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7. 22. 00:19ㆍ야단법석
(도봉사의 돌)
불성(佛性)으로 나아가는 길(제4과)
상대성을 벗어나야 계(界)를 벗어나고 불성을 본다.
의식의 바탕에 심어진 한 생각은
그것이 선의 종자이든 악의 종자이든 아니면 무기의 종자이든
하나의 생각으로 자리하면 다른 생각을 동시에 할 수 없게 된다.
한 의식(계)에서 다른 의식(계)으로 차례로 넘어갈 수는 있지만
동시에 전체적인 하나의 <계>로 인식되어 지지는 못한다.
선(善)을 생각하는 사람은 동시에 악(惡)을 생각하지 못하고,
아름다운 것을 보는 자는 추한 것을 동시에 보지 못한다.
선을 생각하고 난 다음 악을 생각하고,
아름다운 것을 생각한 후에 추한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 역(逆)도 마찬가지다.
그 생각하는 마음이 찰나적으로 일어날 수는 있지만
동시에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마음이란 한 의식에서 다음 의식으로 단계적으로 움직여 간다.
그러나 한 의식(계)에 갇혀버리면 다음 의식으로 넘어가지 못한다.
그것이 집착이다.
경험이나 환경 그리고 특히 사상적 이념에 집착하게 되면
그것을 벗어나 다른 의식으로 쉽게 넘어가지 못한다.
마치 물고기가 물을 떠나지 못하듯, 여우가 숲을 벗어나지 못하듯
그 경험과 환경에 갇히고, 지식에 갇혀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경험과 지식에 사로잡히면 선입견을 내고
그 선입견에 따라 현상세계도 그렇게 보이고, 그렇게 달라져 버린다.
그래서 밉게 본 사람은 그 사람이 이뿐 행동을 해도 모두가 밉게 보이고,
좋게 본 사람은 미운 짓을 해도 이쁘게 보이는 것이다.
그 선입견이란 어디에서 오는가?
계명자상이 바로 선입견이 된다.
쉽게 말해 ‘이름에 대한 분별 집착’이다.
이름은 사람과 동물과 같이 구체적인 사물에 대한 것도 있고,
사랑과 미움이란 말과 같이 추상적인 것도 있다.
이는 실체가 아닌데도 우리 마음은 이를 마치 하나의 존재로 받아드려
종자로서 마음에 심어져 있다. 그 이름은 어디서 왔는가?
<중아함경>은 이렇게 밝히고 있다.
『벗이여, 마치 목재에 연하고, 풀에 연하고, 볏짚에 연하고,
진흙에 연하고, 공간에 둘러싸여서 가옥이란 명칭을 얻게 되는 것처럼,
벗이여, 뼈에 연하고, 근육에 연하고, 살에 연하고, 피부에 연하고,
공간에 둘러싸여서 신체라는 명칭을 얻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명칭을 얻게 된다>란 말은
<관념이 발생하는 것>, <관념이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이름이 없는 것이 이름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 이름이 붙여지면 이 이름에 따라 집착이 더욱 굳어지게 되고
매여져 다시 경계에 연하여 반연하는 것이
다름 아닌 우리가 말하는 선입견인 것이다.
어른이나 아이들이 신발이나 손수건 한 장 고르는데도
유명 브랜드를 찾듯
사람은 이름(명자상)에 집착되면서 희비고락의 업이 더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름(명자상)이란 항상 상대적인 것이다.
인도인들은 달마가 서쪽으로 갔다고 하는데,
중국인들은 달마가 동쪽에서 왔다고 한다.
달마는 움직였지만 동에서 서로 움직인 것도 아니고,
서에서 동으로 움직인 것도 아니다.
동쪽 서쪽이란 사람들의 분별이 지어낸 경계일 뿐이지
동과 서는 본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으로 모든 명자는 상대적이며,
상대적인 것은 곧 분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善)한 것을 상대하여 악(惡)이란 말이 만들어지고,
사랑이란 말에 상대하여 미움이란 말이 만들어 진 것이다.
이름이란 이렇게 상대적이며, 상대적인 것은 허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럼으로 <중론>에 이르길
『무엇인가(법)에 의해서 어떤 자인가(人)인가가 밝혀지며,
어떤 자인가(인)에 의해서 무엇인가(법)가 밝혀지게 된다.
업(법)에 의해서 작자(인)라는 관념이 시설되며,
작자(인)에 의해서 업(법)이라는 관념이 시설되는 것이다.』
라고 했고, 또 이르길
『정(淨)에 의하지 않고 부정(不淨)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정(淨)을 부정(不淨)에 의해서 시설한다.
그러므로 정(淨)은 실로 있는 것이 아니다.』(중론제23장 제10게)
라고 했다.
상대적인 것을 벗어나는 것,
곧 분별을 없애는 것이 바로 불성(佛性)에 접근하는 길이다.
그것이 계(界)를 벗어나는 길이다.
선(善)이란 것도 악(惡)이란 것도 모두가 상대적인 말에 불과하다.
불교의 연기법이란 것도 <인(因)>에 상대한 <과(果)>요,
<과(果)>에 상대한 <인(因)>이다.
전(前)은 후(後)에 상대하고, 시(始)는 말(末)에 상대한 것이다.
불성(佛性)으로 접근하는 일은 이런 상대적인 것을 넘어가는 것이다.
어떤 경험이나 지식에 갇힌 의식이 아니고,
정의된 어떤 틀을 벗어나는 것 - 그것이 불성으로의 접근인 것이다.
교학에서 총체(總體)이니 무애(無碍)니 하는 말은 뒤집어 보면
이런 상대적인 것을 넘어 가라는 의미인 것이다.
18계를 벗어나라는 말도 상대적인 모든 것을 넘어가라는 의미인 것이다.
불교가 중도(中道)를 부르짖는 것도 따지고 보면 상대성을 초월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불성으로 향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맺음의 글)
중생의 마음은 허망한 것이다.
그러나 중생인 우리들은 오온이란
허망한 이 몸뚱아리와 경험 덩어리로 뭉쳐진
이 허망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이 허망한 마음으로 세상을 유지하고,
세상을 이끌며, 이 마음이 한 법이 되어,
세상을 제어해 나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이 허망한 중생의 삶을 일러 천태 지의대사는
「똥밭에 넘어진 자는 똥밭을 짚고 일어나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허망한 마음을 가지고
그 허망한 마음을 벗어나는 길은 무엇인가?
불성으로 나아가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신심(信心)을 내는 일이다.
왜냐하면 신심(信心)은 진실로 삶의 의미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바르게 삶을 알고, 본래면목의 나를 찾고,
진리에 대한 깊은 열정을 품고 행하는 그것이 바로 신심이기 때문이다.
이 신심을 내는 일은 3가지가 있다.
첫째는 모든 것을 연기법적으로 이해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연기법적으로 이해하는 마음이란
“존재”란 관념을 버리는 것이다.
분별을 지우고, 차별된 생각을 버리고 <나>를 포함한 모든 존재는
독립되고 불변하는 존재가 아니라 상호 의존적이며 가변적이며,
자율적이며, 고정된 것이 아니라
구조적이며 유동적이며, 무한한 가능성에 개방되어 있는 것으로
사고를 돌리는 것이다. 그럼으로 세상과 교철융애하고,
남을 탓하는 마음이 없어지고,
사물을 탓하고 탐하는 부정적인 마음을 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연기법은 진실로 우리의 삶을 모든 것과 연계시켜주는
진리의 밧줄이 되기 때문이다.
둘째는 일체의 선행을 닦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일체 선행을 닦는 마음이란 매사에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선한 종자를 심어 선한 행동이 나오게 하고,
악한 종자를 버려 악한 행동이 나오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는 곧 중생이라는 마음 밭에 새로운 생명의 종자를 뿌리는 것이다.
인간의 속성은 “예”라고 대답하기보다는
“아니요”라고 대답하는 속성이 강하다.
그래서 십선(十善)을 행하기보다는 십악(十惡)을 행하기 쉬운 것이다.
그러나 보리의 종자를 뿌리면 보리를 얻게 되고,
배추종자를 뿌리면 배추를 거두게 되는 것은
어린아이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럼으로 악의 종자를 뿌려
미움과 분노와 투쟁의 열매를 거둘 것이 아니라,
선의 종자를 뿌려 화해와 사랑과 자비의 열매를 거두자는 것이다.
셋째는 자비심(慈悲心)을 갖는 것이다.
남의 고뇌를 같이 아파하고, 남의 기쁨을 함께 축복해 주는
긍정적인 마음자세가 자비심이다.
그리고 마음을 열어 유정뿐만 아니라 무정물(無情物)들에까지
베푸는 마음을 갖는다면
진실로 사람과 자연이 함께 조화된 불국토가 될 것이다.
너와 나 우리 모두는 어떤 인연으로 여기에 왔는지 알 수는 없지만
지금 여기에 와있다.
불자가 아니더라도 이제는 선행을 베풀 때다.
과거에 연연하는 삶이 되지 말고
현재의 삶에 반연하는 모든 경계에 긍정적으로 응하며 살아가자.
진실로 어렵고 힘들고 역겨운 일이 닥칠지라도
<No>가 아니라 당당하게 <Yes>로 답하고
그렇게 사는 삶이 되도록 노력하자.
그리고 자비심을 갖자.
내 가족 내 친지를 비롯하여 이름 모를 유정들과 무정들에게까지
기쁨과 고통을 함께 하는 불자로서 자비심을 갖도록 노력하자.
온 사바세계가 불국토가 되는 그날을 위해 정진하자.
진실로 내가 변하면 세상도 변하는 것이다.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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