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빨리 병>에서 벗어나자

2006. 8. 19. 23:11야단법석

 

 

 

     <빨리 빨리 병>에서 벗어나자


우리는 언제인지 모르지만 모든 일에 <빨리, 빨리>라는 병이 생겼습니다. 가정은 물론이고 물건을 만드는 공장에서도, 아파트를 짓고, 항만과 도로건설을 하는 기업에서도, 국민의 복지와 경제정책을 수립하는 정부 관리들도, 법을 제정하고 판결하는 국회의원 나리들이나 판검사나리들도 모두가 한결같이 이 <빨리 빨리 병>에 물들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돈과 출세를 위해서, 목적을 위해서, 자기의 업적을 과시하기 위해서 마치 옛날 탐관오리들이 자기의 허물을 가리기 위해 백성들의 혈세(血稅)로 자기의 공덕비를 세우듯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목적달성의 결과이지 과정이 아니라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이는 <빨리 빨리>를 통하여 얻어진 여유를 즐기고자 하는 것도 아니며, 진정한 나의 행복과 이웃의 행복을 위한 것도 아닙니다. 이는 단지 빨리 결과를 보기 위한 마음의 조바심에 불과합니다. 분명 빠른 것은 느린 것보다 좋을 수도 있습니다. 정보통신부의 모 장관이 방송국 인터뷰에서 한국이 정보통신분야에 괄목한 성장을 이룬 중요한 요인 중에 하나는 모두가 <빨리, 빨리>라는 그 병에 기인한다고 말했습니다. 참으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소리입니다. 100m 경주에서는 빠른 자가 우승자가 됩니다. 그러나 삶의 행복에 있어서는 빠른 자가 결코 우승자의 행복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일찍 결혼한다고 한다고 행복한 삶이 되는 것도 아니고, 증권투자나 벤처사업과 같이 반짝이는 아이디어와 빠른 정보로 일확천금을 얻는다고 해서 삶이 갑자기 행복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국회위원이 되고, 장관이 된다고 해서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젊은 나이에 하버드 대학에서 철학박사나 문학박사 등을 따고, 옥스퍼드에서 영문학 박사를, 예일 대학에서 공학박사를 딴다고 해서 삶이 행복해 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주변에는 돈 많은 사람, 권력 있는 사람, 유식한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그들이 결코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남보다 빠르다는 것으로 남 앞에 거드름은 피울 수 있을지 몰라도 그 거드름이 행복은 되지는 못합니다. 그것은 또한 남의 선망은 받을지 몰라도 그 선망으로 자기가 행복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한 거드름이나 선망은 삶에 있어서 왜곡된 자기 위안이 될지는 몰라도 참된 행복은 아닙니다. 설령 그로 인하여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라면 그것은 분명 거짓되고 왜곡된 행복입니다.

그런 행복이란 본래 얼굴을 가린 가면과 같은 행복일 뿐입니다. 빠르다는 것은 끝없는 욕망의 한 부분을 충족할 수는 있겠지만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행복이란 욕망의 충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참된 <나>를 아는 것에서 오는 것입니다. 행복은 밖에서 오는 것도 아니며, 누구에게 과시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한 행복은 진실한 삶에서 오는 것입니다. 가면의 뒤편에 있는 그대의 참 얼굴이 바로 그대의 진면목임을 이해할 때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재물과 출세에 대한 욕심은 예로부터 변함이 없는 인간의 욕망인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 속담에도 <돈보고 싫어하는 귀신도 없다.>는 말이 있듯이 일본속담에도 <돈은 귀신도 움직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재물이란 산 사람을 물론 죽은 귀신도 움직일 정도로 위대한 숭배의 대상인 것은 사실입니다. 물질을 숭상하는 배금주의에 빠진 서양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동서양을 물론하고 돈과 재물과 명예에 대한 인간의 욕망이 그렇게 큰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돈을 벌기 위해 악착스러워지고 그래서 번 돈을 남 앞에 자랑을 하기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죽어서 묻힐 수백 평의 묘지에 값비싼 돌과 정원수로 치장하여 부(富)를 자랑하여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죽은 자의 묘지를 호화롭게 치장한다고 해서 죽은 자가 천당 가고 극락 갔다는 말을 들어 본적이 있습니까? 문상객이 줄을 잇는다고 해서 죽은 자가 행복해 지는 것도 아니며 산 자가 행복해 지는 것도 아닙니다. 축의금이나 부의금이 많이 들어온다고 행복이 그에 비례하여 오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의 삶은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허망하고 무상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중생들은 어리석게도 허망한 욕망에 빠져 참된 하나 뿐이 이 생명에 욕망의 족쇄를 채우지 못해 안달하고 있습니다. 참된 <나>를 망각하고 욕망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가슴 속에 욕망이란 돌멩이를 집어 놓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는 삶은 무상한 삶이요, 괴로운 번뇌의 삶입니다. 욕망에는 목적이 있지만 진정한 삶에는 목적이 없습니다. 단지 목적이라고 구태여 말한다면 그것은 여유 있고 무엇에도 구애받음이 없는 자유로운 삶일 뿐입니다.

가령 당신이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내일 죽는다는 사실을 안다면 지금의 재물과 권력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설령 죽음이 내일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그 죽음이 예고 없이 닥칩니다. 그 죽음 앞에서 이런 것들이 무슨 의미가 되겠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돈과 출세를 위해 안달하고 있습니다. <빨리, 빨리> 모든 것을 처리하고자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에 고통을 가져오고 번뇌를 증폭시키는 원인이 됩니다.

미국의 경제학자인 제레미 리프킨이란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서두름의 문명을 창조했다.』고.


그의 말에 따르면 시간의 문제는 바로 21세기의 문제라는 것이 됩니다. 사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시간에 갇혀 쫓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감옥에 갇힌 죄수는 얼굴이 창백하듯 우리 모두는 시간에 쫓겨 피곤함에 지쳐 있습니다. 퇴근길 버스나 지하철에서 탄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주름잡힌 얼굴에 일그러진 눈으로 죄수의 손목에 채운 수갑과 같이 손목에 채워진 시계를 바라보고 거기에 매여 하루를 보내고 있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 속에서도 우리는 모두 서두르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약삭빠른 기업가들은 시간에 쫓기는 우리를 위하여 수많은 소비물품들을 만들어 시간에 대한 우리의 바램을 충족시키고자 밤낮을 가리지 않고 <빨리, 빨리> 분투하고 있습니다. 집안에 앉아서 전화하나로 송금도 하고 입금도 하는 텔레뱅킹 서비스, 어느 늦은 야밤에도 마음대로 물건을 살 수 있는 24시간 편의점, 즉석에 볼 수 있는 속성사진, 간단히 즐길 수 있다는 패스트푸드점, 심지어는 즉석에서 알 수 있는 초음파를 이용한 태아감별법까지 … 전화나 전기보다 빠르게 지구촌을 잇는 초고속 인터넷 통신망, 인공지능 컴퓨터와 언제 어디서나 휴대할 수 있고, 수많은 정보를 간단히 접할 수 있는 인터넷 노트북 컴퓨터 같은 정보매체의 사용자들은 지금보다 더 빠른 인공두뇌를 가진 전자뇌를 만들어 내고자 안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욱더 <느린 것>을 참을 줄 아는, <느린 것>을 즐길 수 있는 여유를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빠르게 자동처리 되는 것만을 찾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발맞추어 기업은 하루가 멀다 하고 신상품을 만들어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욕망에 부채질하여, 시간의 감옥 속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사람들은 이제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기다릴 줄 아는 마음의 여유를 상실하고 시간의 더딤을 참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무엇이든 <빨리, 빨리>처리하지 않으면 시간이 낭비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욕망의 충족에는 시간의 가치가 절대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시간이 곧 돈이다>라는 슬로건도 만들어 진 것입니다.

 

 


그러나 행복은 시간을 벗어나 있습니다. 시간이 돈이 될지는 모르나 행복은 되지 않습니다. 행복은 결코 돈으로 살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서두름>에 매달려 이를 뿌리치지 못합니다. 내면의 진정한 행복을 구하는 자는 밖으로는 시대에 따라가지 못하는 느린 자로 보여 집니다. 그래서 <느린 자>를 우둔한 자로, 도태된 자로 비난하고 불쌍히 여깁니다. 그럼으로 여유를 가지고 자기를 찾는 사람들은 현대인으로서 부적함한 자로  밀려나고 것입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순간적인 것이 지속적인 것보다 더 효율적이고 더 경제적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현대 심리학의 대가라 일컫는 칼 융(Carl G. Jung. 1875-1961)이란 사람이 이르길

「다가오는 모든 재앙의 근원은 바로 인간이다. 인간자신이 가장 큰 위험인데도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너무도 모르고 있다.」고 했습니다.


삶의 진정한 행복은 효율이나 경제성이 개입되지 않습니다. 시간이 중요시되는 것은 경제성과 효율성에 있습니다. 그럼으로 PC나 핸드폰, 텔레비전이나 비디오게임 같은 순간적인 것에 빠져 지내는 현대인들이 자기를 돌아보고 참으로 진정한 삶의 가치를 깨닫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잠시만이라도 한번 고요히 앉아 자기 주변을 둘러보십시다.

시간 속에 매달려 쫓겨 온 우리는 바쁘게 살아가면서 내 이웃과 내가 살고 있는 이 환경과 관계를 맺어왔던 많은 의미 깊은 것들을 모두 잃어버리고 무질서와 혼돈의 고통을 겪고 있지 않습니까?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어떤 것이 더 진실한 것인지조차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뛰어가지만 뛰어 가야할 곳을 모르고 그저 앞만 보고 분주히 뛰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욕망은 또 다른 욕망을 부를 뿐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습니다.

가령 장사를 해서 돈을 벌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집을 사고, 더 벌면 빌딩도 사고, 땅을 삽니다. 그리고 더 벌게 되면 더 큰 빌딩, 더 넓은 땅을 살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인생은 흘러가고 죽음이 다가오면 무상함을 느끼게 됩니다. 아무리 많은 재산을 모았다고 해도 그 돈을 저승에 가지고 갈 수 있습니까? 세상의 것들은 모두가 이 땅에 두고 가야합니다. 땅도 집도 빌딩도 그저 세상에 남겨 두고 가야 합니다. 아무리 높은 권력도, 아무리 위대한 명성을 얻었다고 해도 그 모두를 이 세상에 두고 가야하는 것입니다.

 

어느 미국대학에서 철학교수가 학생들에게 코끼리에 대해 글을 써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한 학생이 이렇게 썼다고 합니다.

『코끼리를 더 크고, 더 튼튼하게 하는 법』


코끼리는 그 자체만으로도 완벽한 창조물입니다. 인간의 진면목 또한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는 완전한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모두가 이와 같이 자기를 더 크게, 더 튼튼하게 만들려고 조바심을 내고 있습니다. 마치 공기가 가득 찬 애드벌룬이 하늘 높이 뜨듯이, 그렇게 높이 더 높이 띄우지 못해 안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기가 빠지면 그 어떤 애드벌룬이라 할지라도 땅에 떨어지고 찢어지게 마련입니다. 너무 많이 공기를 불어넣으면 일찍 터지기도 합니다. 삶을 이렇게 살아야만 한다면 정말로 허망하지 않습니까?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거북이는 목적지를 향해 기어갔습니다. 달려간 것이 아니라 목적지를 향해 열심히 기어갔습니다. 그는 가야할 목적지를 분명히 알고 그렇게 쉬지 않고 기어갔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토끼는 뛰어서 갔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거북이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토끼는 자기 자신을 너무 과신한 나머지 자신의 <빠름>에 자만심이 생겼습니다. 너무 과신한 나머지 토끼는 목적지를 잊어버리고, 잠을 잤습니다. 자기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를 잊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는 거북이보다 빠른 발을 가졌지만 목적지에는 빨리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현대를 분주하게 살아가는 우리의 삶도 이 토끼와 거북이의 이야기와 다를 바 없습니다. 머리도 좋고 화려하며 능력도 뛰어난 멋진 토끼가 마침내 종국에 가서는 실패하지만 토끼보다 빠르지도 못하고 보기에도 우둔하지만 깊이 사고하고 지속적으로 자기의 길을 기어가는 거북이의 <느림>을 이 우화를 통해서 반조(返照)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는 삶의 과정에서 이와 유사한 경기에 어떤 식으로든 참여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어느 한 방법을 매순간 선택해야만 하는 경우 토끼처럼 그저 빨리 빨리 앞으로 나아가야 할지, 아니면 거북이처럼 느리지만 제 길만 가야할 지를 선택하는데 망설이게 됩니다.


한 송이 이름 없는 꽃이라 할지라도 그렇게 아름답게 피기 위해서는 추운 겨울을 보내야 합니다. 맛있는 술이 익기 위해서는 발효되는 시간을 충분히 주어야 합니다. 해가 더해져야만 나무의 나이테가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의 대상에게 하나의 기억거리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해주며, 각각의 인간과 그 인간의 삶의 경험을 아름답게 완성해주는 것은 빠르고 순간적인 것이 결코 아님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느끼고 있으면서도 무관심 속에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눈은 뜨고 있으면서 꿈을 꾸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중생구제란 어느 종교에서 말하듯 선택된 사람을 천국에 데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종말론 자들이 말하듯이 어느 날 갑자기 하늘이 열리고 선택받은 자들만이 천국에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을 돌아보고 생명의 참 의미를 자각할 때 그것이 바로 천국이요, 열반임을 일깨워 주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시간에 갇혀 안달하는 중생들에게 자신을 돌아보는 여유를 갖게 하는 것, 그것은 바로 우리 모두의 속도를 한 템포 늦추고 우리의 손과 발에 브레이크를 걸어야 할 때임을 깨닫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를 아는 것은 행복의 지름길이요, 영적인 수행의 목적이 됩니다. 그래서 모든 구도자나 부처님과 같은 성인들은 모든 영적 수행의 목적은 <참된 자아>를 아는 데에 있다고 강조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서에 보면 『네 이웃을 사랑하기를 너 자신을 사랑하듯 하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이웃사람을 어떻게 찾고 더 나아가 그 이웃 안에 있는 자기 자신을 어떻게 사랑하겠습니까?


그럼으로 여러분은 <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이웃사람의 자아(自我) 속에 있는 여러분 자신을 볼 수 있도록 자신의 삶에서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을,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가령 예를 들어 내가 여러분께 여러분이 사과를 사랑하듯이 모든 과일을 사랑하라고 했다고 합시다. 만약 여러분이 사과가 무엇인지를 모른다면 다른 과일들 속에서 사과를 가려낸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와 꼭 마찬가지로 생명체로서의 모든 사람, 모든 사물을 사랑하려면 반드시 여러분의 참된 <나>를 자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의 마음 깊이 자리한 참된 <나>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이름을 하나님이라 해도 좋고, 알라신(神)이라고 해도 좋고, 부처라고 해도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이름이 아니라, 그 무엇이 아니라

당신 스스로 본래의 당신 자신과 만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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