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성(佛性)으로 나아가는 길(제1과)

2009. 7. 21. 08:07야단법석

 

 

불성(佛性)으로 나아가는 길(제1과)

 

내가 변하면 세상이 변한다.

 

『앙산 혜적화상이 삼성 혜연화상에게

“자네 이름이 뭔가?”

하고 물었더니 삼성화상은

“혜적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앙산화상은

“혜적은 바로 내 이름이야.”

하고 되받아 나아가니 삼성화상은 이번에는

“그럼 제 이름은 혜연입니다.”

라고 답했다. 이 말을 듣고 앙산화상은 껄껄 크게 한바탕 웃었다.』

 

이는 <벽암록>제 68칙에 나오는“앙산문삼성(仰山問三聖)”이란 공안이다.

사람과 경계를 초탈하여 절대로 나아가니 그기에 어찌 <너> <나>가 있겠는가?

물(物:이름)을 박차고, 묻는 자와 답하는 자(人)를 박차고 나아가니

묻든 자는 어디에 있고 답하는 자는 어디에 있는가?

진실로 이와 같이 분별의 옷 벗으면 소낙비 속에서도 옷 젖을 일 없을 것이다.

참으로 우리의 삶이 이렇게 명쾌하게 주고받을 수 있다면 중생이 어찌 부처가 아니 되며,

사바가 어찌 극락이 아니 되겠는가? 내 한 마음을 바꾸지 못해, 사람을 쫓고, 경계를 쫓으니

온 누리가 아비지옥이요, 온 사람이 아수라다.

그래서 사람(亻) 아닌(弗) 사람을 부처(佛)라 명명했던가?

 

사람들은 영화 보기를 즐겨한다. 영화는 분명 대중적인 호소력을 지닌 오락이다.

가공의 사건들이 현실적인 것처럼

우리를 울리기도 하고 웃기기도 한다.

오래된 이야기이지만 언제가 “록키3" 라는 미국영화를 본적이 있다.

참 인상적인 영화였기에 감동을 받았다. 근육질의 배우 실베스터 스탤론이 록키 역을 맡은 영화다.

친구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해서 미국의 헤비급 참피온이 적국인 소련으로 가

거기서 갖은 비난과 야유를 무릅쓰고 악전고투 끝에 소련의 영웅적 복싱 참피온을 이기는 것을 테마로 한

실로 미국의 위력을 과시한 홍보영화이기도 하지만

그 마지막 장면에서 만신창이가 된 얼굴로 승리자로서

기자들과 인터뷰하는 극적인 장면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그 인터뷰에서 주인공인 록키는 이런 말을 했다.

 

“처음 제가 링으로 들어 올 때 여러분은 나에게 야유를 퍼부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에게는 내가 적이듯이 나에게도 여러분은 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경기가 시작되면서 저도 변했고 여러분도 변했습니다.

제가 그로기가 되어 마지막 혼신의 힘을 쏟아 일어설 때

여러분은 야유가 아니라 격려의 응원을 베풀어주었습니다.

저는 확신했습니다.

우리는 서로 적이지만 변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제가 변하면 여러분도 변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우리는 적이지만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적과 동지는 따로 만들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이해관계가 가까우면 친구가 되고, 동지가 되지만,

이해관계가 멀어지면 적이 된다. 그래서 적이 동지가 되고, 동지가 적이 될 수 있다.

 착하고 악한 것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사회가 만들어 놓은 도덕적 규범 때문이다.

그래서 성자를 만들고 죄인을 만들지만, 시대가 흐르고 도덕규범도 바뀌고,

또한 성자가 죄를 지을 수 있고,

죄인도 성스러운 행위를 할 수 있다.

 

민주주의나 공산주의자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념이 바뀌면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자가 공산주의의 신봉자가 되고,

공산주의 신봉자가 민주주의의 신봉자로 돌아 설 수 있다.

윤리도덕, 이념과 이해관계, 이들은 모두 사람들의 분별에 기인한 것이다.

그럼으로 분별을 여의면 차별이 사라질 것이다.

차별이 사라진다면 적이 어디에 있으며, 동지가 어디에 있겠는가?

착한 이가 어디 있으며, 악한 이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 중생은 차별 없이 살아갈 수 없다.

그래서 편이 갈라지고, 좋은 일도 생기고, 나쁜 일도 생기게 된다.

그리고 좋은 일, 잘된 일은 제 탓으로 돌리고

나쁜 일, 잘못된 일은 모두가 남의 탓으로 돌린다.

하던 일이 잘못 되었거나 바라든 일이 뜻대로 되지 못하고 좌절당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서투른 목수가 연장을 탓하듯

환경을 탓하고, 남을 먼저 탓하게 된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누가> 잘못했는지를 먼저 따지려 든다.

자신의 허물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남의 허물부터 따지려 든다.

불자라면 <전유경>의 비유를 잘 알 것이다.

나그네가 길을 가다가 독화살 맞았을 때 어떤 행동을 먼저 취해야 하겠는가?

빨리 독화살을 뽑고 의사를 찾아 치료받는 일인가?

아니면 화살을 쏜 자를 찾는 일이겠는가?

자신의 허물은 덮어두고 남의 허물을 찾는 것은 사람들의 속성이다.

손이 안으로 굽듯 자기본위로 모든 것을 감싸들고 있다.

우리들의 지각기능이나 감각기능도 그렇게 되어 있다.

눈은 밖의 사물을 보고 달려가고, 귀는 밖의 소리를 따라 달려간다.

내 안의 <나>를 보려고 하지 않고,

내 안의 <내> 소리를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의 감각기관은 모두 이렇게 밖을 향해 열려있다.

그래서 자신을 보기보다는 밖을 향하여 쉽게 편을 가르고 분별을 지어간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를 보는 것이 아니라

“누가 잘못했는가”를 따지기 좋아한다.

그러나 “누구의 허물” 대신 “일의 그릇됨”을 보는 자는

남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허물을 살피게 된다.

자신의 허물을 살피는 자는 밖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살피게 된다.

자신의 내면을 보게 되는 자는 생각이 바뀌게 되고,

생각이 바뀌면 행동도 바뀌게 된다.

그렇게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달라지고,

습관이 달라지면 새로운 인격자로 탈바꿈하게 된다.

남을 허물을 감쌀 줄 알고, 인용(認容)하며,

부정적인 마음을 긍정적인 마음으로 돌리게 된다.

인생은 흔히 나그네에 비유된다.

나그네는 인적이 드문 곳에서 도둑을 만나 가진 것을 털리기도 하고,

강도나 깡패를 만나 폭행을 당하기도 한다.

때로는 이로 인하여 생명을 잃는 자가 있는가 하면, 불구자가 되기도 한다.

이 사회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욕망이라는 화살의 독으로 인하여 불구자가 되기도 하고,

심하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로 인하여 번뇌와 고통을 받기도 한다.

그런 번뇌와 고통의 독을 예방하기 위해서 사회는 법을 만들고 윤리도덕을 세우지만

그러나 그 법과 윤리도덕이 욕망이라는 그 독화살을 막아 주지는 못한다.

법과 윤리가 안에서 일어나는 욕망이란 그 독을 예방해 줄 수 있는 궁극적 해답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교에 의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종교는 윤리도덕을 말하면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가

진리로 향한 수행법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수신(修身)이요, 수심(修心)이니 이는 곧 마음공부인 것이다.

마음공부란 다름 아닌 의식의 전환이요,

욕망의 독을 치유하는 영혼의 진료행위인 것이다.

 

 

영혼의 진료행위란 무엇인가?

진료란 병자의 병을 치료하는 것이다.

병의 근본 원인을 살펴 이를 치료하여 건강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다.

영혼의 병이란 무엇인가? <나>라는 병이다.

모든 욕망의 시작이, 모든 차별 시작이, <나>라는 병으로 인하여 시작되기 때문이다.

 <나>가 있기 때문에 <내 것>과 <네 것>이 있고, <네 탓>이 있고, 동지가 있고 적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럼으로 영혼의 진료행위란 <나>라는 병을 치료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반야심경>의 이 구절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조견(照見) 오온개공(五蘊皆空) ……』

 

관세음보살이 오온이란 이 몸뚱아리를 살펴보니 <나>라고 부를 주인이 없다는 의미다.

 <나>라는 주인이 없으면 어찌 <남>을 탓할 수 있겠는가?

<나>라는 주인이 없으면 경계라는 객(客)을 어찌 논할 수 있겠는가?

시비선악이 어디 있으며, 정(淨)과 부정(不淨)이 어디 있겠는가?

그럼으로 모두가 무(無)요, 공(空)이라고 <심경>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 오직 의지할 것은 지혜이니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정각)라 한 것이다.

이는 곧 수심(修心)의 극치이니 중생의 지극한 의식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다.

의식전환이란 마음의 수평적인 이동이 아니라

마음의 수직적인 이동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말해서“의식전환”이란 수평적인 사고가 아니라

수직적 사고를 의미한다.

A에서 B로 가는 것이 아니라, A에서 A1, A2, A3 …로 내려가는 것이다.

깊은 계곡으로 내려갈수록 산이 보이지 않듯,

내 마음의 심연 속으로 깊이 내려갈수록 경계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럼으로 앞서 말한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살핀다는 것은

일만 보고 사람을 잊는다는 의미가 된다.

<중론>의 말을 빌리자면

“행위(行爲)만을 보고 행위자를 잊는다”는 의미가 된다.

이는 곧 일의 순연(順延)을 따르지 결과에 메이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람을 잊고, 행위자를 보지 않으면 경계는 저절로 사라지는 것이다.

밖의 경계가 사라진 사람에게는 모두가 하나로 된다.

<너>가 사라지고, <내>가 없는데 누가 누구를 탓할 수 있겠는가?

그럼으로 모두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차별이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밖의 경계가 살아 있으면 사람이 보이고 일이 보이게 된다.

이런 차별의 경계가 일과 사람(행위자)의 허물을 찾아,

<네 탓>이요, <내 탓이 아니요>하고 시비가 갈리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경계가 사라진 하나가 된 마음에서는 모두가 일체가 되는 것이다.

모두가 하나로 되면, 차별이 사라지면,

어찌 <네 탓> <내 탓>을 논할 수 있겠는가?

그럼으로 진정한 의식의 전환은 마음의 차별을 없애는 것이며,

마음의 차별을 짓지 않는 것을 일컬어 사람들은

“마음을 비운다”라고도 말하는 것이다.

 

마호메트에 대한 이런 일화가 있다.

어느 날 그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저 산을 이리로 움직여 보겠다”

마을 사람들이 이 소리를 듣고 선지자의 기적을 보고자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그러자 마호메트는 앞에 있는 산을 향하여 외쳤다.

“산아, 이리로 오너라”

그러나 산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마호메트는 다시 산을 향해서 외쳤다.

“산아 이리로 오너라”

산은 조금도 움직이지도 않았고, 선지자의 기적을 보려 모였든 사람들은 야유를 퍼붓기 시작했다.

그러자 마호메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유유히 산을 향해 걸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네가 오지 않으면 내가 가지”

 

경계가 사라지면 모두가 하나가 된다.

산이 내게 가까이 오나, 내가 산을 가까이 가나 그것은 같은 의미가 된다.

마호메트의 이 일화는

내가 변하면 상대가 변한다는 교훈을 비유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자신이 변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신이 변한다”는 것은 곧 <의식의 전환>을 의미한다.

부정을 긍정으로 바꾸고, 독을 감로로 바꾸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자기의 고착된 의식의 바탕을 바꾸는 것이다.

이 의식의 바탕’을 불교에서는 <계(界;realms)>라고 한다.

<계(界)>란 어떤 활동이나 사상, 혹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영역이나 범위를 뜻하는 말이다.

 

여러분은 <반야심경>의 이런 귀절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無眼界乃至 無意識界)……』

 

이는 <18계(界)>의 공(空) 도리를 말하는 것인데,

18계란 육근(六根)과 육경(六境), 그리고 육식(六識)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안(眼:눈), 이(耳; 귀), 비(鼻:코), 설(舌:혀), 신(身: 육체), 의(意: 마음)라는

우리의 감각과 지각기능인 육근이 사물과 소리, 냄새, 맛, 촉감, 의식 등 소위 육경이라는

바깥 대상을 상대하여 아는 알음알이, 안식 비식 등…

곧 육식(六識)을 말하는 것이다.

이 18계가 우리들 중생의 삶이 바탕이 되고, 우주가 되는 것이다.

“마음이 바뀐다” 또는 “의식을 바꾼다”라는 말은

곧 이 <18계>가 바뀌는 것이다.

<반야심경>에서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라는 말은 곧 18계가 무(無)요, 공(空)이요,

영원불변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에 의지할 것이 못 된다는 의미다.

그럼으로 참된 진리, 바른 도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 <18계>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무(無)>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 자신이 변하면 세상이 변한다는 말은 사고(思考)의 수평적 이동이 아니라 수직적 이동을 의미하며,

이 수직적 사고의 이동은 고착된 <계(界)>를 바꾸는 것이며,

그 <계>를 바꿈으로서 허망한 육신과 망식으로 이루어진 이 몸과 마음을 <나>라고 여기는

그 병을 치료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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