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如是我聞)

2006. 8. 27. 12:41야단법석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如是我聞)


경전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금강경>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금강경의 서두는 이렇게 시작한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부처님께서는 사위국의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는데

1250명의 큰 비구들과 함께 계시었다.

(如是我聞 一時 佛在舍衛國祇樹給孤獨園 與大比丘千二百五十人俱)』


모든 대승의 경전들은 이와 같이『여시아문(如是我聞)』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어느 한 때, 부처님이, 1250명의 비구대중과 어느 곳에 함께 계셨다.』

라고 이어진다. 이를 교학에선 육사성취(六事成就)라 한다.


<여시(如是)>란 「믿고 따른다.」라는 말이다.

믿으면 말이 이 같다고 하고,

믿지 않으면 이 같지 않다고 하기 때문이다.

불법(佛法)은 믿음 곧 <신(信)>을 제일로 삼으므로

모든 경전의 서두에 아난이 능히 믿어서 여시(如是)라 말하였다. 


<불지론(佛地論)>1에 이르기를

『여시아문(如是我聞)은 자기가 들은 것을 모두 나타낸 것이며

불교를 전하는 자의 말이다.』라고 했고,


또 <지도론>1에

『모든 경전에 어떤 근거로 첫 머리에 여시(如是)란 말을 사용하는가?

답하기를 

『불법의 대해(大海)는 믿어야 들어 갈 수 있고

지혜(智)가 있어야 능히 제도(濟度)한다.

여시(如是)란 곧 이 신(信)이란 뜻이다.

불신(不信)하는 자는 이 일을 여시(如是)하지 못하다 하고,

믿는 자는 이 일이 여시하다고 한다.』라고 했다.


한 스승과 제자가 길을 떠나 큰 강 앞에 이르렀다. 강이 깊어 제자가 건너기를 망설이자 스승이 그에게 부적을 주며 말했다.

『이 아미타불의 부적을 가지고 마음 놓고 걸어서 강을 건너가게.』

제자는 이 부적을 가지고 스승의 말을 따라 물위를 그냥 걸어갔다.

강을 반쯤 건너가자 스승님이 준 부적에 대하여 호기심이 생겼다.

『도대체 부적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신기하게 강을 걸어서 건너갈 수 있담?』

그래서 스승님이 준 부적을 뜯어보았다.

그 속에는 아미타불의 부처님을 산스크리트로 쓴

그림 같은 글씨가 한 장이 들어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그는 맥이 빠졌다.

『이것이 겨우 다란 말인가? 부적의 비밀이 겨우 이거란 말인가?』

 이 의심이 그의 마음속에 들어가자마자

그는 그대로 물 속에 빠져버렸다.


제자로 하여금 물위를 걷게 한 것은

아미타불 부처님에 대한 <믿음>이었다.

믿음이 있는 것은 삶이요, 믿음이 없는 곳은 죽음이다.

경전공부의 시작은 진실로 이런 믿음으로 시작되어야 한다.

 

 

날 짐승의 왕인 독수리를 보라.

독수리는 하늘 높이 날지만

그의 눈은 썩은 송장을 찾기 위해서 높이 날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배웠다는 사람들은

그 높은 학문과 지식에도 불구하고 진리에 대한 믿음을 버리고

눈앞의 부(富)와 욕망에 집착하고 있다.

이 때문에 그들은 허깨비 같은 지식을 가지고

진정한 진리를 체증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마음을 순화시키고

가슴을 절실하게 하는 지식만이 진정한 반야의 지혜이다.

그 밖의 모든 지식은 거짓이다.

경전은 진실한 책이다.

그러나 <경전(經典)>이란 말은

언제나 성스러운 책(聖典)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밧줄을 뜻하기도 한다.

 

진리를 알기 위한 그 열정으로 경전을 읽지 않는다면

모든 자만심과 선입견을 버리고 겸허한 마음으로 읽지 않는다면,

단순히 문자로서만 읽는다면,

지독한 에고와 억측, 그리고 학자인 체하는, 유식한 체 하는,

교만심만이 더할 뿐이다.

이는 무수히 얽힌 밧줄과 같아서

그의 마음을 묶는 방해물이 될 것이다.


경전을 공부할 때

주의해야 될 첫 번째 교훈은 자만심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잿더미에 물을 부으면 물은 대번에 말라버린다.

자만심은 잿더미와 같다.

자만심으로 차 있는 사람들에게도 어떤 경전도,

어떤 기도나 명상도 별 효과를 주지 못할 것이다.


경전 공부에서 명심해야 될 또 다른 교훈은

무익한 논쟁을 피해야 한다.

빈 그릇에 물을 부으면 소리가 난다.

그러나 그릇이 차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

진리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매사에 무익한 논쟁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진리를 한번이라 체험하게 되면

말없이 진리에 순종하게 된다.


사람들은 종교에 대하여, 진리에 대해서 많은 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말한 것 가운데

모래알만큼도 실행에 옮기지 않는다.

 

현명한 사람은 그의 전 삶이 진리를 찾는 행위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잔치에 초대되었을 때 처음에는 왁자지껄하다.

그러나 그 왁자지껄한 소리는 음식이 들어오기 전까지이다.

음식이 들어오게 되면 조용하게 된다.

식사가 다 끝나고 다과가 들어오게 되면 더욱 조용해진다.

마지막으로 후식(後食)이 나오게 되면

이제 오직 먹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다.

그리하여 잔치가 다 끝나고 손님들이 할 일은 잠자러 가러 일뿐이다.


진리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질문과 이유가 적어진다.

진리를 체험하게 되면, 그때는 모든 논쟁이며 이유들이 사라져 버린다.

그러면 그 다음은 잠자러 갈 시간이다.

다시 말하면 해탈과 열반이라는 진리와의 영적인 교섭에 젖을 시간이다.


벌이 꽃잎의 밖에 있을 때에는 윙윙 소리를 낸다.

그러나 꽃 속으로 들어가 꽃가루를 딸 때에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다.

진리의 넥타(감로)를 맛보지 못한 사람은

교리나 이론에 대한 논쟁에서 떠나지 못한다.

그러나 진리를 체험하게 되면 그는 침묵 속으로 들어 갈 것이다.


경전공부에서 유의해야 될 또 다른 교훈은

구도자의 티를 내지 말라는 것이다.


미국에서 30년을 살다가 돌아온 한 재미교포가 식당에 들어갔다.

식사를 다하고 급사를 불러서

『휴지를 좀 갖다 주세요』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 급사는

『아, 냅킨을 말씀하신 거군요.』 하면서 으스대며 티(?)를 냈다.

만약 그 급사가 그 손님이

30여년을 미국에서 살다가 온 사람인 것을 알았다면 어떻게 했을까.


외국어를 배울 때 초보자는 회화를 익히기 위하여

가능하면 외국어로 말하려 한다.

자기의 생각을 외국어로 표현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외국어에 능숙하게 되면 굳이 외국어로 말하려 애쓰지 않는다.

 

진리를 찾는 사람의 경우도 이와 같다.

초보자일 경우 되도록 구도자의 티를 낸다.

개량 한복(韓服)에, 수염을 덥수룩하게 키우고,

흰 고무신에 밀짚모자를 쓰고…

 

그러나 진리에 가까워지면 그럴수록 구도자의 티를 내려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마침내 근본종지를 체험하게 되면 가장 평범한 인간이 된다.

평상심(平常心)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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