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7. 21. 23:20ㆍ야단법석
(녹야원의 돌)
불성(佛性)으로 나아가는 길(제2과)
중생의 마음이란 허망한 것이다. 분별을 짓지 말자.
중생은 무엇이며, 중생의 마음은 어디서 생기는가?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오온(五蘊)>이란 말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 오온이란 말은 불교에서 가장 회자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반야심경>을 암송할 때 그 첫 구절이 어떻게 시작되는가?
『관자재보살 행심반야 바라밀다시 조견오온 개공 … 』
‘오온(五蘊)’이란 무엇인가?
오온이란 다름 아닌 중생을 일컫는 말이다.
과거로부터 경험된 내용을 토대로 미래의 자신을 구성해 가는
의식의 존재가 다름 아닌 중생이요, 오온인 것이다.
보고 듣고 만지는 경험을 통해서 외적 존재가 대상으로 있고
육체에 감관이 있다고 믿게 되며, 과거로부터의 인식을 통해
의식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 그것이 오온인 것이다.
<나>라고 하는 존재를 믿고 있는 경험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
그것이 오온인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 손안에 들고 있는
<금강경>이란 책을 과거에 보았는데 지금 다시 볼 경우
우리는 두 개의 지각을 갖게 되며, 이때 우리는 누구나 동일한 책을
두 번 본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우리는 과거에 지각한 내용 A와
현재 지각하고 있는 내용 B와 미래에 지각하게 될 내용 C는
분명히 시간적으로 분리된 지각내용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객관적 대상(금강경)은 분리가 없는 동일한 것이라고 여기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객관적 대상은 체험된 내용을
의식이 통일적으로 구성하여 객관화한 것이며,
이 객관화된 대상은 단순히 A, B, C라는 지각의 합계가 아니라
동일한 존재라는 새로운 내용이 되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이러한 의식의 통일적 구성은
외부의 대상에 대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역으로 과거에 사물을 본 눈과 현재의 사물을 보는 눈,
미래에 사물을 보게 될 눈에 대해서도
우리는 누구나 동일한 눈으로 과거에 보았고,
현재도 보고 있고 미래에 볼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과거에 본 것도 <나>, 현재에 보는 것도 <나>이며,
미래에 보게 될 것도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체험하는 의식도
통일적으로 구성되어 객관화되고 있음을 보게 되는 것이며,
이 객관화를 통해 구성된 존재로서의 자아도
과거의 나, 현재의 나, 미래의 나가 단순히 합쳐진 것이 아닌
불변하고 동일하게 존재하는 <나>가 되는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불변하고 동일한 존재인 내가
나의 동일한 감관, 감정, 이성, 의지, 의식이라는 존재들을 가지고
동일하게 존재하는 외부의 대상을 보고 듣고 만지면서, 느끼고,
사유하고, 행동하고, 인식한다고 믿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망식이요, 허구인데도 그렇게 사유하고 인식하고 있는
이것이 바로 중생이요. 오온인 것이다.
망식에 의해 객관화되고
존재화 된 체험의 내용이 18계를 형성하고,
과거, 현재 미래에 체험되고, 체험하고,
체험될 내용이 하나로 뭉쳐진 덩어리 -
그것이 중생이요, 오온이요,
중생의 마음이기에 허망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 <원각경>에 이르길
『이 몸은 원래 영원한 실체가 없는 것인데
화합하여 형상을 이루었으니 진실로 헛된 것이다.
지수화풍(地水火風)이라는 4가지의 인연이 모여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라는 육근을 만들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
육근과 사대가 안팎으로 화합하고 반연하여,
허망하게 그 안에 모이고 쌓여 반연하니,
마치 무엇이 있는 것으로 여긴다.
이것을 사람들은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고 했다.
진실로 허망한 것이 중생의 마음이라면,
이 허망한 마음으로 무슨 시시비비를 가리며,
선악을 가르랴.
사람들의 분별이란 마치 허공에 금을 그어놓고
동서남북을 가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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