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행무상인(제2과)

2006. 5. 21. 02:15야단법석

 

 

 

 

(제2과)  제행무상인(諸行無常印)


제행무상(諸行無常)이란 ‘일체 모든 것은 덧없다.’라는 뜻이다.

불교용어로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일체 유위법(有爲法)은 찰나에 생하고 멸하여 무상(無常)하다”

라는 뜻이다.

여기서 제행(諸行)의 행(行)이란 천류(遷流)한다는 뜻이다. 천류란 사상(四相)을 말한다. 사상이란 태어나서(生), 머물며(住), 변해가다가(異), 사라지는 것(滅)을 말한다. 소위 생주이멸(生住異滅)하는 것을 천류라고 한다.


유위법(有爲法)의 위(爲)는 조작(造作)을 뜻한다.

<조작>이란 말은 곧 유위(有爲)라는 말과 같은 의미다. 따라서 인연의 조작이 있는 것은 유위(有爲)가 되며, 인연의 조작이 없으면 이는 무위(無爲)가 된다. 사람과 사물은 모두 인연으로 지어지고 인연으로 사라진다. 그럼으로 인연의 조작으로 이렇게 생멸(生滅), 변화(變化)하는 인간과 사물의 모든 현상은 유위법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조작(造作)이 있는 곳은 원인과 결과가 지배하는 세계다.

인연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계인 것이다.

인연의 법칙을 때로는 연기(緣起)라고도 한다. 연기란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멸함으로 저것이 멸하는 것>을 말한다. 콩을 심으면 콩이 나고, 팥을 심으면 팥이 나는 것이다. 죄를 지으면 벌이 따르고, 태어남이 있으면 죽음이 있는 것이다. 부모가 있기 때문에 자식이 있고, 흙과 공기와 물과 태양이 있기에 나무가 자랄 수 있는 것이다.

하나의 개체로 보면 생함과 멸함이 있고, 그 하나의 개체는 다른 개체의 생멸과 연관지어져 어울려 살아가는 세계가 연기의 세계인 것이다.


그런데 이 연기의 세계는 일분일초도 머물지 못하고 변해 가는 세계이다.

그럼으로 연기의 세계에 머물고 있는 모든 존재는 영원한 것이 아니며,

항상 인연의 조작으로 찰나에 생멸을 반복하는 무상한 존재들이다.

그럼으로 일체 유위법은 찰나에 생하고 멸함으로 무상하다고 한 것이다.


태어난 것은 언제가 죽는다. 만들어 진 것은 언제가 부서지게 된다. 인간은 태어남이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죽는다. 모든 동물이나 식물도 그렇다. 강과 산도 그렇다. 그런데 이렇게 만들어 진 것을 자세히 살펴보면 모두가 상대적인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음양의 법칙’이라고 말하고 있다. 음(陰)과 양(陽)은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태어난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과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남(男)과 여(女)가 상대적이듯이 생(生)은 사(死)와 상대적인 것이다. 따라서 이런 모든 상대적인 것들은 언제가 사라지는 것이다.

또한 이런 상대적인 것들은 모두 서로 서로 돕고 의존하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예컨대 나의 어머니가 있다는 말은 상대적으로 나의 아버지가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 어머니가 없으면 내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내가 존재하는 것은 내가 홀로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의존하여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아버지 어머니도 마찬가지로 할아버지 할머니에 의지하여 존재하고 있고, 그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증조부에 의지하고, 그 증조부는 그 위의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내 자식을 기준으로 본다면 내 자식이 손자를 낳고, 그 손자가 또 자식을 낳는 끝없는 연결고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온 곳도 알 수 없고 가는 곳도 알 수 없는 그 연결고리 속에 “나”란 존재는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그 끝없는 무한한 존재의 하나의 연결고리에 불과한 것이다.


그럼으로 “나”란 것은 그 온 곳을 모르니 “나”라는 것이 언제부터 존재한다고도 말할 수 없고, 나로 인하여 자식이 끝없이 이어지니 “나”라는 것이 언제까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럼으로 그런 연기의 세계에 살고 있는 나는 영원한 존재가 아니라 단지 하나의 사건에 불과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영원한 시간 속에 덧없는 하나의 사물에 불과한 것이 바로 <나>란 것이다.


삼라만상도 마찬가지다. 남자가 있음으로 여자가 있듯이, 모든 것은 상대적으로 존재하고 있고, 그 상대적인 것은 생주이멸(生住異滅)의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 예컨대 살아 있는 것은 모두가 암컷이 있음으로 수컷이 있고, 동물이 있으니 식물이 있고, 생명이 있는 것이 있기에 생명이 없는 것이 있다. 삼라만상은 모두가 이렇게 상대적인 것으로 채워져 있다. 상대적인 것은 언제나 태어나, 머물다가, 변하여, 사라지는 생주이멸을 반복하고 있는 존재다. 영원한 존재가 아닌 무상한 존재인 것이다. 그럼으로 삼라만상은 모두가 무상한 것이기 때문에 “일체 유위법은 무상하다”고 한 것이다.

 

삼라만상은 영원한 실체가 아니다. 이는 연기의 세계다.

영원한 것이 아니라면 이는 무상한 것이다. 덧없는 것이다.

연기의 세계는 유위법의 세계다.

그럼으로 일체 유위법은 무상하다고 한 것이다.

 

유위법은 또한 원인과 결과가 지배하는 연기의 세계요, 상대적인 세계다.

그것은 태어나고, 머물다가, 변하고는 사라지는 생주이멸을 반복하는 세계다. 이렇게 삼라만상은 알게 모르게 나와 연관되어져 존재하면서도 그 자체는 찰나에 생하고 사라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찰나에 변하고 있다. 모두가 덧없이 변해 가는 것이다. 그럼으로 모든 것은 찰나에도 머물지 않고 변하고 있음으로 이를 <제행무상>이라고 한 것이다.


우리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마음도 생주이멸(生住異滅)을 반복하고 있다. 우리의 육신보다도 더 빨리 생사를 반복하고 있다. 옛날에 존경했든 사람이 그 사람의 추한 사생활을 듣자 어느새 존경은 경멸로 바뀌어 추하게 보이고, 과거에 보기 싫든 사람이 내게 도움이 되자 금방 좋은 사람으로, 보고 싶어지고, 과거에 죽자 살자 매달린 사랑한 사람이 내게 해(害)가 되자 어느새 미운 오리새끼마냥, 보기 싫은 사람이나, 원수로 돌변해져 간다. 마음은 이와 같이 생멸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 생멸(生滅)변화(變化)하는 사물(物)과 마음(心)의 현상으로 그 존재 양태가 천차만별로 많기 때문에 또한 이를 제행(諸行)이라고 한 것이다.


제행이란 또한 우리의 신(身: 몸)구(口: 입), 의(意: 생각) 삼업(三業)으로 나타나는 여러 가지 동작을 말하기도 한다. 또한 제행이란 말은 입으로 부르는 염불(念佛) 이외에 열반이란 이상경(理想境)에 도달하기 위하여 부지런히 힘써 수행하는 온갖 행업을 말하기도 한다.

 

<중론>관행품에『제행은 오온을 말한다.』라는 말이나,

<법화현의>十에『제행은 바로 인연으로 생긴 법이다.』라고 하는 것도 모두 이런 뜻에서 말한 것이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란 만법이 항상 변전(變轉)한다는 뜻이다.

만법이란 삼라만상의 모든 존재를 뜻한다. 변전이란 태어나고, 머물다가, 변해가며 사라진다는 뜻이다. 모든 것은 잠시도 머물지 않고 찰나찰나에 변해간다는 말고 같은 말이다.

 

<열반경>권14에 재미있는 말이 있다. 동경에 이러기를

『제행(諸行)은 무상(無常)하여 생멸법(生滅法)이다. 생멸(生滅)하고 멸이(滅已)하며 적멸(寂滅)이 위락(爲樂)이 된다.』

라고 하였다. 이것을 제행무상게(諸行無常偈)라 하며 또한 설산게(雪山偈)라 한다. 이 일게(一偈)가 불법의 대강(大綱)을 총괄하는 말이지만 소승과 대승, 그리고 그 각각의 종파에 따라서 해석을 달리하기도 한다. 그러나 공통적인 의미로 해석한다면 모든 삼세에 천류 하는 유위법을 제행이라 하며, 제행은 무상함으로 이는 생멸의 법이 되며, 이 생멸의 법은 고(苦)라는 것이다. 전반의 싯귀는 유전문(流轉門)이라 하며, 후반의 싯귀는 환멸문(還滅門)이라 한다. 유전이란 업의 인연으로 그 과보를 받는 다는 말이다. 과보를 받는다는 것은 생사의 과보를 받아 육도에 떨어진다는 말이다. 육도에 떨어진다는 것은 곧 윤회한다는 말과 같다. 환멸(還滅)의 멸(滅)은 열반을 가리킨다. 그럼으로 업인(業因)을 지어서 생사의 과보를 받는 것을 유전이라 하고 도(道)를 닦아서 열반을 증득(證得)하는 것을 환멸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환멸문의 해석에는 주의할 것이 있다.

생(生)이 다함을 무생(無生)이라 하고, 멸(滅)이 다함을 무멸(無滅)이라 한다. 무생무멸이란 불생불멸(不生不滅)과 같은 뜻이다. 무생, 무멸이면 이는 “절대적 고요함” 뿐이다. 이 ‘고요함’을 적멸(寂滅)이라고 한다. 그럼으로 이런 적멸을 일러 열반이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적멸이 낙(樂)이 된다”는 말은 열반의 락(樂)을 받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유위(有爲)의 고(苦)에 반대로 적멸이 바로 낙(樂)이 된다는 뜻이다. 마치 하늘에 검은 구름이 끼었다가 구름이 사라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 하늘은 본래 푸르지도 검지도 않았는데 구름으로 인하여 구름이 없으면 푸르게 보이고, 있으면 검게 보이는 것과 같이 번뇌로 인하여 고통(苦)이 있는 것이니 번뇌가 사라지면 그대로 기쁨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흔히들 이를 바로 알지 못하고 도를 닦아 깨달음을 얻는다는 말을 듣고 마치 열반이란 어떤 실체가 있어 거기서 낙(樂)이 생기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럼으로 어리석은 구도자들은 마치 노다지를 찾으러 온 산천경계를 누비듯이 이를 찾아 구하니 진실로 어리석은 짓이 아니겠는가?


제행무상이란 말은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무엇을 전달하고자 하는가? 단순히 인생은 무상하다는 그런 뜻뿐이라면 이는 진실로 허무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그럼으로 우리는 이 말의 뜻을 깊이 새겨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일체가 덧없다는 말은 현대를 살고 우리에게 두 가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하나는 모든 것은 찰나에 변하는 무상한 것임으로 집착을 버리라는 것이다. 둘은 일체가 무상한 존재이기에 인연이 닿는 한 사람과 더불어 모든 것에도 자비의 정신을 가지라고 하는 것이다.


첫째 집착을 버린다는 말은 모든 탐내는 마음, 화내는 마음, 사물의 이치를 바르게 알지 못하는 마음의 애착과 욕망을 끊으라는 의미다. 다시 말해서 재물이란 언제간은 없어질 무상한 것들임으로 필요이상으로 더 가지겠다고 하는 마음을 버리고, 언제가 죽어서 없어질 이 몸뚱아리에 지나치게 미련을 갖거나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육신에 대한 애착을 절제하고, 언젠가는 나와 같이 사라질 인생인데 남을 비방하고, 험담하여, 남에게 고통과 불안을 주는 행동과 언어를 삼가 하라는 말이다. 언제간은 사라질 이 몸을 영원히 사는 것으로 착각하여 나를 내세우고 자랑하려고도 하지 말고, 실체도 없는 허망한 기분에 들떠서 명예나 권력을 쫓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중생들은 욕망이란 마차를 타기를 좋아한다. 마치 신혼부부와 초보운전자와 같이 무엇이든 탈것을 보면 타려고 대드는 것이 바로 중생들의 어리석은 마음이다. 눈으로 보는 좋은 것마다, 귀로 듣는 좋은 것마다, 코로 냄새를 맡는 좋은 것마다, 혀로 맛보는 좋은 것마다, 생각으로 짓는 좋은 것마다 무조건 올라타려고 하는 것이 중생의 마음이다. 그럼으로 눈귀코입을 단속하여 언제간은 사라질 무상한 것들을 영원한 것으로 착각하여 욕망에 마음이 이끌러 가지 않도록 항상 일상생활에 속에 이 “제행무상”이란 글귀를 생각하고 욕망이란 도둑이 침범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마치 주인이 문단속을 철저히 하고 깨어 있으면 감히 도둑이 들어오지 못하는 것과 같이.


둘째 자비심을 가지란 말은 단순히 적선이나 동정을 가지라는 말이 아니라 “마음의 주인”이 되라는 뜻이다. “마음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깨어 있는 마음(自覺))”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깨어 있는 마음으로 무상한 모든 존재의 행복과 그 원천을 발견하는데 진력하라는 말이다. 그럼으로 자비는 밖으로는 사랑으로 드러나고 안으로는 모든 형태의 고통과 그 원인인 무지, 증오, 탐욕 등을 치유하고자 하는 수행정신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깨어있는 마음의 반대는 잠들어 있는 마음이다. 잠들어 있는 마음에서 미움과 시기, 질투, 비방과 같은 부정적인 욕망이 생긴다. 그러나 자비는 깨어있는 동안에 일어나는 것이다.


서양에서는 술이나 마약 등에 취한 상태를 <돌이 된다(stoned)>고 표현한다. 돌이란 딱딱하고 생명이 없으며 움직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 촉감은 차갑다. 우리의 마음이 잠들어 있을 때, 욕망과 쾌락의 늪에 빠져 있을 때 우리의 의식은 돌이 된다. 돌과 같이 고집스럽고, 남의 고통과 아픔에 냉담해지고, 베푸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나’와 ‘나의 것’에 집착하여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깨어 있는 마음에서는 이해와  관용과 사랑의 베풂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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