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자.

2006. 8. 9. 00:22야단법석

 

 

삶의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자.


중생들이 사는 이 세계를 고해(苦海)라 한다.

기쁨보다는 슬픔과 고통스러운 일이 더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고통스럽고 마음 아프게 하는 일들이

바로 나의 내면을 일깨우는 선지식임을 자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옛 선지식들은

『악연(惡緣)이 나의 선지식이다.』 라고 한 것이다.


공항부근에 사는 사람이라면 이런 경험을 느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비행기가 마을 위를 지나가고 있다.

그 비행기가 지나갈 때마다 요란한 굉음과 소음이 들린다.

귀가 아프도록 시끄럽다.

그러나 그 비행기가 지나가고 나면 더 깊은 침묵이 뒤따라온다.

비행기가 지나가기 전에는 그렇게까지 조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비행기가 지나가자 더 조용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이런 경험도 있을 것이다.

어두운 밤에 길을 걷고 있을 때

갑자기 어떤 자동차가 빠른 속도로 옆을 지나간다.

그때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너무 밝아 눈이 부시게 된다.

그리고 차가 지나가고 나면 그 전보다 더 어두움을 느낀다.


대립되는 것을 통해서, 대립의 긴장을 통해서,

모든 것은 살아가고 더욱더 깊어진다.

멀리 가 버리면 다시 가까워지고

반대쪽으로 가면 다시 더욱 가까워진다.

대립된 된 것을 통해서

우리는 조용한 침묵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요란스럽고 시끄러웠든 갖가지 사건과 소용돌이를 통해서

우리는 더 고요한 침묵을 배울 수 있어야 한다.

 

내면의 변화가 없는 삶이란 기계적인 삶이요, 침체한 삶이 된다.

우리가 기대하고 바라던 갖가지 희망과

대립되는 갖가지 고통을 통해서 움직이고 변화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삶의 모든 것이 고통스러워진다.

그 고통을 인내하고 기다리면 삶은 더 진부해지고 지루해지게 된다.


삶이 진부하고 지루하게 되면

그대는 그대 자신만 생각하게 되고 매사에 완고한 사람이 된다.

완고한 사람은 남의 일에 끼어들고 싶어 하고

무엇과 누구와 비교하길 좋아하게 되고,

무엇이던 판단하거나 결정하기를 좋아하게 된다.

그래서 갈등이 생기고, 괴로움을 잉태하게 되는 것이다.


종교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코란>과 <칼>을 선택하라면 그대는 완고해 질 수밖에 없다.

『나 이외의 다른 신을 믿지 말라.』고 한다면

그대의 믿음은 자기 자신만의 완고한 신앙을 고집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성인병과 같이 신성화된 질병일 뿐이다.

어떤 사람이 종교적이 된다고 할 때

항상 이런 질병이 생길 가능성이 있다.


지금의 중동사태를 보라.

이슬람과 기독교가 좋은 예를 보이고 있지 않은가?

어떤 사람이 종교적으로 될 때 완고한 신앙이라는 병에 걸리기 쉽다.

그러므로 지금은 종교적이면서

완고하지 않은 사람을 찾기가 매우 힘들게 되어있다.

 

 

지금 우리사회는 부(富)와 명예라는 새로운 신이 숭배되어지고 있고

이를 따르는 맹신도가 너무나 많아졌다.

부와 명예가 자본주의의 새로운 신으로 자리 잡고 있다.

돈과 권력이 신종교의 아미타불이 되어 절대적 신으로,

구세주로 숭배되고 있다.

그래서 이 신종교가 판치는 사회에서

부와 명예로부터 자유로운 이단자(?)를 찾기란

진실로 어렵게 되어가고 있다.


삶을 보라.

어디에나 삶은 모순이 가득 차 있다.

모순에 차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각자

자기 나름대로 철학을 가지고 있다.

자기 신념에 대한 옹고집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바로 진리를 가로막는 족쇄요,

삶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그럼으로 그대가 누가 되었든 항상 유동적이 되어야 한다.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그대 주위에 고정된 틀을 가져서는 안 된다.

항상 움직이고 흘러야 한다.

고통과 변화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삶이란 여름이면서 겨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삶이란 행복스럽고, 또 아름다울 수도 있지만

때로는 고통스럽고 추할 수도 있는 것이다.


변화하는 삶을 두려워하지도 말고 피하지도 말자.

고통을 두려워하기 보다는 고통을 통해서 침묵을 배우자

완고하고 지루한 삶에 빠지지 말자

모든 악연은 선지식으로 여기고 삶의 변화를 승화시켜 나아가자.


자신의 신앙을 고집하는 완고한 자가 아니라

악연을 선지식으로 여기는 진리를 추구하는 자가 되자

완고한 미망에 젖어 헛것을 찾는 <작은 나>를 버리고,

변화하는 그 삶 속에서 <참 나>를 찾아보자.

고착화된 일상(日常)의 삶 속에서 마음의 눈을 뜨면

세상 모든 것은 아름답고 신성하지 않는 것이 없다.

굳어 있는 마음의 문을 열면 이웃 아닌 사람들이 없다.

'야단법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如是我聞)  (0) 2006.08.27
<빨리 빨리 병>에서 벗어나자  (0) 2006.08.19
훼방꾼들  (0) 2006.07.27
강물과 싸우지 말라  (0) 2006.07.06
장미는 장미이고, 장미일 뿐이다.  (0) 2006.07.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