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의 명상(1)

2005. 12. 21. 23:01야단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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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의 명상(1)


<생사일여>라.

태어남과 죽음이 다르지 않다는 의미다.


공간적으로 본다면

[생즉시사(生卽是死) 사즉시생(死卽是生)]이요,

시간적으로 본다면

[생불이사(生不異死) 사불이생(死不異生)]이다.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

태어난 자는 반드시 언젠가는 죽게 된다.

그럼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 된다.

이것이 진실이라면 그 반대도 성립될 것이다.

죽음은 또 다른 생(生)의 시작이라는 것을.

생(生)과 사(死)의 진리가 이러하다면

생(生)도 두려워할 것이 못되고,

사(死)도 두려워할 것이 못된다.


그러나 우리는 모른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인연따라 왔다지만 그 인연을 모른다.

우리는 가지만 가는 곳을 모른다.

인연따라 가지만 그 인연을 모른다.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태어난 생명을 원망하고

사라져갈 나의 죽음을 무상하다고 괴로워한다.

처음도 알 수 없고

끝도 알 수 없는 것을

왜 우리는 이 삶을 원망하고 괴로워해야할까?


돌아보면 인생이란 한줌의 티끌 같은데,

생각해보면 한 조각 뜬 구름 같은데,

재물이 무엇이길래,

명예가 무엇이길래,

사랑과 미움이 무엇이길래

못다한 그 놈의 한(恨)이

못이룬 그 놈의 한(恨)이

나의 삶을 이렇게 고통스럽게 만들까?


서산대사가 이르듯,

들이킨 숨 내뱉지 못하면

그것이 죽음인데,


벗이여, 삶 이후의 또 다른 삶이 없단 말인가?

 

 


 

 

삶과 죽음의 명상(2)


죽음은 예고 없이 찾아든다. 교통사고나 천재지변과 같은 재앙이 아니더라도 친구들과 회식을 하다가 심장마비로 죽을 수도 있고, 저녁 잠자리에 들어서 다음날 아침에 저 세상을 가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기 조차 꺼려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은 이분법(二分法)적 사고에 익숙하게 단련되고 또 그렇게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흑백(黑白)논리에 젖어서, 산다는 것은 좋은 것이고 죽는다는 것은 나쁜 것, 그리고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실상 죽음을 이야기 하는 것은 마치 징그러운 뱀을 보듯이 기피하고, 입에 올리는 것조차 꺼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가 죽음을 피해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죽음이 우리를 피해가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죽음을 이야기하고, 죽음에 대해 명상을 하고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하여 준비할 생각은 하지 못하는 것일까?


죽음이란 무엇인가?

산다는 것이 삶이라면 죽음이란 것도 삶 이후의 또 다른 삶의 시작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룰 둘로 각각 분리하여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산다는 것은 무상하고 허망하고 괴로움뿐이라고 생각하여 죽음을 지극히 매혹적인 것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죽음을 아름다운 것으로 생각하여 절망적인 자신의 삶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자살을 감행한 비극적인 젊은이들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해서 직면하기를 거절하거나 낭만적으로 여기는 경우, 죽음은 하찮은 것으로 전락해 버린다. 죽는다고 절망해서도 안 되고, 죽음에 도취해서도 안 된다. 죽음은 우리를 억압하는 것도 아니고 자유와 해방감으로 우리를 흥분시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삶의 과정일 뿐이다.


우리들 주변에는 수많은 종교가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종교는 또 다른 삶(來世)을 이야기하고 있다. 불교는 물론 기독교를 포함해서 세계의 모든 위대한 선각자 선지식들은 우리들의 이 삶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이런 가르침들은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비전을 전해주고 있다. 그 비전은 바로 우리가 지금 영위하는 이 삶에 성스러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에도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현재의 삶만을 전부라고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다. 영혼이 메말라 있는 것이다. 삶 이후의 삶에 대한 어떤 실재적인 또는 근거 있는 신념도 없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궁극적인 의미를 상실한 채 자신의 삶을 이어가고 있을 뿐이다.


“그대는 죽음 이후에 전개되는 그 삶을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철학적이거나 생물학적인 그런 죽음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그대 마음 깊은 곳에서 이런 질문을 느껴본 적이 없는가? 만약 그대가 자신의 죽음 이후에 전개될 새로운 삶을 생각해 보았다면, 아니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확고부동한 신념을 가진다면 현실에 대한 내 행동의 인과응보를 고려하게 될 것이고, 현실적인 조그마한 결과에 집착함이 없이 새로운 인생관이 전개 될 것이다. 생각해 보라. 지금 이 현실에 저질은 온갖 악행이나, 탐욕스러운 행동들이 그 업보로서 내세에 참혹한 고통을 받는다면 과연 그것을 감수하고 그런 행위나 행동을 할 수 있겠는가?


분명 죽음은 미지의 세계다. 그것은 엄청난 신비다. 하지만 죽음에 대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두 가지가 있다. 우리가 죽는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확실하고, 우리가 언제, 어떻게 죽을 지는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언제 죽을지 불확실하다는 이유로 우리가 죽음에 대한 명상을 거부하고 연기한다는 사실이다. 마치 목욕탕에 불이나면 여인들이 자기 얼굴만 가리고 뛰쳐나오듯 자기 눈을 가리면 아무도 자신을 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짓을 우리는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옛 노래 가사처럼 한 오백년을 살고 싶어 한다. 아니 죽음을 거부하고 천년만년 살고 싶어 한다. 그것이 사람들의 욕망이다. 그러나 그 욕망과 희망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죽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면서 살아가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죽음으로서 모든 것이 끝장난다고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이 찾아오면 전혀 알지 못하는 공간에 던져지거나 전적으로 다른 누군가가 된다고 우리가 느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책이나 영화에서 때로는 어떤 사람들로부터 전해들은 아비지옥과 귀신들이 우글거리는 지옥세계를 헤매는 외로움과 고독에 떨며, 무서움에 몸부림치는 그런 세계를 상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다른 데 있다. 그것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이 다른 것과 구별되는 독자적이고 개인적인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그 내용을 검토해 보면, 그 정체성이란 전적으로 그것을 받쳐주는 무수한 사물들의 집합에 불과한 것임을 알게 된다. 이를테면 나의 명성, 내가 처한 직장이나 환경적 배경, 배우자, 가족, 집, 일, 친구, 은행에 맡긴 예치금이나 보험금 등등 … . 우리가 자신의 안전을 위해 의지하고 있는 것들은 깨지기 쉽고 언젠가는 사라질 일시적인 버팀목이 될 뿐이다. 따라서 그것들을 모두 잃어버린다면 진정 우리가 누구인지 말할 것이라도 있을까?


지난여름 청량사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식당에서 지갑, 운전면허증, 주민등록증 등등 모든 서류나 ID카드를 잃어버렸다. 모든 서류와 ID카드를 잃어버리고 나니 은행이나 거래처 어디를 가던 나를 입증할 것이 아무것도 없어 무척 당황했다. <나>는 분명 <나> 인데 나를 설명할 수가 없었다. 만나는 사람도 처음 본 사람도 아닌 내 이웃이요 하루건너 날마다 만났든 사람인데도 잃어버린 그런 것들이 없으면 나를 <나>라고 인증할 수 없다고 했다.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무엇이 진짜 나인가? 잃어버린 그런 것들이 진짜 나란 말인가?

  

우리가 애지중지하고 있는 이러한 버팀목이 제거된다면, 우리가 그렇게 매달리고 있는 이런 것들이 사라진다면, 우리는 바로 우리 자신, 우리가 모르는 바로 그 사람, 우리가 평생 동안 함께 살아왔지만 결코 만나기를 원하지 않았던 바로 <자아>라는 그 낯선 사람과 만나게 된다. 우리는 이처럼 낯선 사람과 침묵 속에서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 삶의 시간을 하찮고 사소한 부질없는 이런 것들에 매달려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허망한 버팀목에 의지하여 살아가기 때문에 우리의 삶의 방식은 근본적으로 고통스럽고 비극적인 드라마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란 생각해보면 꿈속에서 꿈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허망한 이야기 속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빌딩을 세우는 쾌감에 정신이 팔려 우리들은 모래 위에 집을 짓고 있는 것이다. 죽음이 이 꿈을, 이 환상을 무너뜨릴 때까지 우리에게는 이러한 버팀목들이 기묘하게도 영원하고 튼튼한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우리가 현실에 대한 좀더 깊은 사고(思考)를 지니지 못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어떤 사람들은 영혼이란 것을 이야기한다. 그 영혼이란 곧 내 마음이다. 죽음이 닥치면 우리는 모든 것, 특히 우리가 그토록 애지중지했고 맹목적으로 의존했던 그 모든 것이 의미가 없어진다. 그리고 그렇게 열심히 계속 살아 있게 하려고 애썼던 육신을 뒤에 남기고 떠나게 된다. 육신과 더불어 애지중지하든 그 버팀목들도 사라지고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그 <마음>이란 것도 사라진다. 우리가 절대적으로 믿고 있는 그 마음이란 것도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잠시 자신의 손목시계를 1분 동안만 가만히 들여다보라. 그 1분 사이에 얼마나 많은 생각들이 그대의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가? 그것은 마치 원숭이가 이 나무 저 나무를 잠시도 머물지 않고 옮겨 다니듯 우리의 생각은 아무 이유도 없이 어떤 것과도 무관하게 솟아나기도 하고, 때로는 그 어떤 생각 때문에 혼란과 갈등에 휩싸이기도 한다. 여름철 구름마냥 우리는 변덕스러운 마음에 그렇게 끌려 다니게 된다. 우리가 <나> 라고 여기는 이 마음이 이런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죽는 순간에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이런 마음에 의지한다는 것은 실로 어처구니없는 도박이 아닐까?


그러나 우리는 그 도박에 정신에 홀려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 더 많은 재산, 더 높은 명예와 지위를 꿈꾸며, 더욱더 편리함을 가져다주는 첨단 문명의 이기(利器)에 둘러싸여 비록 무상함이란 깊숙한 두려움이 우리를 숨 막히게 할지라도 결국 이것들의 노예가 되어버리고 만다. 우리의 모든 시간과 정력은 단지 이것들을 유지하는 데 소모된다. 우리 삶의 유일한 목표는 가능한 한 안전하고 확실하게 모든 것을 보존하는 것이다. 변화가 일어날 때 우리는 가장 빠른 치료, 교묘하게 고안된 일시적인 해결을 원한다.


배가 고프면 값진 요리로, 눈이 고프면 TV로, 귀가 고프면 음악으로, 육신이 고프면 성으로 채우게 되면 된다. 외로움이 느껴지면 나이트나 카지노에서 유흥을 즐기면 되고, 자동차로 드라이브를 하거나, 비행기로 낯선 이국땅에서 새로운 것을 대하면 새로운 감흥이 우리의 불만을 채우게 된다. 그래서 꿈속의 꿈을 꾸고, 또 다시 꾸게 된다. 그래서 심각한 병이나 재난이 우리의 무감각함을 뒤흔들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은 그렇게 표류하게 된다.


우리가 이 삶을 위해 많은 시간이나 생각을 쓰는 듯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오랫동안 일하고 퇴직한 사람을 생각해 보자. 나이 들어 죽음의 시간이 다가오자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아무것도 모른다. 실용적인 것에 대해서 우리는 입에 거품을 물면서 지껄이지만 그것이 죽음 앞에서 진정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우리가 신경안정제나 마약 따위에 취하기라도 한 듯이 오직 이 삶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은 커다란 자기기만이다. 이로 인해서 현대 사회에 황량하고도 파괴적인 유물론이 활개 치게 된다. 어느 누구도 죽음을 말하지 않고 어느 누구도 삶 이후의 삶을 말하지 않는다. 죽음을 말하면 염세주의자나 허무주의자나 세상에서 실패한 자들의 허망한 소리로 돌리고 만다. 그러나 우리의 가장 큰 욕망이 진정 계속해서 사는 것이라면 어째서 우리는 죽음이 끝이라고 무모하게 고집하는 것일까? 왜 적어도 죽음 이후의 삶이 있을 수도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지 않는 것일까? 만일 우리 자신이 주장하는 만큼 실용적이라면 진지하게 이렇게 물어야 한다. 우리의 미래는 참으로 어디에 있는가? 결국 어느 누구도 백년 이상 살 수는 없다. 그 이후에는 설명할 길 없는 영원한 미래가 뻗어 있건만…


죽음이 필연적이라면 죽음이란 실재하는 것이고, 아무 예고 없이 불쑥 찾아온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조용히 숙고하는 것이 중요하다. 티베트 속담에 나오는 비둘기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 그 비둘기는 잠자리를 만들기 위해 밤새도록 부산을 떨다가 잠을 자기도 전에 새벽이 밝고 말았다고 한다.


몽테뉴가 이른 말을 했다.

[죽음이 언제 어디에서 우리를 기다리는지 우리는 모른다.

죽음을 몸에 익히는 것은 자유를 실습하는 것이다.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배운 사람은 노예가 되지 않는 방식을 배운 셈이다.]


비 오는 날 빗물이 새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맑은 날 수리를 해야 하듯 사람은 살아 있는 그 젊은 시절에 마지막 생에 대한 준비가 필요하다. 비 오는 날 지붕을 고치는 바보가 되지 말아야 한다. 목이 마른데 이제야 샘을 파러가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가을에 수확하기 위해 농부가 이른 봄에 씨앗을 뿌리듯, 내 인생에 가을이 오기 전에 좋은 마음의 씨앗을 뿌려두어야 한다. 지금의 내 삶과 삶 이후의 삶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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