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9. 8. 01:14ㆍ야단법석
<불암산 바위 위의 나무들>
행동의 선악(善惡)은.
철학자와 윤리학자들은 선악(善惡)을 말합니다.
그러나 행동 그 자체는 아무른 의미가 없습니다.
음밀한 의미에서 보면 행동은 좋다, 나쁘다,
쓸모가 있다, 없다 로 나눌 수 없습니다.
소위 사악한 행동이라는 것도
꼭 행해져야만 하는 아름답고 신성한 행동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 좋고 나쁜 것은 행동이 아닙니다.
행동 그 자체는 중립적인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칼을 집어 사람의 팔을 자르는 것은 나쁜 일입니다.
하지만 수술하는 의사의 경우라면 그건 옳은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동기와 결과입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평화와 환희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와 너와 우리의 기쁨이요 환희가 되는 것입니다.
대승의 보살도를 행하는 까닭이 뭐겠습니까?
나도 즐겁고, 남들과 더불어 기쁨을 나누기 위함이 아닙니까?
사람들이 과일나무를 심고 그 열매를 기다리는 것은
새도 먹고, 나도 먹고, 남들도 함께 먹기 위해서입니다.
나만을 위하여 심어진 사과나무는 없습니다.
나의 삶도 남들이 즐길 수 있는 그런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나의 행동에 사심이 없어야 합니다.
나만이라는 그런 이기적인 마음이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동기가 순수하고 맑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은 바램이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뭔가 바라는 것을 고만두는 순간
진실한 행복을 맛보게 됩니다.
그래서 성인들은 마음이 가난해지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갖가지 선악의 규범 때문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유혹이란 일종의 테스트에 불과합니다.
God란 말은 뒤집어보면 Dog가 됩니다.
Dog란 말을 뒤집어보면 God이 됩니다.
무엇이 악입니까?
옳지 못한 자리에 있는 것이 악입니다.
휴지와 같습니다.
옳은 것도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으면
쓰레기와 같이 쓸려져 버립니다.
선이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전기도 그렇지 않습니까?
전기가 신성합니까? 사악합니까?
전기는 그저 전기일 뿐입니다.
전기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접근방식에 따라 전기는 선도 되고 악도 됩니다.
램프의 플러그를 꽂으면 빛을 얻습니다.
오디오를 꽂으면 음악을 듣습니다.
그러나 젖은 손으로 전기를 만지면
감전이 일어납니다. 무서운 악마가 됩니다.
그런 사람은 전기가 나쁘다고 말합니다.
오디의 플러그를 꽂는 사람은 전기가 멋지다고 합니다.
우리의 악한 행동이란 것도 그와 같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더러움 마음으로 경계에 접근하면
마음은 그대로 그 사악함을 행동으로 드러낼 것입니다.
하지만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대의 본성을 진실로 이해한다면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그대의 악한 행동은 분명 지옥입니다.
그러나 그 지옥은 하늘나라로 가기 위한 양념입니다.
하늘나라로 가기 위한 맛의 간을 내기 위한 것입니다.
영가(永嘉)대사가 이렇게 이르지 않았습니까.
『무명실성(無明實性)이 즉불성(卽佛性)이요
환화공신(幻化空身)이 즉불신(卽佛身)이다.』
라고.
중요한 것은 행동의 선악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대 안에 있는
불성(佛性)이요, 불신(佛身)을 깨닫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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