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있는 삶의 길

2005. 10. 25. 23:52야단법석

 

                       

                           깨어있는 삶의 길


                                     -보살과 육바라밀)-

 

1.서문


불교의식에는 많은 상징물이 있고, 또 경전에는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비유들이 들어 있다. 그 비유들의 핵심은 선하고 좋은 일을 함으로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좋은 일이란 무엇인가? 절을 짓고, 불상을 조상하며, 향을 사르고, 꽃을 뿌리며, 촛불을 키고, 하루에 여섯 번씩 참선을 하고, 탑을 돌며, 단식을 하며 예배를 드리는 일 등이다. 그러나 마음을 지켜본다면 그기에 이 모든 수행이 다 들어 있다. 스스로 자기 마음을 지켜본다면 이 모든 일들은 하나의 부수적인 일이 된다. 그러나 오늘날 불교도들은 비유와 그 상징의 허상만 보고 그것은 숨은 의미를 간과하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마음의 표면만 겉돌 뿐 깊숙한 것을 이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절’이라고 부르는 것을 우리는 ‘도량(道場)’이라고 부른다. 도량이란 도(道)를 닦는 곳으로 ‘청정한 곳’ 이다. 그럼으로 절을 찾고 절을 짓는 것은 청정함을 바라고 청정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요란한 세속의 장소를 멀리하여 산과 강이 있는 인적이 드문 곳에 절을 짓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것은 세속적인 삶에 물들기를 부정하는 사람들에게 욕망의 절제를 암시하라고 마을을 떠나 멀리 있는 것이다. 또한 욕망의 창문인 6감각의 문을 청정하게 지키라는 의미에서 세속적인 삶의 터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몸과 마음을 고요하게 가라앉히며 안과 밖을 깨끗이 하라는 의미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향을 사르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이는 단순히 물질적인 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다르마(법)의 향이다. 어리석음(무명)과 악한 행위가 그 향내와 함께 멀리 사라지라는 것이다.

부처님이 세상에 계실 때 그는 제자들에게 향을 사르게 한 것은 <깨어 있음의 불>을 붙이는 것이라 했다. 또 그것은 또한 시방의 모든 부처를 공양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부처님의 그런 진실한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오로지 물질적인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일본산이니, 중국산이니 하면서 희귀한 재료와 값비싼 것을 자랑할 뿐 오지도 않을 미래의 부귀영화를 구하기 위해 빌고 있다.


꽃을 뿌리는 것은 미덕의 꽃을 뿌리라는 의미다. 미덕의 꽃을 뿌리는 것 역시 같은 진리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다르마를 말하는 것이며 다른 사람들의 축복을 빌어 주는 것이며, 진아(眞我)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다.

만약 그대가 부처님이 자기를 위해 사람들로 하여금 꽃을 꺾어 공양을 하도록 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지켜나가는 사람은 천상과 이 땅에서 어떤 형태의 생명이라도 해치지 않는다. 만약 그대가 실수로 어떤 생명을 해쳤다면 그대는 반드시 그 대가를 지불하게 될 것이다. 그럼으로 의도적으로 계율을 어기고 앞날의 복을 받기 위해서 생명을 해치는 살생을 거듭 행한다면 더욱 큰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어떻게 축복을 슬픔으로 바꾸려고 하는가?


여러분은 가난한 한 여인이 부처님에게 올린 등잔불이 모진 바람에도 꺼지지 않은 <아함경>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을 것이다. 그 꺼지지 않은 등불의 의미는 무엇인가? 꺼지지 않은 등불이란 완전히 깨어있음을 상징한 비유인 것이다.


하루에 여섯 번 참선하라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왜 하필 6번인가? 이는 다름 아닌  육근(六根)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여섯 가지 감각을 다스리라는 뜻이다.


여러분들은 탑돌이를 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왜 탑돌이를 하는가? 탑 주위를 도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탑은 그대의 몸과 마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럼으로 탑을 돌듯이 그대의 깨어 있음이 멈추지 않고 몸과 마음의 주위를 돌아보라는 의미다. 부처님이 살아 계실 때에도 부처님은 수행자들에게 오후 식사를 금지시켰다. 오늘날 의미로 본다면 단식을 시킨 것이다. 그 단식이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단식을 하는 것도 같은 진리를 담고 있다. 단식을 하는 것은 그대의 몸과 마음이

헛트르지거나 방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여러분들이 포식을 하고 나면 그 다음에 무엇을 하고 싶었는지를 생각해 보라. 배가 부르면 그 다음 행동은 잠을 자고 싶은 것이다. 잠이란 곧 그대의 의식을 잠재우는 것이다.

  

이 세상의 진실을 보지 못하는 미혹된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몸과 마음을 모든 형태의 악에 물들게 한다. 그들은 정욕에 마음껏 탐닉하고도 부끄러워 할 줄 모른다. 그리고 그들이 일상의 음식 먹기를 그만두고는 그것을 단식이라고 부른다.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가?


예배도 마찬가지다. 그대는 방편을 이해하고 인연을 맞추어야 한다. 방편에는 행동하는 것과 행동하지 않는 무위(無爲)를 모두 갖추고 있다. 예배란 존경과 겸양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대의 진아에 대해 존경하는 것이고 미혹됨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다. 만약 그대가 악한 욕망을 몰아내고 착한 생각에 머무르면 아무 것도 나타내지 않더라도 그것은 예배가 된다.

외부세계로 감정을 표출하는 것 대신에 내면으로 향한 수행에 실패한 사람은 자신을 쓸모 없는 인간으로 만드는 무지와 증오와 악에서 결코 헤어나지 못한다. 그들은 위엄 있는 태도와 성현 앞에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음으로서 남을 속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생사의 바퀴에서 벗어 날수 없다. 비록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송 받는 좋은 인격자라도 말이다. 그래서 불교는 망각의 잠에서 중생들을 깨우기 위해 촛불과 향응과 같이 갖가지 비유와 상징들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발렌타인데이라 하여 여자에게 조크렛을 선물하고 또 화이트데이라 하여 남자에게 사탕을 선물하곤 한다. 옛적에 아마도 여러분들은 연인에게 꽃을 보낸 경험도 있을 것이다. 조크렛과 사탕 그리고 꽃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사랑을 상징하는 것이다. 좀더 심각한 사이라면 반지를 선물할 것이다. 반지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구혼(求婚)내지 결혼을 상징하는 것이다. 반지를 통한 무언의 대화, 그것이 상징이면서도 분명한 자기 의사표시인 것이다. 때로는 흰 손수건을 보낸 경험도 있을 것이다. 흰 손수건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인연이 끝났다는 의미다. 이별의 표시를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말보다도 더 깊은 의미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 바로 불상과 같은 조형물이나 상징물들이다.


여러분들은 친구의 아기가 두 세돌이 지나면 그림책을 선물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어째서 그림책보다 더 재미있고 교훈적인 교양서적이나 백과사전과 같은 서적을 선물하지 않고 그림책을 선물하는가? 이는 어린아이가 아직 글자를 알지 못하고 또한 논리적 사고나 철학적인 사고(思考)를 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지적 능력을 갖추지 못한 어린아이는 그림책을 통하여 사물에 대한 일체 설명 없이 사물을 사물 그대로의 형상을 통하여 보는 것만으로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 지각(知覺)을 갖춘 청년이나 대학생들에게 그와 같은 어린이 아이들이 보는 그림책을 선물한다면 아마도 받는 사람은 그 주는 사람의 정신을 이상한 것으로 의심하게 될 것이다. 그럼으로 어린아이에게는 어린아이에게 맞는 선물을 해야 하듯이 성인(聖人)이 중생에게 베푸는 진리의 가르침도 또한 그와 같이 중생의 근기에 따라 방편의 가르침이 있는 것이다. 그 방편의 가르침 중 하나가 바로 불교의 조형물이나 공양과 같은 불교의식의 제 상징물인 것이다.

  

불교신도라면 적어도 한번 이상은 법당에 향과 촛불로 공양을 올리거나, 과일, 쌀 등을 공양 올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서양식 학문과 유일신을 믿는 사람들은 이를 미신적 행위라고 말하는데 과연 그런가? 그것이 미신적 행위라면 어떻게 불교가 사 반 세기 동안을 세계 곳곳에 파급되어 지금까지 존속할 수 있었겠는가? 생선은 아무리 포장을 잘한다고 할지라도 그 비린내를 가시게 할 수 없듯이, 거짓된 것은 언제가 탈로가 나기 마련이다. 거짓된 것은 오래 존속할 수 없는 것이다. 미신이란 종교를 가장한 거짓이다. 그럼으로 미신은 오래 갈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향을 사르고 촛불을 밝히는가? 법당이 어둡고 깊은 산 속에 있기 때문에 벌레가 있어 촛불을 키고, 향을 사르는 것인가? 아니다. 이는 마치 어린아이에게 그림책을 보여주듯 법당에 올리는 공양물을 통하여 진리의 길을 상징해 주는 방편의식이기 때문이다. 미신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불교의식의 행위만을 보고 그 행위가 상징하는 의미를 간과한 무지(無知)에 빠져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다. 불전에 놓인 공양물을 다시 한번 살펴보라. 거기에는 깨끗한 물과, 향과 촛불과, 쌀과 과일과 꽃들이 놓여 있다. 부처가 배가 고파서 이들 공양물을 받았겠는가? 아니면 절의 스님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이런 의식(儀式)을 만들었겠는가? 아니다. 이들은 모두 어떤 의미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상징하는 의미가 무엇이겠는가?


깨끗한 물은 <다기수>라 하여 보시(布施)를 상징하고, 향(香)은 계율(戒律)을 상징하고, 꽃은 인욕(忍辱)을 상징하고, 불전에 올리는 쌀은 <마지>라고 하는데 이는 정진(精進)을 상징한다. 그리고 갖가지 과일은 선정(禪定)을 상징하고, 촛불은 반야의 지혜(智慧)를 상징하는 것이다.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반야 ― 이 여섯 가지는 곧 무엇을 말하는가? 보살이 행하는 육바라밀을 말하는 것이다. 왜 육바라밀인가? 근본불교에서는 <나>를 중심으로 깨달음의 길을 가는 팔정도를 수행의 기본도리로서 삼지만 대승(大乘)에 이르면 <나>와 <너>와 <우리> 모두를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기 위하여 보살에게 육바라밀을 수행의 근간으로 삼는 것이다. 보살이란 다름 아닌 대각(大覺)의 진리를 구하는 구도자를 말하는 것이다. 이 구도자가 가야할 6가지 큰길을 여러 신도님들이 올리는 공양물을 통하여 주지시키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직 마음을 깨치지 못한 중생들을 위하여 그들이 올리는 공양행위를 통하여 진리의 길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 공양을 올리는 행위란 곧 깨달음의 길로 가는 수행인 것이다.


2.보살과 바라밀의 의미


가. 보살의 의미

재가 여신도를 일러 우리는 보살이라고 부른다. 보살이란 어떤 의미를 지닌 말인가? 그저 부르기 위한 말인가? 아니면 관세음보살과 같은 존재라는 말인가?

보살이란 말의 원래 의미는 보리살타(Bodhisattva)를 줄인 말이다. "보리(菩提)"란 "깨달음"을 의미하고, "살타"란 중생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럼으로 보리살타란 '깨달은 중생'이라는 뜻이 된다. 깨달은 중생이 있다면 깨닫지 못한 중생이 있을 것이다. 이는 세속의 눈으로 보면 그렇다. 그러나 진리의 눈으로 보면 모두가 완전한 불성(佛性)을 지닌 존재들이다. 그럼으로 모든 사람은 보살이 되는 것이다. 어찌 재가 여신도만이 보살이겠는가? 


일부 경전에서는 보리살타를 대도심중생(大道心衆生), 도중생(道衆生), 대각유정(大覺有情), 각유정(覺有情) 등 여려 말로 번역되어 쓰인다. 이는 도(道)의 대심(大心)을 구하는 사람이므로 '대도심중생'이라 한 것이며, 도를 구하며 대각을 구하는 사람이므로 '도중생'이라 한 것이며 또 '대각유정' 이라 한 것이다. 또한 보리살타를 의역(義譯)하여 개사(開士), 시사(始士), 고사(高士), 대사(大士)등으로 말하기도 하는데 이는 총체적으로 불과(佛果)를 구하는 대승상(大乘象)이란 뜻이다. 그럼으로 <주(注)유마경> 에서는 "보리는 불도(佛道)의 이름이요. 살타는 대심(大心)중생이다. 대심으로 불도에 들어감을 보리살타라 한다."라고 하였고, <대승의장14>에는 "보리를 번역하여 자리와 이타의 도를 갖추어 닦으므로 도중생(道衆生)이라 한다."라고 했다. 더나아가 <법화경 가상소(嘉祥疏)>에는 "보리는 도이다. 무상정변지의 과도(果道)이며 살타는 중생이다. 과도를 구하므로 도중생이라 한다."고 했다. 또 <정명소(淨名疏)>1에 "보리는 무상도(無上道)이며 살타는 대심이다. 그럼으로 무상도대심(無上道大心)이라 한다. 이는 사람이 대심을 발하여 중생을 위하여 무상도를 구하므로 보살이라 한다."라고 했고 <대론>은 "보리는 불도(佛道), 살타는 성중생(成衆生)을 뜻한다. 제불도(諸佛道)를 사용하여 중생을 성취시키므로 보리살타라고 말한다. 또한 보리는 자행(自行)이며, 살타는 화타(化他; 남을 제도하여 이롭게 함)이다. 스스로 불도를 닦고 또한 화타함으로 보살이라 한다." 라고 했다.


경전에 쓰인 의미와 더불어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분석해 본다면 보리살타란 불과(佛果)를 얻으려고 수행하는 자, 혹은 일반으로 대승교에 귀의한 자, 큰 서원을 세우고 육바라밀을 수행하며, 위로는 지혜를 구하고(上求菩提, 상구보리) 아래로 중생들을 제도(下化衆生, 하화중생)하여 삼아승지 백겁의 긴 세월에 자리(自利)이타(利他)의 행을 닦으며 51위의 수행단계를 지나 드디어 불과를 증득하는 자들이 모두 보살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대승에서는 성불(成佛)을 목적으로 하므로 재가신도와 출가 승려를 막론하고 대승법을 수행하는 자를 모두 보살이라 한다. 그런데 시대의 변천에 따라 우리 나라에서는 재가 여신도 즉 <우바이>를 존칭하여 보살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그 본래의 의미는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럼으로 이를 간과해서는 불교의 참된 수행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바른 진리를 알 수도 없을 것이다.


나. 바라밀(pāramitā)의 뜻


바라밀이란 범어 파라미타(pāramitā)를 소리 그대로 음사한 것이다. 간략하게 풀이하면 '저 언덕에 이르다' 라는 뜻이다. 경에서는 이를 구경(究竟), 도피안(到彼岸), 도무극(度無極)등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는 모두 보살의 대행(大行)을 말하는 것이다. 보살의 대행이란 일체 자행(自行) 화타(化他)의 일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게 됨으로 사구경(事究竟)이라 한다. 대행이란 크게 수행한다는 뜻이다. 이는 인간의 모든 문제 중에서 생사의 문제가 가장 큰 문제임으로 생사의 이 언덕(此岸, 차안)에서 열반의 저 언덕(彼岸, 피안)으로 간다는 의미가 된다. 이를 한자로 도피안(到彼岸, 저 언덕에 이른다는 뜻)이라 한 것이다. 또한 이 대행으로 수 만가지 법(諸法))이 비록 광대하고 심오할지라도 능히 깨우쳐 건너감(能度)으로 도무극(度無極)이라 한 것이다. 사홍서원에서 ‘부처님의 도가 비록 위없이 크다고 할지라도 마침내 이를 이루고 말겠다고 하는 <불도무상 서원성>이란 바로 이런 의미에서 말한 것이다. 도(度)란 ‘건너다’라는 의미의 도(渡)와 ‘~에 이른다’라고 하는 도(到)의 의미와 같은 것이다.


3. 육바라밀의 해설


육바라밀이란 전술한 바와 같이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반야(般若)를 말한다. 이제 그 의미를 조금 깊게 살펴보자.


1)보시(布施)바라밀


보시는 범어로 다나(Dãna)라 한다. 한역 음으로는 보시바라밀은 <단(檀)바라밀>이라고 한다. 보시란 통속적으로 본다면 ‘베푸는 행위’를 말한다. 베푸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별하면 재시(財施), 무외시(無畏施). 법시(法施)의 3가지 양식이 된다. 재시란 재물로 베푸는 것을 말한다. <회남자(淮南子)>의 도응훈(道應訓)에 “불의(不義)로 얻기만 하고 능히 보시하지 않으면 환(患; 재앙)이 반드시 온다”라는 말이 있다. 부자란 가난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부자가 있는 것이다. 많이 가진 자는 가지지 못한 자가 있기 때문이다. 재물이란 세속의 가치로 보면 법을 어기지 않는 한 자기 몫으로 정당하다고 주장할 수 있을지 몰라도 진리의 눈으로 보면 정당한 자기 몫이란 없는 것이다. 세속의 재물은 모두가 연기적으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알든 모르든 간에 완전한 자기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럼으로 많이 가기고 있다는 것은 남이 가져야 할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므로 불의(不義)라고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세속의 재물이란 모두가 살아 있는 동안 이용할 수 있을 뿐이지 영원한 내 것이 아니다. 영원하지 못한 것을 영원한 것으로 만들려고 아등바등하는 것은 바로 인간의 탐욕에서 기인 된 것이다. 그럼으로 재물의 보시란 탐욕을 억제하는 수행의 첫걸음이요, 구도자인 보살이 가야할 길인 것이다.


‘베푼다’는 이 말은 좀더 유의할 점이 있다. 여러분들은 연말이면 길거리에서 ‘자선냄비’를 쉽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선(慈善)이란 자본주의를 주창하는 서양적인 사고와 유일신관에서 유출된 말이다. 다시 말해서 자선이란 사랑의 행위로서 신이 인간을 사랑하듯, 가진 자가 가지지 못한 자에게 주는 것으로 주는 자와 받는 자가 전제되어 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런 자선이 아니라 무상(無相)보시를 가르치고 있다. 베푸는 행위로만 본다면 자선과 보시는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 원인행위를 본다면 크게 다르다. 불교의 보시는 무소유(無所有)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베푸는 행위만이 있을 뿐이다. 무소유는 <누구가> <누구에게> <무엇을> 주는 것이 아니다. 그럼으로 <주는 자>도 <받는 자>도 없는 것이다. 그럼으로 불교의 재물보시란 무소유의 철학을 몸으로 배우는 수행의 길인 것이다.


무외시(無畏施)란 온갖 두려움에서부터 중생을 구하여 건져주는 것을 말한다.

법시(法施)란 다른 이에게 교법(敎法)을 말하여 선근(善根)을 자라게 하는 것이며 진리의 가르침을 베푸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법공양(法供養)이 여기에 포함된다. 엄밀하게는 법시는 아랫사람에게 대하는 것을 말하고, 법공(法供)은 윗 분을 대하여 하는 것을 의미한다.


2)지계(持戒)바라밀


지계란 계율을 말한다. 계율은 범어로 <시라(śila,尸羅)>라고 한다. 재가 출가 소승 대승 등의 일체 계행을 말하는 것이다. 지계란 일반적으로 계율을 수지(受持)하여 범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범하지 않는다는 것은 깨끗함을 유지한다는 의미다. 그럼으로 <법화경>비유품에 이르길 “지계를 청결(淸潔)함이 맑은 구술(淨明珠)과 같다”고 했고, <유마경> 보살품에서는 “지계가 보살의 정토(淨土)다.”라고 한 것이다. 스스로 몸을 바르게 가지지 아니하고서 바른 진리의 문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입으로 온갖 악행을 짓고, 몸으로 갖은 악업을 짓고, 마음으로 악한 짓만을 생각하는 자에게서 어떻게 진리의 선한 행업이 나오겠는가? 지계란 입으로, 몸으로, 생각으로부터 청정함을 지키는 것을 뜻한다. 청정함이란 선(善)한 것이며, 아름다운 것(美)이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선하고 아름다운 것은 나에게도 이롭고, 남에게도 이로운 것이다. 그것은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자연스러움을 부처님은 무위(無爲)라 했고, 선사(禪師)들은 평상심(平常心)이라고 했다. 그러나 탐욕은 인위적인 것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도덕 또한 인위적인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도덕>이나 <인격>을 내세우지만 진리는 <자각(自覺)>을 말하는 것이다. 그럼으로 진리를 위한 수행은 모든 유위적인 것을 벗어나고 구애받지 않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입으로, 몸으로, 생각으로 조작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지계인 것이다.


3)인욕(忍辱)바라밀


인욕이란 범어 <크산티(kṣānti)>의 번역어다. 중국인들은 이를 <찬(羼)바라밀>이라고 음사했다. 인욕이란 갖가지의 치욕(恥辱)을 받고도 복수하려고 하는 마음이 없고 마음을 안주(安住)하여 수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추위와 더위 등의 고통과 배고프고 목마름 등의 육체적 고통을 참고 견디며 수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으로 인욕이란 두 가지 의미로 요약된다.


첫째는 인내(忍耐)의 의미다. 인내란 마음에 거슬리는 일에 대하여 참고 견디며 성내는 마음 즉 진심(瞋心) 내지 않는 것을 말한다.


둘째는 안인(安忍)의 의미이다. 안인이란 도리(道理)에 안주하여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것을 뜻한다. <대승의장>9에서는『지혜의 마음(慧心)으로 법에 안주(安住)하는 것을 인(忍)이라 한다.』고 했고, 또 경에서는『법의 실상에 안주하는 것을 인(忍)이라 한다.』고 했다.


4)정진(精進)바라밀


정진이란 말은 범어 비리야(毘梨耶, virya)의 번역이다. 용맹하게 선법(善法)을 닦고, 악법(惡法)을 끊는 마음의 작용을 말하는 것이다. 자은대사는 “정(精)은 정순(精純)하여 악잡(惡雜, 악하고 잡스러움)이 없는 것을 말하고, 진(進)은 승진(昇進)하여 해태(懈怠; 게으름)하지 않은 것을 말한다.”라고 했다. <화엄경소>5에는 “마음을 법대로 단련함을 정(精)이라 하고, 정심(精心)으로 목적을 달성하기를 힘쓰는 것을 진(進)이라 한다”고 했다.


정진바라밀은 또 <근(勤)바라밀>이라고도 한다. <유식론>6에 이르길 “근(勤)은 정진을 말하는데 선(善), 악(惡) 품(品)을 닦고 끊는 일 가운데 용한(勇悍; 용맹스러움과 모질음)이 성(性)이 되고, 해태(懈怠)를 대치(對治; 다스림)하는 원만한 선(善)이 업이 된다.”라고 했다.


5)선정(禪定)바라밀


선정이란 범어 <드야나(Dhyāna)>의 번역어다. ‘드야나’를 음사(音寫)하여 한자어로는 선나(禪那)라고 한다. 또 이를 구역(舊譯)에서는 유수(惟修)라 했고, 신역으로 정려(精慮)라고도 하는데 이는 모두 생사의 바다를 건너 열반의 언덕에 이르는 궁극적인 수행을 말하는 것이다. 선(禪)은 삼매(三昧)와 같은 의미로 쓰이기도 하는데 삼매는 정(定)이라고 번역되어 진다. 진리를 사유하여 산란한 마음을 정지(定止)하는 요법을 말하는 것이다.


6) 반야(般若)바라밀


반야란 지혜를 말한다. 범어 프라쮜나(Prajńa)의 번역어다. 반야바라밀은 지도(智度), 도피안(到彼岸)이라고도 번역된다. ‘지도’란 지혜로 건너간다‘라는 뜻이고, ’도피안‘이란 저 언덕에 이른다는 뜻이다. 반야란 실상(實相)을 비쳐보는 지혜를 말한다. 인생에 있어서 생사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없다. 그럼으로 반야란 나고 죽는 이 언덕을 건너 열반의 저 언덕에 이르는 배나 뗏목과 같으므로 바라밀(도안(到岸)이라고 한 것이다.


4.보살의 진정한 공양은 어디에 있는가?


보살이란 “깨어 있는 사람”이란 뜻이다. 깨어 있는 사람은 6법을 닦아 스스로 진리를 찾아 이를 남과 더불어 생사를 벗어난 영원한 이상향인 열반의 피안에 이르게 됨으로 육바라밀이라 한 것이다. 열반에 이른 자는 자유인이다. 그럼으로 보살이란 자유인이 됨을 뜻하는 것이다. 자유인은 마음에 걸림이 없는 사람이다. 마음에 걸림이 없다는 것은 일체 사념(思念)이 없다는 것이다. 그럼으로 모든 고통과 재액 그리고 생사까지도 걸림이 없는 것이다.


보살의 수행은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이라고 앞서 말했다. 상구보리는 자유인이 됨을 의미한다. 하화중생은 모든 이에게 이익 됨을 의미한다. 모든 이에게 이익 된다란 말은 <전체>를 안다는 말이 된다. 전체를 안다는 것은 <지혜>의 몸이 된다는 의미다. 이는 절대조화이며, 순금과 같은 것이다. 순금이란 고귀하고 값진 것이다. 그러나 그기에 향기까지 난다면 어떻게 될까? 순금이란 지혜를 상징한다. 그 순금에서 은은히 스며나는 향기 ― 그것은 바로 자비를 말하는 것이다. 아래로 중생을 제도한다는 말은 순금에 향기를 더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보살의 삶은 무엇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사십이장경>에 이르길

『백명의 악한 사람을 공양하는 것은 한 명의 착한 사람을 공양하는 것 보다 못하고, 1000명의 착한 사람을 공양하는 것은 오계를 지키는 한 사람을 공양하는 것보다 못하며, 만명의 오계를 지키는 사람을 공양하는 것은 한 명의 수다원을 공양하는 것보다 못하며, 백만명의 수다원을 공양하는 것은 한 명의 사다함을 공양함보다 못하며, 천만명의 사다함을 공양하는 것은 한 명의 아나함을 공양하는 것보다 못하며, 1억의 아나함을 공양하는 것은 한 명의 아라한을 공양하는 것보다 못한다. 1억의 아라한을 공양하는 것은 한 명의 벽지불을 공양하는 것만 못하고, 100억의 벽지불을 공양하는 것은 한 명의 삼세제불을 공양하는 것만 못하고, 1000억의 삼세제불을 공양하는 것은 한 명의 무념(無念), 무주(無住), 무상(無相), 무수(無修), 무증(無證)한 사람을 공양하는 것만 못하다.』라고 했다.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벽지불이란 모두 근본불교에서 말하는 현인(賢人)과 성인들이다. 삼세제불이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를 말하는 것이다. 보살이 닦아야 할 근본수행의 목적은 이 모두를 공양하는 것보다 깨달음을 얻어 이를 지키고 보임하는 현재의 각인(覺人)이 더 위대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무념, 무주, 무상 등은 모두 실상의 묘법을 말하는 이명(異名)들인 것이다.

무념(無念)이란 어떤 뜻인가?

모든 경계의 상에 대하여 마음이 물들지 않음을 무념이라 한다. 스스로 마음에 항상 모든 경계를 여의어 경계상에 마음을 생하지 않는 것이다.

사물을 대함에 있어서 허망한 생각(妄念)을 내지 않고, 그릇된 생각(邪念)을 내지 않는 것이 무념인 것이다. 그럼으로 무념이란 정념(正念)의 이명(異名)인 것이다.

생각이 있다가 없다가 하는 것이 사념(邪念)이요, 없지도 있지도 않는 것이 정념(正念)이며, 선악의 이것저것을 생각하는 것이 사념이요, 선악 모두를 생각지 않는 것이 정념이며, 고락, 생멸, 취하고 버림(取捨, 취사), 친함과 원수짐(寃親, 원친), 미워함과 사랑함(憎愛, 증애)의 생각은 사념(邪念)이요, 고락 등을 생각지 않음이 정념(正念)인 것이다.


무주(無住)란 어떤 뜻인가?

무주란 머물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머문다는 말은 집착한다는 말이며, 메이고 구속된다는 뜻이다. 무주란 사람의 본성이 세간의 선악과 좋은 것과 추한 것과 내지 원함을 맺은 이와 친한 이와 말로서 공박하고, 속이고 다툴 때에도 공한 것으로 여겨서 원수갚을 생각을 내지 아니하며 생각생각에 지나간 일에 메이지 않는 것이다. 만약 앞생각과 뒷생각이 잇달아서 끊어지지 않으면 그것은 얽매임(번뇌)이 된다. 모든 법에 생각생각 머물지 않으면 곧 얽맴이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自己)를 내세우지 않고(자성을 가지지 않고) 아무 것에도 머물러 집착하지 아니하며 인연을 따라 일어남이 무주인 것이다.


무상(無相)이란 무엇인가?

밖으로 일체 상을 여읨을 무상이라 한다. 능히 상을 여읨으로 법체가 청정한 것이다. 이것은 무상이 체가 되는 것이다. 궁극적 진리란 모든 상(相)을 여의었다는 말이다. 그럼으로 <열반경>에서는 열반은 무상(無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경전에 따르면 열반이란 남녀등 10가지 상(相)을 여읜 것이라고 했다. 10가지 상이란 무엇인가?

물질의 상(色相), 소리의 상(聲相), 냄새의 상(香相), 맛의 상(味相), 촉감으로 느껴지는 상(觸相), 생하고 머물다 변하고 사라지는 상(生住壞相), 남녀(男女)의 상을 말하는 것이다.


사성제설법에서 고제의 원인인 집제는 바로 애욕이라고 했다. 애욕은 남자와 여자에 대한 이성적 욕구다. 많은 욕망 가운데 부처님은 왜 하필 애욕을 예시했는가? 나이가 들면 부지불식간에 건망증이 생긴다. 젊은이들이라고 해서 모든 기억이 없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나면 잊혀진다. 특히 여인들은 자기가 만난 사람들 가운데 그 이름과 직업 얼굴 모양은 잊어버렸지만 옷이나 머리스타일은 좀처럼 잊어버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도 어젠가는 아물아물해져 기억이 안 날 경우도 있다. 그런데 한 번 보고는 죽을 때까지 잊혀지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이 남녀의 상이다. 이름과 직업, 옷맵시, 머리스타일 등 모두가 잊혀져도 한번 본 그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절대로 잊혀지지 않는다. 애욕은 그래서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인간의 삶에서 지울 수 없는 큰 번뇌가 되기 때문에 고제의 원인인 집제에 이를 말한 것이다.


마음이란 어떤 상인가?

마음은 있는 것이라고 하지만 모양이 없고(無相), 없다고 하지만 아는 힘이 무궁함으로(妙有) 없는 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니어서 참으로 묘한 것이다. 마음은 깨달아야 할 그 어떤 상을 지니고 있지 않다. 그럼으로 깨달아야 할 그 무엇이 없는 것이다. 그럼으로 무증(無證)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마음은 또한 선한 것 같으면서도 악하고, 악한 것 같으면서도 선하다. 마음 그 자체는 선악을 규정할 수 없으니 닦아야 할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럼으로 무수(無修)인 것이다. 그래서 마음이란 묘한 법(妙法)이라 하고 실상(實相)이라고 한다. 그럼으로 <마음>을 상을 지우고 그 참 모습을 깨치면 <실상묘법>을 깨친 것이 된다. 보살의 상구보리(上求菩提)란 바로 이 마음을 깨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5. 보살이 육바라밀을 닦는 이유


육바라밀이란 복덕(福德)과 지혜(知慧)를 닦는 수행이다. 육바라밀 가운데에서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은 복덕을 닦는 행위(복덕업)이고, 마지막의 반야는 지혜의 행위(지혜업)이다. 앞의 5가지 행위인 복덕업 가운데 중요한 것은 바로 선정이다. 선정이란 곧 자기완성을 의미한다. 먼저 진리에 대한 자기의 눈을 뜨는 것이다. 장님이 다른 장님을 위해 길을 안내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럼으로 보살수행에서 첫 번째 갖추어야 할 덕목이 바로 선정인 것이다. 그래서 <보살>이란 말이 주어진 것이다.


앞에서 보살은 실상의 묘법을 깨치는 것이 보살의 수행이라고 했다. 그 실상의 묘법이란 바로 선정을 통한 것이다. 그럼으로 이런 의미에서 모든 선정 가운데에서 제일이라 호칭하며 따라서 모든 삼매 가운데에서도 으뜸이라는 의미에서 그 선정을 왕삼매(王三昧)라고 부른다. 이 왕삼매는 모든 수행문을 총체적으로 포섭하며 수행의 근원을 그 속에 담아 묶고, 바다와 같은 지혜를 으뜸으로 삼고 있다.

이 왕삼매는 분별이 없는 무심정(無心定)이라고도 명칭 하는데 왜냐하면 이 선정이야말로 열반 중도와 서로 호응하기 때문이다.

또는 인식으로 사려하거나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부사의정(不思議定)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망상의 그 근본 감정과 지혜(情智)의 상대적인 의존관계가 단절했기 때문이다. 또는 진여삼매(眞如三昧)라고도 하는데 이는 육도만행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또는 일행삼매(一行三昧)라고도 하는데 일념 속에 나타난 진여법이기 때문이다. 또는 금강삼매(金剛三昧)라고도 하는데 이는 항상 번뇌에 기우뚱거리며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또는 법성삼매(法性三昧)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생멸의 인연을 따르면서도 다른 모습으로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바다처럼 광대한 부처님이 깨달은 지혜의 광명과 한량없는 관찰수행(觀行), 그 모두가 이로부터 나온다. 따라서 이러한 이치를 체득하지 않으면 그것은 실상의 묘법이 아니며, 부처님이 깨달은 지혜(佛智)가 아닌 것이다.


그럼으로 현실적인 일(事禪定)에만 치우쳐서 수행한다면 이는 생멸하는 무상(無常)한 것들에 대한 선정(世禪)일뿐이다. 따라서 이렇게 수행하는 자는 비록 수행을 한다 할지라도 잘못된 지각(惡覺)을 내어 허망한 마음이 지어내는 사량분별을 다스리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망상의 근원인 마음이 짓는 사념(思念)의분별을 아직 단절하지 않았기 때문에 긴 세월동안 수행 연마한다 할지라도 도리어 괴로움의 세계, 즉 생사의 괴로움을 받는 육도(六道)의 세계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럼으로 보살이 수행을 하는 데는 우선적으로 거울과 같은 근본이념으로 깨달아 들어가 일심이 모든 수행의 근본임을 통달한 뒤에 복과 지혜로 그 수행을 장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보살은 육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다.


6.선정과 집중을 혼돈하지 말라.


선정이란 무엇인가? 밖으로 모습을 떠나는 것이 선(禪)이요, 안으로 어지럽지 않음이 정(定)이다. 그럼으로 부동(不動)의 선(禪)을 닦는 자는 단지 어느 곳 어떤 사람을 볼지라도 그 사람의 시비(是非), 선악(善惡)과 허물을 보지 않는 것이 자성의 부동을 닦는 것이다.


선정은 기본적으로 좌선(坐禪)으로 시작한다. 좌선이란 무엇인가? 법문 가운데 막힘이 없고, 걸림이 없어서 밖으로 일체 선악의 경계에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좌(坐)>라 하고, 안으로 마음이 움직이지 않음을 보는 것을 <선(禪)>이라 한다.

<기신론>에서는 이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모든 망상을 그치는 지(止)를 수행하는 자는 고요하고 안정된 곳에 머물면서(靜處)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몸의 자세를 단정히 하여(調身), 의식을 바르게 해야 한다(調心). 그리하여 호흡에 의지하지 말고(수식관) 골쇄(骨ꝯ) 등의 형체와 청황적백의 사색(四色)에 의지하지 말며, 허공에 의지하지 말고 지수화풍에도 의지하지 말며, 또는 경험적으로 분별하여 아는 견문각지(見聞覺知)까지도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모든 분별하는 상념(想念)이 일어나는 데로 그 모두를 제거하되 역시 상념을 제거한다는 상념마저도 버려야 한다. 모든 존재하는 사물은 본래 망상이 없어 망상의 인연을 따라 나오지도 않았고, 따라서 새삼 사라지지도 않는다.』


이는 실상의 묘법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차별적 개체로 실재하는 모습이 없는 무상(無相)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선정이란 앞의 상념이 눈앞의 경계를 의지하면 경계의 집착심을 버리고, 뒤에 일어난 상념이 마음은 실제인 냥 의지하거든 다시 그 마음에 대한 집착심마저 버려야 실상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음이 외부의 세계에 달려가면 그 마음을 거두어 마음 안에 안주시켜, 그 뒤 마음이 다시 일어난다 해도 그것을 실재하는 마음의 모습으로 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수행자들은 이러한 선정(禪定)을 <집중>과 혼돈하여 수행하는 자들이 있다. 선정은 분명 집중이 아니다. 집중 속에는 집중하고 있는 자기 자신과 그 집중의 대상이 되는 객관이 있다. 다시 말해서 이원성(二元性)이 있다. 그러나 선정 속에는 선정하는 주체도 없고 선정의 대상으로서의 객관도 없다. 그럼으로 선정은 집중이 아니다.


집중은 이원적인 의식의 차원이다. 이 때문에 집중을 계속하게 되면 피로해지는 것이다. 우리는 24시간 동안 줄곧 계속 집중의 상태에 있을 수 없다. 사이사이에 휴식이 필요하다. 집중은 결코 그대의 본성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선정은 아무리 해도 지치지 않는다. 선정 속에서는 피로해지는 일이 없다. 하루 24시간 줄곧 선정을 할 수 있다. 이 선정의 상태를 영원히 지속시킬 수도 있다. 왜? 무엇 때문인가? 선정은 그 자체가 가장 깊은 휴식이기 때문이다.


집중은 행위이다. 하나의 의지적 행위이다. 그러나 선정은 행위가 아니라 비의지적인 행동이다. 휴식의 차원이다. 이 선정의 차원에서 존재는 그 자신의 본질 속으로 살아져 버린다. 그리고 그 자신의 본질은 곧 모든 존재의 본질로 연결된다. 집중 속에는 계획이 있다. 선입견(先入見)이 있고, 관념(觀念)이 있다. 집중 속에서의 마음의 기능은 결론부터 시작한다.

「나는 이러이러한 행위를 해야 한다」는 이 구체적인 결정으로부터 시작된다. 집중은 과거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선정 속에는 거기 선정 그 자체를 하기 위한 결론이나 결정 따위는 없다. 여기 어떠한 행위도 할 필요가 없다. 그대는 그저 존재하고 있을 뿐. 여기 그것의 과거는 없다. 결코 과거에, 과거의 한 부분에 포함되지 않는다. 대신 그것은 순수한 미래다. 이를 무위(無爲)라 한다. <전혀 조작이 없는 행위>, <비행위(非行爲)적인 행위>라는 뜻이다. 선사들이 말하는 <무심정(無心定)>내지 <평상심(平常心)>이란 언어는 바로 이 차원에서 말하는 것이다.

그럼으로 선정이란 깊은 침묵 속에 앉아 있는 것이어 되어야 한다. 마치 봄이 오면 풀들이 저절로 싹이 터서 자라나듯이 그렇게 반야의 지혜가 깨이도록 해야 한다. 기억하라. <저절로>라는 이 말을 기억하라. 어떠한 행위도 인위적이어서는 안 된다. 어서 빨리 자라도록 풀을 재촉해서는 안 된다. 봄이 오면 풀들은 저절로 싹이 틀 것이다. 자라게 될 것이다. 이 경지가 바로 무심이요, 선정인 것이다.


삶 그 자체의 흐름을 따라갈 때 여기 어떠한 조작성도 끼워 넣지 않을 때 어떠한 교리도 강요하지 않을 때, 이것이 바로 자발적이요, 비인위적인 경지요, 선정의 경지인 것이다.


선정은 <현재>다. <순수한 현재>요, <즉시적>인 것이다. 그럼으로 어느 누구도 결코 선정을 할 수 없다. 대신 선정의 상태에 있을 수 있다. 그대는 결코 집중의 상태에 있을 수는 없다. 대신 집중할 수는 있다. 집중은 인간의 차원이요, 선정은 성스러운 차원이다.

집중은 그대 속에 하나의 중심감(中心感)을 형성한다. 중심감이란 에고 의식, 하나의 완고성을 의미한다. 집중은 그대 속에 에고를 심는다. 집중을 많이 하면 그럴수록 거기 강화되는 것은 그대 자신의 에고다. 그대는 점점 더 강해 질 것이다. 그대의 의지는 더욱더 굳세어 질 것이다. 그대는 보다 완벽해 보이고 보다 든든해 보일 것이다. 그러나 선정에는 그것이 없다. 선정하는 사람은 강해지지 않는다. 강해지는 대신 그는 말이 없어진다. 묵묵해지고 유연해 진다. 파워는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투쟁으로부터 나온다. 그럼으로 모든 파워는 투쟁과 마찰로부터 시작된다. 여러분들은 전기가 어디에서 만들어지는 것인지 학교교육을 통해서 익히 잘 알고 있다. 전기란 마찰로부터 일어나는 에너지다. 그럼으로 우리는 물을 이용하여 전기를 일으킬 수 있다. 높은 곳으로부터 낙하하는 물은 바닥에 부딪친다. 이 마찰을 통하여 전기가 발생한다. 이와 같이 파워를 바라는 사람은 언제나 투쟁한다. 투쟁은 에너지를 주기 때문이다. 전기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에너지는, 파워는 마찰을 통해서, 마찰과 투쟁을 통해서 생긴다.

이 세상은 갈수록 갈등과 분쟁이 심화되고 있다. 그것은 이 세상이 파워로만 지배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결코 강해질 수 없다. 투쟁을 하지 않고는 결코 막강해 질 수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선정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파워가 아니다. 파워대신 평화다. 평화 역시 그 자신의 파워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평화 속의 파워란 그 차원이 다르다. 투쟁을 통해서 얻어진 파워란 무엇인가? 저항이다. 반항이며 남성적인 것이다. 그러나 평화 속의 파워는 여성적이다. 수동적이다. 우아하기 이를 데 없으며 무한히 열려 있다. 그것은 결코 투쟁이 아니다. 저항적이 아니다.

부처님은 막강하다. 이 평화 속에서, 이 침묵 속에서 누구보다도 막강하다. 그러나 그는 원자폭탄처럼 막강한 게 아니라 장미꽃처럼 막강하다. 어린 아기와 같은 천진한 그 웃음으로 살인마 앙굴리마라를 제도하고 미쳐서 날뛰는 코끼리를 유순하게 만드는 그런 파워를 지니고 있다. 그의 파워는 결코 칼의 파워가 아니다. 조그만 램프의 불빛이다. 이 어둠 속을 비추는 조그만 램프처럼 그는 그렇게 파워가 있다. 그의 파워는 전혀 그 차원이 다르다. 이는 총칼을 든 <전사(戰士)의 파워>가 아니라 꾳을 든 <성스러운 연인의 파워>다. 비투쟁적인 곳으로부터 나온 파워이기 때문이다. 누가 소리 없이 피어있는 아름다운 꽃과 투쟁을 하려고 하겠는가?


집중은 투쟁이다. 그대는 지금 그대 자신의 마음과 투쟁하고 있다. 그대는 그대의 마음을 어떤 일정한 곳에, 대상에 집중시키려 하고 있다. 집중시키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마음은 흩어져 버린다. 그대는 그런 마음을 자꾸자꾸 모으려 하고 있다.  바람이 그물을 빠져나가듯 마음은 소리 없이 그렇게 빠져나가 버린다. 그대는 그런 마음을 붙잡아 매려고 발버둥치고 있다. 그대는 지금 바로 그대 자신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이 싸움을 통해서 어떤 파워가 형성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파워는 위험하기 이를 데 없다. 이 파워는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 것이다. 투쟁을 통해서 만들어진 파워는 곧 투쟁, 그 자체이기 때문에, 투쟁으로부터 나온 것은 투쟁적일 수밖에 없다. 마치 아무리 부드러운 호랑이도 그 새끼는 호랑이일 수밖에 없듯이.


그대 주변에 선객(禪客)이 있다면 자세히 관찰해 보라. 그들은 전쟁에 나온 투사(鬪士)나, 선거 유세장에나 등장하는 연사들 마냥 갖은 논리와 말재주로 상대를 공격하고, 자기를 내 세우고, 모든 것을 부정하고 있지 않은지를. 그러나 평화로부터 나온 파워는 투쟁적이 아니다. 조작적이 아니다. 그것은 곧 장미꽃의 파워요, 조그만 램프의 파워다. 어린 아기의 파워요, 우는 여인의 파워요, 그 눈물 속의 파워요, 아침이슬 속의 파워다. 그것은 광대하다. 그러나 무겁지 않다. 그것은 무한하다. 그러나 저항적이지 않다. 그것은 아릅답지만 현란하지 않다. 상대를 제압하되 힘이 아니라 유연함이다. 집중은 그대를 의지의 사나이로 만들 것이다. 그러나 선정은 그대를 빈 공간을 찾아가는 물과 같이 유연한 존재로, 해맑은 웃음을 머금은 한 송이 꽃과 같은 존재로 만들 것이다.


선정은 씨앗이 없이 싹터서 자라는 나무와 같다. 이것이 선정의 기적이요, 신비다. 집중은 그 속에 씨앗이 있다. 어떤 목적이 있다. 동기가 있다. 그러나 선정 속에는 아무런 동기도 없다. 동기가 없다면 무엇 때문에 선정을 하는가?


동기라는 것은 목적이라는 것은 한낱 신기루임을 깨달을 때, 오직 그 때만이 명상이 존재 속으로 들어오게 된다. 목적은 그 목적에 도달하는 순간 또 다른 목적을 향한 출발점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목적에서 목적으로 아무리 뛰어가 봐야 거기 아무 것도 없다. 그 목적지 뒤에는 또 다른 목적지가 있을 뿐. 또 다른 신기루가 있을 뿐. 다람쥐가 끝없이 쳇바퀴 속을 달려가고 있을 뿐. <목적>은 사정없이 그대를 휘몰아친다. 그대를 미치게 한다. 하나의 욕망이 충족되고 나면 그 즉시 또 다른 욕망이 솟는다.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어하듯 그렇게 목적은 계속 더해간다. 그러나 엄밀하게 본다면 여기 성취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대 빈손만이 거기 있을 뿐. 그대여 보라. 그대의 목적이, 그대의 목적의식이 그대의 삶 전체를 좌절시키고 있다. 보라, 그대여, 목적이, 목적의식이 그대를 패배자로 만들고 있다.

목적을 성취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목적은 그 누구에게도 축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목적은 오직 약속일 뿐. 목적이라는 이 상품은 결코 배달되지 않는다.


집중은 투쟁이며, 동기가 있고 목적이 있다. 선정은 평안이요, 텅 빈 마음뿐이다. 그래서 근본불교에 근간이 되는 삼삼매는 공(空)과 무상(無相) 다음에 무원(無願)삼매를 두고 있는 것이다. 선정 속에서는 그 어떤 대상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속에는 그 어떤 진리의 가르침도, 그 어느 선지식, 조사도, 그 어떤 성인도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물며 부귀영화가 대상이 될 수 있을까? 선정에는 목적이 없는 것이다.


7. 육바라밀의 메시지


가)보시(布施)바라밀


보시는 베푸는 행위다. 그 베푸는 행위는 탐욕을 없애는 수행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베푸는 행위의 전제는 바로 <무소유(無所有)>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무소유가 전제되지 않은 행위는 어떤 행위의 보시라도 거기에는 <나>와 <나의 것>이란 관념이 숨어 있게 된다. 그럼으로써 보시는 무소유의 실천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럼으로써 밖으로는 <나의 것>을 없앨 수 있고, 안으로는 <나>라는 에고를 없앨 수 있는 것이다.


보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주느냐 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준다>는 이 행위다. <베푼다>라는 이 행위다. 그럼으로 가지고 있을 때 주어라. 남에게 준 것은 나와함께 영원히 있지만 내가 움켜쥐고 있는 것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럼으로 주고받는 행위에 관심을 갖지 말라. 자연스럽게 나누어 가져라. 자연스럽게 나누어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진 일이겠는가? <베푸는 것>과 <나누어 가지는 것>, 이는 분명 다르다. <내>가 <너>보다 더 많이 가졌기 때문에 베푼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자선이라는 이름으로 <나의 것>을 너에게 준다는 것은 세속에서 바라는 도덕적 행위는 될지 몰라도 진리를 구하는 수행자의 자세는 아니다. 그럼으로 베푼다는 것은 <신의 선물을 나누어 가진다고 생각하라.> 신의 선물은 누구의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신의 선물은 인간 모두를 위한 선물이기 때문이다.


나)지계(持戒)바라밀


지계바라밀이란 깨어있는 자의 자연스러운 행동을 의미한다. 말과 행동을 절제하고 억누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도덕이나 인격을 중시하여 이를 그대에게 강요한다. 그러나 여기에 구애될 것은 없다. 단지 주의해야 할 것은 도덕이나 인격이 아니라 단지 <깨어있음>이다. 깨어 있으면 모든 행동과 생각이 자연스러워 지고, 자연스러워지면 그기에 조화가 있는 것이다. 흔히 선사들은 반야의 지혜에서 중도(中道)가 나온다고 한다. 이 말은 곧 자연스러움에서 진정한 도덕적 행위가 나온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다.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조화롭게 행동하는 것, 이것이 지계바라밀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중도란 다름 아닌 균형을 이룬 조화의 세계를 말한다. 그럼으로 모든 행동과 생각에서 균형이 이루어질 때 더욱더 진리에 가까워 질 수 있다. 진리란 곧 우주의 궁극적인 균형이요, 조화요 질서이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지계바라밀이란 바로 극단을 피하고 이 궁극적인 균형을 통하여 조화롭게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그것은 사람들이 말하는 인격이나 도덕적 행위가 아닌 자각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극단이란 곧 탐욕에의 집착이다. 섹스가 극단이 아니다. 도둑질이 극단이 아니다. 사람들은 하나의 극단에 탐닉하다가 다시 다른 극단으로 움직여 그것에 또 탐닉하게 된다. 수도자들이 홀로 사는 것이 싫증나서 결혼을 하는 것과 같다. 도둑이 자신의 죄악을 가리기 위해 박애주의자나 자선가로 전향하는 것과 같다. 독신(獨身)이 악이고, 결혼이 선이란 말인가? 도둑질이 악이고, 자선이 선이란 말인가? 이것은 양극이다. 그럼으로 그칠 곳을 알아야 한다. 그칠 곳을 아는 것, 그것이 바로 중도이다. 중간에 머물 수 있다면 그때 마음이 사라진다. 마음은 극단 속에서만 살기 때문이다. 지계바라밀이란 다른 아닌 중간에 머물 줄 아는 중도(中道)의 마음을 지키는 수행인 것이다.

그러나 중생의 마음은 극단과 함께 존재한다. 마음은 항상 생각한다. 너무 많이 먹으면  단식을 생각하고, 단식하면 푸짐한 음식을 생각한다. 그러나 중간에 머물러 있다면 생각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는 베고플 때 먹는다. 그것으로 끝이다. 그리고 졸릴 때 잔다. 그것으로 끝이다. 그대는 배고프지 않지만 아침이면 아침을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아침식사를 한다. 졸리지 않지만 밤이면 그대는 자야한다고 생각하고 잔다. 생각은 극단이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 단지 중간에만 머문다면 생각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중간에서 생각은 사라진다. 진정으로 조화를 이룰 때 리듬을 얻는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적당히 충족시킬 뿐 그 어느 것에도 노예가 되거나 적이 되지 않는다. 너무 탐닉하지도 않고, 너무 금욕하지도 않는다. 단지 중간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이를 인위적으로 규제하는 것은 바로 도덕이다. 도덕은 그대의 인격을 내세워 그대를 극단으로 몰고 간다. ‘이것은 선이다.’ 그럼으로 이를 따라야 한다고 그대를 강요한다. 그리고 ‘이것은 악이다.’ 그럼으로 이를 버려야한다고 그대를 강요한다. 그대가 선택할 기준은 선악의 둘뿐이다. 이원적이다. 그 중간은 없다.


지계바라밀이란 그 어느 기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중도가 어느 기준을 두고 있지 않듯이 지계바라밀이란 어떤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기준이 있다면 그대의 자각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움이다. 자연스러움이란 조화요 질서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사들은 <평상심(平常心)이 도(道)다.>라고 한 것이다.


마음은 참으로 불가사의하다. 마음은 불행해지는 원인을 찾아내는데 매우 능수능란하다. 마음은 모든 불행을 만들어낸다. 환희에 찬 상태에서는 마음은 죽어버리기 때문이다. 마음은 모든 환희에 반대하고 있다. 그대가 어떤 고통 속에 있으면 마음은 "이것은 좋지 않다. 저것을 하라." 라고 일러준다. 정반대 되는 것을 일러준다.


천국은 지옥과 지옥 사이에 있다. 그러나 그대는 한끝에서 다른 한끝으로 옮겨갈 뿐, 가운데 천국을 지나쳐 가버린다. 마음은 허풍을 떨면서 천국을 지나친다. 도덕과 인격을 내세워 진리를 빗겨간다. 경계하라. 마음이 정반대 되는 것을 제안할 때 그에 따르지 말라. 그것이 지계바라밀을 지키는 것이다.


중도는 왜 중요한가? 에고를 완전히 파괴하기 때문이다. 에고 때문에 사람들은 성스러운 본질을 잃어버린다. 본성을 잃어버리는 것은 바로 에고만이 저지를 수 있는 유일한 죄이다. 그러나 중간에서는 주장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주장하고 단언할 것이 없으면 에고는 채워지지 않는다. 평범하라. 중간에 머물라. 이것이 가장 위대한 덕이다. 몸으로 깨어 있다는 그것은 위대한 덕이다. 깨어있는 행동이 아니면 그대는 천국을 지나치게 된다. 지계바라밀의 메시지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평범하다는 것은 지계바라밀에서 가장 위대한 덕이다. 평범해지면 아무 것도 주장할 것이 없고, 에고는 사라져버린다. 에고는 불균형 속에서 자란다. 극단을 먹고 큰다. 그리고 양극단 속에서 살고 있다. 중간에서는 에고는 사라져 버린다. 에고가 사라지면 덕이 높아지고 본질로 가는 문이 열린다. 불성(佛性)에 들어가고, 진리에 들어가게 된다. 중간에서 그대는 불성을, 진리를 만나게 되고 극단에서는 불성을 잃게 된다. 그것이 지계의 의미다. 진리를, 불성을 느끼고, 그 불성의, 그 진리의 느낌으로부터 나오는 것만을 행동하도록 하라. 이것이 지계바라밀의 메시지인 것이다

  

다)인욕(忍辱)바라밀 

마음이란 이것이 너그러울 때에 온 우주를 다 갈무리하고, 좁히려 들 때는 터럭 끝도 용납하지 않는다. 이것이 드러나면 우주 안에 이르지 않는 곳이 없고, 이것이 숨으려 들면 겨자씨나 먼지 티끌도 들어 갈 수 없다. 이것은 곧 사람의 근원 바탕자리이다. 그럼으로 인욕이란 열린 마음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인욕이란 단지 그대의 마음이 닫혀 있을 때 행하는 수행인 것이다. 우리의 삶이란 수무고개 같아서 한 고개 넘어면 또 한고개의 고통과 번뇌를 맞따드리게 된다. 그럼으로 이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데에는 4가지의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첫째는 <나의 고통>이라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 <나의 고통> 이 되면 이는 분노와 복수심, 질투심이 일어난다. 만약 이를 <중생의 고통>이라는 생각이 들면 거기에는 분노와 복수심이 사라지고 대신 용서와 자비심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대가 만약 가장(家長)이라면 아내의 잔소리를 남편의 입장에서 듣지 말라. 가장의 귀로 들어라. 어린아이가 욕을 하드라도 그대는 화를 내지 않는다. 어른의 귀로 듣기 때문이다. 중생의 소리는 부처의 귀로 들어라. 그러면 그기에 고통도 번뇌도 살아질 것이다.


둘째는 <왜? 하필 나에게만 이런 고통인가?>하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 억만장자를 보면 나는 가난한 자이지만 동전을 구걸하는 거지를 보면 나는 부자인 셈이다. 기차역이나 식당에서 줄을 서서 기다릴 때 앞에 선 사람을 보면 고통스럽지만 내 뒤의 사람을 보면 행복을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은 상대적인 비교감에서 고통이 더 커진다. 나를 남과 비교하기 때문에 고통과 번민이 더해지는 것이다. 그럼으로 나를 남과 비교하지 말라. 빌린 돈은 언제간은 갚아야 하듯, 내가 지은 과거의 업보를 지금 갚는다고 생각하라. 여러분들은 <타산지석(他山之石)>이란 말을 알고 있을 것이다. 남의 허물을 보고 이를 나의 가르침으로 삼는다는 의미다. 선사들이 <나에게 고통을 주는 자가 바로 나의 선지식이다>라고 하는 말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그럼으로 고통을 받을 때 이렇게 생각하라. 내가 이 만큼 고통스러운데 나보다 못한 남이 이런 고통을 받는다면 얼마나 더 괴로울까? 하고 생각하라. 그러면 마음의 문이 열리고 현재의 고통을 피할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마음에 받는 고통은 감해 질 것이다.


셋은 <고통과 어려움을 남의 탓으로 돌리지 말라>. 여러분은 책상 모서리에 튀어나온 못에 찔려 피를 흘려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때 여러분은 어떤 감정을 느꼈는가? 아마도 이렇게 했을 것이다. “어느 놈이 이렇게 했지?” 그런데 만약 부처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못에 찔려 피를 흘리는 것은 육신을 지닌 자라면 부처님이나 중생이나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음의 행동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그는 단지 튀어나온 그 못을 뽑아 다른 사람이 다치지 않게 조치했을 것이다.

진리를 찾는 자라면 더 많은 고통을 겪게 된다. 그대가 구도자라면, 그대가 진정 보살로서 육바라밀을 행하고자 한다면 그대는 수행의 길에 더 많은 사람들로부터 고통을 받게 된다. 수행의 길이란 세속을 버리는 길이기 때문에 세속사람들의 비난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고통은 감수해만 한다. 고통은 반드시 필요하다. 고통을 통해서만이 성숙하고 내면적 존재가 성숙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날카로움과 명철(明哲)함은 사실을 직면할 때만이 얻어 질 수 있다. 고통을 주는 자가 도리어 나의 선지식으로 여겨질 때 그대는 내면적으로 성숙하게 된다는 기억하라. 그럼으로 고통을 받을 때 그 고통을 참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바른 법(正法)을 진실하게 보호하는 데 있다. 어떤 행위든지 그것을 비난하기는 쉽다. 어떤 행위든지 그기에 합당한 변명을 찾기는 더 쉬운 일이다. 변명하는 것이 반복되면 그것이 습관이 되어 그것을 따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마음이란 자기에게는 한없이 관대하지만 남에게는 매서운 칼날을 들어대기 좋아한다. 마음이 바르면 모든 사물의 이치가 바르고 마음이 빗나가면 모든 사물의 이치마다 빗나가게 된다.

자기의 마음을 떠나서 밖에서 상대방의 허물을 타파하려고 한다면 자신과 상대방이 대립관계가 되어 차별적인 견해를 갖게 된다. 분별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분별이 일면 거기에는 반드시 <내 탓> 이니 <네 탓>이 하는 허물이 생긴다. 그럼으로 알아야 할 것은 인욕이란 분별하는 마음이 의지하여 자라나는 육근을 잘 거두어 육진(六塵)의 세계에서 분별집착의 침범을 당하지 않도록 지키는 것이다. 그럼으로 남을 탓하기 이전에 자기 마음을 지키고 보호하는 길이 바로 인욕하는 세 번째 마음이다.


넷째 고통을 두려워하지 말라. 무상한 삶에서 야기되는 고통에서 해방시켜주는 각성제로 생각하라. 모든 고통은 사물의 진실을 보지 못한 허상에서 일어난다. 그럼으로 허상을 버리고 사물의 본질을 지켜보라. 진실을 지켜보고 무상하고 인위적인 것들을 버려라. 프라스틱꽃과 같이 인위적인 것이 아름답게 보일 수도 있다. 그것은 선망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행동하고 무위적인 마음으로 움직여라. 결코 인위적인 것과 함께 움직이지 말라. 과학문명과 사회는 인위적인 것이다. 부귀영화란 인위적인 것이다. 언제가 사라질 무상한 것들 때문에 괴로워 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인간들의 삶 전체는 인위적으로 되어 있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조화일 뿐이다. 멀리서 보면 아름답고 좋게 보인다. 그러나 가까이 가서보면 그것들은 플라스틱으로 되어 있다. 물론 그들은 일찍 죽지 않는다. 아니 죽을 수가 없다. 플라스틱 꽃이기 때문이다. 죽을 수 없는 것은 고통도 없다. 살아있는 것만이 고통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대의 삶은 플라스틱 꽃이지만 그대라는 존재 자체는 그렇지 않다. 그럼으로 고통이 있는 것이다. 역경이 있고 번뇌가 있는 것이다.

들판에 핀 꽃은 정원 속에 핀 꽃보다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많은 시련을 겪었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꽃을 보라. 얼마나 겸손한가? 그리고 또 얼마나 연약한가? 아침에 피어나는 꽃을 보면 각박한 이 세상에 비하여 너무나도 가냘프게 보인다. 폭풍과 비구름 또는 여러 가지 동물과 장난꾸러기 아이들이 꽃을 위협한다. 꽃은 그러한 위협에 대항해서 피어있다. 그것이 아름다움이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꽃은 진다. 다시 볼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살아 있다. 아침이 되면 아름다운 자태로 피어났다가 저녁이 되면 시들어 떨어져 흙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것은 살아 있었다. 거기에 비하면 플라스틱 꽃은 죽어 있다. 조화가 죽을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이미 죽어있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것은 모두 다 죽는다. 오직 죽어 있는 것만이 죽지 않는다. 고통이란 바로 이 살아 있다는 의미를 각성시켜 주는 약인 것이다.

잊지 말라. 고통을 두려워하지 말라. 행복이 사라진다고 해서 두려워하지 말라. 조화와 같이 거짓된 것은 결코 죽지 않는다. 그러나 진리는 수없이 죽었다가 거듭 부활한다. 이를 잊지 말라. 거짓된 것은 플라스틱 꽃과 같다. 안전하지만 살아 있지 않다. 그러나 고통은 살아 있는 자에게만 온다. 의식이 열릴 수 있는 자에게만 고통이 온다. 그럼으로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이미 행복한 것이다. 자연스럽게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진리에 닦아선 것이다. 인욕은 단순한 감정의 억제가 아니다. 진리의 문으로 들어가기 위한 각성제(覺醒劑)임을 잊지 말라. 이것이 네 번째 인욕바라밀의 메시지다.

라)정진(精進)바라밀


정진이란 마음의 나태심을 제거하고 꾸준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경전은 ‘용맹하게 선법을 닦고 악법을 끊는 마음의 작용’을 정진이라고 했다. 정진은 ‘부지런함(勤)’이라는 뜻이다. 교학의 말을 빌리자면『법에 물들이지 아니함(無染)을 정(精)이라 하고, 념념이 나아가서 구하는 것을 진(進)이라 한다.』고 했다.


법에 물든다는 것은 만족과 쾌락과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럼으로 무염(無染)이란 쾌락이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본질을 찾는 길이다. 진리가 무엇인지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념념이 나아간다’라는 말은 방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정신을 차리고 나태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진리를 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진실해야 한다. 존재 속에서 진리를 구하려면 먼저 자기 자신의 존재 속에서 진리를 발견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자기 자신을 기억하려고 하는 노력이 따라야 하는 것이다. 그 노력은 또한 시간이 따른다. 그럼으로 진리를 아는 길은 긴 여행과도 같다고 말하는 것이다. 긴 여행일수록 또한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진리를 향한 구도의 길도 이와 마찬가지다. 그 준비하는 노력이 바로 정진인 것이다. 진리를 담을 수 있는 큰 수레가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많은 노력이 필요다. 찾아온 손님을 위해 깨끗한 빈 그릇을 준비하듯 그대는 그대 자신을 비우고 진리라는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하는 것이 바로 정진의 의미인 것이다.


그대는 매일 아침 식사를 한다. 아침을 먹지 않았기 때문에 점심을 두 번 먹는다고 아침의 허기가 가시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포만감으로 위에 고통을 줄뿐이다. 그럼으로 식사란 제때에 하는 것이 건강에 좋듯 진리를 향한 여행은 중단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하루를 굶으면 허기가 지지만, 만약 사흘이나 일주일을 먹지 못한다면 그대는 쓰러질 것이다. 정진이란 그대의 식사와 같은 것이다. 식사는 때를 놓치지 않아야 건강을 유지하는 것처럼 진리를 향한 구도의 길도 어느 한 순간도 마음을 방심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방심하지 않은 마음이란 자만에 빠지지 않는 마음이며, 깨어있는 마음이며, 진실한 마음이다. 도둑을 지키는 주인의 마음, 그것이 바로 정진바라밀의 의미이다.


마)선정(禪定)바라밀


선정이란 궁극적으로는 어떻게 전체적으로 행동하는가를 배우는 것이다. 그럼으로  그대의 삶 전체를 선정으로 만들어야 한다. 육조대사가 이르듯 가고, 오고, 앉고 눕고 하는 것(行住坐臥. 행주좌와) 모두가 선정이 되어야 한다.


선정이란 무엇인가? 선정이란 <근원으로 되돌아옴>을 의미한다. 선정은 또한 삼매(三昧)라 한다. 삼매(samadhi)라는 말은 ‘삼(sam)’과 ‘아다(adha)’가 합쳐 이루어진 말이다. 삼(sam)이란 "완전히 하나같은 것"이라는 뜻이며, 아다(adha)란 "도달하고 있는 것" 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삼매란 "함께 존재한다." 또는 "하나에 도달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삼매 속에 있을 때 모든 것이 하나로 결정화(結晶化, crystalize)되어 대립하는 것이 하나도 없게 되어 하나의 통일체가 된다는 뜻이다. 그때 모든 대립되는 것이 조화를 이루게 된다.


그 조화(調和)란 무엇과의 조화인가? <나>와 <너>의 조화이며, <인간>과 <자연>의 조화다. 조화는 절대로 투쟁이 될 수 없다. 조화 속에는 갈등이 있을 수 없다. 그럼으로 선정이란 부정적인 마음이 긍정으로 돌아선 마음이 되는 것이다, 공격적인 마음이 용서(容恕)와 화해(和解)의 마음이 되는 것이다. 날카롭고 모난 마음이 유연하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되는 것이다.

선정이란 바로 그대의 본연, 그대 속에 있는 불성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바)반야(般若)바라밀


반야는 지혜를 말한다. 지식과 지혜는 다른 것이다. 지식(knowledge)은 생각에서부터 온다. 지식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럼으로 지식은 원형(原形;original)이 아니다. 지식은 그 자체로 볼 때 원형이 될 수 없다. 지식은 차용해 온 것이다. 그러나 지혜는 원형이다. 지혜는 외부에서 온 것이 아니다. 지혜는 그대 안에서 자란다. 지혜는 결코 인공적인 것이 아니다. 동대문시장에서 살수 있는 그런 플라스틱 꽃이 아니다. 지식을 영어로는 knowledge라고 한다. 이는 경험 없이 얻어지는 지식을 뜻한다. 대학에 가서 얻어지는 그런 지식을 뜻한다.


사람들이 말하는 지혜란 서양에서는 wisdom이라고 한다. 이는 삶을 통해서, 삶의 경험을 통해서 얻어지는 그런 지혜다. 그러므로 젊은 사람들은 지식은 축적할 수 있다. 그러나 결코 지혜롭게 되지는 못한다. wisdom은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젊은 사람들은 학위를 얻을 수 있다. 그는 공학박사, 건축학박사 등의 학위를 얻을 수 있다. 이는 어렵지 않다. 그러나 오직 늙은 사람들만이 wisdom의 차원에 머물 수 있다. wisdom은 그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얻어지는 그런 지식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외부로부터 얻어질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다.


반야(prajna)는 그런 지식(knowledge)도 아니요, 지혜(wisdom)도 아니다. 그것은 그대 존재의 심층부로부터 솟아나는 그런 것이다. 그것은 결코 경험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요, 자기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을 통해서 얻어 질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도 아니다. 그것은 또한 삶을 통해서, 삶과의 만남을 통해서 얻어지는 그런 것도 아니다. 그대 자신의 완전한 침묵 속으로 들어가서 그 속에 감춰져 있는 그것을 꽃피어나도록 함으로써만 그것은 얻어 질 수 있는 그런 것이다. 반야는 그대 존재의 심층부에 씨앗의 상태로 있다. 반야는 그것이 싹틀 수 있는 그런 토양을 필요로 하고 있을 뿐, 반야는 원형이다. 그것은 그대 자신의 것이다. 그러나 주의하라.『그것은 <그대의 것>이라고 말한 것은 결코 그 속에 <그대(我)>라는 어떤 에고의 요소가 있다는 그런 뜻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그대의 본질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그대의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 에고가 있을 여지는 전혀 없다. 에고는 또다시 마음(思念)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에고는 결코 그대 존재의 내적 침묵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체로부터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을 때 거기 프라즈냐파리미타(prjnaparamita; 마하반야 바라밀)의 상태가 온다. 완벽한 지혜, 초월의 상태가 온다.


반야에 이르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속세의 길로서 자기 자신은 잊는 길이며, 다른 하나는 신의 길로서 자기 자신을 기억하는 길이다. 이 두 길은 행복을 구하는 자는 결코 얻지 못하고, 진리를 구하고 행복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자는 항상 행복을 발견한다는 아이러니가 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찾어야 할 것은 자기 자신을 아는 일이다. 자기 자신을 아는 일만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엇을 안다고 해도 다 무의미한 것이 된다.』라고 했다.

자기 자신을 아는 것과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이 두 가지를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 두가지 장벽을 지켜보라. 그리고 그대 자신을 버리도록 하라. 먼저 지배하거나 소유하고 이용하는 일을 그만 두라. 그러면 갑자기 사회의 올가미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된다.


그 첫 번째 장벽이 바로 에고이다. 에고가 문제이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는 것은 에고 때문이다. 에고는 사람들에게 그들 자신의 거짓된 이미지를 형성시켜준다. 그런 이미지를 오랫동안 간직하고 다니면 그 이미지가 상처를 입고 파괴될 때 두려워하게 된다. 스스로 거짓된 얼굴을 만들어 놓고 그것 때문에 두려워한다. 그 거짓된 얼굴이 떨어져 나가면 그대는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미쳐버리고 만다. 사람들은 그 이미지에 너무도 많은 것을 투자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그 자신을 그런 고상한 개념으로 그리고 거짓된 개념으로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이 자기와 맞지 않으면 그들이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으로 그대 자신을 알고 싶다면 먼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보고 거짓된 이미지를 떨쳐버려야 한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은 아름답지 못하다. 매우 추하다. 그것이 문제이다. 사람들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감추고 아름다운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사람들은 자기자신을 모르기 때문에 천국에 던져져도 그 속에서 지옥을 만든다. 사람들은 항상 지옥을 갖고 다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어디에 가든 큰 차이는 없다. 항상 자기 자신의 세계를 갖고 다닌다. 그 세계란 그의 내면에 있는 어두움이다. 내면의 어두움은 사라져야 한다.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것은 바로 그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진정으로 사랑할 줄도 모르고, 웃을 줄도 모른다. 모든 것이 위선이요, 거짓이다. 그러면서도 진리를 찾는다고 한다. 이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진리를 만나기 위해서는 진실해져야 한다. 진실과 진실만이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진실하지 못한 사람은 진리에 이를 수 없다. 오직 진실한 사람만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 진실한 자만이 자기를 거짓 없이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삶에 있어서 진실해 진다면 많은 어려움도 생길 것이다. 그러나 각각의 어려운 곤경이 그대를 더욱 성숙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진실해지고, 진리를 말하고 행동함으로써 진리는 그대 속으로 내려 올 준비가 된다. 성숙함이 어느 정도에 이르면 갑자기 문이 열린다. 이밖에 딴 길은 없다.


과학이란 자기 자신을 아는 지식을 제외한 모든 지식을 말한다. 그 지식을 아는 자가 자신은 어둠 속에 머문다.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다. 종교는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을 아는 일에 기초하고 있다. 그것이 반야의 길이다.


                          나무 석가모니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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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