에 7층의 탑신이 올려져 있는데, 기단부의 면석은 판석으로 되어 있으며,

판석에는 팔부신중, 사천왕 등을 비롯한 신상들이 새겨져 있다.

기단 윗면은 시멘트로 덮여 있으며, 초층 탑신 밑까지 비스듬히 경사져 올라갔는데,

본래의 형태는 아니다. 본래는 초층 탑신의 밑부분에서 기단 윗면까지

수평으로 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의 모습은 사찰이 없어지고

그 자리에 다른 건물이 들어서는 과정에서 지반이 낮아지면서 바뀌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초층에는 남쪽으로 문을 낸 감실이 있고, 감실 내부 천장은 사각추 모양으로 비스듬하게 조성되었는데,

네 천장 면이 만나는 중심에는 탑신 위까지 뚫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심주(心柱)를 세웠던 구멍이 있다.

감실 안에는 불상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지붕돌(옥개석)은 벽돌로 쌓았기 때문에 계단식 형태를 띠고 있으나

지붕을 덮었던 기와가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기와로 덮여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지붕돌 구조상 처음부터 기와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 것으로 여겨지며,

조선 시대에 중수하는 과정에서 기와를 덮었던 것으로 보인다.

상륜부는 현재 노반석만 남아 있으나

 영가지에 금동 장식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본래 금동 상륜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영가지에 기록된 탑의 개축 연대는 1487(성종 18)이다.

 

 

 

 

기단의 윗면을 시멘트로 발라 놓았을 뿐만 아니라,

탑 옆은 탑동 종택이 잠식하고 있고, 또한 탑과 3m 정도의 거리에 중앙선 철도가 지나가고 있어

 진동과 소음으로 인한 붕괴마저 염려된다.

여주 신륵사의 다층 전탑과 칠곡 송림사의 전탑은 사찰 내에 위치하여 보호 관리 되고 있지만,

안동시에 있는 3기는 모두 보물로 지정만 되어 있지 거의 방치된 것과 다름이 없어

문화재를 찾는 이의 안타까움을 느끼게 한다.

 법흥사의 7층 전탑은 19621220일에 국보 제16호로 지정되었다.

 

 

 

 

안동 법흥사지 7층 전탑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전탑이다.

지붕에 기와를 얹었던 자취가 있는 것으로 보아

목탑을 모방하여 전탑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탑동고택>

@국보 제16호인 법흥사 7층 전탑이 있는 이곳의 고택은 탑동 종택으로

 고성 이씨(固城李氏) 탑동파(塔洞派)의 종갓집이다.

 집터는 통일신라 시대 고찰인 법흥사가 있었던 자리라고 전해지며,

 탑종종택은 1984110일 중요민속자료 제185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에는 대문채 문간방, 영모당, 정우재, 산청정사 등의 이름으로 된 객실이 있어

명품고택의 운치를 즐기며 하룻밤 묵어갈 수 있다고 하는데

상시 열려 있는 것은 아닌지 대문이 닫혀 있어 안을 들어가 보지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