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7. 12. 23:39ㆍ야단법석
팔부중도(제4과)
4.팔부중도가 주는 메시지
『깨친 이는 평등에서 차별을 쓰고
인연을 떠나 인연을 따르네.
둥근 구슬이 온갖 빛을 가려내듯
밝은 거울엔 모든 물건 다 비치네.
세상살이 마음에 걸림 없거니
집에선들 그 어이 공부 못하랴
보고 듣는 온갖 것 둘 아닌 줄 안다면
구태여 산에서만 애쓸 것 없네.』
이는 신라 28대 진덕여왕 때 재가신자인 부설거사(浮雪居士)의 시다.
한 마음 깨치고 나면 밝은 지혜로 살아갈 수 있으니 만사가 원융무애하며,
마음이 열리면 속(俗)과 비속(非俗)의 삶이 따로 없다는 메시지다.
그럼으로 오로지 기억해야 할 일은 이 한 마음 깨치는 일이다.
깨치면 속(俗)이 곧 비속(非俗)이요, 미망에 빠지면 설령 비속(非俗)일지라도 속(俗)이 된다.
그럼으로 삶과 구도를 따로 구별 지어야 할 것이 아니라,
삶이 곧 구도요, 구도가 삶이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또한 함축하고 있다.
그러기에 고인(古人)도 이르기를
『도(道)를 보고 산을 잊으면 산 가운데에서도 공적 하여 질 것이고,
만일 산을 보고 도를 잊으면 산 가운데에서 역시 시끄럽다.』라고 했다.
어떤 스님이 조주(趙州)스님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조주의 모습입니까?”
조주라는 그 이름 뒤에 있는 그 놈이 누구냐라는 의미다.
조주스님이 답하기를 “동문, 서문, 남문, 북이다.”라고 했다.
소위 “조주사문(趙州四門)이라는 공안이다.
어떤 사람이 소크라테스에게 말했다.
“델포이 신탁에 의하면 선생님을 일러 현인이라고 하시는데 그렇습니까?”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나는 나 자신도 모른다네?”
불제자로서 부처의 가르침을 배우는 궁극적인 목적은 어디에 있는가?
극락왕생도 좋지만 궁극적인 것은 <나>를 찾는 일이다.
본래면목의 <나>를 찾는 것 이상 더 궁극적인 것은 없다.
그럼으로 ‘나 자신도 모른다. 라고 한 소크라테스의 말도,
조주의 사문공안도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본래면목을 찾는 일을 지칭하여 한 말이 아니겠는가?
팔부중도나 공(空)을 자각하는 일도 궁극적인 목적은
이 본래면목을 찾아가는 길이다. 본래면목이란 무엇인가?
육조 혜가(慧可)스님이 이르시길
“요요상지(了了常知)나 언지불가급(言之不可及)”이라고 했다.
“밝고 밝아서 항상 알지만, 말로써는 미칠 수 없다”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 본래면목은 미래의 어떤 세계나, 알 수 없는 신비의 어느 세계에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것은 바로 지금 이 사바세계(娑婆世界) 안에서 성취해야만 하는 중대사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철학자나 성직자들만이 찾아야 할 일이 아니고,
일숙각선사가 <증도가>에서 이르듯 허망한 이 마음과 허깨비 같은 이 육신으로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우리들 중생이 이 사바세계에서 추구해야만 하는 것이다.
따라서 본래면목을 찾아가는 길은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는 길이 되고,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는 길은 먼저 공(空)을 이해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럼으로 부처님이 <잡아함경>에서 다문(多聞)제일의 아난과, 신통제일의 목건련에게 이르시길
『아난이여, 아(我)도 아소(我所)도 공(空)하기 때문에 세간은 공(空)하다.
목건련이여, 항상 마음을 가다듬고 자아(존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버리고(破),
세간을 공(空)하다고 관찰하라. 이렇게 하면 죽음을 뛰어넘는다.
이와 같이 세간을 관찰하는 자는 염라대왕(死王)도 넘보지 못한다.』고 했다.
고요한 마음으로 돌아가 보자.
달마대사의 말처럼 외식제연(外息諸緣)하고 내심무천(內心無喘)해보자.
밖의 모든 연(緣)을 쉬고, 안으로 헐떡거리는 마음을 잠재워보자.
모든 것은 흘러가고 머무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모든 것은 변하지만 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지금의 이 몸뚱아리는 어디서 와, 어디로 가는가?
내 온 곳을 거슬러 올라가니 처음의 시작을 알 수 없고
내 가는 곳을 내려다보니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온 곳은 알 수 없지만 나는 여기 있고,
가는 곳을 알 수 없는데 자식은 이어져 간다.
올챙이가 개구리가 되고 개구리가 올챙이를 낳는다면
왜 올챙이를 개구리라 부르지 않고
왜 개구리를 올챙이라 부르지 않는가?
계란이 닭이 되고 닭이 알을 낳는다면
그 둘은 같은데
어찌 계란장수는 계란을 들고 “닭사시오” 하고 외치지 않는가?
계란이 닭이 아니요 닭은 계란이 아니라면
계란은 어디로 가고, 닭은 어디서 왔는가?
세상사 돌아보면
차가운 것은 따뜻해지고 따뜻한 것은 차가워진다.
젖은 것은 마르고 마른 것은 젖게 된다.
병이 있기에 건강이 좋고, 악이 있기에 선이 좋다.
죄인이 있기에 성인이 좋고, 성인이 있기에 죄인이 싫다.
배고픔이 있기에 포만이 좋고, 피곤함이 있기에 휴식이 좋다.
살아 있거나 죽어 있거나, 깨어 있거나 잠들어 있거나,
젊었거나 늙었거나, 그것은 다르면서도 같지가 않다.
서로 멀리 떨어졌다가는 다시 하나로 모여들고
하나로 모였다가 다시 제각기 흩어진다.
모든 것은 생겨나지만 온 곳이 다르지 않고
모든 것은 가지만 가는 곳이 다르지 않다.
생각하면 모두가 하나로 돌아가는 데
봄이면 꽃피고 가을이면 열매를 맺는다.
모두 것이 공(空)한데 <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진실로,
불생불멸(不生不滅)을 이해하는 자
<나>를 벗어나고
<나>를 벗어난 자 무아(無我)로 돌아간다.
진실로,
부단불상(不斷不常)을 이해하는 자
<너>를 벗어나고,
<너> 벗어난 자
무아소(無我所)로 돌아간다.
진실로,
불일불이(不一不異)를 이해하는 자
<우리>를 벗어나고,
<우리>를 벗어난 자
대자대비심으로 돌아간다.
진실로,
불출불래(不出不來)를 이해하는 자
<시간>을 벗어나고,
<시간>을 벗어난 자
찰나가 <지금, 바로, 영원> 속으로 들어간다.
선남선녀 불자님들,
<중론>에 이르기를『존재가 공함으로 부처는 생사에 머물지 않고
공(空)함이 곧 존재이니 부처는 열반에 머물지 않는다.』고 합니다.
생사에 걸림이 없고 극락정토와 열반에 마음이 없다면 무엇이 나를 두렵게 하겠습니까?
그럼으로 비록 세상살이가 어렵고 고달프다고 해도
<공>의 이 의미를 이해한다면 그 속에 진정한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왜냐하면 <나>도 공이요, 세상도 공(空)이면 <나>와 <세상>은 다르지 않고 하나로 되기 때문입니다.
공은 경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업을 짓는 것은 마음에 있지만 재앙은 몸으로 받기 때문에 <나>에 집착하게 됩니다.
그러나 <나>도 공이요, 이 <몸뚱아리>도 공이라면 무엇이 <나>니, <너>니 하는 구별을 짓게 하고,
무엇 때문에 남을 원망하거나 시시비비를 가리게 되겠습니까?
내 마음이 공한데 누구를 위해 부귀영화를 찾을 것이며,
이 몸뚱아리가 공한데 누가 고통을 느끼겠습니까?
팔미의 모든 분별이 공하여 사라지게 되면 세상과 나는 하나가 됩니다.
세상과 <나>가 하나가 될 때 거기에 불행도 고통도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중생이 곧 부처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空)을 알지 못하면 세상은 팔미(八迷)로 갈라져 보입니다.
그기에 차별이 있고, 분별이 있고, 그 분별은 사랑과 미움의 씨앗이 되어 고통과 불행의 씨앗이 됩니다.
그럼으로 갖가지 업을 짓고, 선(善)한 것은 선한 것을 따라,
악(惡)한 것은 악한 것을 따라, 인연 따라, 때로는 얕게, 때로는 깊게,
지은 데로 과보(果報)를 받아 삶은 고통스럽고 힘들게 됩니다.
불자님들, 진정으로 무상을 이해합시다. 무상(無常)이 공(空)임을 자각합시다.
그래서 본래의 <나>를 알고, 진정한 <너>를 알도록 합시다.
자각하는 그 마음은 하나지만 온 세상을 담을 수 있습니다.
온 세상은 크고 넓지만 한 마음에 담겨집니다.
일월보현일체수(一月普現 一切水)요,
일체수월일월섭(一切水月 一月攝)이다!
(한 달이 만강(萬江)에 두루 나타나고, 만강의 비친달 한 달에서 나온다.)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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