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주인이 되자

2005. 11. 1. 22:43야단법석



<포대능선에서 바라본 도봉산 풍경>

 

        내 마음의 주인이 되자.


임제선사 어록에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이란 말이 있다.  우리가 부딪치는 모든 일마다 주인의식으로 행하면 하는 일마다 진실 되지 않는 것이 없다는 뜻이다.


주인이란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사람이다. 자유로운 사람이다.

그 자유로움은 곧 마음이 깨어있는 사람을 말한다.

이는 삶에서 모든 일에 전체적인 의식을 가지고 산다는 의미다.

전체적인 의식을 가진다는 것은 이기적이거나 타율적인 삶이 아니라 자주적이며 이타적인 주인으로 사는 삶이다. 그러므로 “나” 와 “너” 가 아니라 “우리” 라는 마음을 갖는 삶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때때로 도둑을 만날 수 있다. 도둑은 주인이 잠들어 있을 때, 주인이 방심하고 있을 때 들어온다. 그럼으로 주인이 깨어 있지 않으면 도둑을 막을 수 없다.

그 도둑이란 이기적인 마음, 질투와 증오, 시기하는 마음, 거짓말과 이간질하는 마음, 남을 저주하고 욕하는 마음, 갖가지 미사여구로 아첨하는 마음, 거짓을 꾸며대는 거짓된 마음,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려는 배타적인 마음이다. 그럼으로 삶은 진실로 온몸으로 깨어 있는 주인이 되어야 이런 도둑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내 삶이 생명이 있는 살아 있는 삶이라면 남도 나와 같이 생명의 에너지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그럼으로 <나> 가 아닌 <우리>라는 말이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언제,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도움이 필요할 때, 그들을 도와 줄 수 있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집안에 키우는 개가 죽어 가고 있을 때 당신은 개를 보살펴 준 적이 있을 것이다. 아무도 물을 주지 않아 나무가 말라 갈 때 그 나무에게 물을 준 적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을 했다고 남에게 떠들어 보이거나 자랑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도록 이렇게 외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내가 얼마나 자비로운 사람인지 보시오. 나는 이 나무에게 물을 주어 다시 푸른 잎이 피어나게 했소.』


삶에 있어서 베풂은 누가 누구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다. 그럼으로 보상이나 반대 급부를 조건으로 달아서는 안 된다. 하인은 무슨 일을 하면 주인에게 생색을 낸다. 그러나 주인은 그렇지 않다. 반대급부를 요구하거나 바라는 것은 주인의식 아니다. 뜰 앞에 피어나는 저 나무를 보자. 나무가 다시 푸르게 되도록 도와주면 당신은 당신 자신의 삶을 푸르게 만드는 것이 된다. 바로 그것이 보상이다. 그것 이외의 다른 보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죽어 가는 개를 보살펴 주는 것은 결국 당신 자신을 보살펴 준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상세계에 드러나 있는 모든 사물들은 궁극적으로 보면 나의 삶과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나와 하나이다. “나와 너”가 아니고 “우리” 가 되는 것이다. 그럼으로 주인의식이란 세상사 모든 것에 주인이 된다는 의미다. 사람과 사물, 그리고 처하는 일마다 주인으로서 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다.


누군가가 성(聖) 어거스틴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나는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 어려운 말은 잘 모릅니다. 그러니 가능한 짧고도 쉬운 말로 일러주십시오.”

그러자 성 어거스틴은 말했다.

 “그렇다면 말해 줄 것은 단 한가지다. 진정으로 사랑하라. 사랑만 한다면 그대가 무엇을 할지라도 올바른 것이 될 것이다.”

진실로 이는 맞는 말이다. 당신이 진실로 남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주위의 돌과 나무와 강을 사랑한다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올바른 행위가 될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진정한 사랑이 없다면 모든 것이 잘못된 것이 된다. 그 진정한 사랑이 결핍되어 있다면 그 사랑은 도둑과 같이 위장된 이기적인 마음이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진정한 사랑은 조건이 붙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남의 발이 닿지 않은 곳에 찾아가 베풂을 줄 수 있고, 남이 하기 싫은 일을 내가 할 수 있고, 남이 힘들어하는 것을 나는 기쁜 마음으로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랑을 일러 나누어 갖는 사랑이라고 한다. 베푸는 사랑이라고 한다. 이것이 자비요, 깨어 있는 자의 사랑이다. 이렇게 온 몸으로, 전체적으로 깨어 있는 삶이 바로 참된 주인 의식인 것이다.


어느 기독교 단체에서 한 구석 밝히기 운동을 편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것이 한구석을 밝히는 마음이다. “한 구석”이란 숫자의 “하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비유다. 그것은 전체를 말하는 것이다. 전체는 개체를 통하여 드러나기 때문에 “한구석”이라고 한 것이다.


그럼으로 나누어 가져야 한다. 나누어 가짐은 곧 주인의식이다. “함께” 하는 것, 그것은 곧 일체가 되는 것이다. 이는 곧 주인 의식이다. 내 욕심을 부리는 이기적인 삶을 사는 것은 주인이 아니라 하인의 의식이다. 주인은 나누어주고, 돌보아 주지만, 자신의 공덕은 자랑하지 않는다.

집안의 개를 보라. 개는 결코 어울려 먹지 않는다. 고기 한 조각을 얻으면 개는 즉시 그것을 물고 구석으로 달려간다. 그 개는 다른 개가 자기 옆으로 오지 않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다른 개가 자기 것을 빼앗아 먹을까 바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는 혼자서 먹는다. 개뿐만이 아니라 모든 동물들은 나누어 먹지 않는다. 나누어 먹는 것은 인간만의 특징이다. 사랑으로 남을 감싸줄 수 있는 것도 인간만의 특징이다. 그럼으로 당신의 마음속에도 개와 같은 그런 동물근성이 일어나지 않도록 깨어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당신은 당신 의식의 주인이 아니라 하인이 되는 것이다.

그럼으로 그대는 마음이 항상 깨어 있는 주인이어야 한다. 이기적이고 바르지 못한 악인의 마음은 버리고, 베풀고 함께 하는 부처의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깨어 있는 마음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그럼으로 나의 삶에 내가 주인이 되어 모든 것을 조건 없이 받아드리고 조건 없이 베풀어 줄 수 있는 것이다.


“수처작주 입처개진”,

이것이 진실로 모든 부처가 우리에게 주는 삶의 메시지요, 영원한 진리의 소리다. 이것이 진정 진실 된 내 삶을 조각하는 이정표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말이 좋다. 그래서 이 말과 함께 나는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내 삶을 그렇게 일구어 나가고 싶다.

-<현림> 저. <바람에 실린 꽃향기처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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