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7. 12. 23:43ㆍ야단법석
팔부중도(제2과)
2.무상(無常)을 아는 자만이 공(空)을 이해할 수 있다.
사람들은 흔히 “인생은 무상(無常)하다”고 말한다. 공들이고 바라든 일이 실패하거나,
남몰래 애지중지 하든 것들이 도둑맞거나 망가질 때, 그토록 사랑하든 사람과 헤어지거나 이 세상을 떠날 때,
할 일은 천 가지 만 가지 많은데 질병이나 노령(老齡)으로 뜻을 이루지 못할 때,
우리는 흔히 ‘인생은 무상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무상(無常)의 본래 의미가 아니다.
이는 우리의 감성적인 면을 드러내는 말에 불과한 것이다.
이는 단지 ‘허무하다’는 의미를 들어 낸 감정에 젖은 한스러운 말에 불과한 것이다.
무상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유마경>의 제자품에 이른 말이 있다.
『존재의 궁극적 도리(實相)를 설명하는 데에는 찰나에도 생멸(生滅)하는
이 마음의 작용을 가지고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가전연이여,
모든 존재(法)는 생기지도 않고(不生) 없어지지도 않습니다(不滅).
이것이 무상(無常)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무엇에 대해 ‘무상(無常)’이라고 할 때 그것은 처음과 비교해서 변했다는 뜻이다.
청운의 꿈을 꾸던 홍안의 소년이 죽음을 기다리는 노인이 되고,
아침에 핀 아름다운 꽃이 저녁에 시들고, 떵떵거리든 부자가 하루아침에 거지가 되고,
무소불위 하든 권력자가 철창신세를 지고, 아름답고 고요한 마을이 물에 잘길 때……,
우리는 이 모두를 무상하게 여기지만 이는 곧 모두가 처음과 비교해서 변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느 한순간이 아니라, 보이지는 않지만 찰나적으로 계속적으로 변한 것이다. 그럼으로 변화란
“어느 한 순간에도 머물지도 않고 또 남아 있는 것이 아닐 때”를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존재는 영속적이고, 불변하고, 일원적이며, 독립적인 것인데,
변화란 올챙이가 개구리가 되듯 사라져 버린 어떤 것을 대신하여 새로운 어떤 것이 생겨남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올챙이가 변하여 개구리가 되었지만 개구리가 올챙이가 아니듯,
이는 처음과 달라진 것 곧 주체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며, 따라서 흔히 말하는 영원한 존재라는 개념,
고정된 자아(自我)라는 개념, 불변의 자성이라는 그런 개념과 양립할 수 없을 때 이것이 곧 무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갓 난 어린 아기를 보자. 그 갓난아기가 어떤 특별한 순간까지 갓난아기로 있다가
다른 어떤 순간에 갑자기 노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 갓난아기는 잠시도 머물지 않고 변해간다. 그 아기의 몸 세포가 계속 변하는 것을 우리는 성장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찰나적으로 변하는 그 세포의 변화를 눈으로 보지 못한다.
그러나 쉬지 않고 변하고 있다. 생겨난 것은 모두가 이렇게 잠시도 머물지 않고 계속 변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생명이 없는 것도 모두가 우리들 눈에는 감지되지 않지만 쉼이 없이 변해가고 있다.
생주이멸(生住異滅)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어는 한 순간도 고정되어 머무는 것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그리고 계속적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 무상(無常)이란 이렇게
『한 순간도 머무름이 없고, 남아 있지도 않고,
계속적이면서 순간적으로 변화를 지속하는 것』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등 모두를 “존재”나 “실체”로 여기고 살아가고 있다.
“고정되고, 머물고, 변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고 있다. 다시 말해서 “머물고 있는 실체”로 우리에게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진실로 사물을 바로 보면 모든 것은 머물지 못하고 변하고 있다.
그럼으로 우리가 존재로 알고 있는 삼라만상 모두가 이렇게 변하고 있다면
이는 분명 “변함이 없는 고정된 것 즉 존재”가 아닌 것이다.
머무름이 없다는 것은 존재함이 없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일체 사물이 순간적이라면 이들은 모두 공(空)하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란 것도 마찬가지다.
<금강경> 제18장 ‘일체동관분’은 마음의 실체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수보리여, 과거의 마음은 얻을 수 없고,
현재와 미래의 마음도 또한 얻을 수 없다.』
소위 “삼처심 불가득(三處心不可得)”이란 금강경의 가르침이다.
마음도 물건도 시간 속에 있는 모든 것은 실체가 없다. 공(空)하다고 할 수 있다.
과거의 사물들은 아주 가버렸으므로 그들은 더 이상 얻을 수 없거나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의 사물들은 결코 머물지 않으므로 지속성이란 없으며
따라서 포착되거나 가리켜 말할 수도 없다.
미래의 사물들은 아직 오지 않았으므로
지금 이 순간에는 얻을 수도 없고,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다.
따라서 시간 속에 있는 것은 어떤 것도 참으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으며,
그것은 단지 허상으로 존재하는 홀로로그나 환상으로 존재할 뿐,
그 실체는 없는 것이다. 공(空)한 것이다.
우리가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불교에서는 자성(自性)이라고도 하고 자아(自我)라고도 한다.
이는 자족(自足), 자존(自存)의 실재를 뜻하며, 독립성, 결정성 그리고 개체성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세상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 가운데 이런 특성을 지닌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스스로 존재하며, 다른 원인들에 의해서 생겨나지 않는 어떤 것을 우리가 알고 있지 않다.
다른 사물에 의존함이 없이 스스로 만족하고 참으로 독립적이며,
스스로 실재하고 더 이상 나뉠 수 없는 어떤 것이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일찍이 부처님은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고 하고,
“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 말씀하셨고 연기법을 설하신 것이다.
모든 것은 연기일 뿐 찰나에 변하고 머물지 못하니
영원한 것은 그 어느 것도 없다는 의미다.
그럼으로 실제로 변화하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은
이른바 “머무름의 순간”이 곧 “머무름이 없는 바로 그 순간”이라는 것이 된다.
우리가 현실의 눈앞에서 보이는 모든 사물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계속적으로 머물지 않고 변하는 그 순간이 바로 새로 생겨남의 순간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머무름이 곧 머물지 않음이요(住卽無住),
머물지 않음이 머뭄이 되는 것(無住卽住)”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머무름 없음의 머무름이 바로 무상함의 본체이며,
나타남과 사라짐이 현존하고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이 무상인 것이다.
그럼으로 “일어남이 아님(不生)과, 사라짐이 아닌 것(不滅)이 동시(同時)에 현존하는
이것이 바로 무상(無常)의 참뜻이 되는 것이다.
그럼으로 위대한 역경가로 알져진 쿠마라지바(불교역경자. 344-413A.D.)가 이르기를,
『존재란 머무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따라서 머무름이 없다면 자연히 존재도 없을 것이다.
비존재란 무상에 대한 미묘하고 놀라운 가르침인
필경공(畢竟空)과 동의어다.』라고 한 것이다.
그럼으로 진정으로 무상을 아는 자만이 공(空)을 이해한다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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