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릉가바차 아라한 이야기

2005. 12. 11. 20:51경전속의 우화들

                                                        

 

 

              필릉가바차 아라한 이야기


사람이 살아가는 데 홀로 살수만은 없는 것이다.

그럼으로 적게는 가족이라는 단위에서 크게는 국가와 인류라는 연결고리가 만들어 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각자 그 자라난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마음은 비록 정직하고 순진하지만

 그 표현에는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를 상대가 오해한다면 내용이 아니라

그 표현방식에 감정이 상하고 화가 나서 갈등과 분쟁이 야기 되는 것이다. 


<대지도론>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부처님 당시 필릉가바차라는 아라한이 있었다.

아라한은 이미 도를 성취한 사람임으로 신통력 또한 자유자재 했든 모양이다.

그런데 필릉가바차 아라한은 눈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탁발을 나갈 때마다 앞에 놓인 황하강 즉 지금의 갠지스 강을 건너야 하는데

눈을 볼 수가 없기 때문에 강을 건너 가는 것이 항상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탁발을 하러 나갈 때 마다 신통력을 사용했다.

그는 이 강을 건너갈 때마다 강물에다 손을 퉁기면서

 “이 종년아, 물을 둘로 갈라놓아라. 내가 건너갈 수 있도록”라고 외치곤 했다.

 그러면 강의 신은 필릉가바차의 신통력이 두려워 강물을 둘로 갈라 길을 내주곤 했다.

그러면 필릉가바차 아라한은 유유히 그 길을 따라 강을 건너서 마을에서 걸식을 마친 다음에는

 다시 건너올 때도 똑같이 “이 종년아 물을 둘로 갈라놓아라, 내가 건너 갈수 있게. ”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강의 신은 참다못해 부처님에게 나아가

 “부처님 제발, 필릉가바차 아라한에게 욕 좀 하지 않도록 하여 주십시오” 라고 부탁을 했다.

부처님은 곧 이를 받아 들여 필릉가바차 아라한을 불러 참회하게 하고 강의 신에게 사과하라고 훈계했다.

필릉가바차가 아라한은 이를 흔쾌히 받아 드려서 강의 신에게 사과 했다.

그런데 참회하고 사과한다는 것이 가관이었다.

 “이 종년아 내가 사과한다. 나의 참회를 받아라.”


참으로 웃음이 절로 나는, 사과치고는 별난 사과였다.

그런데 부처님은 웃지도 않으시면서 모인 중생들에게 그 이유를 말씀하셨다.

 "필릉가바차 아라한의 사과에는 교만도 없고, 거짓됨도 없다.

그런데 왜 그런 식으로 말하는가 하면 필릉가바차 아라한은

 500번의 전생을 사는 동안에도 바라문으로 태어나

지금까지도 바라문출신에서 귀의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바라문이란 현대적으로 말한다면 돈 많고 지위 높은 귀족 중에 귀족의 신분에 해당한다.

그러니 한번의 생도 아니고 500번의 생을 통해서

 항상 그런 지위를 누리고 있었으니 어찌 그 버릇이 없어졌겠는가?

다만 부처님만이 이를 아시고 그를 이해하라고 모인 중생들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도 마음과 달리 말이 거칠거나, 행동이 투박한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자기 고향의 특이한 사투리와 어감이 달라 이질감을 느끼기도 하고 더 나아가 말의 내용보다

그 어감에 반감을 가지게 되는 경우도 있다.

상대는 좋다고 칭찬하는 말도 어떤 선입감 때문에 도리어 욕으로 들리고 또 내 기분을 잡치는 경우가 있다.

이는 우리가 진실로 그 사람을 바로 알지 못하고, 그가 뜻하고 있는 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환경이나, 말투, 어감 등에서 그 사람을 왜곡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왜곡으로 인하여 그 사람과의 사이에 갈등과 미움과 시기심등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화장실을 절에서는 해우소라고 하고, 옛날 사람들은 뒷간 이니 정낭 이라고  했다.

이렇게 말이란 것은 일정한 것이 아니다.

그럼으로 일정하지도 않은 말에 성내거나 분함 마음 등을 일으킬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비가 오면 우산으로 비를 막고, 땅이 질면 장화를 신고,

목이 타면 물을 구하며, 추우면 불을 피우듯이

우리는 다만 그 환란을 막는 법만을 구할지언정 그기에 대하여 옳다,

그르다 따지지 않으며, 선이다, 악이다 라고 꾸짖어 들려하지 않는다.

 

이와같이 감정적인 것이나 모든 악에 대해서도 다만 자비한 마음으로 모든 악을 쉬게 할지언정

성내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그럼으로 먼저 사람을 대하는 경우 자신의 선입관을 버리고 

진실한 뜻을 바르게 상대방에게 이해 시키는 노력도 당연히 필요한 일이겠지만

 또한 상대의 마음을 우리가 그 표현방식이나, 어감, 환경적인 요건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일들을

왜곡됨이 없이 이해하고 받아드리는 노력도 또한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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