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법인(제1과)

2006. 5. 21. 02:16야단법석

 

 

 제1과  3법인(三法印)이란 무엇인가?

 

3법인은 불교(佛敎)의 대의(大義)라 할 수 있는 중요한 교리다. 먼저 불교라는 말을 살펴보자. 불교(佛敎)라는 말의 불(佛)은 부처님을 가리키는 말이고, 교(敎)는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그럼으로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뜻이 된다. 또 불(佛)이란 말은 인도의 고대어인 산스크리트어로 붇다(Buddha)에서 나온 말이다. 이는 “각(覺)”이라는 뜻이다. 각(覺)이란 “깨닫다”는 뜻이다. 교(敎)는 가르침이니 이는 곧 진리(眞理)의 가르침을 뜻한다. 그럼으로 불교는 “깨달음의 진리”라는 뜻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진리는 하나인가, 둘인가?

진리는 오로지 하나다.

여기서 “하나”라는 의미는 숫자로서 하나(1)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상대적인 것을 벗어나 있는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단지 “하나”라고 하는 것이다. 진리가 둘이라면 상대적이다.

가령 착한 것만이 오로지 진리라고 한다면 악한 것은 진리가 아닐 것이다. 악한 것이 없다면 선(善)하다는 것은 무엇을 기준으로 하여 선(善)이라고 정할 것인가? 선(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악(惡)을 상대하여 정해질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악(惡)은 선(善)을 기준으로 하여 정해진다. 악이 없으면 선도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상대적인 것은 진리가 될 수가 없다.

진리라면 절대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선과 악을 벗어나 있으면서 선과 악을 함께 지니고 있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의식은 이렇게 둘을 동시에 인식할 수가 없다. 선을 생각하지 않으면 악을 말할 수가 없고, 악을 생각하지 않으면 선을 말할  수가 없다. 선과 악을 따로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 우리들 중생들이 갖는 마음이요, 의식이다.

그럼으로 절대적인 진리는 단순히 말로서 “진리는 무엇이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말과 생각을 벗어난 것이기 때문에

 “언어도단(言語道斷)”이라고들 하는 것이다.

 

상대적인 것은 말이나 문자로 표현될 수 있지만 절대적인 것은 말과 글을 벗어나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 진리는 말과 글을 통하여 설명되어 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 중생은 말과 글을 통하지 아니하고는 이 뜻에 접근 할 수가 없다. 그럼으로 성인이나 현자는 이 하나인 진리를 일깨우기 위해서

여러 가지 수단과 방법이 동원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29세에 출가하여 35세에 정각을 이루신 후 80세에 반열반(般涅槃)에 드시기 전까지 40여년을 오로지 중생교화를 펴신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대장경이란 책으로 엮은 경문만 따지더라도 흔히들 8만4천이라고 한다. 만약 문자화되지 못한 것까지 아울러 유추한다면 분명 이 보다 더 많을 것임이 자명한 일이다. 그러나 이 모든 가르침은

절대적인 하나인 진리를 설명하기 위한 것에 불과 한 것이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중생들을 위하여 설명하고자 했기 때문에

수만 가지 비유와 수많은 언어적 표현을 사용한 것뿐이다.

그럼으로 그 하나인 진리를 펼치면 8만4천의 법이 되지만 접으면 단지 하나일 뿐인 것이다.

 

삼법인이란 바로 하나인 진리를 3개로 펼쳐 놓은 것이다.

따라서 그 많은 가르침 중에서 부처님의 근본도리를 가장 잘 요약된 것이

바로 삼법인(三法印)의 가르침인 것이다.


법인(法印)의 법(法)이란 일체 모든 것을 지칭한 것을 가리키고

인(印)은 불교에서 지혜와 같은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란 말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지식(知識: knowledge)도 아니며, 지혜(智慧: wisdom)도 아니다. 지식은 사물(事物)이나 문자 등을 통하여, 대상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을 말한다. 지혜란 시간이 개입되어져 삶에서 얻어지는 것으로 이 또한 보고, 듣고, 만지고 할 수 있는 객관세계부터로 얻어 지는 것이다.

예컨대 농사를 한 번도 지어보지 못한 자라도 책이나 매스컴을 통하여 훌륭한 농사법을 알 수 있다. 그럼으로 20세 전후에 농학박사도 될 수 있고,

또 머리가 좋다면 철학박사 내지 갖가지 박사학위를 받을 수도 있다.

이것은 지식이다.

이에 반하여 글자를 알지 못하는 농부는 매년 논과 밭에서 농사를 짓는 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농사법을 경험하게 되고, 정월 대보름 비와 눈의 량으로 그 해의 농사가 잘 될 것인지, 수확이 많을 것인지 아닌지를 미리 알기도 한다. 이는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책이나 다른 문자를 통해서 얻어진 것이 아니다. 이는 농부가 경험을 통하여 스스로 터득한 농사법에 대한 지혜이다. 이런 지혜는 문자를 통한 것이 아니라 삶이란 긴 시간을 통하여 경험적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지식과 지혜는 모두 밖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밖에서 온다는 것은 사물을 통하여 경험적으로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지혜는 지식과 달라 시간이 개입되어 있는 것이다.

옛 사람들이 말하기를

“노인은 지혜롭다”고 흔히들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노인은 많은 세월을 보낸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인(印)이 지혜라고 하는 것은 이런 지식이나 노인의 지혜가 아니라 반야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다.

지혜와 반야의 지혜는 무엇이 다른가?

이 반야의 지혜는 밖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것은 사물을 통해서 아는 것도 아니고, 시간이 흘러야 아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모든 삶을 통한 모든 지식과 지혜가 사라진 고요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도장을 찍듯 일시에 모든 것의 궁극적 성질을 알 수 있기 때문에 법(法)의 도장 즉 인(印)이라고 한 것이다.


사물의 궁극적 성질을 일러 법성이라고 하고 또 법계라 하며 진여라고도 한다. 그 이름은 많지만 그 뜻은 사물의 근본된 성품, 성질을 말하는 것이다. 그 법성의 존재를 법이라고 한다. 그 법은 진실로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 법을 일러 또한 묘법(妙法)이라고도 한다.


묘(妙)란 절대적이란 뜻이다.

범부의 지식과 지혜로 알 수 없는 불가사의 한 것이기 때문에 묘(妙)라 한 것이다. 그럼으로 경전은 이를『묘법(妙法)의 인새(印璽)』라고 했다.

우리가 집을 사거나 어떤 중요한 계약을 맺을 때 마지막에 도장을 찍는다. 이 도장은 곧 모든 내용이 진실이며 불변임을 증명하는 증표인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묘법은 진실하여 부동(不動), 불변(不變)함으로

인(印: 도장)이라는 비유를 사용한 것이다.


그런데 그 묘법을 깨달은 이는 누구인가?

이는 바로 부처님이다. 그럼으로 법인(法印)이란

부처님(佛)의 정법(正法)을 증명하는 것임을 뜻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법인을 안다는 것은 곧 부처님이 깨달은 법의 정수(精髓)를 안다는 뜻이 된다. 용수의 <지도론>22에는 이를

『불(佛)의 법인을 얻어서 통달(通達)무애(無碍)함이

왕의 옥새(王印)를 얻어서 어느 곳에서나 어려움이 없는 것과 같다.』

라고 했다.


 <왕의 옥새를 얻는다.>라는 말은 <어명(御命)>과 같은 말이다.

왕의 명령은 절대적이기 때문에 아무도 이를 그르칠 수가 없는 것과 같이, 삼법인을 안다는 것은 왕의 옥새를 얻음과 같이 절대적 진리의 진수를 안다는 말이다. 진리의 진수를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곧 깨달음을 얻는다는 뜻이다.

깨달음이란 모든 존재의 궁극적인 본성을 아는 것이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절대적인 것이다.

그럼으로 삼법인을 안다는 것은 곧 부처를 안다는 말이며,

불법을 안다는 말이며, 진리의 진수를 안다는 것이며,

모든 존재의 궁극적 본성을 자각한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삼법인이란 

(1) 제행무상인(諸行無常印)

(2) 제법무아인(諸法無我印)

(3) 열반적정인(涅槃寂靜印)을 말한다.


흐르는 곡: 울엄니/최성남(대금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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