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필리아적 속성을 경계하자

2005. 12. 11. 12:07야단법석

 

 

네크로필리아(Necrophilia)의 속성을 경계하자.

 

 

 

 

 

 

심리학에서 인간의 속성을 정의한 말 가운데 “네크로필리아(Necrophilia)"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시체 애호증(愛好症)’이란 뜻인데 쉽게 말해서 살아 있는 것보다 죽은 것을 더 좋아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문제는 이 네크로필리아적 속성을 모든 사람들이 지니고 있으며 그것은 마음의 심층의식 속에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활동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토담집이나 통나무집의 향수를 그리면서도 차갑고 매끄러운 대리석 건물을 더 좋아한다. 통나무는 생명을 지닌 식물이지만 대리석은 생명이 없는 차가운 돌덩어리다. 그런데도 우리가 통나무집보다 대리석을 장식한 콘크리트건물을 더 좋아하게 되는 것도 바로 이 <네크로필리아적> 속성 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살아있는 동물을 사랑하는 대신 죽은 밍크의 가죽을 좋아하고, 연인을 옆에 두고도 무감각한 현대인들이 포르노영화 필름에서 비치는 영상을 보고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것과 같이 산 사람보다는 그림자에, 다시 말해서 생명이 없는 것들에게 더 관심을 가지는 속성이 바로 네크로필리아적 속성에 기인한 것이라 심리학자들은 말한다.

 

 

 

죽은 시체는 온기가 없다. 차갑고 싸늘하고 꼿꼿하고, 감정이 없다. 이러한 것을 좋아하는 네크로필리아적인 속성은 삶에서 온기를 거부한다. 시체를 해부하는 차갑고 날카로운 메스처럼 감정이 개입되지 않는다. 그럼으로 거기에는 어둠과 침울함이 삶의 약동성과 조화를 덮어버린다. 그래서 네크로필리아적 속성은 우울증과 같은 내면성에 빠지면서 온화하고 부드러운 감성 보다는 차가운 딱딱한 지식을 선호하게 된다. 삶의 온기가 사라진 차가운 마음은 편협된 세계관에 빠져 자기만의 지식을 어머니로 삼고 아집을 낳는다. 그래서 네크로필리아적인 속성을 좋아하는 자들은 대개 어름처럼 차갑고, 음울하고 시체처럼 굳은 아집을 가지고 배타성을 지니게 된다.


오늘날 우리는 첨단과학의 덕분으로 기계문명 속에 살고 있다. 분명 기계문명은 자본주의 꽃이다. 정밀하고, 민첩하고, 일의 효율을 극대화시킨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편리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편리함이 목적이 아니다. 삶의 의미는 그런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삶의 방편일 뿐이다.

삶이란 살아있고, 약동하는, 자유로움이 있어야 한다. 살아 있는 것은 구속받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육체적이든 정신이든 간에.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기계는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온기가 없다는 것이다. 기계는 실수를 허용하지 않듯 삶에서 유연성과 포용성, 그리고 여유를 절대 허용하지 않는다. 기계란 것은 우리에게 편리함과 일의 효율성을 제공하지만 그것은 단지 삶의 방편이지 목적이 될 수는 없다. 그럼으로 그 방편에 매달려 사는 것을 최대 행복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오늘날 우리는 본말(本末)이 전도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살아 있는 자가 죽은 기계에 매달려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첨단과학이 창출한 각가지 기계문화가 창출하는 편리함에 빠져서 약동하는 생명의 그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죽은 것에 매달려 살아가는 이것 또한 이 네크로필리아적 속성에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서 <돈>이 생명이다. 그런데 그 돈이란 무엇인가?

돈이란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이 삶의 전 목적은 아니다. 돈이란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서 행복한 것이 아니고, 돈이 적다고 해서 불행한 것도 아니다. 돈이란 생명을 지닌 것은 아니다. 돈이란 단지 유통수단으로 가치를 지닌 한갓 종이에 불과하다. 부동산, 증권 모두가 생명을 지닌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도구가 되겠지만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야 하는 궁극적 목적은 아니다. 그것은 과거의 것이지 현재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두 과거의 산물이다. 과거에 축적되어진 것들이다. 현재가 살아 있는 것이라면 과거는 분명 죽은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현재보다 과거를 더 좋아하다. 살아있는 것보다도 죽은 것을 더 원한다. 네크로필리아적 속성이 또한 여기에 발로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사회에 새로운 인기있는 종교가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돈>을 신으로 모시는 종교다. 배금주의(拜金主義)사상이 새로운 종교로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돈은 필요하지만 돈이 나의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내가 돈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 배금주의란 무엇인가? 직설적으로 정의한다면 사자(死者)가 생자(生者)를 다스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칼 마르크스(Karl Marx)는 그의 경제학에서 <죽은 것이 산 것을 다스린다.> 라고 했다.


죽은 송장을 끌어안고 슬퍼하는 자는 있지만 죽은 송장을 끌어안고 기쁨을 노래하는 자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그렇지 않다. 재물이라는 죽은 것을 부둥켜안고 거기에서 풍기는 살인, 절도, 강간, 폭행, 사기행각 등 악취를 감수하면서 매달려 살고 있다. 산 자가 죽은 것에 매달려 이 삶을 악취의 늪 속에 빠져들어 가는 것에 열을 올리고 있다. 잠시만 홀로 깨어 있는 마음으로 생각해 보라. 죽은 시체를 부둥켜 끌어안는 장면을. 송장의 역겨운 짙은 냄새를 쾌락이라는 향수로 뿌린다고 해서 어찌 그것이 산 자의 향기가 되고, 기쁨이 되겠는가? 그래서 옛 사람들은 재물은 추한 것이라고 한 것인 줄도 모른다.


바이블의 창세기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이야기는 기독교인 아니더라도 아마도 모두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라는 도시는 지상에서 가장 악명 높은 죄악의 도시라 일컬어지는 곳이었다. 바이블에 의하면 말로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한 인간사회 - 황금송아지 앞에서 혼성섹스와 관능적 유흥과 절도, 살인 등이 판을 치는 곳이었다. 그래서 이를 보다 못한 하느님은 그 도시를 이 지상에서 멸하기 위해 두 명의 천사를 보냈다. 거기에는 하느님의 충실한 제자 <롯>이 살고 있었다. 롯은 천사가 온 목적을 알고 그 도시를 구하고자 애걸을 해보았다. 만약 그 도시에 하느님을 믿는 40명의 사람들만이 있으면 그 도시를 멸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그 천사는 이르길 “40명이 아니라 단지 10명의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라도 있으면 그 도시를 멸하지 않겠다. 고 했다. 그러나 롯은 소돔과 고모라의 도시에서 그 10명을 채우지 못했고 그 도시는 하느님의 저주로 지구상에서 멸망했다고 바이블은 말하고 있다. 과연 이 시대에도 그런 천사가 온다면 우리가 진실로 죽은 것들을 버리고, 돈을 버리고, 물질적 탐욕과 관능적 쾌락을 버리고 참다운 인간의 온기 있는 삶을 추구하고, 바른 믿음을 갖고, 삶의 궁극적 의미를 추구하는 그런 자 10명중에 끼어 들어갈 수 있을까?

 

 

 

 

죽은 시체는 굳어 있다. 딱딱한 돌처럼 굳어 있다. 네크로필리아적 속성이 발동되면 사람들의 의식은 시체처럼 굳어진다. 굳어진 의식은 남을 배척하게 되고, 교만과, 아집과 편견을 낳게 된다. 바위처럼 고고하게 보이고 싶고 무언가 남에게 우월성을 돋보이고 싶어진다. 자본주의에서 그것의 가장 쉬한 접근은 바로 소비다. 그래서 소비를 통한 과시욕을 자랑하게 된다. 그래서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의 위력은 다름 아닌 소비력에 있다고 사회심리학자들은 말한다.

그리고 부자가 자랑하는 것은 오로지 두 가지 뿐이라고 말한다.

하나는 쇼핑이고, 다른 하나는 해외여행이다.

이것은 분명 우리가 현실에서 보고 느끼는 분명한 사실이다. 소비는 분명 소유의 한 형태이다. 이것은 분명 오늘날의 자본주의 산업사회가 바라고 있는 가장 중요한 사실이다. 소비는 분명 여러 가지 특질을 지니고 있다. 즉 그것은 우선 불안을 제거해 준다. 왜냐하면 가지고 있는 것을 빼앗길 염려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또 더 많이 소비할 것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이전의 소비가 곧 그 욕구 충족적 성격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대의 소비자들은 다음과 같은 공식으로 자신을 확인한다.


『나는 존재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 및 내가 소비하는 것』


그러나 그들의 소비는 기껏해야 자동차, 비디오, 오디오, 전자제품, 여행, 섹스가 소비주의의 주된 대상이 되고 있을 뿐이다. 이들은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모두가 생명이 없는 기계문명이 만들어 낸 장난감이요, 온기를 없애는 냉장고 같은 기호품에 지나지 않는 것들이다. 사람은 어디로 사라지고 물건이 이 세상을 지배하기 위해 사람들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인간의 순수한 부드러운 마음이 어떻게 자리할 수 있을까? 그기에 삶에 대한, 자신의 존재에 대한 깊은 온기와 유연성과 조화가 어떻게 일어날 수 있을까? 생명의 온기를 잃어버리고, 소비와 과시욕으로 굳어진 이 마음에 무엇이 남겠는가? 탐욕과 허욕과 병들은 쾌락 밖에 더 있겠는가? 생명의 온기가 사라져 버리고, 정신이 시체처럼 굳어버렸을 때 그것의 종착역은 바로 황금송아지와 쾌락에 젖은 현대판 소돔과 고모라의 도시가 되지 않겠는가?


고대 서양에서도 쾌락주의를 신봉하는 <에피쿠르스>학파가 있었듯이 석가모니 부처님이 살아 계실 그 당시에도 신의 존재나, 업의 법칙, 생전이나 사후의 존재 등 인간의 정신적인 모든 것을 부정하고 오로지 인생의 목표는 육체의 고통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쾌락을 최고한도로 즐기는데 있다고 여겨 욕망의 충족을 인생의 최고 가치를 여기는 철학사조가 있었다.


소위 <차르바카(cãrvãka)>의 철학도들이다. 그들은 쾌락 이외는 다른 어떤 도덕적 법칙도 인정하지 않으며, 이 세상에서 고통을 완전히 극복하려고 추구하는 해탈의 이상(理想)은 불가능한 것이라 여겼다. 말하자면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한 쾌락과 고통은 따르기 마련이며, 그렇다고 그것이 두려워서 쾌락과 고통의 피안(彼岸)의 세계를 찾는 것은 마치 껍데기 때문에 알맹이를 버리는 것과 같이 어리석다고 여겼다.


<차르바카>는 “차르브(carv)"에서 나온 말로 <먹고, 마시고, 즐기라>는 의미를 지닌 말이다. 오로지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영혼이란 의식이 있는 몸에 지나지 않으며, 향락만이 인생의 유일한 목적이며, 죽음만이 해방이라고 부르짖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천박하고 상식적인 견해를 따른다 하여 순세파(順世派)라고도 불렀다. 우리가 이 시대에 부러워하는 소위 <출세한 사람>이란 바로 이 순세파의 교도들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생명의 온기가 사라진 차가운 시체처럼, 돌보다 더 단단하게 굳어져 있는 첨단 기계문명의 혜택을 누리고자 하는 이 21세기의 산업사회의 주역이 추구하는 물질문명은 바로 이 <차르바카>의 철학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삶이란 <산자의 몫>이다. <죽어 있는 자의 몫>이 아니다.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이 생명이다. 그럼으로 삶은 언제나 약동하고, 변화하면서 창조하는 신선한 정신을 지녀야 한다. 굳어 있는 것이 아니라 부드럽고 유연하게 살아 있어야 한다. 죽은 것이 산 자를 다스리게 해서는 안 된다. 육체의 향락과 쾌락이 아닌 영혼의 기쁨과 평화를 가져오는 그런 힘은 죽은 것에서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세속의 부귀영화만을 추구하는 차르바카의 신도가 평온한 여생을 마치고 열반에 들었다는 이야기는 없다.


그러나 그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다. 언제나 한 순간 한 순간 살아 있는 <자아>를 의식하고 <자아>가 병들지 않도록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

비록 들판에 피어난 이름 없는 한 송이 꽃으로 태어났더라도 요란하지만 죽어 있는 조화보다는 살아있는 꽃으로 살다가 가는 것이 더 보람된, 더 의미 있는 삶이되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살아 있는 온기를 찾아야 한다. 그래서 모든 것을 사랑해야 한다. 자연과 더불어 생명의 온기를 지니고 있는 나와 너를, 그리고 우리 모두를.


죽음은 고요하다. 정적만 감돈다. 죽음은 동요가 없다. 변화가 없다. 고인 물이 썩듯 죽음은 허무와 공허의 고름만 내뿜는다. 거기에는 기쁨도 평화도 없다. 희망도 도전도 없다. 그것의 성취 뒤에는 허무만 낳고 더 많은 갈증만 남긴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 있다. 삶이란 여러 가지 도전에 직면하게 되어있다. 살아 있는 꽃이 바람과 눈과 각종 도전에 시달리듯 우리의 삶은 실패와 좌절과 같은 갖가지 도전 속에 존재한다. 때로는 우리의 삶에 절망적인 위기가 도래할 수도 있다. 우리는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삶이 필요로 하는 것은 죽음과 같은 고요한 그런 안전이 아니라, 솟구치는 샘처럼 굽이치는 삶의 약동성이 있어야 한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불안전성이 바로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을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불안전한 토양 속에서 더 성장해 간다. 불안정하면 그럴수록 점점 더 살아 굽이치는 그대 자신을 발견해야 한다. 마음이 네크로필리아적이 되어 죽음을 동경해서는 안 된다. 우울하고 침울한, 그리고 차가운 감정에 젖어서 살아서는 안 된다. 마음의 온기, 그리고 삶의 부드러움과 유연성, 그리고 삶의 온기를 지닌 그대 자신의 변화가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대 속의 네크로필리아적 속성이 발동하지 않도록 언제나 깨어있는 삶이 필요하다. 그래서 불교는 깨달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 깨달음이란 무언가? 펄펄 살아있는 그대의 현존(現存)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살고, 그렇게 살 수 있다면 달리 극락정토가 필요하겠는가?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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