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성(佛性)으로 나아가는 길(제3과)

2009. 7. 22. 00:13야단법석

 

(능가사의 돌)

 

불성(佛性)으로 나아가는 길(제3과)

 

계(界)를 이해하고, 마음의 속성을 바로 알자

 

중생은 오온이며, 오온은 경험의 덩어리다.

그 경험의 덩어리가 계(界)에 묻혀 굴러가는 것이 중생의 삶이다.

“계(界)”의 산스크리트 원어는 <다투(dhātu)>라고 한다.

이는 층(層 layer), 구성요소(component), 기본요소(element)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이 계(界)라는 말은

‘layer'의 의미를 취한 한역이다.

 

층(層)이란 어떤 의미인가?

“층(層)”이란 ‘쌓여서 이루어진 것’을 의미한다. 반복된 습관이나 생각이 주입된 것이다.

일찍이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촉감으로 느껴진 것,

그리고 사유(思惟) 된 것들이 쌓이고 쌓인 것이 바로 오늘날 그대 자신의 의식세계인 것이다.

여러분은 집안에 개를 키워본 적이 있을 것이다.

개를 어떤 방식으로 학대하면 아무리 유순한 개라고 할지라도 사나워진다.

가령 검은 장갑을 끼고 개를 두들겨 패보라.

아무리 유순한 개라도 반복된

그 행위로 인하여 그 개는 사람이 검은 장갑만 끼고 나타나면 성질이 변하여 으르렁대고 달려들 것이다.

개의 두뇌 속에는 검은 장갑만 보면 이에 대한 반항의식이 쌓여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평상시에는 주인에게 꼬리를 치지만 검은 장갑만 끼고 나오면 으르렁대고 대들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의 의식도 이와 마찬가지다.

육근과 육경과 육식에 화합한 마음의 종자들이

어떤 경계를 만나면 검은 장갑을 낀 주인에게

개가 으르렁거리며 대들듯이 그렇게 반연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어릴 때 모두가 천진스럽고 귀엽고 착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자라면서 경계에 반연하여 그 얼굴도 생각도 거칠어진다.

우리 속담에 “바늘도둑이 소도둑이 된다”라는 말과 같이

하찮은 어릴 때 훔치는 습관이 커서는 도둑이 되고,

조그마한 힘자랑이 자라서는 폭력배가 되고, 살인자가 된다.

검정 숯을 만지는 사람은 쉽게 손이 검게 되듯,

컴푸렉스나 자아의식에 강한 사람들은

이념이나 사상에 젖어 공산주의자가 되고,

민족주의자가 되고, 테러리스트가 된다.

문화적 습관과 전통, 그리고 종교적인 이념이나 교리도

사람들의 의식을 경직화시키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렇게 교육받고 세뇌되면 그 이념이나 교리에 젖어

의식(계)이 형성되고 행동하게 된다.

그 좋은 본보기가 이슬람의 과격주의자들에 의하여

몇해전 미국에서 발생한 9.11테러사건 즉 미국무역센타의 쌍둥이 빌딩 폭파사건이 아닌가?

 

의식의 바탕이 되는 이 <계(界)>란 다름 아닌 중생들이 화합하고

함께 하는 세계가 된다. 다시 말해서 “계”는 중생들이 분별하여

그들이 구성한 세계라는 의미다.

분별하여 구성한 세계란 자신이 태어나 살면서 쌓여진 경험과

지식의 결집인 것이다.

 

어떤 고지식한 판사가 결혼식 주례를 보게 되었다.

그는 점잖은 어투로 말했다.

“원고는 괴로울 때나 기쁠 때나 흰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피고를 아내를 맞이하겠는가?”

 

길거리에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 보라. 옛날 같으면 사람들은

“저 사거리에서 왼쪽으로 돌아 큰 길이 나오면 그리로 돌아 가시오”

라고 말할 것을 마이카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대부분 이렇게 말한다.

“ 저 사거리에서 좌회전하고 큰길에서 유턴 하시오.”

우리의 의식은 계(界)에 갇혀 사물의 참된 모습을 바로 보지 못한다.

마치 외눈박이가 사물을 보지만 거리감을 알지 못하듯, 장님이 영화를 보지만 형상을 알지 못하듯,

살아가지만 왜 사는지를 알지 못하고, 찾지만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사대가 모인 이 육신을 <나>로 알고,

찰나에 생멸하는 이 마음을 내 영혼으로 여기고 살고 있다.

찻잎이 주전자 안에 있을 때는 차가 되지만 주전자 밖에 나오면 쓰레기가 되듯

어제는 검게 보이든 것이 오늘은 희게 보이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이다.

침이 입안에 있을 때는 침이 되지만 입 밖에 나오면 오물로 여기듯,

어제는 그렇게 소중한 것들이 오늘은 하잘 것 없는 것으로 보인다.

허공의 둥근 달이 쪼갈려진 적이 없건만 어둠에 가려 초승달이 되면

마음이 우울하게 되고,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되면 기분도 밝아진다.

시간은 오고 감이 없건만 육신이 병들고, 곧은 허리가 굽어지며,

검은머리가 희게 되니 행복했든 지난 세월도 무상하게 느껴지고,

젖먹이 재롱둥이를 시집장가 보낼 때는 삶의 환희를 느끼다가

집에 돌아와서는 서글픈 인생의 납월을 느낀다.

그러면서도 어제의 내 마음은 오늘의 내 마음이 되고,

또 오늘의 내 마음이 내일의 내 마음으로 알고 살아간다.

 

 

여러분들은 아마 “일수사견(一水四見)”의 이야기나 “사승마(蛇繩麻)”의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는 <유식학>에서 흔히 인용되는 이야기인데 사람들에게는 물로 보이는 것이

하늘의 신들에게는 장엄한 유리로 된 땅으로 보이고, 물고기들에게는 집으로 보이고,

악귀들에게는 고름으로 보인다는 것이 <일수사견>의 비유다.

 

다이아몬든 사람에게는 값진 것이지만 강아지에게는 뼉다귀만도 못하고,

풀장이 딸린 고급빌라를 사람들은 동경하지만

구더기와 파리는 냄새나는 측간과 오물쓰레기통을 좋아한다.

목수는 곱게 뻗은 아름드리나무를 좋아하고, 어부는 싱싱하고 큰 물고기를 좋아한다.

도박사들은 대박을 바라고, 화가는 좋은 그림을 바란다.

물건의 가치는 물건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찾는 자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지고 쓰임도 달라진다.

내게는 좋지만 남은 싫어하고, 내게는 쓸모없지만 남에게는 귀한 물건이 된다.

농부는 물을 보고 모내기를 생각을 하고,

소방관은 방화수를 생각한다.

나그네가 길을 가다가 길에 떨어진 삼베로 꼰 끈을 보고

처음에는 뱀으로 알고 깜짝 놀라 물러났다가

다시 이를 보니 삼베의 끈이었음 알고는 마음이 평안해졌다는 이야기가

사승마의 비유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도 놀랜다는 우리 속담같이,

가진 것 없고 빽 없이 당하기만 하는 사람에게는

세상사람 모두가 도둑으로 보이고, 사기꾼으로 보인다.

대권의 도취된 자는 허수아비도 유권자로 보이고,

배고픈 자에게는 돌멩이도 빵으로 보인다.

애욕에 눈이 멀면 절구통에 치마를 둘러놓아도 여자로 보이고,

돈독에 취하면 코브라의 이빨도 황금으로 보인다.

 

물은 고름도 아니고, 유리도 아니다. 삼베는 분명 뱀이 아니다.

그러나 중생에 따라 그렇게 보이는 것은 외부에 실재하는 세계가 아니라

중생들이 분별하는 그 마음, 그 계(界)에 따라

각기 다르게 구성되는 세계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눈으로 보는 세계, 귀로 듣는 세계, 맛으로 아는 세계, 냄새로 아는 세계,

촉감으로 느끼는 세계, 생각으로 느끼는 세계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계에 갇혀 그 마음이 그려낸 허상이요 진실의 세계가 아니다.

현실의 세계에서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각양각색의 생각을 달리 갖는 것도

보이는 대상이 다른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그 의식의 바탕이 다르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의처증이 있는 남편은 아내가 하는 모든 행동이 요부로 보이고,

아내가 예쁘면 마마자국도 보조개로 보인다.

사람은 모두가 그 의식의 바탕이 다르기 때문에

그로 인하여 버리고, 취함이 있고, 시비가 있고, 선악의 대립이 있고,

사랑과 미움이 교차하는 것이다.

 

<잡아함경>에 이런 말이 있다.

 

“중생은 언제나 계층과 함께 하고 계층과 화합하느니라 …… .

내지 훌륭한 마음이 생길 때에는 훌륭한 계(界)와 함께 하며,

살생할 때에는 살생하는 계와 함께 하고,

도둑질, 사음, 거짓말, 술 마시는 마음이 생길 때에는

술 마시는 계와 함께 하느니라.

살생하지 않을 때에는 살생하지 않는 계와 함께 하며,

도둑질하지 않으며, 사음(邪淫) 하지 않으며, 거짓말하지 않고,

술 마시지 않을 때에는 술 마시지 않는 계와 함께 하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비구들이여,

마땅히 갖가지 계층을 잘 분별하여야 하느니라”<계화합경>

 

술꾼들은 술꾼들끼리 모이고, 도둑놈들은 도둑놈들 끼리 모이고,

정치꾼은 정치꾼들끼리 모이듯, 같은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같은 의식을 지닌 무리들이 따라야 하고,

그 의식의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그 의식의 바탕이 같아야 한다.

마치 콩을 얻으려면 콩의 종자를 심어야 하고,

팥을 얻으려면 팥의 종자를 심어야 하듯

그 의식의 바탕에 무엇을 심느냐에 따라서 보이는 것도 행동하는 것도

그렇게 결정되어 진다.

그대의 마음이 선(善)을 추구하고 선한 종자를 심으면 선한 행동이 나오고,

악한 마음을 품고 악한 종자를 심으면 악한 행동이 나오게 된다.

 

의식이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은 무엇에 기인하는가?

그것은 갈애(渴愛)에 기인한다. 그래서 경은 이렇게 설한다.

 

『 … 눈의 계층을 인연하여 눈의 부딪침이 생기고,

눈의 부딪침을 인연하여 눈의 부딪침에서 생기는 느낌이 생기며,

눈의 부딪침에서 생기는 느낌을 인연하여

눈의 부딪침에서 갈애가 생긴다.

귀, 코, 혀, 몸 의지의 계층을 인연하여 의지의 부딪침이 생기고,

의지의 부딪침을 인연하여 의지의 부딪침에서 생기는 느낌이 생기며,

의지의 부딪침에서 생기는 느낌을 인연하여

의지의 부딪침에서 갈애가 생긴다.

비구들이여, 갖가지 갈애를 인연하여 갖가지 느낌이 생기는 것이 아니요,

갖가지 느낌을 인연하여 갖가지 부딪침이 생기는 것이 아니며,

갖가지 부딪침을 인연하여 갖가지 계층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갖가지 계층을 인연하여 갖가지 부딪침이 생기고,

갖가지 부딪침을 인연하여 갖가지 느낌이 생기며,

갖가지 느낌을 인연하여 갖가지 갈애가 생기는 것이니,

이것을 비구들이여, 갖가지 계층을 인연하여 갖가지 부딪침이 생기고,

갖가지 부딪침을 인연하여 갖가지 느낌이 생기며,

갖가지 느낌을 인연하여 갖가지 갈애가 생기는 것이라 한다.』

(잡아함경/촉경)

 

“부딪침”이란 곧 분별을 의미한다.

삶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분별 다음에 사랑과 미움이 따르기 때문이다.

증애(憎愛)하는 마음이 따라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 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따르기 때문에 즐거움은 따름이 있고

괴로움은 거슬리게 되는 것이다.

즐거운 것은 옳고, 괴로운 것은 그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시비(是非) 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시비는 업의 과보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신심명(信心銘)>에 이르길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니

오로지 분별(揀擇)하는 마음만 버리면 된다.

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 이 마음만 없다면

도는 탁티어 저절로 명백해 진다』

 

라고 했고, <기신론>에서는 전변하는 이 마음을

육상(六相)이란 이름으로 거듭 자세히 벌려 밝히고 있는 것이다.

 

육상이란

첫째 지상(智相)이니 경계를 의지해서

마음을 일으켜 사랑함과 사랑하지 않는 것을 분별하는 것이고,

둘째는 상속상(相續相)이니

지상에 의지하여 괴로움과 즐거움(苦樂)을 깨닫는 마음을 내어서

생각을 일으켜 서로 응하여 끊어지지 않는 것이고,

셋째는 집취상(執取相)이니

상속을 의지하고 경계를 반연해 생각하여 고락에 머물러서

마음에 집착을 일으키는 것이고,

넷째는 계명자상(計名字相)이니

망령된 집상(執相)을 의지해서

거짓된 이름 -가명언상(假名言相)-을 따라 분별하는 것이고,

다섯째는 기업상(起業相)이니

명자(名字)를 의지해서 이름을 따라 취하고

매달려 갖가지 업을 짓는 것이고,

여섯째는 업계고상(業繫苦相)이니

업을 의지하여 과보를 받아서 자재하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경계에 연하여 경계를 분별하는 마음에서 고락(苦樂)을 낳고,

고락에 집착함으로서 취사(取捨)심이 일고,

이 취사심에 이름이 가하여 다시 애착을 낳기에 이에 따라 업을 짓고,

그 지은 업에 따라 과보를 받는다는 말이다.

 

담쟁이가 담을 따라 넝쿨을 뻗어가듯,

우리의 마음은 경계를 인연하여 분별을 짓고,

분별을 따라 쾌락을 낳고, 쾌락을 따라, 이름에 집착하여 뻗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업(業)을 짓고 과(果)를 맞게 되는 것이다.

담쟁이 뿌리를 끊으면 담쟁이 넝쿨을 거두지 않아도 되듯,

경계를 임하여 일어나는 마음의 첫 움직임을 안다면

마음이 짓는 허망한 분별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