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7. 2. 11:23ㆍ야단법석
장미는 장미이고, 장미일 뿐이다.
삶은 답이 없습니다.
삶은 단지 삶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많은 질문을 합니다.
『삶이란 무엇입니까?』
『부처란 무엇입니까?』
당신은 갖가지 답을 늘어놓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말도『삶은 이것이다,』
『부처란 이것이다』라고 짤라서 말할 수 없습니다.
양파처럼 껍데기는 말할 수 있어도 알맹이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선사(禪師)들은 단지 이렇게 말합니다.
『꽃은 붉고, 버들은 푸르다.』
사람 사는 것도, 부처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 이상 달리 말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이상의 말은 사족(蛇足)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시(詩)가 탄생합니다.
철학이 아니라 시(詩)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 장미가 있습니다.
장미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무어라 말하겠습니까.
『장미는 장미이고, 장미일 따름입니다.』
달리 그 이상은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장미이다> 라는 말을 빼놓고는 장미에 대해
무엇 하나 말할 것이 없습니다. 장미에 대해 그대가 하는 말은
모두 장미에 대해 늘어놓는 거짓말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장미는 그저 장미가 지닌 불가해한 아름다움 속에 있을 뿐입니다.
장미는 알 수 없는 향기를 풍기며 사실로서 존재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대는 장미를 어떤 이론을 가지고도 풀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대가 장미를 어떤 이론을 가지고 풀이한다 해도
그것은 무엇인가 다른 것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꽃잎과 가시와 향기를 가지고 설명해도
그것은 결코 장미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거울 속에 비친 영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참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장미의 본질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장미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장미는 장미이고 장미일 뿐이다.』
이 말 밖에 할 수 없습니다. 더 이상 아무것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대가 [장미는 장미이고, 장미일 뿐이다.]라고 말할 때는
아무 것도 말하고 있지 않은 것이 됩니다.
만일 그대가 논리학자에게 찾아간다면 이 같은 말은
같은 말의 반복이라고 할 것입니다. 불필요한 반복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대는 아무 것도 말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무엇도 말을 통해서는 나타낼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답은 없습니다. 침묵만이 답입니다.
더 이상 그 질문에 응답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유일한 길은 질문의 대답이 아니고 침묵입니다.
그 침묵은 바로 그대의 감응(感應)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대는 삶과 죽음에 많은 고민도 하고 생각도 많았습니다.
논리적이고 철학적으로 많은 이론과 가설들을
끊임없어 만들어 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논리와 철학은 단지 쓰레기에 불과합니다.
삶은 어떠한 해답도 없이 그냥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음 또한 어떤 해답도 없이 그냥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그대가, 삶에 대해여, 죽음에 대하여
궁극(窮極)에 대하여, 사물의 근저에 대하여,
바로 존재의 바닥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나는 누구인가?』를 찾고 있는 것이 됩니다.
그때는 그 어떤 철학도 아무런 해답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선인들은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란 화두를 둔 것입니다.
철학은 여러 세기 동안 심사숙고하며 그것에 대답을 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도,
그리고 끝없는 내일까지도 이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노력은 모두 헛수고로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어느 유명한 철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젊었을 때 나는 학자나 성자들을 열심히 쫓아다니며
삶과 죽음에 대한 위대한 말들을 들었다.
하지만 언제나 내가 들어가는 문과 나오는 문은 똑같았다.』
삶과 죽음을 둘러싸고 이런 저런 수많은 이야기와
수많은 철학들이 돌고 돕니다. 그러나 결코 정확한 초점을 잡지 못하고
주위에서 빙빙 돌고 있을 뿐입니다. 호기심을 자극하고, 흥미진진한
수많은 이야기들이 계속되고 있지만 거기서 나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화(寓話)같은 이야기 아니면 그저 횡설수설로 떠들고 있을 뿐입니다.
깊이 살펴보면 거기에서는 무엇 하나 나올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삶은 철학적 명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해답일지라도 철학적인 것은 해답이 될 수 없습니다.
삶이란 실존적인 것입니다.
오로지 실존적인 해답만이 그대를 만족시켜 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서 주워 모은 해답이 아니고,
마음에서 조립되어 꾸며진 해답이 아니며,
경전에서 빌려 온 해답이 아닌,
오로지 그대의 존재로부터 솟아오른 해답만이
그대의 전 운명을 꽃피울 수 있고,
완전한 상태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깨달음이란 것입니다.
그것은 해답이 아닌 하나의 깨달음,
해답이 아닌 하나의 계시,
해답이 아닌 하나의 실존적인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선에서 추구하는 깨달음이란 이런 것입니다.
탐구란 실존적인 것입니다. 선(禪)은 가장 곧은길입니다
그것은 바로 표적을 향하여 똑바로 날아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결코 이리저리 헤매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위를 빙빙 도는 것이 아니고
화살같이 똑바로 날아가기 때문입니다.
오스트리아 철학자로 서양에서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숭앙받았던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신비한 것은
이 세상이 어떻다는 것이 아니고,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세상이 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짜 신비스런 것입니다.
그대가 어떻게 여기에 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여기에 왜 왔는가가 아니라,
그대가 여기에 왜 있는가 하는 목적이 아니라
그대가 그냥 여기에 있다는 사실만이 가장 위대한 신비인 것입니다.
그대가 여기에 있고 내가 있다는 그 사실만이 최대의 신비인 것입니다.
그래서『장미는 장미이고 장미일 뿐이다.』
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꽃은 붉고 버들은 푸르다.』
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모든 질문들은 보기에 따라서는 매우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대답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마음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그대와 진실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장벽일 뿐입니다.
마음은 계속해서 질문을 만들어 냅니다.
그리하여 그것은 그대의 탐구를 지연시킵니다.
그대가 수많은 질문을 하고 있을 때,
마음은 그대가 위대한 탐구자라는 것을 확신시키려 합니다.
그러나 질문들로 인하여
그대는 주위에 구름 같은 병풍을 둘러쳐놓은 격이 됩니다.
처음엔 그대가 질문을 합니다.
그러나 질문이 곧 그대를 둘러싸게 될 것입니다.
다음엔 그대는 어떤 해답을 찾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나 곧 해답이 그대를 둘러싸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대와 있는 그대로 발가벗은 그대의 삶 사이에는
언제 하나의 장벽이 남게 될 것입니다.
진정으로 추구해야 하는 것은 삶 그 자체와의 만남입니다.
있는 그대로 발가벗은 삶과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사들은
『꽃은 붉고 버들은 푸르다.』고 말한 것입니다.
시인들도 말합니다.
『장미는 장미이고, 장미일 뿐이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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