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6. 23. 07:45ㆍ야단법석
구도(6)
선어(禪語)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득수반지미족기(得樹攀枝未足奇)
현애철수장부아(懸崖撒手丈夫兒)』
발하나 의지할 곳 없는 낭떠러지에서
간신히 붙잡고 의지하던
그 나뭇가지마저 놓을 수 있어야
진실로 대장부라고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진리를 깨닫기 위한
선(禪)의 궁극적 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일체 경계를 놓아버린 완전한 무소유를 의미합니다.
최후의 마지막 한 경계까지 놓아 버려야
진리를 깨우친다는 의미입니다.
그 최후의 경계란 곧 생명입니다.
그 생명에 대한 집착까지도 놓아 버렸을 때라야
진리를 체득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진리를 탐구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탐구자는 자기의 전 생애를 걸지 않으면
진실로 거기에 이르기도, 알기도 어렵기 때문입니다.
달마대사께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보라는 달은 안 보고 왜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느냐?』고.
가리키는 손가락은 곧 경전입니다.
만일 그대가 경전을 따른다면
그대는 지도책을 따라가는 것이 됩니다.
그대가 어떤 종교나 종파, 교회를 따른다면
그때도 그대는 지도를 가지고 따라가고 있는 셈이 됩니다.
그러나 진리에 대해선 어떤 종류의 지도도 있을 수 없습니다.
진리는 사사(私事)로운 것이지
공공(公共)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도는 공공의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도 따르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지도에는 고속도로만 표시되어 있지
좁은 오솔길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종교는 오솔길이지 고속도로가 아닙니다.
어떤 선지식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오늘 날 종교는 사라지고 종교인들만 가득하다.』고.
크리스챤으로, 불교도로서 신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대는 그대 자신으로서만이 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경전(經典)이나 성전(聖典)들은
강으로 우리를 인도할지 몰라도
강을 건너는 것은 바로 우리들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누구인가 다른 사람들의 길을 따라서는 신에 이를 수 없습니다.
진리를 찾아 가는 길은 갖가지 회의를 느끼는 순간이 옵니다.
차라리 찾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후회도 생깁니다.
때로는 삶의 문제로 번민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강한 질투심마저 느낄 정도로 후회와 좌절감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그러나 걱정할 것도, 후회할 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순간이 진정한 탐구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망설임과 회의, 좌절과 절망은 마음의 저항입니다.
마음은 언제나 지도를 따르는 데서
행복감을 느껴 왔으므로 저항감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알려진 것에 대해서는 마음은 편안히 주인이 될 수 있으나
미지의 것에는, 불가사의한 것에 대해서는
마음은 완전히 객이 되어 당황하기 때문입니다.
이 마음은
진실로 지금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회의와 좌절에 빠진 마음은 쉽게 지치고 피로를 느낍니다.
그리하여 마음은 말합니다.
[너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냐?
편한하고 즐거운 삶을 왜 그렇게 시간을 낭비하고 있느냐?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 남들처럼 왜 살지 않느냐?
혼자 잘난 척 하지 말고 남들 다 가는 길을 따르라.]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순간입니다.
아무리 힘이 빠지고
절망과 회의의 좌절감을 느낀다 할지라도
계속 정진해 나갈 수 있다면
그대의 이런 마음은 떨어져 나갈 것입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첫 명상의 섬광이 나타나는 것이다.
진리와 수행은 길은 멀고 험한 길입니다.
<주저주저> 하다가
<저주>로 끝나지 않도록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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