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자신을 알라>는 말의 메시지

2005. 10. 28. 23:16야단법석

 

  <청량사의 아침>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의 메시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2가지로 구분해서 말할 수 있다.

하나는 <알려진 것(the known>으로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알려지지 않은 것(the unknown)>으로 우리가 아직도 알고 있지 못한 것을 말한다. 이 <알려지지 않은 것>은 앞으로 알려질 가능성이 있다. 과학은 모든 것을 이렇게 <알려진 것>과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둘로 나누고 있다. 알려진 것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며, 알려지지 않은 것은 앞으로 알게 될 것이다. 알려지지 않은 것이 알려지는 데에는 단지 시간만이 필요할 뿐이다.


그러나 종교는 존재를 셋으로 나눈다.

<알려진 것>,

<알려지지 않은 것>

그리고 <알려질 수 없는 것(the unknowable)>의 세 가지다.

이 <알려질 수 없는 것>은 아무리 자세히 알려고 해도 알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알려지지 않은 것은 알려진 것이 된다. 그러나 알려진 것이 다시 알려지지 않은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런 일이 많이 있었다. 역사를 보자. 광대한 중국의 대부분 영토는 과거 우리의 땅이었다. 그러나 역사의 물줄기 속에서 우리는 그것을 잊어버렸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은 <발해>와 <부여>의 고증을 찾아 다시 우리에게 그것이 우리의 땅이 되었든 사실을 알려준다. 이와 같이 많은 것이 우리에게 알려졌다. 그런데 그것들이 다시 알려지지 않은 것이 되었다. 사회가 관심을 쓰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과거를 깊이 파고들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 물어보면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것들은 거의가 다 이전에 이미 알려졌다가 잊혀진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어떤 것이 사라지고, 존속하고 하는 것은 사회에 달려 있다. 사회가 관심을 두면 존속하고, 그렇지 않으면 사라져 버린다.


알려진 것이 알려지지 않게 되고,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 알려지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 제3의 차원이 있다. 그것은 <알려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은 알려질 수 없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과학은 이렇게 말한다.

『알려질 수 없는 것이란 단지 알려지지 않은 것일 뿐이다.』

그러나 종교에서는 그것이 완전히 다른 차원이라고 말한다.

<알려질 수 없는 것>은 항상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남아 있다.

그 본래의 성질은 마음이 어떻게 처리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알려진 것>은 객관이 된다. 객관은 전체에 대한 부분이요, 주관에 대한 상대다.

주관과 객관이 하나가 되면 아는 자도 알려진 것도 없게 된다.

그럼으로 주관이 있기 때문에 객관을 알 수 있게 되고, 부분이 전체에서 분리되면 알려질 수 있다. 그러나 알려질 수 없는 것은 분리되어진 것이 아니다. 주객(主客)으로 분리될 수도 없고 부분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광대하고 무한하며 처음도 끝도 없다. 그것이 부분이 아닌 전체이기 때문이다.


전체는 어떤 방법으로도 부분에 의해서 포착될 수 없다. 어떻게 부분이 전체를 포착할 수 있겠는가? <나>를 알려면 <나>와 분리되어야 한다. 마음이 마음을 알려고 보는 마음과 보여 지는 마음으로 분리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하나가 주체가 되고 하나는 객체가 된다. 주객이 분리되면 전체가 아니다. <나>가 아니다. <내 마음>이 아니다. 그럼으로 마음이 어떻게 마음을 알 수 있겠는가?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는 그것을 마음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불가능하다. 결코 불가능 하다. 우리를 현상세계에 있게 한 그 근본자리를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우리는 단지 바다 위를 오가는 파도일 뿐이다. 부분일 뿐이다. 파도가 어떻게 전체 바다를 자기 안에 포함 시킬 수 있겠는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전체에서 분리되어진 현상의 세계요, 객관세계일 뿐이다. 마음이 마음을 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마음이 또 다른 마음의 그림자를 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해될 수 없는 것이 있다. 알려질 수 없는 것이 있다.

어떻게 그대가 그대 자신을 알 수 있겠는가? 모든 종교는 이렇게 말한다.

『그대 자신을 알라.』


어느 때 쇼펜하우엘이 무엇인가 골들이 생각하면서 길거리를 걷다가 마주 오는 사람과 부딪쳤다. 그 사람은 화가 나서 물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요?”

생각에서 깨어난 쇼펜하우엘이 말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소. 나도 지금 그것을 몰라 생각하는 중이요.”

우리 모두가 그렇다. 어떻게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알 수 있겠는가? “내가 누구다”라고 말할 때 누가 아는 자가 되고, 누가 알려지는 자가 될 것인가? 안다는 것은 지식이다. 지식은 주체와 객체가 떨어져 있음으로써 가능해 진다. 보이는 것과 보는 자가 분리되어 있을 때 안다고 말할 수 있다. 거울에 얼굴을 바짝 가까이하면 거울에 내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거울과 나와 거리가 있을 때 나는 거울을 통해서 나를 볼 수 있다. “나는 그대를 알 수 있다. 그대도 나를 알 수 있다.” 고 말할 때 이는 내가 객체가 될 때 그대는 주체가 되고, 그대가 객체가 될 때 나는 주체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어떻게 자기가 자신을 알 수 있겠는가? 그렇게 하려고 할 때 그대가 알게 되는 것은 그대 자신이 아닐 것이다. 아는 자는 항상 물러나 있게 된다. 지식은 항상 객체로 묶여 있게 되고, 그대는 주체로 묶여 있게 된다. 상대적이면 알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예를 들어보자. 의학의 발달로 초음파를 이용하여 그대는 그대의 심장을 그대의 눈으로 볼 수 있다. 그러면 그대는 말한다. 나는 나의 “심장” 보았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나의 심장을 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심장은 그대 자신이 아니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대가 그대의 마음을 알 수 있다고 하자. 예컨대 지나간 어느 시절에 달콤한 추억을 생각을 보라. 그 추억을 느끼는 그때의 그 마음도 그대의 마음이요, 그 추억을 되씹는 그 마음도 그대의 마음이다. 마음이 마음을 보고 아는 것이다. 앞의 마음도, 뒤의 마음도 그대 자신이 아니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것이다. 즉 마음은 객체가 되고 그대는 그것을 아는 또 다른 마음이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그대는 계속 뒤로 물러서서 어떤 대상을 본다. 무엇을 알든 그대는 즉시 그 알려진 것을 초월하여 주체가 된다. 그 객체가 알려지게 된 순간 그대는 객체로부터 분리된다. 앞의 마음이 뒤의 마음이 되고, 그 마음이 다시 앞의 마음이 되고.... 보는 마음이 보여지는 마음이 되고, 그 마음을 다시 보는 또 다른 마음이 뒤를 잇는다.


『나는 나 자신을 알았다.』라고 말한다고 하자. 그것이 무슨 뜻인가?

누가 누구를 알았단 말인가?

알려진 것이 그대인가? 아니면 아는 자가 그대인가?

그대가 아는 자라면 아직도 그대는 <알려지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알려 진 것이 그대라면 그것을 아는 그대는 누구인가? 그럼으로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 한 일이다. 그대의 마음을 백가지로 쪼개면 백 개의 마음이 그대에게 생긴다. 마음이 마음을 아는 것은 그래서 불가능하다. <나>가 <나>를 알기는 그래서 불가능하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도 <나는 나 자신을 모른다>고 하지 않았는가?


일찍이 불교는 <나>라는 문제를 집중적으로 분석했다. 아비달마의 교설이 바로 그것이다. 둘로 쪼갠 것이 바로 명색(名色: 물질과 정신)이다. 다섯 개로 쪼개본 것이 오온이다.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다. 이를 다시 12개로 쪼개본 것이 12처(處)요, 18개로 쪼개본 것이 18계(界)다. 이것을 다시 법(法)으로 나누어 본 것이 아비달마의 5위 75법이요, 100개로 쪼갈려 본 것이 유식의 5위 100법이다. 그러나 <나>라는 문제는 아직도 정의 되지 않았다. 이 문제는 영원히 풀어질 수 없는, 알려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식은 전식득지(轉識得智)라 했다. 이는 곧 마음으로는 <나>라는 것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무어라 정의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식(識)>이란 다름 아닌 <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식득지란 그 마음을 굴러서 지혜를 얻는다는 말이다. 그 지혜란 반야를 말한다. 그것은 마음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말과 문자로 기술되어질 수 없는 것이다. 무어라 정의 될 수 것이기에 이름이 반야인 것이다. 금강경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름이 반야가 아니기 때문에 반야인 것이다.’ 객관화 되고, 분리되어 질 수가 없는 것은 알려질 수 없는 것이다. 안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왜 모든 종교에서는 언제나『그대 자신을 알라』고 말하고 있는가?

그것은 자기 자신을 알려고 하는 노력을 통해서만 <알려질 수 없는> 차원으로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질문의 답인 것이다.


『그대 자신을 알라』는 말에 속지 말라. 이는 그대 자신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안 사람은 아무도 없다. 또 알 수 있는 사람도 없다. 그리고 모든 깨달은 사람은 ‘크고 광대하고 궁극적인 것은 항상 알려지지 않은 채로 남는다’ 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신비의 세계요, 어떠한 지식으로도 접근할 수 없는, 마음으로 알 수 없는 불가사의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이냐? 그것이 바로 <나>라는 실체요, 그 주체라 할 수 있는 <마음>의 실체다.


『그대 자신을 알라』- 이것의 탐구는 바로 <알려질 수 없는 세계>로 가는 문이라는 것을 홀연히 알게 되는 길이다. 그대 자신을 알려고 하는 노력을 함으로써 그대는 알려질 수 없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알려질 수 없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는 말은 그대가 그것(자신)을 알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알려 질수 없는 것 속으로 가게 된다는 말이다. 그것은 결코 지식이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도약이다. 말과 언어, 그 어떤 <무엇이다>라고 정의될 수 없는 그런 경지다.


물방울이 바다에 들어가듯 거대한 바다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도약이다. 그대가 그대 자신을 알게 된다는 뜻이 아니다. 그대는 바로 그것이 되는 것이다. 물론 아주 미묘한 방식으로 그것을 알면서 동시에 알지 못한다. 선사들의 이런 화두를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저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가 그대 안에 있는가? 그대 밖에 있는가?”


우리들의 눈에는 이런 말들이 역설적으로 보이고, 결함이 있고, 약간 미친 소리처럼 들리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나>라는 존재의 본질에 대한 물음인 것이다. <나>를 찾는 물음인 것이다. 존재의 더 깊은 뜻을 추구한다는 것은 더 이상 아무것도 행해질 수도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안과 밖이란 분별하는 그대의 마음이지 안과 밖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분별하는 마음은 식(識)이다. 바다물의 작은 조각이 분리되면 물방이 되고, 다시 바닷물에 합쳐지면 그냥 바닷물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런 준비도 없이 알려질 수 없는 것 속으로 들어가게 될 때는 그냥 안이면서 밖이 되는 것이다. <나>를 찾는 질문은 안과 밖을 찾는 질문이 아니라, 파도와 바다를 찾는 것이 아니라, 그대가 안이 되고 동시에 밖이 되고, 그대가 바로 파도가 아니라 바다임을 보는 것이다. 그래서 진리는 <본다>고 말하지 <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불교를 일러 믿음의 종교가 아니라 깨달음의 종교라 하는 것도 여기에 연유하는 것이다.


<나>라는 것에 대한 질문의 답은 너무도 역설적이기 때문에 앞뒤를 분간할 수 없다(初中後가 없다). 그리고 너무도 깊기 때문에 밑바닥에 이를 수도 없다(무저갱). 또한 너무도 무한하기 때문에 그 속으로 들어가면 들어 갈수록 그대는 자신을 잃고 만다(무변광대).


쉽게 신이란 것을 생각해 보라. 신은 전체요 창조자다. 그대는 피조물이며 절대자가 아니다. 그대는 전체가 아니라 부분이다. 부분은 전체로 들어가도 부분이 전체를 흡수할 수는 없다. 그럼으로 그대는 신을 소유할 수 없다. 그대가 소유될 수 있을 뿐이다. 신은 소유될 수 없다.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신이 그대를 소유하도록 허용하는 일이다. 그것이 할 수 있는 전부이다. 자연스러운 수용뿐이다. 이를 흔히 <항복>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신을 불태워 재로 만든다는 의미가 이것이다. 그래서 금강경에서 수보리는 <항복기심>을 테마로 질의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신이 그대를 소유할 수 있도록 허용할 때 그대는 소유될 준비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아니 그저 수용되기면 하면 된다. 모든 이성(理性)을 버리기만 하면 된다. 이성은 여기에 아무 쓸모도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식(識)이기 때문이다. 식(識)에 빠지면 그때 모든 것이 혼란되고 흐려진다. 맑고 깨끗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대는 이 혼란된 것을 맑게 하려고 식(識)으로서 노력해 왔다. 그러나 불가능한 일이다. 삶은 모든 역설적인 것을 함께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찾는 그대의 마음은 또 다른 찾는 마음을 내기 때문이다. <나>라는 존재의 문제는, <너 자신을 알라>는 이 화두는 자연스러운 수용은 있어도 소유나 객관의 대상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식(識)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를 찾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내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다. 그러나 삶에 있어서 모든 길을 다 여행할 수 있어도 결코 목적지에 이를 수 없다. 모든 길은 하나로 합쳐져 있기 때문에 목적지에 다다를 수 없다. 왜 그런가? <나>에 대한 질문의 답은 알려 질 수 없는 것이듯, 삶 또한 목적지가 없기 때문이다. 삶은 단지 찬양일 뿐이다. 삶이란 풀어야할 수수께끼 아니라 체험하는 신비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삶은 어느 곳으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되어 가는 것을 즐기고 있는 것일 뿐이다. 하나의 게임이며 장난이다. 그럼으로 삶이란 어린아이와 같이 게임과 장난을 할 때처럼 진지하게 살라고 선지식들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 <그대 자신을 알라>는 이 말은 종교적인 말이지 과학적인 말이 아니다. 그럼으로 <그대 자신을 알라>는 이 말을 논리적으로 접근하려고 하지 마라. 논리적인 사고는 그대를 심각하게 만든다. 그대라는 존재는 삶 속에 존재한다. 그럼으로 삶 또한 너무 심각하게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삶을 놓치게 된다. 진지해져라. 그러나 심각해지지 말라. 이는 집착하지 말라는 뜻이다. 진지함과 집착함은 서로 다르다. 집착할 때는 수단과 목적, 방법과 성취라는 개념으로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때는 목적지가 있고, 그 목적지로 가는 길이 있다. 그기에 당연히 그림자처럼 야망이 생긴다. 집착은 곧 야망이며, 하나의 질병이다. 관심을 이 세상으로 돌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 야망에 찬 마음은 또 다른 세상을 생각한다. 집착함은 종교적인 것이 아니다. 심각한 것은 종교적이 아니다.


심각한 사람은, 집착하는 사람은 자동적으로 철학적인 사람이 된다. 그는 생각을 시작한다. 집착한다는 것은 곧 머리와 관계가 있다. 심각한 사람, 집착한 사람, 사상가가 침울한 얼굴이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들은 웃지도 못하고 놀지도 못한다. 항상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삶을 통해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그는 삶 자체를 수단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삶 그 자체가 곧 목적인 것이다.

철학적으로 <나>를 찾아가는 사람은 그래서 심각해지고, 삶 자체를 수단으로, 이념을 세우기 좋아하는 것이다.


진지한 사람은 완전히 다르다. 진지함은 가슴으로부터 나온다. 진지한 사람은 심각하지 않다. 집착하지 않는다. 진지한 사람은 추구는 하되 목적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그는 어린 아이처럼 추구한다. 찾고자 하는 것을 발견하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리고 발견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것으로 역시 족하다. 아이는 닭을 쫓아 달려가다가도 도중에 나비를 발견하면 방향을 바꾸어 나비를 쫓는다. 그렇게 나비를 따라가다가 길가에 핀 꽃이 있으면 나비는 잊어버리고 온 관심을 꽃으로 집중시킨다. 아이는 심각하지 않다. 아이는 집착하지 않는다. 단지 진지할 뿐이다. 아이가 어떤 것을 마음에 두면 그는 전체적으로 그것과 함께 있게 된다. 그것이 진지함이다. 나비와 닭을 잊어버리면 꽃이 모든 것이 된다.


관심을 어떤 하나에 집중할 때 그것이 진지함이다. 그러나 어떤 목표를 얻기 위해서 관심을 하나의 수단으로서 사용할 때 교활하게 된다. 그대는 단지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수단으로서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아이들에게는 길이 곧 목적지이다. 그러나 종교적인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길이 곧 목적지이다. 질문이 곧 답이다. 내가 어디에 있든 그것이 바로 목적지이다. 내가 무엇이 되었든 그것이 바로 목표이다. 바로 <이 순간>에 나의 삶 전체가 나에게로 수렴한다. 어디 다른 곳으로 갈 목적지가 없다. 그대는 이 순간을 전체적으로 받아드리고 즐겨야 한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수용>의 의미다. 식(識)을 버리고 지혜로 나아간다는 유식의 <전식득지(轉識得智)>는 바로 이런 자연스러운 수용의 길을 가리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혜란 슬기로운 방편이요, 그 방편이란 이 삶이든, 저 삶이든 자유로움과 안락함을 누리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살도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육바라밀에서 <지혜바라밀>를 맨 끝에 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세속적인 <나>의 탐구는 목표 지향적이다. 그 목표가 무엇이든, 심지어 신이라도 목표 지향적이다. 그러나 비세속적인 사람은 목표 지향적이 아니다. 위대한 선사는 모든 성인들은 비세속적이었다. 그들은 역사에 드러나 있듯이 목표지향적인 삶을 살지 않았다. 단지 그들은 <지금 그리고 여기에> 살았다. 모든 것이 지금, 그리고 여기로 수렴된 삶을 살았다. 바로 이것이 무한이 된다. 바로 그것이 찰나 속에 영원을 사는 삶이다. 모든 길을 통해서 그 무한으로 가려고 하여도 그것은 언제나 도달될 수 없는 것으로 남는다. 그러나 찰나에서 영원으로 가는 길은 긴 길이 아니라 찰나가 곧 영원이요, 영원이 찰라 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무한의 아름다움이기도 하다. 우리가 추구하는 <영원>이란 말이 바로 찰라 속에 꽃피우는 것이다. 찰나와 영원이란 말은 우리의 마음으로 구분된 분별일 뿐 본질에서는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우리가 어떤 곳에 도달할 때 모든 것은 곧 사라져 버린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알게 된다면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스스로 싫증을 내게 된다. 그러나 <나>를 탐구하는 그 길에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무한한 것은 계속 진행되어 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무한은 하나의 무한에서부터 또 다른 무한으로 계속해서 진행되어 나간다. 이것이 <나 자신을 아는 것>에 대한 수용의 길이다.


이 말을 잊지 말라. <그대 자신을 알라>는 이 말의 참 의미를 잊지 말라. 이는 논리적으로, 지식적으로 그대 자신을 탐구하라는 말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불교에서는 지식이란 말 대신 깨달음이란 말을 사용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인 것이다. 저 무한의 끝까지 더욱더 깊이 들어가 가슴속에서 알려질 수 없는 그 자리에 이르러 융화되고, 융섭되어진 참 그대의 모습이 되라는 말임을 알아야 한다.

융화란, 융섭이란 바로 그대 자신이 무아(無我)인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파도가 바다에 흡수되듯 그대가 이 우주라는 무한한 법계 속으로 사라짐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럼으로 <그대 자신을 알라>는 이 말은 곧 <공(空)>으로 돌아가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저 유명한 소크라테스의 <나 자신을 모른다>는 말처럼 <공>으로 돌아가는 것이 다. 그럼으로 이 말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그래서 불교는 이 말을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무아(無我), 무집(無執), 무주(無住), 무애(無礙), 공성(空性) 등등으로.


전체 속에서 <나>라는 것을 버리고,

자연스러운 수용을 허락하는 것,

식(識)을 벗어나 알려질 수 없는 저 무한한 신비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

그리고 무아로서 공(空)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너 자신을 알라>는 이 말의 메시지임을 알아야 한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 석가모니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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