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의>란 말의 의미

2006. 1. 13. 23:15야단법석

 

 

귀의(歸依)란 말의 의미


불교에서는 귀의(歸依)란 말을 많이 사용한다.

부처님(佛))에게 귀의하고, 부처님의 가르침(法)에 귀의하고, 부처님을 따르는 수행자(僧)에 귀의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귀의(歸依)란 다름아닌 수백 수천의 욕망과 본능의 주인들에 대항해서 하나의 통치자를 선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통치는 부드럽다. 그것이 부드러운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기본적으로는 주인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주인이 하나라는 것은 언제나 좋다. 주인이 둘이 되면 거기에는 싸움이 있기 마련이며, 주인이 많을 때는 항상 혼란이 있게 된다.

수 백 가지 명령을 받게 되고 그대는 사방으로 끌려 다니게 된다.

우리 속담에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 란 말이 있다.

바다로 나아가야 할 배가 사공이 많아 산으로 간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당신은 무질서의 카오스(chaos)에 빠질 것이다.

혼란의 늪으로 빠지게 될 것이다.

때문에 미치게 되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게 될 것이다.

누구를 따르고 누구를 따르지 말아야 하는가?


한 젊은 사람이 소크라테스(socrates BC 469~399)를 찾아 왔다.

그는 인생에 있어서 결혼을 꼭 해야 되는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해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소크라테스를 찾아 온 것이다. 위대한 철학자이며 존경받는 그 사람만은 분명한 해답을 줄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찾아 온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대답했다.

『사람은 결혼해야 한다. 좋은 아내를 얻으면 그는 행복할 것이고,

나처럼 나쁜 아내를 얻으면 철학자가 될 것이다.』

위대한 철학자인 소크라테스의 아내는 어떤 사람인가?

소크라테스의 아내는 크산티폐(Xanthipper)라고 하는 인류역사상 가장 지독한 악처로 소문이 난 여인이다. 소크라테스는 그녀와 살면서 많은 고통을 당했다. 밤낮을 불문하고 긁어 되는 바가지는 기본이고, 부부 싸움을 할 때는 프로야구 선수인 냥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마구 집어던지곤 했다. 심지어는 뜨거운 커피를 그의 얼굴에 솓아 붓기도 했든 여인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의 얼굴 한쪽은 평생 화상의 흉터가 따라 다녔든 것이다.

그럼으로 이 젊은이가 그에게 부정적인 해답을 기대했다면 그에게 의견을 물어 본 것은 적절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긍정적인 해답을 기대했다면 그는 실망했을 것이다.


철학자란 누구인가?

항상 모든 대상과 거리를 두고 살아가야 하는 고독한 사람이 아닌가?  

그대의 탐욕은 말한다. “계속해서 돈을 모아라.”

그대의 욕정(sex)은 말한다. “계속해서 육체의 쾌락을 즐겨라.”

그러나 그렇게 되면 문제가 발생된다. 왜냐하면 투쟁이 일기 때문이다.

그대가 너무 섹스에 탐닉하면 돈을 축적할 수 없다.

구두쇠는 언제나 반(反) 섹스적이다.

왜냐하면 같은 에너지가 돈을 모으는 데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두쇠들은 연인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반 섹스주의자들이 되는 것이다.


하나의 욕망은 말한다.

“돈을 모아라. 돈은 안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늙으면 누가 도와 줄 것인가? 미래를 위하여 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것이 보호자이다.”

그러면 욕정은 말했다.

“그러나 인생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늙었을 때를 생각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당신의 청춘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그 순간이 가버리고 에너지가 고갈되기 전에 가서 마음껏 즐겨라. 그 에너지를 사용하라. 그것을 즐겨라.”

욕정은 말한다.

“지금 이 순간을 탐닉하라.”

욕망은 말한다.

 “지금을 생각하지 말라. 먼 훗날의 목표를 생각하라.”

그래서 투쟁이 일어난다. 이것은 두 개의 욕망사이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욕망이 다른 욕망과 투쟁을 일으킨다.


그대의 분노는 말한다.

“즉시 죽여라. 이 사람을 살해하라.”

그러나 그대의 두려움은 말한다.

 “그러지 말라. 다른 사람을 죽이면, 다른 사람들도 그대를 죽일 것이다.

예의 바르게 미소를 띠어라. 너는 훌륭한 사람이다.

너는 살인자가 아니다. 너는 범죄자가 아니다.”

그러니 어떻게 할 것인가?

주인은 그토록 많은데 노예는 한 사람 뿐이다.

하나의 주인을 선택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최소한 수백만이나 되는 목소리는 녹아 없어지고 하나만이 남기 때문이다.


그 하나의 주인은 누구인가?

인간의 이상향은 타율적인 것이 아니라 자율에 의지하여 자신의 자각을 일깨우는 부처님의 소리요,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외치지도 않았고,

팔만 사천 경문을 설했으면서도 “나를 따르라”라고 말하지 않았고,

“그대가 곧 부처다”라고 설파하신 부처님의 소리다.

그럼으로 부처님만을 따라야 한다. 그리고 그대는 모든 책임을 그에게 전가시킬 수 있다. 그리고 그는 말한다. “나의 멍에는 가볍다.” 그것은 왜 가벼운가? 그대에게 복종을 요구하더라도 그것은 그대를 다른 주인들로부터 해방시켜 주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그대의 욕망을 벗어버리는 한 그도 이 멍에를 벗겨 줄 것이다. 이것은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통과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욕망을 벗어버리기만 하면 복종은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이다.


귀의란 곧 자유를 얻기 위함이다.

다시 말해서 귀의란 마음속에 자리한 갖가지 욕망의 굴레를 벗어버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깨어 있는 마음으로 가는 길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각의 길이 된다.

자기 마음의 주인이 되는 길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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