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단의 메세지

2006. 1. 13. 22:20야단법석

 

 

 

 

 

 

             사실단(四悉檀)의 메시지


1.여우같은 의심을 버리고 바르게 정근합시다.


녹음이 짙어 가는 푸르름의 계절입니다.

저 푸른 산과 같이, 저 맑고 향기로운 풀내음 속에서

우리의 삶도 그렇게 푸르고 향기를 뿜으면서 살아갑시다.


지금 우리들의 삶은 허영심과 호기심, 이기심으로 악취를 풍기고 있습니다.

호기심과 허영심, 이는 인간의 최고의 기호품이요,

이기심은 인간의 최고의 마약입니다.

이제 악취가 풍기는 그 허영심, 호기심, 그리고 이기심을 버리고 부처님이 우리에게 남기신 우담바라의 숲향기 속에서 우리의 삶을 누리십시다.


사람들은 신비의 세계를 동경합니다.

천국과 지옥, 그것은 인간의 세계가 아닙니다.

그것은 신비의 세계요, 미지의 세계입니다.


신비의 세계 - 그것은 또한 호기심의 발동입니다.

그 호기심이 분별을 낳고, 희론의 뿌리가 됩니다.

인간은 예로부터 숙명적으로 지닌 호기심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과 고통으로부터 해방이었습니다.

그 죽음의 근저에는 죄의식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기독교의 <원죄(原罪)>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그 원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구원이라는 새 명제를 걸고 최후의 심판을 받는 날 그들의 <메시아> 즉 구세주인 하느님에게 천국으로 보내달라고 오늘도 열심히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우리의 불제자도 이 법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모든 악업의 뿌리가 삼독이요, 그 삼독은 무명에서 야기된다고 했습니다. 그럼으로 불교는 모든 악업과 그로 인한 죄의식은 무명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 됩니다. 그 무명은 곧 업으로 인한 것이기 때문에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의식이나 원죄는 이 한 면에서 본다면 전개방식만 다를 뿐 동일 맥락에서 다루어 질 수 있습니다.

이런 죄의식이나, 업의 문제로 인한 호기심은 사람의 마음에 갖가지 분별을 지어 각가지 세계를 만들어냈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지옥이나 불교에서 말하는 지옥 악귀 등 육도의 세계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 육도의 세계 중 가장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은, 다시 말해서 인간에게 가장 호기심을 일어 키는 것이 바로 천국과 지옥에 대한 세계관입니다. 그래서 미래에 대한 갖가지 분별심이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하다가 천국과 지옥이라는 세계를 가장 적나라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러한 천국과 지옥이란 세계가 만들어지면서 가장 유리하게 덕을 본 사람은 말한 것도 없이 보수적인 집단 내지 아양승과 같은 종교가들이었습니다. 실정법과 도덕률을 넘어 증명이 필요 없는 신의 경지를 설정함으로서 인간을 확실하게 다룰 수 있고, 또한 개인적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종교는 천국과 지옥을 만들어 놓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그렇고, 이슬람교가 그렇고, 불교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에게 지옥의 두려움을 심어줌으로서 인간을 쉽게 다스릴 수 있고, 천당과 극락이라는 유토피아의 세계를 만듦으로서 자비와 사랑, 무조건적인 헌신을 이끌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객관적 과학지식을 유토피아로 여기고 있는 서양종교들의 목회나 집회를 보십시오. 그들의 교회나 성당에는 형식상으로는 십자가와 십자가에 메 달린 예수상 정도가 고작이지만 그 안에서 설법하는 목사나 신부는 입으로 지옥의 공포를 조장하고 있지 않습니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워지고 있다>고 외치고 있지 않습니까?


절에 가도 마찬가집니다. 일주문에서부터 사천왕의 무서운 얼굴이 나를 주시하고 있습니다. 화엄회상에는 수많은 귀신, 천신, 아수라등 각가지 보살들이 주시하고 있습니다. 명부전에는 지장보살 주위에 지옥세계를 다스리는 시왕(十王)이 눈을 부릅뜨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어리석은 중생들의 호기심을 통하여 지옥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하고, 서방정토와 극락에 대한 가고자 하는 이기심을 이용하여 선행을 쌓게 하는 방편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천국과 지옥을 만든 또 다른 긍정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어린아이에게는 백과사전보다는 그림책이 어울리듯이, 어리석은 중생들에게는 법의 실상을 밝혀주는 참된 진리의 소리보다 두려움과 공포를 통해서 진리로 끌어드리고, 극락이라는 유토피아의 세계를 그려줌으로서 그 마음에 불심을 심어주고 믿음을 심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편이 되기 때문입니다.

 

신도 여러분,

<입세아비담론>등이나 아함경 등에 의하면 8대 지옥이 있다고 합니다.

중생의 세계를 삼계육도로 분리하는 데 그 상하(上下)로 구분한다면 지옥은 맨 아래 있다고 합니다. 가장 하층에 있는 것이 무간지옥인데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아비지옥이 바로 이 무간지옥입니다.

<잡아함경>의 분류에 따르면 그 8대 지옥이란 상(想)지옥, 흑승지옥, 퇴압지옥, 규환지옥, 대규환지옥, 소적지옥, 대소적지옥, 무간지옥이 있다 합니다.

이들 8대 지옥은 같은 지옥이지만 그 업력의 차이가 있어 최초의 지옥은 그대로 죄업이 가벼우며 점점 더 무거운 죄업으로 그 다음의 지옥에 태어나게 되며 최후의 무간지옥은 가장 극악한 죄업을 지어 태어나는 세계라고 합니다. 그리고 각 지옥에는 16개의 소지옥을 갖추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지옥의 고통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극악하다고 합니다. 도끼나 쇠톱으로 몸을 갈래갈래 찢기도 하고, 뜨거운 쇳물을 입에 부어넣기도 하고, 이리떼에 온 살점이 뜯기어 뼈만 남게 하고, 뜨거운 가마솥에 집어넣어 고기를 끓이듯 삼기도 하고, 큰 바윗돌로 압사시키기도 하고, 뜨거운 쇠판을 걷게 하고, 살점을 도려내어 얼음판이나, 자갈밭을 끌고 다니고, 칼산을 걷게 하는 등 하루에도 수 십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그런 갖은 고초를 겪게 한다고 합니다. 가장 무서운 무간지옥에서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살가죽을 벗겨 이것으로 끈을 삼아 묶어서 불 바퀴에 매달아 철로 된 땅위를 끌고 다니면서 뼈가 부서지고 피륙이 다하도록 고통을 준다고 합니다.

  

신도 여러분!

지옥이 두렵지 않습니까? 8대 지옥의 그 고통이 두렵지 않습니까?

인간의 호기심을 극대화하고, 그 분별심으로 극대화시켜 공포와 두려움의 극치를 이룬 것이 바로 지옥이라는 세계관입니다.

그러나 진실한 불제자로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는 자라면 그 지옥이란 것이 책에 나온 그 이상의 무서운 세계라 할지도 그런 지옥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지닐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동쪽으로 기운 나무는 동쪽으로 쓰러지듯, 부처님 법을 따르는 자가 서방정토로 가지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러기에 <대지도론>에 이르기를 “믿음이 있으면 비록 당장에 부처를 이루지 못하여도 그 믿음의 힘 때문에 불법(佛法)에 들어간다”고 한 것입니다.


신도 여러분,

그래서 부처님은 중생의 이런 마음을 미리 아시고 두 가지 측면에서 가르침을 두신 것입니다.

하나는 사람의 마음을 제도할 만 가를 관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법의 실상을 관찰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법의 실상을 알려주신 가르침이 바로 <마하반야바라밀경>인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경이 바로 예불할 때 송하는 <반야심경>이 됩니다.


신도 여러분, 지금까지 무의식으로 보았든 <반야심경>을 다시 한번 음미해 보십시다. 그기에 무어라 했습니까?

<오온>도 없다 했으니, <나>가 없는 것입니다. 주인공인 <나>가 없으니 죄를 지은 자도 없고, 그 죄를 받아 지옥 갈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의식계>도 <무의식계>도 없다 했습니다.

<육근>도 <육경>도, <육식>도 없다 했습니다.

정신세계도, 물질세계도 모두가 없다 했으니 지옥 천국이 없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사성제>도 <12인연>도 없다고 했습니다.

불교의 근본가르침인 모든 교리가 <심경>에 송두리째 부정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일찍이 아함경 등에서 말씀하신 모든 도리가 거짓말이란 말입니까? 신구의(身口意)로 짓는 모든 선업도, 악업도 없다는 그 말은 어디까지 우리가 믿고 따라야 한다는 말입니까?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면 이런 의심이 당연히 들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오면 귀가 솔깃해집니다. 사실 우리들 주위에는 천국과 지옥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들이 이 외에도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럴듯한 책도 수 없이 많습니다.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우리가 판단할 수 없도록 정교하게 만들어진 이야기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그러나 공작새는 비록 좋은 빛으로 몸을 단장했지만 큰기러기처럼 멀리 날지 못하듯, 그런 이야기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참된 진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도 여러분,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그 어느 하나 거짓된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어리석음이 갖가지 분별심을 내어 희론(戱論)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여우같은 의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허영심과 호기심이 우리의 마음에 혼란을 주고, 천국과 극락에 가고자하는 그 이기심이 우리의 참된 마음을 마약에 취하듯 그렇게 취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를 미리 아시고 사람마다의 근기에 맞추어 도(道)를 성취 할 수 있도록 4가지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실단(四悉檀)>의 진리인 것입니다.


2.사실단(四悉檀 : siddhanta)


<실단>이란 <성취(成就)>라는 뜻입니다. 남악선사는 <실>은 <보통(普通)>의 뜻이고, <단>은 범어의 <다나> 즉 <보시>라는 뜻이라 했습니다. 이는 부처님이 이 4가지 법으로 중생을 법의 성취에 이르게 보시함으로 <실단>이라고 이름한 것입니다. 그럼으로 쉽게 풀어서 부처님이 중생들로 하여금 법의 진리에 이르도록 가르친 4가지 진리의 길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그 4가지 실단은,

첫째는 세계실단(世界悉檀)이요,

둘은 각각위인실단(各各爲人悉檀)이요,

셋은 대치실단(對治悉檀)이요,

넷은 제일의(第一義)실단(悉檀)입니다.


세계실단이란 것은 어떤 법이 인연의 화합 때문에 있을 지언정 달리 성품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마치 우리가 말하는 마차라는 것은 빗장, 축대, 바퀴, 바큇살 등이 화합하기 때문에 있는 것이지 따로 마차라는 실체가 있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도 그와 같아서 다섯 가지 무리 즉 색수상행식의 오온이 모여서 있는 것이지 따로 사람이라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럼으로 부처님께서 “내가 청정한 천안(天眼)으로 중생을 보니 선이나 악의 업을 따라 여기서 죽어서 저기에 태어나면서 과보를 받되 착한 업을 짓는 이는 하늘이나 인간으로 태어나고 악한 업을 짓는 이는 지옥, 악귀, 축생과 같은 나쁜 길에 떨어진다.”고 하신 것은 바로 이 세계실단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신도 여러분,

만약 어떤 사람이 금덩어리를 종이와 바꾼다면 바보로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전당포에서 금반지를 주고 지폐를 받는 것을 보고는 바보로 여기지 않습니다. 지폐는 금만큼 실제적인 가치는 없지만 명목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세계실단이란 바로 그것과 같습니다.


건강을 지키기 위해 아침마다 요구르트를 마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유와 그 빛과 냄새와 맛과 촉감의 인연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요구르트라 말합니다. 만약 우유와 빛과 냄새와 맛과 촉감의 인연이 없다면 요구르트라는 것은 없는 것이 됩니다. 이와 같이 요구르트의 인연이 진실로 있기 때문에 요구르트가 있는 것이지 마치 토끼의 뿔이나 거북이의 털이라는 것과 같이 인연이 없이 거짓 이름만 있는 경우와는 같지 않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바로 세계실단이라고 합니다. 


서양속담에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로마의 법이 우리 나라에서는 통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로마에서는 그것이 진리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인간들이 사는 이 세속의 진리는 세속에서 진리가 되지만 개 닭 등 모든 중생이나 중생이 아닌 초목이나 무생물에게는 진리가 되지 못합니다. 또한 세속의 진리는 시공간의 제약을 받습니다. 과거의 선행이 지금 이 현대사회에서는 악법이 되고 있는 것과 같이 세속의 진리는 시공간의 제약이 따릅니다. 

그럼으로 앞서 말한 천당과 지옥, 극락세계란 있습니다. 이는 세계실단이기에 있는 것이고 여여(如如)한 법성의 실체를 말하는 제일의실단에서 보면 없는 것입니다. 시공간을 벗어나고 중생과 중생 아닌 그 모든 것에 통섭되고 무애한 진리, 그것이 바로 제일의실단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그 제일의실단에서 보면 극락과 지옥이라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각각위인실단>이란 사람들의 마음씨를 관찰해서 설법을 해 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 가지 일에 대하여 듣는 이도 있고 듣지 못한 이도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에서는 “잡된 업 때문에 잡되게 세간에 태어나서 잡된 촉감을 받고 잡된 느낌을 받는다.” 라고 하고, 또 어떤 경에서는 “촉감을 받을 사람도 없고, 느낌을 받을 사람도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쉽게 풀어서 요약한다면 앞의 경의 내용은 어떤 이는 갖은 악업 때문에 지옥에 태어나 고통을 받는다는 의미인데, 뒤의 경은 악업도 없고 악업을 받아 지옥에 태어나 고통을 받는 자도 없다는 의미가 됩니다. 앞뒤가 서로 상충되는 말이지요. 왜 이런 상반되는 이야기가 경에서 나올까요? 이것을 회통시키는 것이 바로 각각위인실단입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오는 세상을 의심하여 죄와 복을 믿지 않고 악행을 행하여 단멸(斷滅)의 소견에 떨어진다면 그런 사람들을 위하여 그들의 의혹을 끊고 그들의 나쁜 행을 버리게 하고, 그들의 단멸의 소견을 뽑아주기 위해서 “잡되게 세간에 태어나서 잡되게 촉감을 받고 잡되게 느낌을 받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데 육신이 살아 있을 때 내 하고 싶은 것 마음껏 하고 즐기고 싶은 것 마음 데로 즐기다가 한 세상 끝내면 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위하여 천국과 극락을 이야기하고, 또 죄와 그 업의 과(果)를 설명함으로써 선업을 쌓게 하고, 범행(梵行)을 바르게 세워 인도하기 위한 것이 바로 각각위인실단인 것입니다.


또 <나>가 있다고 분별하고 집착에 빠지고, 신(神)이 있다고 분별하고 집착에 빠져 상견(常見)에 떨어지는 이를 위하여 그 인아견(人我見)을 깨트려주기 위해 “촉감을 받을 사람도 없고, 느낌을 받을 사람도 없다.”라고 한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일러 각각위인실단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영생(永生)이라든지, 전지전능한 신을 앞세워 그기에 매달려 사는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 바로 제법무아(諸法無我)를 설하고, 일체(一切)무상(無相)과 제행무상(諸行無常)을 설하신 것이 바로 이러한 각각위인실단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대치실단>이란 대치(對治)할 법이 있으면 있거니와 실제의 성품에는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치(對治)>란 쉽게 말해서 번뇌를 이기고, 염법(染法)을 짓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령 아스피린은 혈압환자와 당뇨환자에게는 도움이 되지만 위궤양이나 출혈성 질병에는 약이 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불법(佛法)에서 마음의 병을 다스리는 것도 그와 같습니다.


예컨대 부정관(不淨觀)을 생각하는 것은 탐욕의 병에는 좋은 대치방법이 되지만 성내는 병에는 좋다고 할 수 없고, 대치방법도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몸의 허물을 관찰하는 것이 부정관인데 성낸 사람이 그 허물을 관찰하면 성냄의 불길이 더 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 더 예를 들면, 요즘처럼 얼굴의 컴프렉스 때문에 성형외과를 찾는 사람에게 육신의 허망함을 설명하면 가뜩이나 성난 사람에게 더욱 화를 부채질하는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 자심관(慈心觀)을 생각하는 것은 성냄의 병에는 좋은 대치방법이 되지만 탐욕의 병에는 좋다고 할 수 없고 대치하는 방법도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심(慈心)은 중생들에게 좋은 일을 구하게 하고 공덕을 관찰하게 하는 것인데 만일 탐욕이 있는 이가 좋은 일을 구하거나 공덕을 관찰한다면 탐욕이 더욱 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보시를 한다는 사람들을 보면 그 보시를 통하여 무소유의 진리를 가까이 느끼는 것이 아니라 허망한 명예와 아상을 더 높이 쌓는 것과 같습니다.


인연관(因緣觀)의 법은 어리석은 병에는 대치하는 법이 되지만 탐욕과 성내는 병에는 착한 법이 되지 못하며 대치하는 법이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삿되게 관찰했기 때문에 삿댄 소견을 내는 것이니 이는 삿댄 소견이 곧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


제일의 실단이란 법의 궁극적 실체의 경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법이란 곧 존재를 말합니다. 그것은 말과 모든 사고(思考)의 영역을 벗어난 것이기 때문에 <심경>에서도 오로지 찬탄만 할 뿐 드러내지 못하듯 그것은 말과 언어의 영역도, 그 어떤 사고(思考)의 영역도 아닙니다. 그럼으로 용수의 <대지도론>에 따르면,

『온갖 말로써 표현할 길을 초월했고, 마음으로 더듬을 곳이 없어서 어디에도 의지할 곳이 없어 아무 법도 보이지 않는다. 모든 법의 실상은 처음도 없고, 중간도 없고, 나중도 없으며, 다함도 무너짐도 없나니 이것을 제일의실단이라 한다.』고 했습니다.

3.사실단의 메시지


세속의 진리는 유위법(有爲法)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인연화합으로 이루어진 그 법이 있기에 그 법에 대한 진리를 세운 것입니다. 탐욕에 대한 부정관의 진리를 세우고, 성냄에 대하여 자비관의 진리를 세우고, 어리석음에 대하여 인연관의 진리를 세운 것입니다. 이를 깨닫지 못한 중생이 악한 마음을 지니고 탐욕을 부려, 남을 속이고 사기나 치고, 살생을 일삼거나, 재물과 명예에 눈이 어두워 자기만을 위하고, 자기 것만 아끼고, 부자나 입신출세만을 위하여 온갖 수단 방법을 다 동원하여 악행을 범한다면 그 악업으로 인한 업력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과보로 받는 것이 바로 지옥과 축생과 아귀 등의 고통과 어둠의 세계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신 가장 큰 이유는 중생으로 하여금 그런 지옥의 고통을 벗어나게 하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이 이 사바세계에 오셔서 중생에게 남기신 크나큰 가르침은 참된 범행(梵行)을 통하여 <나>라는 존재와 사물의 진실 된 모습을 바로 보게 하려는 데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 반야바라밀>입니다. 그 길을 알려주기 위하여 어리석은 중생들의 근기를 따라 세계실단을 설하시고, 각각위인실단을 설하시고, 대치실단을 설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일의실단을 설명하시기 위하여 반야바라밀의 가르침을 설하신 것입니다.


신도 여러분,

부처님의 가르침은 기독교의 성경공부와 다른 것입니다. 성경에는 중생이 성경을 수천 수만 번을 외우고 이해하고, 독송한다고 하드라도 하나님이 된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대 자신이 누구인지 깨달으면 그대가 바로 부처가 된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대가 본래 부처임을 자각하는 그것이 바로 부처님의 참 가르침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제일의 실단이 주는 메시지는 바로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물을 사물 그대로, 그대 자신을 그 본래 면목 그대로 볼 수 있는 그대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 길이 바로 반야바라밀의 길입니다. 반야의 참 뜻이 성취될 때 그것이 바로 제일의 실단이 된다는 것을 일깨워주기 위한 것이 바로 사실단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신도 여러분,

지금까지 무의식적으로 암송하던  <반야심경>의 참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겨서 항상 마음에 새기고 또 새겨서 부처님이 이르신 그 제일의실단의 참 의미를 깨닫도록 합시다. 그래서 우리들 중생 모두가 어두운 이 사바세계를 그 참 뜻에 따라 맑고 밝은 극락정토가 되도록 정진 또 정진해 나갑시다.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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