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7. 12. 23:45ㆍ야단법석
팔부중도(제1과)
1. 무상한 인생인데 조급한 마음을 버리고 살자
하루 종일 봄을 찾아도 봄은 안보여
짚신이 다 닳도록 온 산을 헤매었네.
봄 찾는 일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오니
울타리에 매화꽃이 한 창인 것을
(盡日尋春不見春 芒鞋踏破隴雲
歸來偶過梅花下 春在枝頭已十方)
이는 경허(鏡虛)선사의 선시(禪詩)다.
사람들은 진리를 찾아, 행복을 찾아 밖으로 밖으로 나아가지만 참된 진리와 행복은 밖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안에 있음을 알리는 메시지다.
사람들은 부처를 찾는다고 온 절간을 다 누비지만 찾는 그 마음으로 부처를 알 수 없다.
하느님을 찾는다고 온 성당을 누비는 사람들이 있지만 거기서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는 없다.
알고자 하는 마음을 멈추고 행복이란 유토피아를 구하는 마음을 버릴 때,
그리고 내 마음의 깊은 심연 속으로 들어갈 때 그기에 진정 빛이 있고, 거기에 부처가 있고,
거기에 하느님이 있고, 행복이 있다는 의미다.
밖을 향하여 진리를 찾고, 행복을 찾는 마음은 인간의 조급한 마음에서 나온다.
그러나 조급한 마음으로는 무엇 하나 얻을 수 없다.
봄에 뿌린 씨가 알맞은 계절이 오면 저절로 열매를 맺듯 모든 것은 때가 되면 저절로 구해진다.
진리도, 행복도 알맞은 계절이 오면 저절로 이루어진다.
삶에 있어서 기억해야 될 일은 조급한 마음을 버리는 일이다.
농부를 보자. 농부는 계절을 지켜본다. 씨앗을 뿌릴 때가 되면 씨앗을 뿌린다.
날씨가 따뜻하다고 해서 겨울에 씨를 뿌리지 않는다. 결코 그전에도 하지 않고 그 후에도 하지 않는다.
농부는 단지 가장 적당한 순간을 기다리다가 그 순간이 오면 씨앗을 뿌린다.
때를 기다리다가 그 때가 되면 임한다.
그리고 밤이 되면 잠을 자고 때를 지켜보면서 기다린다.
해야 할 일은 다 하지만 거기에는 조금함도 서두름도 없다.
우리가 50년 전 농업을 주된 생계수단으로 살았을 때만 하드라도 사람들은 지금과 같이 매사에 서두르지 않았다.
모든 일에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산업화가 시작되고 공업화가 시작되자 사람들은 매사에 조급함과 서두르는 병이 생겼다.
“시간이 돈이다”라는 경제관념에 얽매여 서두름과 조금함이 생겼다.
기계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봄과 겨울을 가리지 않는다. 공업기술은 계절과 아무 관계도 없기 때문이다.
농업만으로 수천 년을 살아 온 우리 선조들과 농부들은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시간 감각이라는 것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네 조상들은 “저녁에 돌아오겠습니다.”라고 말하지만 그 저녁이란 오후 6시도 될 수 있고
10시도 될 수 있었다. 그들은 또 “아침에 오겠습니다. 라고 말했지만
그 아침이라는 것도 새벽 4시도 될 수도 있고, 11시도 될 수 있었다. 아니, 아예 다음날 오기도 했다.
우리네 옛 조상은 결코 시간을 나누지 않고 살았다. 또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계절에 따라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농부들의 1년은 달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봄, 여름, 가을, 겨울 등 계절로 여기고 살았다.
그래서 그들은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씨앗을 뿌리는데 어떻게 서두를 수 있겠는가?
그들은 결코 그런 일에 구애받지 않았다.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단지 알맞은 시간을 기다리기만 할뿐이다. 그리고 알맞은 시간이 오면 씨앗을 뿌렸다.
그러면 그 씨앗은 스스로 싹을 틔우고 자란다. 농작물은 사람이 서둘든 말든, 아무 상관도 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마음이 조급하다고 해서, 빨리 수확하고 싶다고 해서
농작물이 사람들의 마음을 따라 설득되어지는 것도 아니고,
또 사람들이 애걸한다고 해서 받아들여지는 것도 아니다.
농부들은 적당한 때가 되면 모든 곡식은 탐스럽게 익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시간에 대한 여유를 가지고 살았다.
그렇기 때문에 농부는 자신의 시간을 즐기면서 오직 기다리기만 할뿐이었다.
진정한 삶을 찾는 사람은, 진정한 구도자라면 이렇게 농부와 같이 되어야 한다.
깨달음의 씨앗, 명상의 씨앗, 이해의 씨앗을 뿌리겠다면,
시간에 매인 운전기사처럼 그런 기술자가 되지 말고 농부와 같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삶이란 정해진 역도, 도착해야만 하는 정해진 시간도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삶은 궁극적으로 서두르면서 살아야 할 이유는 없다.
일상의 삶도 그렇거늘 <나>안의 부처를 찾는 진리의 길은 어느 것도 억지로 할 수도 없고, 그렇게 되지도 않는다.
무엇을 하든 단지 적당한 때를 기다려야만 한다. 너무 많이 하려고 해서도 안 되고, 서둘러서도 안 된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요즘 선방(禪房)을 찾는 고객(?)이 많다고 한다.
만사를 제쳐놓고 제2의 달마가 되겠다고 이름난 선방만을 찾아다니는 단골이 많다고 한다.
“지나친 것은 모자람만 못하다”라는 속담과 같이 억지로,
너무 많이 하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
그러한 노력이 바로 삶의 장벽이 되고 구도의 장벽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조금함을 낳고, 조급하면 서두르게 된다. 모든 불행과 고통은 거기서 야기된다.
세속인이나 출가자나 모두들 인생이 짧다고 모든 것을 일시에, 속전속결(速戰速決) 하고자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욱 매사를 조급하게 서두르고, 뜻을 같이 하는 무리들이 늘어나
결국에는 같은 친구 간에도, 같은 길을 가는 도반(道伴)끼리도 사소한 일에 조급한 마음 때문에
골이 깊어지고 갈등이 생겨, 등지게 되고 암투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를 찾는 길은 더욱 멀어지고 이 절간 저 절간을 찾게 되고,
이 선방(禪房), 저 선방을 찾게 되는 것이다.
인생은 짧다. 그러나 그 짧은 인생의 목적은 무엇을 성취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 있다.
목적이 답이 아니고 과정이 답인 것이다.
목적에는 기쁨이 없고 과정에는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일의 결과를 묻지도 말고 집착도 버려야 한다.
봄에 뿌린 씨앗은 때가 되면 저절로 열매가 되어 돌아오듯, 우리가 진실로 바랬든 것,
그것들은 모두 알맞은 계절에 돌아온다. 오늘 그런 일이 생긴다 하여도 좋은 것이고
오늘 생기지 않는다 하여도 좋은 일이다. 오늘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현명한 사람은 때가 아직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때가 되면 그것은 일어날 것임을 안다. 그럼으로 다만 기다림뿐이다.
주변을 돌아보면 속인(俗人)도 출가자도 어린아이같이 유치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이 많다.
장사나 사업을 시작하자마자 바로 부자가 되려고 하고, 출가하자마자 부처가 되려고 안달하고 있다.
모든 것이 당장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불안해한다. 남보다 뒤쳐지면 마음이 잠시도 고요하지 못하고 불안해 진다.
그래서 안달하고 서두른다. 어린아이들을 보라. 어린아이들은 무엇이든 즉시 나타나는 것을 좋아한다.
유치함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어린아이는 한밤중에라도 장난감이 갖고 싶으면 ‘당장에’ 그것을 달라고 보챈다.
“애야, 아침에 가계를 열면 사주마” 부모들이 그런 말을 하지만 아이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아이는 가계가 닫혔으므로 아침이 오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이는 그것이 변명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는 바로 지금 장난감을 갖고 싶어 한다.
한밤중엔 가게가 닫혀 있다는 것은 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부리는 속임수로 생각한다.
왜 상점들이 한밤중에는 문을 닫을까? 한밤중에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아이는 아침이 되면 모든 것을 잊어버린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이는 사람들이 속임수를 쓰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만일 잠을 자게 되면 다음날 아침에 잊어버리게 될 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즉시 원하는 것이다.
그럼으로 어린애처럼 유치해져서는 안 된다. 서둘러서는 안 된다.
아침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구도도 삶도 기다릴 줄 아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유치한 문명을 갖고 있는 사회는 항상 즉시로, 당장에 이루게 되는 것을 좋아한다.
인스턴트커피라든가 즉석 사랑, 즉석 명상 같은 것을 좋아한다.
즉석에서 지금 당장 하는 것…… 하루에 십분 씩만 하면 보름이면 깨닫게 된다고 하는 ……
동네 슈퍼나 대형 할인매장을 보라.
널따란 진열장에는 깡통과 유리병으로 포장된 갖가지 인스턴트식품으로 가득 차 있지 않는가?
남해바다 적조현상과 같이 한번 바람이 불면 온 바닷가 녹색으로 변하듯,
배금주의(拜金主義)의 바람이 일어나자, 남녀노소, 귀천의 직업을 가리지 않고,
배운 자나 배우지 못한 자나 모두들 대박의 꿈을 안고 카지노로, 경마장으로, 부동산과 증권에 매달리고,
육체의 쾌락은 채팅과 원조교제, 술과 마약으로 오염되어 가는 현실을 한번 보라.
모두가 일순간의 대박에 매달리고, 찰나적인 행복을 구가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어디에서 왔겠는가?
서두름과 조급함이 가져온 어리석고 유치한 문명을 추구하는 원인에 기인되지 않았는가?
이래선 안 된다. 우리의 삶이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사회가 이래서는 안 될 것이다. 기다림의 여유 없이 크게 성취되는 일은 없다.
빨리 달은 쇠가 쉬이 식듯 삶도, 구도(求道)도 여유를 가져야 한다.
자연을 보라. 자연은 사람이 바란다고 해서 그렇게 그 요구대로 따르지 않는다.
뜨거운 여름이 싫다고 서늘한 가을이 먼저 오지 않고, 추운 겨울이 싫다고 해서 봄이 먼저 오는 것이 아니다.
자연은 그 자신의 길을 따라갈 뿐이다. “모든 것은 알맞은 계절이 있다.”
조급함을 버리고,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
삶도, 구도도 마찬가지다. 기다려야 한다. 단지 노력을 하고 기다리면 된다.
그리고 결과가 즉각 나오기를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더욱더 늦어지기만 할 뿐이다.
삼조 승찬대사의 <신심명(信心銘)>에 이런 말이 있다.
『대도는 본체가 넓어서 쉬움도 없고 어려움도 없거늘
(大道體寬 無易無難)
좁은 견해로 여우같은 의심을 내어 서둘수록 더욱 더디어진다
(小見狐擬 轉急轉遲)
집착하면 법도를 잃어 반드시 그릇된 길을 들어가고,
(執之失道 必入邪路)
놓아버리면 자연히 본래로 된다. 본체는 가거나 머무름이 없기에.
(放之自然 體無居住)
농부처럼 깨어 지켜보면서 꾸준히 수동적 자세로 기다릴 수 있다면 바라든 것을 모두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서두르면 실패한다. 시간을 너무 의식하면 진리의 길로 나아갈 수 없다.
진리의 길이란 시간이 없는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항상 잊지 말라. 그대가 준비될 때면 그것은 언제라도 일어난다.
그리고 준비도 그에 알맞은 계절이 되어야 일어난다.
진리의 길에 나선 젊은 구도자들은 흔히 이렇게 말한다.
“나는 매우 긴장됩니다.” 젊은 사람은 긴장되어 있어야 한다. 어떤 구도자는 또 이렇게 말했다.
“초연(超然)해지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계절에 맞지 않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젊은 사람은 무엇인가 집착해야 한다. 집착을 경험하지 않는 사람은 초연해질 수 없다.
억지로 초연하게 되면 그 사람의 삶은 엉망이 되어 버린다.
집착해야 할 시간이 와도 그 시간을 놓쳐버리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억지로 초연을 가장하게 되고 늙어서 마음이 무디어지고
욕정이 가라앉아 당연히 초연해질 시간이 와도 그 억압된 부분이
아직도 그 사람의 주위에 안개처럼 남아 있어서 초연해 질 수도 없게 된다.
그래서 마음에 죽음의 문제가 닥쳐오게 되면, 그때 사람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억압된 부분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면 내가 활동할 시간은 언제인가?
나는 사랑도 하고 싶고 좋아하는 것에 매달리고도 싶다.
나는 보람된,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 그런데 시간이 없다.”
그러면서 그 억압된 부분은 튀어나와 관계를 찾으려 한다.
나이가 들어 노인이 되어 그런 것을 추구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해서 모는 것을 놓치고 있다.
모든 계절을 놓쳐버린 것이다.
이를 잊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은 계절에 맞추어 살아야 한다.
긴장한 시간이 오면 긴장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속에 잘못된 것이 무엇이 있는가?
긴장할 수 없다면 어떻게 휴식할 수 있겠는가? 화를 내지 않는다면 어떻게 자비로울 수 있겠는가?
사랑에 빠질 수 없다면 어떻게 사랑으로부터 성숙할 수 있겠는가?
모든 것은 각각 알맞은 계절이 있다. 모든 것은 저절로 나온다.
항상 그래 왔으며 앞으로도 항상 그럴 것이다. 존재는 광대하다.
그대가 그대 자신의 길을 그 광대한 존재에 강요할 수는 없다.
그대는 단지 그것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지켜보고 그대로 따라야 한다.
부질없는 작은 소견으로, 조급한 마음으로 서둘지도 말고, 의심을 내어서도 안 된다.
그것은 빠른 것 같지만 그대를 더 더디게 만든다.
아니, 어쩜 영 딴 길로 몰고 갈지도 모른다. 그럼으로 마음을 놓아야 한다. 집착을 놓아야 한다.
조급함과 서두름을 놓아야 한다. 놓아버리면 자연으로 돌아간다.
마치 봄이면 풀이 절로 자라듯.
무지한 사람과 현명한 사람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
무지한 사람은 항상 자신의 생각에 따라 삶의 강물을 떠밀려고 한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에게는 그 자신의 생각이 없다.
그는 단지 본질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지를 지켜보고 그를 따라 흘러갈 뿐이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해야 할 일은 마음의 조급함을 버리는 것이다. 서두르는 마음을 잠재워야 한다.
조급하고 서둘면 의심이 생긴다. 의심이 생기면 매사 지름길을 찾게 되고
그대의 마음은 유치한 어린애로 전락하게 된다.
사람들은 인생은 짧다고도 하고, 무상(無常)하다고들 한다.
짧다는 것은 시간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무상하다는 것은 영원을 느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짧은 것도 무상한 것도 아니다. 진리의 길은 짧은 것도, 무상한 것도 아니다.
정해진 길이 없기에 지름길도 없다.
진리의 길은 정해진 곳이 아니기에 왕도가 따로 없다.
그럼으로 급한 마음, 조급한 마음을 버리고 적절한 때가 임할 때까지
여유롭게 다만 최선을 다하는 삶의 자세가 필요하다.
'야단법석'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성(佛性)으로 나아가는 길(제2과) (0) | 2009.07.21 |
---|---|
불성(佛性)으로 나아가는 길(제1과) (0) | 2009.07.21 |
팔부중도(제2과) (0) | 2009.07.12 |
팔부중도(제3과) (0) | 2009.07.12 |
팔부중도(제4과) (0) | 2009.07.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