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원과 같은 삶을 살자

2006. 5. 30. 00:07야단법석

 

 

<안개낀 정선 두위산의 어느 등산객>

 

초원과 같은 삶을 살자


징기스칸의 본명은 <테무진>이었습니다.

<테무진>이란 이름은 그의 아버지 <예수게이>가

전쟁에서 패배시킨 적장(敵將)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라고 합니다.


테무진의 아버지 예수게이는

불화관계에 있던 정적 타타르족에 의해 독살됩니다.

아버지가 죽자 그의 어머니 호엘운과 테무진은 축출당합니다.

테무진은 하루아침에 왕족에서 영세한 가문으로 몰락하고 맙니다.

그래서 비천한 유목민의 삶이 시작됩니다.

극심한 가난으로 베고 품을 참지 못한 어린 동생은

가족 몰래 도둑질까지 하게 됩니다.

그러나 테무진은 그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동생을 타일러 봅니다.

그러나 당장 베고픔을 참지 못한 동생은

계속 몰래 도둑질을 하게 됩니다.

마침내 그는 동생이 도둑질하는 현장을 목격하고는

그 자리에서 동생을 화살로 죽이고 맙니다.


테무진의 아버지 예수게이는

생전에 장차 테무진의 아내 될 정혼녀로

<보르테> 라는 여인을 정해두었습니다.

테무진이 성장하여 결혼 정년기가 되자

정혼녀 보르테는 부친들이 맺은 약속에 따라

신랑 될 테무진을 찾아옵니다.

그러나 넉넉지 못한 살림이라

테무진은 보르테를 당분간 마을에 머물게 하고 일터로 나갑니다.

그러나 테무진이 없는 사이에

침략자 ‘메르키트족’ 사람들에 의해 강간당하고 맙니다.

메르키트족은 자기의 여자가 될 ‘호엘룬’을

테무진의 아버지 예수게이가 그들로부터 강탈하여

자기의 아내를 삼았기 때문에

예수게이가 죽자 그의 아들 테무진에게 같은 복수한 것입니다.

아버지의 빚을 그의 아들인 테무진이 진 셈이 됩니다.

테무진이 집에 돌아와 보니 아내는 남의 자식을 임신하고 있었습니다.

분노한 테무진은 ‘보르테’를 마을 밖으로 내쫓아 유폐시킵니다.

선친의 유언을 따라 남편을 찾아왔든 보르테는

선친들이 저질은 죗값으로 강도들에게 강간당하고,

남편인 테무진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감금까지 당하는 슬픔과 고통 속에서 살게 됩니다.

달이 차서 보르테가 출산을 하게 되지만

테무진은 그녀를 핍박하고 만나주지도 않습니다.


타락의 나락을 걷고 있는 테무진과 보르테의 슬픔은 깊어갔습니다.

이를 보다 못해 어머니가 아들을 불러 타이릅니다.


“테무진아, 초원을 보라.

저 초원은 추하고 깨끗함을 가리지 않고

모든 생명을 받아드린다.

그럼으로 너도 초원처럼 되어야 한다.

자신이 핍박당하였다고 하여

남을 핍박하는 그런 사람이 되지 말고

모든 생명을 중히 여겨 거두는 초원이 되어야 한다.

그런 사람이 진정 위대한 사람이다.”


방황하든 테무진은 어머니의 이 말에 감동되어

보르테에 대한 모든 원한과 미움을 거두고

보르테와 그 자식을 받아드립니다.

그리고 자신을 배신한 부족까지

초원이 모든 것을 받아드리듯 받아드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재기하여 세계 역사상 다시없는 대 제국을 세우게 됩니다.

그가 바로 위대한 영웅 징기스칸입니다.

 

 

<두위산의 숲속>

 

<숫타니파아타>에 이른 말이 있습니다.

『욕망에 이끌리고 욕심에 사로잡힌 자가

어찌 자기의 견해를 벗어날 수 있겠는가?

그는 자기가 완전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그대로 행한다.

그리고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언제나 입 밖에 내게 된다.』


마음이란 한번 미움을 품고, 원한을 품으면

그에 대한 자기의 입장만 생각하게 되고,

오로지 이에 대한 복수할 생각만이 떠오르게 됩니다.

본래 우리의 마음이란 열면 온 우주를 담을 수 있지만

닫으면 바늘하나 꽂을 곳이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자기 아내가 남에게 강간을 당하고,

따르든 부족이 자기를 배반했지만

테무진은 그 모든 것을 거두어 들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인류역사상 가장 방대한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습니다.

그 마음이 초원처럼 되었기에 모든 것을 거둘 수 있었든 것입니다. 


초원에는 아름다운 꽃도 피지만

보기 싫은 잡초도 자랍니다.

초원에는 풀과 나무가 자리싸움을 하지 않습니다.

초원에는 식물과 곤충이 공생(共生)을 합니다.

초원에는 미움도 사랑도 거부되지 않습니다.

초원에는 추함과 아름다움이 거부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도 그런 초원처럼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숫타나파아타>는 말합니다.

『마음속으로 노여움을 모르고,

 세상의 흥망성쇠를 초월한 수행자는

이 세상과 저 세상을 다 함께 버린다.

마치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버리듯이.』


세상사 일이란 항상 시비가 일고,

사랑과 미움이 일게 마련이고,

갈등과 원한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뱀이 허물을 벗듯이

그 모든 부정적인 마음을 버리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돌려

관용과 수용의 삶을 산다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행복은 반드시 찾아들게 될 것입니다.

그럼으로 미움과 원한에 대한,

그 어떤 사소한 것이라도

그것을 거부하지 않고 거두어드리는

초원처럼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초원처럼 관용과 수용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관용과 수용의 삶은

비록 보잘 것 없는 작은 것이라도,

그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물방울이 비록 작더라도

그것이 모이고 쌓여서 큰 그릇이 가득 차듯

관용과 수용도

남이 알아주던, 알아주지 아니하던,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되어

그것이 쌓여서 큰 것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우리들 모두가

초원과 같은

그런 관용과 수용의 마음을 지니고 산다면

이 세상이 바로 극락이 될 것입니다.

언제나 맑고 향기로운 삶을

우리 모두가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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