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명상

2006. 5. 21. 03:08잠언과 수상록

 

 

 

 

죽음의 명상


공자는 40세를 일러 불혹(不惑)이라 했습니다.

불혹이란 유혹에 빠지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욕망과 탐욕에 흔들리지 아니하고,

호기심과 시비선악에 동요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의학의 발달로 우리의 생명은 늘어났습니다.

지금의 50이 옛날의 40대 보다 더 젊어지고 있습니다.

불혹이란 말이 어울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더 가슴 아픈 것은 자본주의의 배금사상이

불혹이란 말을 아예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한 인간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10개월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한 인간을 죽이기 위해서는 단 하루면 충분합니다.

아니, 몇 분이면 족합니다.


중년을 흔히 완숙한 인간으로 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10개월이 아니라 적어도 50년이 필요합니다.

그렇게도 많은 희생 그렇게도 많은 욕망으로 점철된 50년!

그렇게도 많은 사연으로 아로 새겨진 50년!

그런데 이렇게 한 인간이 만들어진 다음,

드디어 성숙한 인간이 다 형성된 다음

이제 이 인간은

오로지 죽음에 붙여지는 데밖에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인간의 죽음이 무의미하다면

인간의 일생도 허무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만일 삶이 가지지 못한 의의를 죽음이 지닌다면

우리는 인생자체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재평가해야 하고 새로운 해석을 하게 됩니다.


인생의 의의에 대한 탐구를

죽음의 의의(意義)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죽음은 실로 엄청난 충격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빈번하게 주변에서 일어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너무도 빨리 움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에 무감각해졌습니다.

언젠가는 죽겠지만 내일은 아니라고

덮어버리고 망각의 늪으로 밀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죽음의 망각은 나의 존재에 대한 망각을 불러옵니다.


오늘에 와서 죽음이 우리에게 주는 엄청난 충격은

일반적인 의의 상실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아무런 충격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인간의 죽음만큼

우리에게 무감각하게 느껴지는 사건도 별로 없습니다.


죽음에 대한 망각은 현실존(現實存)의 망각을 유발합니다.

이에 반해 죽음에 대한 진정한 숙고는 우리의 삶을 밝혀줍니다.

죽음을 깨닫게 되면 삶을 또한 깨닫게 됩니다.

이를 거꾸로 표현하자면

<죽음을 잊는 사람은 삶도 역시 잊게 됩니다.>

그래서 고통스러운 삶에서 벗어나게 되고

고난과 역경에도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게 됩니다.




: 흐르는 곡: 나그네는 어디로 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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