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축복

2006. 5. 28. 23:01잠언과 수상록

 

 

삶의 축복


삶의 진정한 축복은 이 육체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영적인 것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오기 때문에

그것을 찾는 사람들은 항상 내일로 미룬다.

그러나 삶의 영적이란 축복은

미루는 것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그럼으로 붓다도, 선인들도 모두 이렇게 말한다.

<내일이 아니다. 시작하라. 지금 바로 시작하라.>고.


기쁨은 세 가지 면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쾌감>, 즉 육체적인 쾌락이다.

둘째는 <행복>, 즉 마음의 행복이다.

셋째는 <축복>, 즉 영적인 축복이다.


그러나 이 셋은 모두 하나의 본질에 근거하고 있다.

본질은 기쁨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쁨은 몸의 언어로 변형되면서 쾌락이 된다.

기쁨은 몸을 통하여 쾌락으로 나타난다.

기쁨은 마음을 통하여 행복으로 나타난다.


기쁨은 몸도 아니요, 마음도 아닌,

몸과 마음을 넘어선

제3차원을 통과하면서 <축복> 그 자체가 된다.

이것이 기쁨의 3단계이다.

 


<기쁨>은 에고를 삭제해 버린다.

그러나 <불행>은 에고를 더욱 강화시켜 준다.

에고는 바로 불행 속에서 태어나기 때문이다.

기쁨 속에서는 그대 자신을 잃어버릴 뿐이다.

기쁨의 순간은 결코 에고의 순간은 아니다.

그러나 불행의 순간은 에고가 더욱더 강화되는 순간이다.

불행할 때 거기 그대가 존재한다.

그러나 기쁨에 차 있을 때

거기 그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에고이스트이기 때문에

행복보다는 

불행, 슬픔, 고통 등을 더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삶은 기쁨의 축제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왜 우리는

기쁨의 모든 순간을 슬픔으로 바꿔 버리고 있는가?

오직 이 길만이 에고를 강화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지옥에서만 에고는 존재한다.

그러나 천국 거기 에고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극락정토(淨土)에 가고 싶거든 에고를 없애라.

에고가 없어야만 비로소 극락정토에 갈 수 있다.』


우리는 이런 식의 말을 수천 번도 더 들어 왔다.

아니 인류의 전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이런 식의 말만을 들어 왔다.

그러나 위대한 선지식은 이렇게 말한다.

『그대여, 에고가 없다면 극락정토가 그대 속으로 들어온다.』


극락정토란 지역적인 어느 특정한 곳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그러므로 극락정토라는 장소에 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에고가 없을 때 그대가 바로 극락정토이다.

그러나 에고가 가득 차 있을 때

그대가 바로 지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지옥이란 존재의 밑바닥 어디쯤이 아니다.

또한 극락정토란

존재의 꼭대기 어디쯤에 있는 것도 아니다.

지옥과 극락이란 상징이다.

삶의 어떤 상태를 뜻하는 것이다.


그대가 존재할 때 그대는 지옥에 있다.

그러나 그대가 존재하지 않은 때

그대는 극락정토에 있다.

에고가 강화될 때

그대는 그대 자신을 의식하고자 한다.

남(他者)과 분리되고자 한다.

우주적인 이 리듬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여기 하나의 역설이 있다.

에고는 불행을 낳는다.

그리고 에고는 기쁨을 원한다.

에고는 기쁨을 탐내고 있다.

에고는 모든 쾌락을 원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에고는 불행을 낳는다.


그대는 속고 있다. 불행을 낳으면 낳을수록

에고는 거기에 반비례하여 기쁨으로 기울고 있다.

그러나 에고 속에서는 기쁨이란 존재할 수 없다.

기쁨은 에고의 기능이 아니기 때문이다.


깊은 이 통찰이야말로

붓다의 진정한 메시지를 이해하는 통찰이다.

그리고 한 순간만이라도

기쁨의 단 한 순간만이라도

그대를 변형시키기에 충분하다.


쾌락은 육체를 통해서 가능하다.

쾌락은 대상을 필요로 한다.

쾌락은 객관적인 것에의 열망이다.

쾌락은 혼의 외적(外的)인 여행이다.


여기 이 쾌락 속에는 그 어느 것도 잘못된 것이 없다.

쾌락은 쾌락 그 자체로서 충분하다.

쾌락이 성취된 그 다음 기쁨이 온다.

기쁨이란 혼의 내적(內的)인 여행이다.

기쁨은 대상이 아니라 자기 자신 속으로의 몰두다.


기쁨은 주관적이다.

쾌락 속에서는 타자(他者)가 필요하지만

그러나 기쁨 속에서는

그대 자신이면 그것으로써 충분하다.

<쾌락>이 육체적이라면 <기쁨>은 정신적이다.


그러나 세 번째 단계인 <축복>으로 승화되기 전에는

이 두 가지는 꽃봉오리에 지나지 않는다.

<축복>, 이 축복이야말로 그대 의식의 개화(開花)이다.

그대 의식의 이 정상에 설 때

그대라는 존재의 봉오리는 활짝 꽃피는 것이다.


명상의 축복을 경험하게 되면,

모든 것이 그대로 변질된다.

존재 전체가 그대로 신성으로,

신의 입김으로 축복의 열기에 싸이게 될 것이다.

명상의 축복을 느껴보자.

영적인 축복을 느껴보자.

 


감성에서, 마음에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대로 볼 수 있는 역량을 우리는 불성이라고 부른다.

불성은 깊이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역량이다.

우리들 안에 있는 불성의 씨앗을 가꾸어야 한다.

그래서 명상이 중요한 것이다.


왜 명상이 필요한가?

축복이기 때문이다.

<나>라는 존재의 꽃봉오리를 피우는 축복이기 때문이다.


밖에서 데모하듯이 요란을 떤다고

영적인 축복이 내려오는 것이 아니다.

 

고요히 앉아 깨어있는 마음으로

숨쉬고 평화로이 웃을 때

우리는 참 자신으로 돌아가게 된다.

영적인 축복은 바로 그런 명상에서 오기 때문이다.


 

흐르는 곡: 동방의 샛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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