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7. 12. 23:41ㆍ야단법석
팔부중도(제3과)
3. 불교공부의 핵심은 공(空)을 이해하는 데 있다.
<입능가경>에 이르기를『분별된 것은 세속이며, 이것을 끊음에 의해서 성스러운 경계가 있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들 중생들은 눈을 뜨면 <나>도 있고, <너>도 있다. 삼라만상이 보인다.
그런데 부처님은 모두가 없다고 한다. 실체라는 것이 없다고 한다. 공(空)이라고 한다.
눈앞에 보이는데 그것을 허깨비라고 한다. 씨앗이 뿌려지면 싹이 돋고 가지를 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낳는다.
그런데 생(生)함도 없고 멸(滅)함도 없다고 한다. 생함과 멸함, 이 모두를 공이라고 한다.
생함이 없다면 피어 있는 눈앞의 꽃은 어디에서 왔으며, 멸함이 없다면 사라진 그 씨앗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우리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이런 말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래서 부처님의 진리는 때로는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들고,
선지식의 예지(叡智)는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공(空)>이란 실상(實相)이 없다는 말이다. 영원한 존재가 없다는 의미다.
모든 것은 찰나에 변하고 잠시도 머물지 않기 때문에 공(空)하다고 하는 것이다.
고정된 참된 모습을 지니고 있지 않기에 공이라고 한다. 생함도 멸함도 아닌 이것을 공(空)이라고 한다.
부처님이 성취한 정각(正覺)도 이 공(空)의 실체를 깨달았다는 의미다.
그럼으로 공(空)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오아시스 없는 사막과 같이 불교공부는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그럼으로 불교를 안다고 하는 것은
곧 공(空)을 이해하고 있다는 말과 같은 뜻이 된다.
따라서 불교를 이야기한다면 공(空)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고,
공(空)을 이야기한다면 용수(龍樹)의 <팔부중도(八部中道)>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팔부중도란 어떤 것인가?
어떤 이는 이를 <팔부정관(八部正觀)>이라고 하고 또 <팔부중관(八部中觀)>이라고 한다.
‘중도(中道)’라 불리는 것은 지어진 바(所作)의 도리(理)에 따라 말하는 것이며,
정관(正觀)과 중관(中觀)이란 깨닫는 주체(能證)의 지혜를 따라 말하는 것이다.
또한 치우침(偏)에 상대가 되는 것을 중(中)이라고 하고,
삿댄 것 (邪)에 상대되는 것을 정(正)이라고 한다.
불교 종파중의 하나인 삼론종에서는 이것을 지극한 종지로 삼고 있다.
팔부(八部)라고 하는 것은 “불생(不生), 불멸(不滅), 부단(不斷), 불상(不常),
불일(不一), 불이(不異), 불래(不來), 불출(不出)”의 8귀(句)인 4가지 상대적인 것을 말하며,
이것에 반대되는 것은 생(生), 멸(滅), 단(斷), 상(常), 일(一), 이(異), 거(去), 래(來)가 되는데,
이것을 팔미(八迷)라 하고 또는 팔계(八計)라고도 한다.
팔미란 8가지 미혹을 뜻하고, 팔계란 8가지 분별이란 의미가 된다.
이 팔부를 깨달음으로 삼승의 중생이 있고, 팔부에 미(迷)함으로 육취(六趣)의 고난이 있다고 옛 조사님들은 말한다.
다만 깨달음의 높고 낮음이 있고, 미(迷)함에는 얕음(淺)과 깊음(深)이 있으므로
육취(六趣)의 구별이 있고 삼승(三乘)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제 그 의미를 <청목대사>의 말을 한번 부연해 보자.
1)불생(不生)
봄이 오면 꽃이 피고, 가을이 되면 열매를 맺는다. 얼룩소가 송아지를 낳고 그 송아지가 자라나서 또 애기 송아지 낳는다.
아버지가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또 손자를 낳는다. 일체 만물은 끊이지 않고 이어져 간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것이 새로 태어난다고 말한다. 생(生)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일체만물은 생(生)함이 없다. 불생(不生)이다.
저 들판에 누렇게 익은 벼는 분명 봄에 누군가의 손에 의해서 씨앗이 뿌려졌기 때문에 열매를 맺은 것이다.
봄에 뿌린 씨앗이 없다면 저 들판의 벼는 없을 것이다.
그 씨앗은 분명 작년 가을 내지 그 이전 해의 추수에서 거두어들인 것이다.
그 씨앗을 다시 이 봄에 뿌려 가을에 열매를 거두어들이는 것이다.
그 벼는 새로 생겨 난 것이 아니라 작년의 씨앗에서 나온 것이다. 이는 생한 것이 아니다.
생이란 없는 것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무(無)에서 유(有)로 나타날 때 우리는 “생겼다(生)”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작년의 볍씨가 없었다면 지금의 벼는 없을 것이다. 없든 것이 홀연히 나타날 수는 없다.
볍씨를 뿌리지도 않았는데 추수가 가능하겠는가?
작년의 볍씨는 재작년의 볍씨로부터 나왔다.
그러면 태초(太初)의 첫 볍씨 없이 지금의 벼가 있다면 그것은 분명 생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없던 곳에서 홀연히 생겨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지금의 벼는 처음 볍씨의 씨앗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벼가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 벼는 생한 것이 아니다. 불생(不生)이다.
눈앞에 보이는 저 꽃도, 저 나무도, 저 나비도, 어느 것 하나도 새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2)불멸(不滅)
생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살아진 것이 된다.
불생(不生)이라면 당연히 멸(滅)이기 때문이다.
생한 것이 없는데, 태어난 것이 없는데, 어떻게 사라짐이 있을 수 있으며,
태어난 것이 없는데 어찌 죽음이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들판에서 누렇게 익은 벼들은 본다. 그것은 태초의 볍씨가 사라진 것이 아니다.
사라진 것이 어떻게 눈앞에 보이겠는가? 그것은 불멸(不滅)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눈앞에, 이 세상에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저 들판에 풍요롭게 익은 벼를 통하여 태초의 볍씨인 그 불멸을 보기 때문이다.
만약 태초(太初)의 볍씨가 멸(滅)하였다면 지금의 저 벼들은 응당 없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우리들 눈앞에 풍성한 열매를 머금은 벼가 있다.
그럼으로 불멸(不滅)이다.
태초의 볍씨가 사라진 것이 아니다.
3)불상(不常)
멸한 것이 아니라면 다시 말해서 불멸(不滅)이라면 당연히 영원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태초의 볍씨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면 영원한 것이 되어야 한다.
즉 상(常)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영원한 것이 아니다. 상(常)이 아니다.
이는 불상(不常)이다. 왜냐하면 세상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저 들판에서 불상(不常)을 보기 때문이다.
볍씨가 뿌려지고 싹을 날 때 그 볍씨는 변괴(變壞)되고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태초의 볍씨는 영원한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불상(不常)이다.
4)부단(不斷)
만약 영원한 것이 아니라면 즉 불상(不常)이면 이는 당연히 사라진 것이다.
즉 끊어짐이 된 것이다. 단(斷)이 된 것이다.
그러나 사라진 것도, 끊어진 것도 아니다. 부단(不斷)이다. 왜냐하면 눈앞에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눈으로 만물이 끊어지지 아니함(不斷)을 보기 때문이다. 곡식을 따라 싹이 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끊어진 것도, 사라진 것도 아니다. 부단(不斷)이다.
만약에 끊어지고 사라지고, 단절되었다면 당연히 상속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태초의 볍씨가 끊어지고 사라진 것이라면
지금의 논밭에서 어찌 그 벼를 다시 볼 수 있겠는가? 그럼으로 부단(不斷)이다.
5)불일(不一)
만약에 끊어지고 사라진 것이 아니라면 즉 부단(不斷)이라면 동일(一)한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같지 않다. 즉 불일(不一)이다. 왜냐하면 눈앞에서 그 차이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눈으로 만물이 동일하지 않음 즉 불일(不一)함을 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곡식은 싹이 아니고 싹은 곡식이 아니다.
만약 곡식이 싹이 되고 싹이 곡식이라면 응당 같은 것이다.
닭이 계란에서 나왔다고 해서 닭장수가 닭을 팔면서 “계란사시요”하고 외치지 않는다.
그럼으로 싹은 벼와 같지 않고, 계란은 닭과 같지 않다.
같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당연히 불일(不一)이다.
태초의 볍씨와 지금의 저 들판에 누렇게 익은 벼는 같은 것이 아니다.
6)불이(不異)
만약에 같지 않다면 즉 불일(不一)이라면 당연히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이(異)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다르지 않다. 불이(不異)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을 눈앞에 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보이는 만물은 다르지 않다(不異). 만약 다르다면
어찌하여 벼의 싹, 벼의 줄기. 벼의 잎이라 분별하여 말하면서
나무의 싹, 나무의 줄기, 나무의 잎이라 말하지 않는가?
그럼으로 이는 다르지 않다. 불이(不異)다.
7)불래(不來)
만약에 다르지 않다면, 불이(不異)라면 응당 그것이 오는 것(來)이 있어야 한다.
달걀에서 병아리가 나오고, 태(胎)에서 강아지가 나오듯 다르다면 나오는 곳도 달라야 한다.
여기서 래(來)란 말은 먼 곳에서 가까운 곳으로 온다는 의미다.
원인 없이 어떤 존재가 생겨 나온다는 의미다. 생겨난다는 의미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서 온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눈으로 보아도 만물은 어디서 오는 것이 아니다.
불래(不來)다. 마치 곡식 속에서 싹이 따라 온바가 없기 때문이다.
나무가 불에 탄다고 해서 나무에 불이 따라 나오는 것도 아니고,
그 불과 싹은 다른 곳에서 온 것도 아니다.
만약 오는 곳이 있다면 싹은 당연히 다른 곳에서 와야 할 것이다.
마치 새가 나무둥지에서 날아오듯이 싹은 다른 곳에서 와야 할 것이다.
원인 없이 다른 존재로부터 왔어야 한다. 그러나 실로 그렇지 않다.
그럼으로 불래(不來)다. 어디서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불래(不來)다.
8)불출(不出)
만약 어디서 온 것이 아니라면 처음 것은 어디로 사라진 것이 된다.
불래(不來)라면 마땅히 출(出)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로 간 것이 아니다. 불출(不出)이다.
출(出)과 거(去)는 같은 의미로 쓰인 말이다. 이는 가까운 곳에서 먼 곳으로 가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세간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세간의 눈으로 보면 만물이 어디로 간 것이 아니다.
불출(不出)임을 알 수 있다. 만약 가는 것이 있다면(出) 응당 싹이 곡식을 따라가야 할 것이다(出).
마치 뱀이 동굴을 따라 나가듯이 그렇게 간 곳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실로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불출(不出)이다.
팔부중도는 우리가 존재로 여기는 모든 그릇된 고정 관념을 깨트리기 위해서 설해진 것이다.
그 고정관념이란 모든 것은 영속적(永續的)이고, 불변(不變)하고, 고정적이며, 일원적(一元的)이며,
독립적(獨立的)인 것들로 여기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사물에 대하여 이런 고정 관념이나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찰나에도 머물지 못하고 변하고 있는 모든 것이 우리의 눈에는 실재하는 존재로 여기게 된다.
모든 것을 존재로 보기 때문에 영원성이나 불변성을 이야기하게 되고,
영원성이나 불변성을 추구하는 마음 때문에 우리의 삶은 미망에 갇히게 되어 고통과 번뇌를 피할 수 없게 된다.
예컨대 우리는 어디서 온 것도,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지만
<나>라고 하는 이 존재에 깊은 애착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내 몸을 이루는 세포는 일분일초도 멈추지 못하고 변하고 있고,
<마음>이란 것도 찰나적으로 변하고 있는데 우리는 십년 전이나 십년 후나 똑같은 <나의 육체>요,
똑같은 <내 마음>으로 여기고 있다.
눈앞의 모든 사물도 마찬가지로 잠시도 머물지 못하고 변하고 있는데
우리는 어제의 것과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을 동일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보는 <나>도 찰나에 변하고, 보이는 <사물>도 찰나에 변하고 있다.
<주체>도 변하고 <객체>도 변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것이 영속적이며 불변하는 존재로 여기고 있다.
일분일초도 머물지 못하고 변하는 것, 다시 말해서 찰나에 생멸을 반복하는 것이 <나>요, <사물>이다.
그렇다면 상주(常住)하지도 못하는 그런 <나>에 대하여 갖는 애착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찰나에 변하는 그 몸과 정신에 부귀영화가 무슨 의미를 지닐까?
존재에 대한 우리의 그릇된 관념 때문에 우리의 삶은 미망에 빠진다.
우리가 불변으로 여기는 그런 존재들(경계)로부터 사랑과 미움이라는 분별을 일으키고,
사랑스러운 것에 대해서는 행복과 기쁨을 느끼고, 미워하는 것으로부터는 불행과 고통을 느끼게 된다.
그럼으로 행복은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고, 고통스럽고 불행한 것은 빨리 멀어지고 없어지기를 바란다.
행복과 불행, 기쁨과 고통은 인(因)과 연(緣)의 경계를 따라 더욱 깊어지고,
마음이 짓는 허망한 이름과 형상들을 따라 더욱 집착하게 되면 우리는 그것 때문에 갖가지 업을 짓게 되는 것이다.
그럼으로 삶은 괴로워지고 안개 속을 걸어가듯, 주인 없는 마차 모양,
가야할 방향을 잃고 허망한 환상을 따라 미혹의 삶을 살아가다가
죽음을 생각하는 나이가 되면 인생무상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럼으로 팔부중도는 존재의 근원에 대하여 그 허망성을 밝히고
삶의 바른 길을, 진정한 존재에 대한 자각을 일깨우기 위해 설해진 것이다.
존재에 대한 진실을 자각하는 것 ― 그것이 해탈이요, 열반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존재는 하나인 절대적 존재가 아니라
상호의존적이며, 영원한 실재가 아니라 연기적이며,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사건과 행위들로서 실체가 없는 것이다.
공(空)이다. 이를 자각한다면 우리의 삶은 미로에서 벗어나고,
갇힌 곳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볼 수 있듯이,
일찍 마음을 깨친 자는 더 높은 세계로 날아 갈 수 있을 것이다.
'야단법석'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팔부중도(제1과) (0) | 2009.07.12 |
---|---|
팔부중도(제2과) (0) | 2009.07.12 |
팔부중도(제4과) (0) | 2009.07.12 |
이 마음이 곧 부처다. (0) | 2009.07.01 |
순응(順應)하는 삶이 중도의 삶이다. (0) | 2009.07.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