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는 개성보다 조화로운 삶을 살자.

2006. 4. 23. 01:37붓다의 향기

 

 

 

 

 

 

       튀는 개성보다 조화로운 삶을 살자.


영어에 “윌리 닐리(willy-nilly)”라는 말이 있다.

이는 ‘좋든 싫든’ 이란 뜻이다.

<윌리(좋든, willy)> 는 그대의 뜻에 따라 일어 되어 가든가 아니던가 라는 뜻이다. <닐리(싫든, nilly)> 는 그대의 뜻에 반하거나 그렇지 아니하거나 라는 뜻이다. ‘좋든’ 은 그대의 뜻에 맞는 다는 의미이며, ‘싫든’은 그대의 뜻에 반한다는 의미이다.


우리의 지족하는 삶은 그렇게 되어야 한다. 좋든 싫든 그것이 어디로 가든 간에 삶이 흘러가는 그 물결을 따라 살아야지 튀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모나게 남의 눈에 튀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니다. 강물을 거슬러 올려가려고 헤엄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는 나를 내세우지도 말고, 세상과 다투지도 말고 조화롭게 살라는 의미다.


중생이 바라는 욕심은 한량없다. 그래서 수많은 목적지를 가지고 있다.

대통령도 되고 싶고, 재벌 총수도 되고 싶고, 학자도 되고 싶고, 교황도, 부처도 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세상과 싸우고 있다. 세상은 그대와 싸우려고 하지도 않는데 그대 혼자 세상을 적으로 알고 싸우고 있다. 그래서 모두들 남들보다 튀려고 안달하고 있다. 남들보다 앞서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세상은 그대에게 그 어떤 것도 바라지도 않는다.

바라는 것은 그대지 세상이 아니다.

그러나 그대는 홀로 그 흐름을 거슬러 가고자 안달해 하고 있다.

전체를 벗어나 홀로 헤엄치기를 바라고 있다.

부질없는 <개성>과 허망한 <질문>을 가지고 달려가고 있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삶은 답이 없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은 답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목적지가 있다.

무엇이 되어야한다는 목적지가 있다.

그래서 남들 보다 좀더 다른 그 무엇으로 되기 위해 남들보다 튀려고 한다. 그래야만 바라든 그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 목적지는 결코 도달할 수 없다.

한 산등성이를 넘어가면 또 다른 산이 버티고 있다.

한 목적지는 또 다른 목적지를 설정하고 있다.

그래서 마음을 충동질하고 또 한다.


인간의 욕망이란 그 끝이 없다. 그래서 질문도 끝이 없다.

그래서 그 답은 부정과 긍정도 끝이 없다.

그래서 욕망은 본래 허망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 욕망이란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아서 쉽게 무너지게 되고

허망하게 끝나게 되어 있다.

욕망은 허망하기 때문에 그 허망한 것이 결코 진실이 될 수 없다.

거짓된 마음이 결코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우리는 세상에 무엇인가 바라고 있지만

우리가 바라는 그것들을 얻을 수는 없다.

불가능하다. 

설령 그대가 바라는 목적지에 도달한다고 해도

허망한 것이고, 도달하지 못한다고 해도 허망한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은 그대에게 홀로 그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 보다 더 위대한 영웅들도 세상을 그들의 의지대로 바꾸려고 했지만 그러나 성공한 자는 없었다. 그것은 결코 성공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개체란 어디까지나 개체다. 개체는 전체와 동화 될 때 개체가 의미가 있는 것이다. 존재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오로지 전체와 조화를 이룰 때 개체란 의미가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불성(佛性)>이니 <진여(眞如)>라는 말도 이런 의미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어떤 특정한 개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의미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삶은 답이 없지만 조화로운 것이다.

조화란 무엇인가?

조화는 어우러짐이다. 그럼으로 개체가 홀로 튀어나와서 전체가 가는 물줄기를 바꿀 수는 없다. 물고기가 연못의 물이 흐리다고 홀로 설쳐보아야 연못의 물만 더 흐릴 뿐이다. 나서지 않고 홀로 조용히 있으면 연못의 물은 저절로 맑아진다. 조화란 어느 한 개체가 단독으로 이룩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바로 필연인 것이다.

 

조화란 전체와 동화될 때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한 마리의 물고기가 요동친다고 해서 어찌 강의 흐름을 바꿀 수 있겠는가? 한 마리의 고래라 할지라도 어찌 바다의 저 파도를 잠재울 수 있겠는가? 그럼으로 오직 전체만이 필연이란 운명을 갖고 있다.

전체적인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그대가 아니다.

오직 전체만이 어디론가 가고 있다.

가는 것은 그대가 아니다.

그대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조화 속에 몸을 담그는 것이다.

모나지 않고 동화해 가는 것이다.

왜 선사(禪師)들이 <평상심(平常心)>를 그렇게 강조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돌과 기왓장도 불성을 지니고 있다는 <법화경>의 가르침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모난 것은 바로 그대의 지식이요, 욕망이요, 무지이기 때문이다.


어느 처사가 스님에게 물었다.

“스님, 개에게도 불성이 있다고 하는 데 그렇습니까?”

스님이 그 처사를 한참 보더니 말했다.

“음, 개에도 불성이 있지.”

그 처사는 만족한 듯이 돌아갔다.


한참 후 다른 처사가 놀러와 다시 물었다.

“스님, 개에게도 불성이 있다는 말은 거짓말이죠?

개에게도 불성이 있으면 개도 부처가 된다는 소리인데

이게 어디 말이 됩니까?”

스님은 또 물끄러미 그를 보다가 말했다.

“그럼, 그렇고 말고. 개에게는 불성이 없지.”

그 소리를 듣고 그 처사도 만족한 듯이 돌아갔다.


처사가 돌아가자 스님을 모시고 있던 상좌가 물었다.

“스님, 처음에는 불성이 있다고 했다가,

뒤에는 없다고 하셨는데 도대체 어느 말이 맞는 말입니까?

스님이 잘 몰라서 처사들을 속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스님은 또 물끄러미 상좌를 보다가 말했다.

“맞아, 자네 말도 맞구먼.”

 

그대는 삶에 대하여 갖가지 질문을 늘려놓는다.

그대의 욕망이 그대가 가고 싶은 목적지를 만들어 놓는다.

그러나 그대의 욕망, 그대의 목적지는 단지 그대가 바라고 있는

마음의 그림자에게 불과하다.

 

세상과 다투지 말라.

그대가 바라는 답이란 그대의 마음에 드느냐 아니냐에 불과할 뿐

그대가 진정 바라는 답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답이 되는 것은 결코 그대의 마음에 든 답이 되지 못할 것이다. 세상에 대하여 그대가 던진 질문의 답은 모나지 않은 자라면

그대가 원한대로 답할 뿐이다.

그대가 검은 것을 바란다면 검은 것을 답할 것이고,

그대가 흰 것을 바란다면 흰 것을 답할 것이다.

 

그것은 세상의 답이 아니라 그대가 바라는 답을 준 것에 불과하다.

세상은 결코 그대의 질문에 답을 내 놓지 않을 것이다.

어리석게 세상에 질문을 던지지 말라.

경전에서 말하는 불성(佛性)이란

우주에 두루 한 것이지 어느 한 사람,

어느 풀한 포기에 국한 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우주의 근본이 되고, 조화의 어머니가 된다.

그것은 편협 된 것이 아니라 만유의 공통된 근본자리이기에

개체가 거기로 돌아가는 것이다.

 

전체는 다만 그 개체를 통해서 전체를 들어내는 것이지 개체에 따라가는 것은 아니다. 따지는 것은 그대지 세상이 아니다. 따짐이 없기에 그래서 이 세상은 조화로운 것이다. 그러나 그 조화와 그 움직임은 그대가 만든 것도 아니고, 또 그대가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부처님도 그러지 아니했는가?

『인연의 법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다.』라고.

 

 

모든 것을 전체에게 바칠 수 있을 때 모든 것이 성취된다.

그대가 전체가 되고, 전체의 운명이 그대의 운명이 되며,

전체의 목적이 그대의 목적이 되기 때문이다.

목적지가 어디 딴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전체는 지금 바로 여기에서 행복이 있고 환희가 있다.

 

세상을 평화롭고 고요한 데 오직 그대만이 걱정하고 있다.

오직 그대만이 강과 함께 흐르고 있지 않다.

그대는 그대 자신을 위한 조그마한 언덕을 차지하기 위해 한 모퉁이를 잘라내려고 아등바등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과 싸우지 말라.

세상과의 조화 그것만이 그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대는 누구인가?

전체 속에 살아 있는 개체일 뿐이다.

그럼으로 전체적인 삶을 살도록 하라.

나의 목적지에 메인 삶을 살지 말고

전체와 동화되는 그런 삶을 사는 자가 되어야 한다.

개성이란 이름으로, 지성이란 이름으로,

그대의 욕망 때문에 전체의 흐름을 거슬리려고 하지 말라.

 

이것이 부처님이 주는 삶의 메시지다.

무원(無願), 무욕(無慾), 무쟁(無爭)의 평범한 일상의 마음으로 돌아가라는 부처님이 메시지다.

 

 

바라지 않고, 나만의 욕심을 가지지 않고,

세상과 다투지 않는 것이 바로 조화의 삶이다.

가장 공통적인 것으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윌리닐리>의 삶이다.


그럼으로 모든 것에 공통되는 것을 보라.

더 공통되는 것일수록 더 진실하며,

예외적인 것일수록 더 거짓이 된다.

 

평범해져라. 

그러면 근본에, 그리고 진리에 더욱더 가까워진다.

완전히 평범해 질 수 있다면 그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필요한 것은 더 이상 없다. 매 순간순간이 축복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조화의 결과다. 완전히 평범해 질 때 무엇이 문제이겠는가?

 

나의 삶은 남에게 드러내 보이는 것만이 값진 것이 아니다.

모나게 사는 것은 비범한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삶이다.

어찌 손바닥으로 저 불어오는 바람을 막을 수 있겠는가?


진실로 비범해지고 싶으면 평범해져라.

가장 평범한 삶이 가장 비범한 것이다.

그것이 <윌리닐리>의 삶이다.

 

진실로 그렇게 살 수 있다면

그대는 평상심으로 돌아가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조화롭게 살고 있는 것이다.

세상과 싸우지 않는 삶이다.

 

부정하지도 않고, 긍정도 않는 삶,

그것이 윌리닐리의 삶이요,

부정도 수용하고, 긍정도 수용하는 그런 삶이 윌리닐리의 삶이다.

 

진정한 답은 부정과 긍정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정과 긍정은 튀는 삶이기 때문에 그기에 조화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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