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법무아인(제3과)

2006. 5. 21. 02:14야단법석

 

 

 

 

제3과 제법무아인(諸法無我印)


<제법무아>란 말은 ‘모든 것은 영원한 실체(我)가 없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항상 변하는 허깨비라는 것이다. 여기서 “아(我)”라는 것은 “영원한 실체나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럼으로 “무아(無我)”라는 말은 “모든 것은 ‘나’라는 영원한 존재가 없다”는 뜻이 된다. 사람과 사물을 통틀어서 대승에서는 이를 “자성(自性)”이라고 표현한다. 자성을 지닌 존재, 다시 말해서 영원한 실체나 존재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말은 흔히 신(神)이란 말로 표현한다. 이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절대적인 영원한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그런 신이란 것도 없다. 만약 신과 같이 어떤 영원한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분명 영속적이고 변하지도 않고 유일한 하나의 존재로서 다른 것에 의지함이 없는 독립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이제 그 ‘변한다’는 의미를 살펴보자. 가령 ‘올챙이가 개구리가 변한다’라고 할 때 이는 올챙이라는 주체가 변하여 개구리라는 주체가 된다는 의미다. 따라서 <~이 변한다>라고 하는 것은 <주체가 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체가 변하는 것을 일러 “주재성(主宰性)이 없다”라고도 한다. 그럼으로 만약 올챙이라는 주체가 즉 올챙이라는 “아(我)”가 있다면 이는 영원히 변하지 않은 주체가 있다는 의미가 됨으로 절대로 개구리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올챙이는 자라서 개구리가 된다. 그럼으로 올챙이라는 주체 즉 올챙이라는 영원한 “아(我)”는 없는 것이다. 만약 올챙이라는 영원한 존재가 있다면 개구리를 보고도 올챙이라고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

왜냐하면 주체가 변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은 영원한 실체가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십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분명 변했는데도 우리는 동일한 “나”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육체를 살펴보라. 십년 전의 머리카락이나, 손톱, 키, 피부 등등 어느 하나 변하지 않은 것이 있는가? 십년 전에 가졌든 마음이 지금과 같은 마음인가? 몸도 마음도 어느 한 순간 머물지 못하고 찰나에 변해가고 있건만 우리는 단지 이를 알지 못하고 동일한 십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를 동일시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미망(迷妄)인 것이다. 단지 혼란된 마음의 투영인 것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이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계속적으로 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라는 존재는 영원한 존재가 아닌 것이다.

<무아(無我)>인 것이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의아심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나>라는 존재가 없다면 그러면 죄를 짓더라도 그 죗값을 받을 사람은 누구인가? 라는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행위자(作者)는 없지만 행위는 남는다.>라고. <행위자가 없다>는 말은 무아(無我)라는 의미다. <행위가 남는다>라는 말은 업보를 받는다는 뜻이다. 그럼으로 무아(無我)이지만 그가 저질은 죗값은 필할 수가 없다는 말이 된다. 이런 문제는 상당히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불교를 배우는 자라면 언제간은 이해해야 될 중요한 진리다.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 가령 어떤 사람이 담뱃불을 끄지 않고 거리에 그냥 버렸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그 담뱃불이 바람에 실려 이웃으로, 이웃으로 번져 마을 전체를 태웠다고 하자. 그 담뱃불과 집과 가재도구를 태운 불은 분명 다르다. 그럼으로 그 사람이 “내 담뱃불”과 그 집을 태운 불과 다르기 때문에 나는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과연 이와 같은 이유로 방화범(放火犯)의 책임을 벗어날 수 있을까? 그는 당연히 방화범으로 화재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불의 동일성은 없지만 불로 인한 연속성(화재)으로서 그 책임을 당연히 지게 되는 것이다. 그럼으로 행위자는 없어도 죗값, 다시 말해서 업의 과보를 받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라는 존재는 영원히 지속하는 유일하고 완전한 단일 존재이기 때문에 <나>라고 하는 것이다. <유일한 단일 존재>란 곧 <일원적(一元的)인 존재>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순수하고 다른 것이 섞이지 않은 기본단위라는 뜻이다. 만약 <나>라는 것이 여러 개가 있다면 이는 <나>라는 말이 성립되지 않을 것이다. 이를 학자들은 [상일성(常一性)]이라고 부른다. 그러면 우리가 말하는 <나>라는 문제를 한 번 살펴보자.


몇 개월 전에 신문에 이런 기사를 본적이 있다. 살인범을 추적하던 형사가 고생고생 끝에 공소시효 한 달을 남겨두고 어느 어촌에서 그 살인범을 잡았다. 그래서 그는 표창도 받고 승진도 했다. 만약 그 살인범이 한달 만 넘겼더라면 그는 살인죄에 대한 죄 값을 받지 않고 무죄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공소시효 한 달을 남겨두고 운 나쁘게도 잡혀서 검찰에 기소되었든 것이다. 그 살인범은 이름도 바꾸고 얼굴도 성형수술 하여 10년 동안을 법망을 피해 다녔든 것이다. 그러다가 그는 마지막 강원도 어느 어촌의 은신처에서 마음을 고쳐먹고는 자기가 저질은 죗값을 청산하기 위해서 험한 식사로 끼니를 때우면서 낮에는 부둣가에서 험한 노동으로 돈을 벌고, 그렇게 벌은 돈은 밤에는 전도사로 위장하여 헐벗고 굶주린 아이들을 돌보는데 쓰면서 목자로서 사랑과 헌신으로 생활하고 있었든 것이다. 그는 분명 십년 전의 살인범과 비교한다면 분명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건만 법은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

 

우리가 말하는 <나>라는 것은 바로 이런 실체를 일러 <나>라고 부르고 있다. 법이 단지 사회적 측면에서 합법성만을 추구하여 그를 살인범으로 처벌하듯이 이름을 바꾸고, 얼굴까지 성형수술하고, 마음도 생활도 모두가 변했지만 그를 전의 살인범과 동일인으로 보듯이 우리가 말하는 <나>라는 것은 이런 식의 <나>를 <나>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좀더 깊이 생각해 보면 이런 식의 <나>는 상식적인 의미에서 <나>일뿐 존재론적인 측면에서 영원한 <나>가 아닌 망상이요, 혼란된 생각으로 인한 집착이며 모든 괴로움과 고통의 근원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럼으로 부처님께서는

『물질은 괴로운 것이다. 만일 물질이 괴로운 것이 아니라면, 응당 물질에는 병과 괴로움이 생기지 않을 것이며, 또한 이렇게 되었으면 하고 바라지 않을 것이요, 또한 이렇게 되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지도 않을 것이다. 그것은 물질이 괴로운 것이기 때문에 물질에서 병이 생기고 또한 물질은 이렇게 되었으면 한다던가, 이렇게 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랄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느낌이나, 생각, 행동과 알음알이(受想行識)도 그와 같다.』라고 하신 것이다.


이러한 <나>는 분명 영원한 지속적인 <나>가 아니다. 그래서 하나인 <나>를 찾기 위해 <나>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에 대하여 동서양의 철학자와 종교가들은 정밀분석을 시도했다. 그래서 일차분석은 <나>는 정신과 육체라고 했다. 불교의 논사들의 말을 빌리면 명색(名色)이 된다. 명(名)은 정신을 말하고, 색(色)은 육체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다섯(5:색수상행식)으로, 열두 개(12: 육근과 육경)개로, 열 여들(18:육근, 육경, 육식)개로 쪼개어 분석하고 또 75개(구사론의 오위75법), 100개(유식의 오위100법)로 분석했다. 이는 모두 통합된 하나의 <나>를 찾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분석해 보아도 어느 것 하나 영원히 변하지 않고 항상 하고, 독립적인 <나>는 발견될 수 없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무상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들 속에는 아무 것도 영원한 실체가 없는 것이다. 무상한 것들 속에서 영원한 것이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동서양의 철학자들은 형이상학적인 모델을 만들기 시작했다. 원자설에서부터 현존이니, 실존이라는 가설까지 무수한 이론이 등장했다. 그리고 그 작업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만약 영원한 <나>가 있었다면 분명 누군가에 의해서 발견되었을 것이다.

우리의 인생이 고통스러운 것은 바로 “나”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영원한 <나>가 없기 때문에 자유롭지 못하고,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 고통이란 무엇인가? 생사의 윤회바퀴다.

윤회의 원인은 바로 삼독이라고 부처는 말한다. 삼독(三毒)의 덧에 걸려 무상한 생사(生死)의 고해(苦海)를 헤매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학자들은 삼법인에 <모든 것은 고통이다>는 말을 추가하여 <사법인(四法印)>을 만들었든 것이다. 이것이 [일체개고(一切皆苦)]인 것이다.


그렇다면 <제법무아> 즉 모든 것은 영원한 실체가 없다는 이 진리는 우리에게 무엇을 암시하고 있는가?

<나>라는 생각을 가진 자에게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과 사물이 독립된 영원한 실체로 상대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그럼으로 상대를 이기기 위해서 남보다 더 많은 재물을 소유하고, 남보다 더 높이 올라가고, 남보다 뛰어남을 과시 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실체가 없다는 이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라면 모든 사람과 사물들은 영원한 실체로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단지 연기로 존재하는 것에 불과함을 알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와 <나의 것>이는 소유와 지배욕, 자기 과시욕과 같은 분리된, 부정적인 마음이 아니라 “우리” 또는 “하나”라고 하는 전체적이고 통합적인 마음으로 상부상조하는 관용과 자비심을 일으키는 긍정적인 마음을 가질 것이다. 그럼으로 또한 고통과 번뇌의 굴레로부터 자유로워 질 것이다. 그럼으로 그의 삶은 역동적(力動的)으로, 자유롭게, 무한히 뻗어갈 수가 있는 것이다.



흐르는 곡: 매향/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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