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성제와 십이행상

2005. 10. 16. 20:52야단법석

 

                     

                   사성제(四聖諦)와 12행상의 메세지 

  


1. 사성제란 무엇을 말하는가?

  

모든 행복에는 그 원인이 있고, 모든 재앙은 그 조짐이 있다.

행복이란 어디서 오는가?

행복은 진리를 얻었을 때에 얻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행복만을 추구한다면 그대는 진리도, 행복도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행복은 진리에 대한 하나의 부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것을 직접 얻을 수 없다. 거기 행복에 도달하는 길은 없다.

그것은 오직 진리를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만일 그대가 진리에 도달한다면 행복은 저절로 얻어 지는 것이다.

행복은 하나의 그림자이다. 그것은 진리를 따라 다닌다.

그러므로 그대가 행복을 찾으려 한다면 그대는 행복을 구할 수도 없고 진리도 얻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을 보라. 그들은 100명중에서 99명은 행복을 추구한다. 그들은 많은 고통을 당하며, 그들의 삶은 불행하다. 그래서 그들은 행복이란 해독제를 구할 뿐이다. 그들은 반대의 것을 구하고 있다. 행복을 구하기 위하여 예수나 붓다에게 접근한다면 그대는 다시 한 번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그대는 눈먼 장님과 같기 때문이다.

 

행복은 결코 목표가 될 수 없다.

그것은 구해지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괴로워 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언제나 부산물로서 얻어 진다.

나무를 길러보라. 그러면 꽃은 피어나기 마련이다. 처음부터 꽃을 얻으려들지 말라. 그러면 실패하고 말 것이다. 꽃을 구하려고 들면 실패하지만 나무를 키울 때 시기가 오면 꽃은 피어난다.

그대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것에 대하여 고민할 필요가 없다.

 

진리의 탐구는 희귀해 보이고, 메말라 보이고, 단절되고, 외로운 자기와의 싸움이다. 그러나 행복은 가치가 있어 보인다. 그럼으로 만일 "진리를 추구하라. 행복은 저절로 따라 올 것이다."라고 말하면 그대는 행복이 그 부산물이라는 이유로 진리를 추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그대는 여전히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된다.

 

그대가 행복을 찾기 위해서는 진리가 얻어져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진리를 추구하기 시작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그대는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대의 마음은 여전히 행복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그것을 헛되이 찾는 꼴이 된다.


행복이란 진리의 탐구에서 주어지는 부산물이다. 행복만을 추구하는 자는 종국에 고통으로 끝난다. 행복을 추구하는 마음은 항상 그 행복에 더하여 또 다른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에 끝없는 고통의 길이 이어진다. 그럼으로 행복이란 영원한 진리의 탐구 속에서만 이루어진다. 진리탐구의 길, 그것을 외로운 자기와의 싸움이다. 그것을 구도의 길이라고 한다.


재앙은 어디에서 오는가?

인간의 탐욕과 무지에서 온다.

그럼으로 행복을 구하는 자는 원인을 쌓아야 하고,

재앙을 피하고자 하는 자는 마땅히 그 조짐을 알아야 할 것이다.

봄에 땀흘려 씨앗을 뿌리지 않은 자가 가을에 풍요로운 수확의 기쁨을 어찌 누릴 수 있겠으며, 게으른 어부가 어찌 만선(滿船)의 기쁨을 누릴 수 있으랴!

장마철이 다가올라치면 바람이 먼저 조짐을 보이고,

개미와 쥐들은 더 높은 곳으로 처소를 옮기고,

새들은 나뭇가지를 주어 모어거나, 둥지를 높은 곳으로 옮기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미물인 개미와 쥐들, 그리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들까지도 재앙의 조짐을 미리 알고 이를 대처하는데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부하는 인간은 자연의 재앙은 고사하고 자기 마음하나 다스리지 못하여 욕망의 늪에 빠져 번뇌와 고통으로 허무한 인생을 마감하고 있지 않은가.


달에다 유인(有人) 정거장을 세우고 화성 탐사를 구가하는 첨단우주과학시대라고 과학자들은 자부하지만 이에 비례하여 암과 같은 갖가지 불치(不治)의 병은 인간의 생명을 한 순간에 앗아가는 경우를 우리는 우리주변에서 심심찮게 보고 듣는다.

 

그러나 육신의 병이란 느닷없이 오는 것이 아니다.

간암의 경우를 생각해 보라. 간 질환이 이미 중상을 나타내기 시작하면 때는 늦은 것이다. 현대 첨단과학이 제시하는 방사선 등의 고급의술로서 부분적으로는 치유 될 경우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하드라도 시간이 걸린다. 만약 증상이 나타나기 전에 미리 알았다면 일찍 예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나타나면 고치는 일은 어렵게 된다. 주변을 둘러 보라. 멀쩡한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병이 발병하여 사망에 이르지만 그들은 그 병이 오랜 시간을 걸쳐 자행되었음을 간과하고 있다. 병의 원인이란 어느 순간에 발병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중병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병의 조짐이 반드시 드러나는 것이다. 그럼으로 그 조짐을 따라 준비하였다면 적어도 완치는 될 수 없다 할지라도 사망에까지는 이르지 않을 것이다.

구 소련에서는 첩보활동과 더불어 사진 기술이 고도로 발전해 있었다.

그 중에서 키를리안(kirlian)사진이라는 것이 있다.

이는 피사체인 생물을 전장(電場: 대전체의 전기작용이 존재하고 있는 장소)에 놓음으로써 그것에서 방사하는 빛을 필름에 기록하는 방법에서 발전한 것인데 그것은 사람의 오오라(aura)를 찍을 수 있는 매우 감광성(感光性)이 뛰어난 필름이다.

 

오오라는 흔히 후광(後光)이라고도 부르는 것인데 이는 영기(靈氣)를 말하는 것으로 모든 생물체에서 발산되는 극히 미묘한 빛을 말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배후에 드러나는 후광이나, 예수와 같은 그런 성인의 성화 뒷면에 나타나는 빛을 그린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도 오오라의 일종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데 소련 과학자들에 의하면 키를리안 사진에 나타난 오오라를 통해서 보면 6개월 후에 나타날 병을 알아낼 수 있다고 한다. 6개월 후의 건강 상태가 현재 사진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누구도 6개월 후에 나타날 자신의 병을 의식할 수는 있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의사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분명 병은 발생되고 있다. 겉으로는 보기에는 완전히 건강하게 보일 수도 있었지만 병은 이미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단지 겉으로만 나타나지 않았을 뿐이다. 알지 못하는 것은 아직 몸에도 나타나지 않았고, 마음으로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오라에는 나타나 있다고 한다.

 

사람들 내면에 있는 가장 미묘한 물질인 이 오오라를 종교에서는 아스트랄체(astralbody, 聖氣體, 靈體)라고 부르고 있다.


아스트랄 이라는 말은 '별'이라는 단어에서부터 유래된 된 것으로 ‘아스트랄’ 이란 ‘별(star)의 몸’ 이라는 뜻이다. 즉 별의 빛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뜻이다. 별을 관찰하여 인간의 운명을 점치는 점성학(astrology)도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이다.

 

키를리안 사진술은 병을 예측할 수 있는 매우 과학적인 발명이다. 그리고 그 확률은 100%에 달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 사진술로 병을 예언하면 일반사람들은 아무도 믿지 않는다. 의사들이 조사를 해보아도 아무 곳에도 증상이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의사들이란 단지 육체만을 조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신과 의사들 또한 알아낼 수가 없다고 한다. 정신과 의사들은 오직 마음만을 진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키를리안 사진술은 아스트랄 체에 있는 아직은 밖으로 표현되지 않은 상태를 진단할 수 있는 기술이다. 그럼으로 아스트랄 체에 내재해 있는 상태에서 병은 고쳐질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러면 병은 결코 발병(發病)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감지할 수 없는 상태에서 병은 존재하다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이는 병의 조짐을 미리 알면 그 병도 외부적으로 발병되기 전에 예방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미래의 세계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더욱 발전하여 현실적으로 이용될 수도 있을 것이다. 각 병원마다 아스트랄체를 검사하는 기구가 설치된다면 병이 육체적으로 나타나지 않더라도 오오라의 조짐을 통해서 미래에 발생할 병까지도 완전히 사라지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내면의 존재에서도 이와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 마음을 다스리면 모든 현상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가령 분노가 일어난다면 분노가 일기 전에 분노가 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분노를 심리적으로 고찰하면 분노는 3단계 과정을 거쳐서 일어난다.

 

분노는 먼저 아스트랄 속에 나타난다. 관심을 기우려 주의하면 분노의 폭풍이 다가 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아직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지만 문을 두드리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분노를 일으킬 때를 생각해 보라. 분노가 일어날 경우 열이 오르고 얼굴은 붉어지고 눈은 충열되고 심장의 고동은 점차 격해지지 않던가? 그 처음 조짐은 마치 문을 두드리는 노크소리와 같다. 그러나 그 노크 소리는 매우 작다. 그러나 들을 수 있다. 단지 주의해야만 할뿐이다. 주의하지 않을 때 그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대의 내면에는 소음이 연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침묵을 지킬 수만 있다면 분노가 와 닿기 전에 분노를 느낄 수가 있을 것이다. 그때는 분노를 다루기가 아주 쉽다.

 

두 번째 단계는 분노에 사로잡힐 때이다. 그때는 분노를 밖으로 밀어내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이미 분노에 사로잡혀 그것을 조정할 주체가 없어져버리기 때문이다. 화를 낼 때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분노만이 있을 뿐이다. 그대는 완전히 소유 당한 상태에 있다. 단 한순간만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속에서 그대는 그대 자신을 잃는다. 분노가 그대를 감싸 안는다. 그때 그대는 후회할 일을 한다. 그러나 어쩔 수가 없다. 이미 그 분노를 조종할 주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 번째 단계는 분노가 사라져버렸을 때이다. 그때서야 자신을 되찾고 후회한다. 그리고 왜 자기가 화를 냈는지를 변명할 구실을 찾고 상대방을 찾아가서 용서를 구한다. 이것이 세 번째 단계이다. 이 세 번째 단계에 와서는 다시는 화를 내지 않겠다고 스스로 맹세한다. 항상 그렇게 한다. 그러나 그 맹세는 쉽게 깨져버린다. 무기력하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이 세 번째 단계에 와서는 스스로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현명한 것이다. 그 현명함이란 무엇인가? 고통을 겪은 후에야 생각하는 어리석음이 아니겠는가?

 

분노가 찾아올 때 이미 깨달아야 한다. 키를리안 사진으로 그 드러난 오오라를 읽듯이 그 조짐을 읽어야 한다. 그러나 일단 분노가 들어오면 분노를 다시 쫓아내는 일은 힘들다. 그러나 분노가 찾아 올 때 깨어 있으면 어느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다.

 

분노를 바라보기만 하라. 그러면 그것을 스스로 증발해 버릴 것이다. 이미 소유된 상태에 있으면 분노를 다시 돌려보내기가 무척 힘이 든다. 불가능하다. 그러나 분노에 사로 잡혀 있는 상태에서라도 분노를 지켜보고 있으면 그것은 단지 그대 안에서 끓어오르기만 하다가 다시 진공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그때는 다른 사람에게 전혀 피해를 입히지 않게 된다. 단지 그대 자신이 해를 입을 뿐이다. 그러나 첫 번째 단계에서 깨어있게 되면 해를 입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된다. 그대도 해를 입지 않는다.

 

탐욕과 어리석음의 병도 이와 마찬가지다.

탐진치, 이 삼독의 병 또한 마음이 6근(根)의 경계에 의해 오염된 병인 것이다.

그럼으로 병의 조짐을 미리 알면 치료할 수 있듯이 자기 마음의 움직이는 근원을 깨달은 자는 행복을 얻을 것이고, 자기 마음의 움직임을 깨닫지 못하고 따라 움직이는 자는 고통과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져 끝없는 윤회의 질곡을 밟아 갈 것이다.

 

어느 정도 세상을 살아 본 사람이라면 인생은 무상하며, 괴로운 것이라는 이 사실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진정으로 사바세계의 삶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라면 당연히 무상하지 않은 영원한 삶을 찾아야 할 것이고, 사바세계의 삶이 괴롭다면 행복한 영원한 삶을 추구해야만 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행복이 마치 여름 하늘에 우박이 떨어지듯 그렇게 떨어지기를 바라고 고통은 봄날 아지랑이처럼 걷히기만을 바라고만 있다. 욕망과 무지의 늪에 빠져 고통의 원인을 찾아 이를 소멸하고 행복의 원인을 살펴 낙원의 이상향을 추구하려는 의지도 노력도 갖지 못하고 기계적인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현대인들이 아닌가?

 

고타마싯달타가 카필라의 작은 성의 왕자로 태어나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고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된 것도 사바세계에서의 고통의 원인을 찾아 이를 멸함으로서 영원한 행복의 이상향을 얻고자 한 것이다. 그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가? 바로 욕망과 애욕과 무지의 세계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 고통의 멸이 곧 해탈이요, 영원한 행복의 낙원이 바로 열반이 아니겠는가?


부처님이 성도를 한 후 처음 법을 펴기 위해 찾아 간 곳은 녹야원(鹿野苑)이었다.

거기에는 아버지 정반왕이 그를 회유하기 위해 보낸 5명의 사자(使者)들이 수행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고타마싯달타가 부처가 되기 전에, 다시 말해서 정각을 이루기 전에 한때 같이 수행한 자들이었다. 그 다섯 명의 제자들에게 부처가 스스로 증득한 깨달음의 진리를 최초로 설한 것이 바로 이 사성제라고 한다. 사성제란 4가지 큰 진리라는 뜻이다.

 

제(諦)란 ‘진실’이란 뜻이니 이는 속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럼으로 사성제란 4가지 진실된 진리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 4가지 큰 진리란 무엇인가? 현실적인 이 사바세계에 살고 있는 삶의 고통(苦)과 그 고통의 원인(集)을 밝히고, 그 고통을 멸하는 길(道)을 제시하여 영원한 행복의 이상향(滅)을 제시한 것이 바로 4가지 큰 진리이니 이것이 곧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사성제인 것이다. 그럼으로 부처님이 최초로 설한 사성제란 우리가 처한 고통스러운 현실 세계로부터 행복이 넘치는 이상의 세계로 나아가게 하는 이정표를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행복이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진리를 구하는 것에서 온다.

진리를 구함이란 다름 아닌 수행의 길인 것이다.

구도의 길, 그것이 바로 진리의 길인 것이다.

 

불행이란 어디서 오는 것인가?

인간의 허망한 욕망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럼으로 행복이라는 것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두가 이 마음의 자세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내 마음속에 일어난 병의 원인을 찾아 바르게 치유하면 그것이 행복이요 열반이 되고, 그 병의 원인을 알지 못하여 그릇된 처방을 내면 그것이 고통이요, 지옥이 아니겠는가? 그럼으로 내 마음의 병을 다스리는 4가지 큰 진리가 바로 사성제인 것이다. 그럼으로 사성제(四聖諦)야말로 불교의 8만4천 법문이 이로부터 시작되고 이로서 끝난다고도 해도 과언이 아닌 진리요, 모든 종교와 삶의 진리 가운데 최고의 가르침인 것이다.

    

2.사성제(四聖諦)의 해설


사성제의 성(聖)은 드러난 바(所見)의 모든 도리(滯痢)가 됨으로 ‘성스러운 진리’ 곧 성제(聖諦)라 한 것이다. 또한 성(聖)은 정(正)의 뜻이니 ‘진실로 바른 도리(正眞)’라는 뜻으로 이름을 성제라 한 것이다.

제(諦)라 함은 ‘진실하다’는 뜻이니 그것은 세간을 속이지 않기 때문이다.

세간을 속인다는 것은 세상과 야합하는, 언제간은 허망한 꿈으로 끝날 그런 말들로 세상 사람들을 욕망과 애욕의 늪으로 이끌고 간다는 의미다. 주변을 둘러 보라.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말들이 위대한 진리나 가르침인 냥 우리들을 현혹하고 있지 않은가. 일확천금을 얻는 비법, 출세하는 비결, 운명을 미리 아는 비결, 행복한 삶에 이르는 지름길, 위대한 정치가가 되는 비결, 유토피아의 건설, 천국에 이르는 비밀 등등……,

삶에 있어서 이런 말들이 다소 자극은 되겠지만 그 자극은 오로지 인간의 본성을 흐리게 하고, 욕망의 섶에 불을 붙쳐 궁극에는 번뇌와 고통의 늪으로 빠져들게 하는 것들일 뿐이다.


사성제(四聖諦)는 고집멸도(苦集滅道)의 4가지 진리를 말한다. 또 이를 사진제(四眞諦)라고도 말하는데 그 뜻은 성인(聖人)이 보는(見) 진리라는 뜻이다. 성인이란 누구인가? 자기 마음을 다스릴 줄 아는 자이다. 마음속의 일체 욕망이 사라져 버린 자이다. 생사의 윤회사슬을 끊은 자이며, 자기 마음의 주인으로 일체 경계에 걸림이 없는 대자유인을 말하는 것이다.


1)고제(苦諦)란 무엇인가?


사람이 살아가는 데 숫한 고통이 있다. 이 많은 고통을 부처님께서는 8가지로 대변하셨다. 소위 사고(四苦) 팔고(八苦)라는 것이다.

태어나고(生.생), 늙고(老. 노), 병들고(病.병), 죽는 것(死.사)이 고(苦)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짐이 고(愛別離苦. 애별이고)요, 미운 사람이나 원수를 만나게 되는 것이 고(怨憎會苦. 원증회고)요,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함이 고(願不得苦. 원부득고)요, 근심과 걱정과 번민과 슬픔이 고이니 한마디로 인생의 존재 그 자체가 고(苦)의 집합체라는 것이다(五陰盛苦, 오음성고). 이는 비록 축약된 말이기는 하지만 인생의 모든 번뇌와 병을 통칭한 말이 되기도 한다.

 

앞의 4가지 즉 생노병사를 사고(四苦)라 하고, 뒤의 4가지를 합치면 팔고(八苦)가 된다.


태어남이 어찌하여 고통이 되는가?

중생들이 각기 그 종류를 따라 오온(五蘊)이 화합하여 목숨을 이룬 후 세상에 태어나지만 한 생명이 이 세상에 나와 그 생명을 보존하고 키워가려면 천만 가지 고통을 겪게 됨으로 이것을 태어남의 고통이라 하는 것이다. 

 

늙는다는 것은 어떤 고통인가?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머리털이 희어지고, 눈이 흐려지고, 이가 빠지고 얼굴은 쪼글쪼글 해지고, 등이 굽으며 기력이 쇠하여진다. 몸은 날로 무거워 앉으면 허리가 아프고 다닐 때는 지팡이에 의지하게 되니 이것이 늙음의 고통인 것이다.

 

병의 고통은 어떠한가?

온 몸은 균형을 잃고 기혈이 순조롭지 못해 두통이나 치통, 요통을 앓으며 눈이 어둡고 귀가 먹고 뼈가 삭는다. 혹은 열병(熱病), 냉병(冷病), 풍병(風病) 습병(濕病)으로 사지가 뒤틀리고 온갖 고통이 엄습하니 이것이 병이라는 고통이라는 것이다.

 

죽음의 고통이란 무엇인가?

중생들이 그 몸의 기력이 다하고 목숨이 끝나려 할 때 아직 끊어지지 않은 잔명이 죽음의 막다른 길에 이르러 여러 가지 견디기 어려운 심한 고통을 받게 된다. 그럼으로 이것을 죽음의 고라 하는 것이다.

 

원수를 만나는 고통이란 무엇인가?

일찍이 서로 미워하며 원한을 품고 해치거나 죽이려 했든 자와 만나게 되는 고통을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짐의 고통이란 무엇인가?

아무리 가까운 부모와 처자라도 언젠가는 서로 이별하게 되는 고통을 말한다.

 

구하는 것을 얻을 수 없는 고통이란 무엇인가?

모든 중생은 나지 않으려고 해도 업을 따라 태어나게 되며, 태어났으면 늙거나 병들거나 죽지 않아야 할 텐데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리고 사는 동안 부귀 영화를 원하고 온갖 재난과 슬픔이 없기를 원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으니 그것이 고통인 것이다.

 

오온성고란 무엇인가?

이와 같이 이 세상에 일단 생을 받아 태어난 것은 결국 모든 고통의 집합체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고의 진리(고성제)라는 것이다.


교학적으로 말하면 고성제란 삼계, 육취(六趣)의 고보(苦報)를 말하며 미(迷)의 과(果)가 된다. 삼계란 하나는 욕계(欲界)이니 이는 욕망의 세계요, 둘은 색계(色界)이니 이는 유형(有形)의 물질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셋은 무색계(無色界)이니 정신과 관념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육취(六趣)란 중생이 지은 업인(業因)의 차별에 따라 태어나는 6가지 세계를 말하는 것으로 흔히 지옥, 악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인의 세계를 뜻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모든 유형의 태어남은 고통의 연속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한가지 고통이 끝나면 또 다른 고통의 연속, 그것이 윤회의 의미인 것이다. 그 윤회의 고통이란 욕망에 고통받고, 물질로 괴로움을 받고, 정신과 관념적인 것으로 괴로움을 받는 존재라는 의미다.

2)집제(集諦)란 무엇인가?


위와 같은 고의 원인은 집착에 있다. 집착이란 무엇인가?

궁극적으로는 이 다음의 생을 불러 온 애욕과 번뇌가 집착이 되는 것이다. 부연하자면 애욕과 탐욕(貪)과 성냄(瞋)등의 번뇌와 선악의 모든 행위(諸業)가 삼계육취의 고통의 결과(果報)를 쌓아서 일어나는 것(集起)이므로 집제라 한 것이다.

 

12인연에서 말하는 무명(無明), 행(行), 애(愛), 취(取) 등의 번뇌로 인한 업행이 다 고(苦)의 원인인 집(集)이다. 또 이것을 습(習)이라고 번역하니 탐진치 등의 번뇌에 의한 관습 곧 마음 가운데 일어나는 애욕, 탐심을 끊지 못하고 따라다니며 버릇이 됐다는 뜻이다. 이렇게 탐진치 번뇌를 따라 살생, 도둑질, 음란, 망어, 악구, 양설 등을 쌓아 모았다는 뜻으로 집(集) 또는 습(習)이라 한다.


이와 같은 괴로움은 모두가 원인 없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의 해답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욕망인 것이다. 무엇을 성취하고자 하는 미망에 갇히어 갈구하는 우리의 탐욕인 것이다. 목마른 자가 물을 갈구하여 헤매듯이 우리는 우리의 욕망에 따라 끌려가는 것이다. 그럼으로 경(經)에서는 이를 갈애(渴愛)라고 표현한 것이다.

갈애가 있는 곳은 고통이 있다는 뜻이니 이것이 바로 고에 대한 원인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집성제(集聖諦)라 한다.


우리의 본래 마음은 청정하다. 그 청정한 마음을 일러 부처의 마음이라고 한다. 부처의 마음이란 곧 불성(佛性)인 것이다. 그 청정한 마음인 불성을 덮어 가리고 있는 번뇌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진리를 찾는데 혼돈을 주는 미혹과 이성의 번뇌가 그것이고, 둘은 경계에 부딪쳐서 혼미를 빚게 하는 이른바 감정의 번뇌가 그것이다.

 

이들 두 가지 번뇌는 온갖 번뇌를 집약적으로 분류한 것이지만 이같은 온갖 번뇌의 근원이 되는 것을 추구해보면 한가지는 무지 곧 무명이고 또 한가지는 애욕이다.

이 무명과 애욕은 온갖 번뇌를 만들어내는 자체적인 힘 곧 자력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야말로 온갖 번뇌의 근원이 되어 고통을 야기하는 것이다.

 

무명이란 무지몽매함을 말한다. 사물의 도리를 옳게 분별하지 못함을 뜻한다. 틀린 것을 바르다고 보거나,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아는 것이 바로 무지의 속성이다. 다시 말해서 고통을 낙(樂)으로 알고, 변하는 것을 변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허깨비를 진짜로 알고, 더러운 것을 깨끗한 것으로 아는 것이다.  

 

애욕은 격렬한 욕망으로서 삶에 대한 집착이 그 근본이 되며,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모두를 탐내는 탐욕으로도 되고, 때로는 뒤바뀌어 죽음을 원할 정도로 극단의 욕망으로 변하기도 한다. 중생이 괴롭다는 것은 이 같은 무명과 애욕을 밑바탕으로 하여 여기에서 탐욕, 노여움, 어리석음, 그릇된 견해, 원한, 질투, 아첨, 기만, 사치, 멸시, 게으름, 그 밖의 갖가지 번뇌가 생기기 때문이다.


탐욕이 생기는 것은 마음에 드는 사물을 보고 옳지 못한 생각을 갖기 때문이다.

노여움을 일으키는 것은 마음에 거슬리는 일을 보고 옳지 못한 생각을 갖기 때문이다.

어리석음은 무지몽매로 인하여 해서는 안 되는 일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그릇된 견해는 옳지 못한 가르침을 받아드려 올바르지 아니한 생각을 갖는데서 비롯된다.

 

이들 탐욕, 노여움, 어리석음은 세상의 세 가지 불이라고 일컬어진다. 탐욕의 불길은 욕망에 눈이면 나머지 그 진실성을 잃은 사람을 불태우며, 노여움의 불길은 화가 치받쳐서 생명 있는 것들의 목숨을 해치는 그런 사람들을 불사르며, 어리석음의 불길은 마음이 혼미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불태운다.

 

참으로 이 세상은 갖가지 불길에 싸여 불타고 있다. 탐욕의 불길, 노여움의 불길, 생로병사의 불길, 근심, 슬픔, 고통, 번 민의 불길, 이러한 갖가지 불길에 휩싸여 활활 타오르고 있다. 이들 번뇌의 불길은 몸과 입과 생각의 나쁜 행실로 몰고 가서는 자신을 불태울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뭇 중생들까지 불태우고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와 같은 더러운 불길에 의해 생긴 상처의 고름은 닿는 데마다 독을 옮겨 우리가 의지하여 살아가야 하는 산과 강마저 오염시켜 모든 생명체의 존립은 물론 생명이 없는 것들까지 무자비하게 파괴하고 불태우고 있는 것이다.


탐욕은 만족을 얻고 싶은 기분에서, 노여움은 만족을 얻지 못한 기분에서, 어리석음은 깨끗하지 못한 생각에서 빚어진다. 탐욕의 죄로 입은 더러움은 작지만 이를 떨쳐 버리기는 쉽지 않으며, 노여움의 죄로 입는 더러움은 크지만 이를 떨쳐 버리기는 매우 쉽다. 어리석음의 죄로 입는 더러움은 크기도 크려니와 또한 이를 떨쳐 버리기도 매우 어렵다. 따라서 사람들은 마음에 드는 사물의 모습을 보고, 들었을 때는 바르게 생각하고, 마음에 안 드는 사물의 모습을 보았을 때는 자애로운 마음을 기르며, 항상 올바르게 생각함으로써 이들 세 가지의 불길을 끄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에 사람들 모두가 올바르고 깨끗하고, 공평무사한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면 번뇌에 의하여 현혹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탐욕과 성내는 마음, 그리고 어리석은 마음 ― 이들 세 가지 번뇌는 이 세상의 슬픔과 괴로움의 근원이 된다. 이같은 슬픔과 괴로움의 근원을 잘라내는 데는 지켜야 할 규범이 있으니, 곧 계(戒)와 선정(禪定)과 지혜(智慧)이다. 계(戒)는 탐욕의 더러움을 제거하며, 올바른 선정(禪定)은 노여움의 더러움을 씻어내고 지혜(智慧)는 어리석음의 더러움을 닦아 내준다.

 

인간의 욕심에는 끝이 없다. 그것은 마치 소금물을 마신 사람이 더욱 더 목이 타는 것과 흡사하다. 그 사람은 언제까지라도 만족함이 없어 점점 거센 갈증에 신음하게 된다. 사람들은 이런 욕심을 만족시키고자 애쓰지만 불만만 누적되어 초조해질 따름이다. 인간은 결코 자기의 욕심을 만족시킬 수가 없다. 만족되지 않음으로 고통은 크지고, 끝내 만족하지  못할 경우에는 미쳐서 실성할 따름이다.


3)멸제(滅諦)란 무엇인가?


고의 원인인 애욕과 번뇌를 남김없이 없애는 것을 말한다. 고의 원인인 애욕과 번뇌를 다 없앤 곳은 다름 아닌 열반의 경지다. 그럼으로 멸(滅)은 열반을 가리키는 말이 된다. 열반이란 말의 원래 뜻은 ‘불이 끄진 상태’ 를 뜻한다. 그럼으로 열반은 번뇌의 불, 혹업(惑業)을 멸하였으니 생사의 고통을 여의 곳이 된다. 그럼으로 진실로 진공(眞空) 적멸(寂滅)하므로 멸(滅)이라 한 것이다. 이는 깨달음(悟)의 과(果)가 되는 것이다.

 

병이 생겨 고통스럽다면 그 병의 원인을 찾아서 근본적으로 그 병을 치료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진리다. 그 병을 없애는 것을 멸(滅)이라 한다. 마음의 병은 갈애요, 욕망이다. 그러므로 이를 멸하는 진리의 길이기에 멸성제(滅聖諦)라 한 것이다.


4)도제(道諦)란 무엇인가?


도제란 팔정도를 말한다. 이는 열반에 통함으로 길이므로 도(道)라 한 것이다. 이는 깨달음(悟)의 인(因)이 되기 때문이다. 교학에서는 앞의 두 가지 즉 고(苦), 집(集)은 유전(流轉)의 인과(因果)라 하며 또 세간인과(世間因果)라고 한다. 뒤의 두 가지 즉 멸(滅), 도(道)는 환멸(還滅)의 인과(因果)라 하며 또 출세간(出世間)인과(因果)라 한다. 유전이란 물이 흐르듯 욕망의 흐름을 따라가는 업인의 결과를 말한 것이며, 환멸이란 그 물의 흐름을 차단하여 본래 깨끗한 본원으로 환원시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4가지를 다 제(諦)라 하는 것은 실상(實相)이 지극하기 때문인 것이다.

 

사성제를 원인과 결과의 순서로 집고도멸이라 하지 않고 고집멸도라고 하는 것은, 다시 말해서 둘다 과(果)를 먼저 세우고 다음에 인(因)을 두는 것은 과(果)는 알기 쉽지만 그 원인(因)은 알기 어렵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어리석은 중생은 고통을 싫어하기 때문에 먼저 결과인 고과(苦果)를 나타내어 싫어하게 한 뒤에 그 인(因)을 끊어 없애게 하고, 또한 열반의 오묘한 결과(妙果)를 들어서 기쁘게 한 뒤에 그 도(道)를 수행하게 권하기 위해서 결과를 먼저 밝힌 것이다. 현실의 고통을 먼저 이해시키고 그 원인을 밝혀 열반의 이상향을 제시하고 그에 이르는 길을 설명한 것이다. 이런 가르침은 가장 근기가 낮은 중생들을 깨달음으로 유인하기 위한 부처님의 뛰어난 교화법인 것이다.

 

부처님께서 보리수하에서 일어나서 녹야원(鹿野苑)에 이르러 5비구를 위하여 처음 이 법을 설하시니 이는 부처님이 스스로 깨달은 바의 진리의 수레바퀴(전법륜)를 처음 굴린 것이 된다. 이를 초전법륜이라고 하는 데 이 초전법륜의 법이 바로 사성제인 것이다. 이에 의하여 수도(修道)증멸(證滅)한 사람들을 성문(聲聞)이라고 부른다.


면(滅)이 병을 없앤 상태라면 도(道)란 그 병을 없애는 길을 말하는 것이다. 그 없애는 처방의 길을 가르쳐 도성제(道聖諦)라 한 것이다.

 

도성제는 8가지의 길이 있다. 그러므로 이를 팔정도(八正道)라 부른다.

팔정도는 여러 가지 이름이 있다. 혹은 팔륜(八輪), 삼자(三自), 팔정(八正), 팔유행(八由行)이라고도 하고 <구사론(俱舍論)>에서는 팔성도지(八聖道支)라고도 하고 또는 팔정도분(八正道分)이라고도 한다. 이 팔성도(八聖道, 범어.ryamrga, 파리어. ariyamagga)의 성(聖)은 정(正)의 뜻이니, 도(道)에는 편견을 여의었기 때문에 정도(正道)라 한 것이다. 또는 성자(聖者)의 도(道)이니 성도(聖道)라고 한다.


팔륜(八輪)이라고 한 것은 팔정도를 수레에 비유한 것인데 이는 수레바퀴의 바퀴살(輻, 폭)과 바퀴통(轂, 곡); 바퀴테(輞, 망)가 서로 도와서 한 수레바퀴가 성립하는 것과 같이 정견, 정사유, 정정진, 정념의 넷은 바퀴살이 되고 정어, 정업, 정명은 바퀴통이 되며, 정정은 바퀴테가 되어 서로 도와서 정도를 이룬다는 의미의 비유다. 또한 우리들 수행자는 이것을 의지하여 열반의 피안에 이를 수 있으므로 바퀴(輪)에 비유한 것이다.


삼자(三自)라 한 것은 팔정도를 자조(自調), 자정(自淨), 자도(自度)의 셋으로 분류한 것이니 이것은 이승(二乘)의 성자(聖者)가 닦은 계학(戒學), 정학(定學), 혜학(慧學)에 배대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정어, 정업, 정명의 셋은 자조(自調)와 계학(戒學)인 지계(持戒)에, 정념, 정정의 둘은 자정(自淨)과 정학(定學)인 수선(修禪)에, 정견, 정사유, 정정진의 셋은 자도(自度)와 혜학(慧學)인 지혜(智慧)에 배대한 것이다.<智度論六十一>

 

팔정도란 멸에 이르는 8가지 바른 진리의 길이란 뜻이다. 그것은 바른 견해(正見. 정견), 바른 생각(正思惟. 정사유), 바른 말(正語. 정어), 바른 행위(正業. 정업), 바른 생활( 正命. 정명), 바른 노력(正精進. 정정진), 바른 기억(正念. 정념), 바른 선정(正定. 정정)을 말한다.


바른 견해란 네 가지 진리를 바로 보는 견해요, 바른 생각이란 번뇌 망상을 멀리하고 성냄과 원한이 없는 생각이요,

바른 말이란 거짓말, 악담, 이간질, 부질없는 잡담을 떠난 도리에 맞는 참된 말이다. 바른 행위란 살생, 도둑질, 음행을 하지 않고 올바른 계행을 지키는 것을 말한다.

바른 생활이란 출가자의 생활 방법으로 부정한 장사나 점이나 사주팔자 따위의 수단을 떠나 정당한 방법으로 의식(衣食)을 얻어 생활하는 것을 말한다.

바른 노력이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나쁜 생각을 일지 않게 하고 이미 일어난 나쁜 생각은 없애버리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착한 생각은 일게 하고 이미 일어난 착한 생각은 원만히 키워 나가도록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다.

바른 기억이란 생각을 한 곳에 집중하여 몸과 마음과 진리를 바로 관찰하고 탐욕에서 일어나는 번뇌를 없애는 것이다.

그리고 바른 선정이란 모든 욕심과 산란한 생각을 가라앉혀 선정에 들어감을 말한다.


팔정도(八正道)의 정(正)이란 허망된 모든 것을 멸하고 바른 하나(一)로 돌아간다(止)는 뜻이다. 그 하나는 무엇인가? 바로 우리의 진심을 일컫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럼으로 팔정도는 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길을 예시한 것이다.


3.녹야원의 설법


중생이 겪는 8가지 고통도 고통이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괴로운 것은 생사의 윤회문제다. 그럼으로 <열반경>15에 이르길

『너희들이 사성제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오랫동안 생사의 대해를 유전하였지만 만약 사성제를 안다면 능히 생사를 끊으리라.』

 

라고 했다. 모든 윤회의 고통은 생(生)이 있기 때문에 사(死)가 있는 것이고, 또한 사(死)가 있기 때문에 생(生)이 있는 것이다. 윤회란 생사의 고리가 이어진 고통의 수레바퀴인 것이다. 그러면 생사의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사성제를 이해해야 할 것인가? 부처님이 설한 사성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처님이 설하신 그 방법을 따라 이해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일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삼전십이행상(三轉十二行相)과 그리고 4가지 지혜(四肢)에 대한 이해다.


1)사제(四諦) 십이행상(十二行相)


고집멸도의 네 개의 성스러운 진리를 각각 세 단계(示. 勸. 證) 유형에 의해 고찰하는 것으로 이는 총 12가지가 되기 때문에 삼전십이행상이라고 한 것이다. 행상이란 경계에 따라 드러나는 마음의 작용을 말하는 것이다. 부처님이 녹야원에서 사성제를 설하신 방법은 먼저 결과를 보여주고, 그리고 고통을 멸하고 행복을 찾도록 유인하여, 마침내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 이를 시(示), 권(勸), 증(證)의 3단계 과정을 예시한 것이니 각 단계마다 4가지 변화의 과정을 밟아 가는 의식의 전환을 설명한 것이기 때문에 이를 ‘삼전(三轉)’이라고 한 것이다.


(1)시전(示轉)

이것이야말로 고(苦)요, 집(集)이요, 멸(滅)이요, 도(道)이다 라고 사제를 각각 제시하는 것을 말한다. 제시한다는 말은 사실을 사실대로 직시(直視)하라는 의미이며 분명한 문제의식을 가지라는 의미다. 다시 말해서 고통을 행복으로 착각하지 말며, 원인을 결과로 오인하지 말며, 무애한 것을 구속으로 여기지 말며 바른 길을 삿댄 길로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2) 권전(勸轉)

고(苦)는 알아야 할 것, 집(集)은 단(斷:끊음)하여야 할 것, 멸(滅)은 증(證: 깨달음)하여야 할 것, 도(道)는 닦아야 할 것이라고 사제의 수행을 권하는 것을 말한다. 문제가 분명하다면 그 해답은 자명한 것이다. 그럼으로 고통이 무엇인지 알면 그 원인을 찾아야 끊어야 하고 행복을 구한다면 그 길을 가야할 것이다.


(3)증전(證轉)

고(苦)를 스스로 알고, 집(集)을 스스로 끊고, 멸(滅)을 스스로 증(證)하고, 도(道)를 스스로 닦았다고, 스스로가 자기에 대하여 증(證)하는 것을 말한다. 증한다는 말은 스스로 체증(體證)한다는 말이다. 인생에 있어서 영원한 행복을 구하는 것은 바로 진리를 향한 수행의 길이다. 그 수행의 길은 단지 아는 것에 머물러서는 생사의 고통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내가 먹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아무리 훌륭한 옥(玉)이라도 캐내어 다듬지 않으면 보물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스스로 맛보고 스스로 제련하고 다듬었을 때 그 옥은 빛나고 좋은 음식이 되는 것이다. 진리의 수행은 스스로 체증하여야만 그 길이 완성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후대의 해석에 의하면 이 삼전(三轉)에 있어서 근기가 뛰어난 자(上根氣)는 첫 번째의 시전(示轉)에 의해서 깨달음에 나아가고, 중간 근기를 지닌 자(중근기)는 두 번째의 권전(勸轉)에 의해서 깨달음에 나아가고, 마지막 근기가 낮은 자(하근기)는 세 번째의 증전(證轉)에 의해 각각 깨달음에 이른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현명한 자는 현실을 직시함으로서 진리의 길에 들고, 덜 현명한 자는 전후를 살피고, 남의 설명을 들어서야 진리의 길에 나아가며, 어리석은 자는 그 방법까지 일러주어야 진리의 길을 간다는 의미다.  


2)사성제의 4가지 지혜(四智)


(1)고제(苦諦)의 지(智)는

<비상(非常)>, <고(苦)>, <공(空)>, <비아(非我)>의 의미를 아는 것이다.

전생의 업에 기인해서 받은 이 육체는 영원한 실체가 아니다. 그럼으로 이 몸은 언제가 사라질 무상한 것이기에 영원하지 않다(非常)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를 비상(非常)의 행상이라 한다. 모든 괴로움과 근심이 있는 것은 이 몸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이 몸이 모든 근심과 번뇌의 집합체임을 아는 것이 고(苦)의 행상이다. 사람들은 이 몸뚱아리를 자기의 것으로 알지만 이는 <나>의 소유가 아니라 오온의 집합에 불과한 것이다. 사대(四大)가 모였을 때는 나의 육체가 되지만 사대가 흐트러지면 사라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의 육체는 영원한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대의 인연으로 모이면 생(生)이 되고 흩어지면 사(死)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육체를 공(空)한 것이라고 관찰하는 것을 공(空)의 행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 불멸(不滅)의 육체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육체는 곧 내가 아닌 것이다. 이렇게 관찰하는 것을 비아(非我)의 행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라는 의식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가?

독일의 심리학자며 철학자인 프리쯔 펠스(1893-1970, Fritz Perls)라는 사람은 주관적 나의 세계와 객관적 현상세계 사이에 일어나는 의식세계를 DMZ(비무장지대) 라고 불렀다. 이는 힌두교에서 말하는 <마야>와 같은 것이다. 마야란 환영(幻影)을 말한다. 이 DMZ는 우리의 선입관을 포함하고 있다. 선입관을 가지고 이 세계를 보면 우리는 그때 우리자신의 세계를 만들어 낸다. <마야>를, 환영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편견과 지식으로 우리 자신을 보게되면 우리는 또 다른 환영을 만들어 낸다. 에고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나>라는 의식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저밖에 무엇이 있는 지를 우리는 볼 수 없고, 이 안에 무엇이 있는 지를 볼 수 없다. 밖을 잘못 보았을 때 거기 <마야>가, 환영이 전개된다. 그리고 안을 잘못 보았을 때 에고가 전개된다. 이 두 가지 현상은 모두 DMZ에서 일어난다고 한다.


그럼으로 <나>라는 에고(Ego)는 실재가 아니다. 하나의 관념이다. 에고는 유전학적이 아니다. 따라서 이는 배움을 통해서 생성되는 것이다.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이러한 에고가 형성되는 것은 7개의 문을 통해서 들어온다고 한다.


첫째 문은 육체를 통한 문이다. 

호흡은 하나의 생명현상이다. 인위적인 것이 아니다. 갓 태어난 아기는 의식이 없다. 그러나 두세 달이 지나면 호흡을 통하여 무엇인가가 <내 속에 있다.> 그리고 나머지 다른 것들은

<저밖에 있다.>는 식별이 생긴다. “무엇인가가 내 속에 있다.”는 이 식별의식이 에고가 들어오는 첫 번째 문이다. 허허벌판에 서있다고 가정해 보라. 거기 허공에는 안과 밖이 없다. 안과 밖을 느낄 수도 없다. 그런데 그 허허벌판에 한 채의 오두막이라도 지어서 그 안에 들어가면 이제는 집안과 집밖이 구별이 된다. 허공은 안과 밖이 없는데도 단지 작은 오두막으로 인하여 허공은 안과 밖으로 구별되어 들어오지 않는가?


두 번째 문은 자기동일성(自己同一性)이다.

어린 아기가 태어나며 이름을 지어준다. 갓 태어난 아이들은 자기 이름이란 것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 이름과 아기 그 자체는 분명 다르다. 부모들은 그 이름을 반복해서 그 아기 이름을 부른다. 그러면 아기는 반복되는 그 이름을 통하여 그 이름을 자기인 줄 알게 된다. 이름과 자기를 동일시하게 된다. 조금 크면 거울을 보게된다. 어제 본 같은 얼굴이 오늘의 거울 속에 비취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처음에는 거울 속의 자기얼굴을 자기 얼굴인줄 모르고 거울 속을 얼굴을 잡으려 한다. 그러나 머지 않아 그 거울 속의 아기가 바로 자기라는 느낌을 가진다. 거울 속의 그 아기는 다름 아닌 자기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그는 이제부터 하나의 연속성을 느낀다. 어제도 오늘도 거울 속의 그는 같은 얼굴이다. 모든 것은 변해간다.

그러나 그기에 변하지 않는 것은 한가지가 있다.

<자기>라는 이미지다. 이것이 에고가 들어오는 두 번째 문이다.


불교도라면 출가인이든 재가인이든 간에 한 두개의, 법명(法名)을 갖고 있다. 자기에게 부여된 법명은 시간이 지나면 자기를 대변하게 되고 자기와 동일시 된다. 그런데 왜 이런 풍습이 만들어졌는지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이는 이름이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자각시키기 위해서이다. 이름이란 가변적이며, 언제 어디서라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출가인들에게는 더 큰 의미가 숨어 있다. 왜냐하면 세속의 이름은 자기와 동일시되고 있기 때문에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세속적인 모든 관념을 벗어나라는 의미가 숨어 있는 것이다. 또한 자기의 실체가 고정된 것, 확정된 것이 아니라는 집착을 버리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름이란 하나의 기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기 위함인 것이다. 개명이나 법명을 통하여 에고를 벗어나라는 메시지를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세 번째 문은 자존심이다.

이는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연결되어 있다. 애가가 웃으면 칭찬한다. 아기가 걸음마를 시작하면 잘한다고 칭찬하다. 처음에는 표정도 어색하고 잘 넘어지지만 주변의 반복되는 칭찬소리에 그 일을 반복한다. 그리고 마침내 걸음마를 한다. 그리고 느낀다. <~을 할 수 있다>는 이 자신감을 가질 때 이는 에고가 들어오는 세 번째 문이 된다.


네 번째 문은 자기확장 또는 자기소속감이다.

 <나의 집>, <나의 아버지>, <나의 학교>, 그는 <나의~>라는 소유격의 영역을 넓히기 시작한다. 아이는 장난감에 관심이 없다가도 다른 아이가 집으려들면 <내 것>임을 주장한다. <나의 것(mine)>은 <나를(me)>가리키고, <나를(me)>는 가리키는 것은 <나(I)>라는 생각을 낳는다. 소유의식이 자아의식을 낳는 것이다. 똥차를 타고 호텔문 앞에 세워 보라. 호텔보이가 쳐다보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데 캐디락이나 적어도 그랜저 정도의 고급 차를 타고 간다면 그 호텔보이는 상전 모시듯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맞이할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큰 차, 더 값비싼 차를 선호하게 된다. <나의 것>을 통해서 <나>를 확장해 나가는 것이다. <나의 것>을 통해서 <나>라는 에고를 강화시켜 나가는 것이다.


다섯 번째의 문은 자기 이미지다.

아이는 칭찬을 받을 때 그 인정받은 것을 지속하려고 한다. 그러나 비난이나 꾸지람을 들을 때 자기를 인정시키려고 하는 다른 행동이 나온다. 그것을 우리는 반발심이라고 한다. 여기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그러나 문은 하나다. 첫째 그들의 칭찬을 받고 "나는 좋은 아이다."라고 느끼는 것이다. 그들의 칭찬을 받을 수 없을 경우 어린아이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렇다면 나는 생각이 있다. 내가 누구인지를 보여주겠다." 그 이후부터 그는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기 시작한다. 그는 닥치는 데로 부수고 깨트리기 시작한다. 그들이 좋아하지 않는 행동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생각한다. "자, 부모들이여, 나를 알아보겠지요.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보겠지요. 당신들은 나를 거부하지 못할 것입니다." 좋은 아이와 나쁜 아이는 이렇게 해서 생겨나는 것이다. 성자와 죄인도 이런 식으로 생겨나는 것이다.


여섯 번째의 문은 지식과 이성(理性)이다.

어린아이는 <왜>라는 이유를 배우기 시작한다. 모든 논쟁은 <왜>로부터 시작한다. 배우지 않으면 기가 죽는다. 그래서 교수가 되고, 박사가 되고, 금매달리스트가 되고, 우등생이 되려고 아등바등하는 것이다. 모든 논쟁은 경쟁을 함으로서 <왜?>에 대한 답을 풀 수 있기 때문이다. 경쟁은 지식이 필요하다. 지식이 떨어지면 남에게 떨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식은 이성(理性)을 배양하고, 이성은 그자신의 에고를 강하게 뒷받침해 준다. 그럼으로 이성(理性)은 에고의 강한 후원자이다. 배웠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을 보라. 그들은 모두 "나는 누구누구"라고 내세우고 있지 않은가? 저들의 이면에는 지식이라는 것이 에고를 깊이 떠받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일곱 번째의 문은 세속적인 욕망이다.

세속적인 욕망이란 불굴의 노력, 인생의 목표, 야망, 입신출세, 미래에 대한 꿈 등등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에고가 들어오는 마지막 문이다. 유명해진다는 것은 자기의 에고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이유 없는 도둑의 살인,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지존파의 살인자들”과 같이 단지 신문이나 텔레비의 톱뉴스로 부각되는 것을 바라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유명해졌다고 여기는 것이다. 유명인사를 찾아가서 악수한번 하고, 노인정에다 라면 몇 박스 들여 내밀어 놓고서는 사진 찍기 바쁜 사람들, 이 모두가 유명해지려는 자아의식의 발동이 아니겠는가?


(2)집제(集諦)의 지(智)는

<인(因)>, <집(集)>, <생(生)>, <연(緣)>의 의미를 아는 것이다.

번뇌의 업을 관찰하는 지혜로 첫째 번뇌업은 장래의 고통의 결과(苦果)를 가져올 원인이 될 종자와 같다고 관찰하는 것이니 이는 인(因)의 행상이 된다. 그리고 그 번뇌의 업은 능히 평등하게 그 결과를 집합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관찰하는 것이 집(集)의 행상이다. 예컨대 거지가 도둑질하든 부자가 도둑질을 하든 그 도둑질의 죄과는 같다는 것이다.  또 번뇌 업은 나고 죽는 삼유의 과보를 이끌어 내는 작용을 한다고 관찰하는 것이 생(生)의 행상이다. 거지가 죽든, 대통령이 죽든 그 지은 업에 육도의 세계를 태어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그럼으로 번뇌의 업은 고과(苦果)에 대하여 연(緣)이 되어서 고의 결과를 이루게 된다. 이렇게 관찰하는 것은 연(緣)의 행상이다.


(3)멸제(滅諦)의 지(智)는

<멸(滅)>, <정(淨)>, <묘(妙)>,< 리(離)>의 의미를 아는 것이다.

열반의 진리를 관찰하는 지혜로서, 열반의 본체에는 일체의 물듦과 때묻은 것을 다 없애어 청정하기 때문에 멸이 된다. 이를 관하는 것을 멸(滅)의 행상이라 한다. 열반의 진리는 일체의 탐진치 삼독이 다쉬고 그쳐서 그지없이 깨끗하다고 관찰하는 정(淨)의 행상이다. 열반의 진리는 일체의 내우(內憂)가 없다고 관찰하는 묘(妙)의 행상이 있고, 열반의 진리에는 일체의 외환(外患)을 여의었다고 관찰하는 이(離)의 행상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묘(妙)란 지극한 환희라는 뜻이다. 내우(內憂)란 생각으로 짓는 속알이 근심을 말하고, 외우(外憂)란 일체 경계를 통한 근심을 말한다.


(4)도제(道諦)의 지(智)는

<도(道)>,< 여(如)>,< 행(行)>, <출(出)>의 의미를 아는 것이다.

무루의 성도(聖道)를 관찰하는 행상으로서, 무루지(無漏智)는 범부로부터 성자에 나아가는 진리의 길이라고 관찰하는 도(道)의 행상이 있고, 무루지는 여여한 진리에 계합하는 길이라고 관찰하는 여(如)의 행상이 있으며, 무루지는 곧 열반에 나아가는 행이라고 관찰하는 행(行)의 행상이 있으며, 무루지에 의해서 생사의 근심을 영원히 뛰어넘는다고 관찰하는 출(出)의 행상이 있다. 무루지(無漏智)란 진리를 증득(證得)하고 모든 번뇌를 여읜 청정한 지혜를 말한다.


4.사성제의 메시지

가. 고성제의 메세지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도 고통이요, 갖고 싶은 것을 갖지 못하는 것도 고통이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도 고통이요, 밉고 보기 싫은 사람과 함께 하는 것도 고통이니 인생 자체가 고통이다. 삶이 이와같은 고통으로 점철되니, 삼계는 고통의 바다(一切皆苦 三界苦海)인 것이다. 이렇게 삶이 고통이요, 현실의 인생이 고통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고성제는 무엇을 암시하고 있는가?

 

이는 집착으로 인하여 야기되는 고통스러운 중생계의 상황을 직시하라는 의미다. 고통을 직시한다함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가령 육친 중에 누가 죽었을 때 가장 슬픈가? 그것은 분명 자식의 죽음일 것이다. 그런데 그 죽음은 거꾸로 생명의 존귀성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지 않은가? 죽음 자체를 직시할 때 그기에 생명의 존귀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장애인이나 불구자들을 보라. 그들은 보통 사람보다 더 생명의 애착을 느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장애와 불구를 통해서 온전한 육체에 대한 참 가치를 진실로 느꼈기 때문에 생명에 대해 더 애착을 느끼는 것이다. 그럼으로 고통을 직시하는 자는 괴로움을 참으로 아는 자이며, 괴로움을 참으로 아는 자는 슬픔이 어떤 것인 줄을 아는 자이며, 슬픔이 무엇인지를 경험한 사람은 또 기쁨이 어떤 것인지, 행복이 어떤 것인지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더 나아가 진실로 일체가 무상하고, 모든 존재가 영원한 존재 즉 실아(實我)가 없다는 사실을 직시한다면 고통이란 것이 어디 있겠는가? 나의 육체가 없는데 고통을 어떻게 느낄 것이며, <나>라는 것이 없는데 누가 고통을 느낄 수 있겠는가?

사람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이성적인 면에서 보다 감정적인 면에서 더 연유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감정적인 면에 치우치면 자기만이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그나마 조금 식견 있는 사람들은 “인생은 짧지만 하루는 길다”고 말하다. 인생이 짧다는 것은 무상을 어느 정도 머리로 이해하고 있다는 의미다.

그러나 하루가 길다는 말은 바램이 성취되지 않아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이는 이성적이 아니라 감성적인 면이 더 작용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욕망으로 인하여 무상(無常)과 비아(非我)의 도리를 바로 알지 못한 그릇된 우주관과 인생관에서 일어나는 주관적 가치판단이요, 망상인 것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상(無常)이란 무엇인가? 무상(無常)은 생멸변화요, 생멸 변화하는 것은 곧 시간적인 유한성(有限性)을 의미한다. 비아(非我)라는 것은 무체(無體)를 말하는 것이니 이는 공간적인 무한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중생의 고통은 이러한 유한성을 무한성으로 알고, 비아(非我)를 유아(有我)로 알기 때문에 그기에 고통이 있는 것이다. 이 미혹한 생각 때문에 사고(四苦), 팔고(八苦)가 있는 것이며, 삼계 육취가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 그 욕망이 바로 미혹의 업인(業因)이 되니 이는 곧 인과율(因果律)의 선악을 따르는 유루(有漏)의 세계가 되는 것이다. 유루의 세계란 선악(善惡), 미추, 증애(憎愛)가 있는 세계이며, 좋은 것(好)과 싫은 것(不好)이 교차하는 세계인 것이다.

그럼으로 이런 유루의 세계를 직시함으로서 청정(淸淨)무구(無垢)한 무루(無漏)의 세계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현실에서 삶이 고통스러운 것은 살고자 하는 맹목적인 본능의 발동력이 인(因)이 되어 미혹(惑)으로 시작한다. 그리하여 이 미혹으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행위를 지으니 이것이 조연(助緣)이 되어 갖가지 현실적인 고(苦)가 발생되는 것이다. 이 혹업(惑業)의 고(苦)로 말미암아 생사의 윤회가 성립되는 것이니 이것은 곧 연기요 인과의 법인 것이다. 그럼으로 인(因)이 선(善)하면 결과가 즐겁고 좋은 결과를 낳을 것이고 인(因)이 악하면 결과가 고통스럽고 해가 된다는 것은 부처님이 인연법을 통하여 말씀하시지 않았더라도 자명한 사실이다.

 

인(因)은 같은데 어떤 사람은 부귀영화를 누리고 어떤 사람은 엄동설한에 차가운 지하철역 대합실 등에서 끼니를 굶으며 고통스러운 밤을 보내야 하는 것은 왜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이는 인간이 평등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전생에 지은 혹업(惑業)이 제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과거의 좋은 업은 현세에서 받고, 현세에서 지은 업은 내세에서 받을 것이다.

 

고성제의 원인을 집성제라 했다. 집(集)이란 쌓이고 모여서 일어난다는 뜻이다. 생사의 과보는 단지 하나의 원인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숫한 인연이 쌓이고 모여서 그렇게 과(果)를 불러오는 것이다. 그럼으로 비록 현세에서 고통을 받지만 많은 선업(善業)을 쌓으면 현세에 받지 못하더라도 내세에 받을 것이고, 현세에서 악업을 쌓으면 그 악업대로 그에 상응하는 과보를 언제간은 받게 될 것이다.

 

모든 불행과 행복은 <나>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있기 때문에 욕망이 일고, 욕망이 있기 때문에 업이 발생한다. 그럼으로 <나>라는 것에 집착하면 그 욕망으로 사고(四苦)와 팔고(八苦)에 갇혀 고통을 받을 것이고 <나>에 대한 집착을 끊으면 무애(無碍)하여 자유와 행복을 얻을 것이다.


사고(四苦) 팔고(八苦) ― 이는 현실적인 것으로 분명한 사실임으로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내용이다. 그런데 고(苦)란 무엇인가?

 

고(苦)의 원어는 duhkha 이다. 이 말은 khan과 duh라는 두 단어가 합쳐진 복합어로서 khan은 공혈(孔穴; 구멍, 틈이라는 뜻)을 의미하는 말로서 외계와 접촉하는 감각기관을 가리키는 말이고, duh는 나쁘다는 의미를 지닌 말이다. 이두 단어가 합쳐져서 '손상(損傷)된', '오염(汚染)된' '조화가 깨어진' 상태의 감각기관을 의미하는 것이 곧 고(苦)의 의미가 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부조화(不調和)한 곳에서는 항상 심리적인 갈등 즉 고(苦)가 존재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苦)는 어느 특수한 사람만이 겪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현실을 직시(直視)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고통을 직시함으로 고통을 벗어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직시하라는 말인가?

첫째, 모든 존재는 주어진 그대로서는 

     1)어려움이 있고,

     2)제한이 있으며,

     3)불편하며,

     3)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모든 불행은 그대가 정상적인 궤도(常軌)를 벗어나 어디론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메시지라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고(苦)는 몸과 마음의 병이다. 그럼으로 몸과 마음에 병이 발생되었다면 이는

『행동하라, 방법을 바꾸어라. 생활양식을 바꾸어라. 어딘가 그대는 본질에 어긋나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임을 자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우리의 기대가 배반당한다는 점에서 중생의 삶은 총체적으로 고(苦)가 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어린이가 성장하여 청년이 된다는 것은 기쁜 일이지만 동시에 등이 굽고 흰머리가 날리는 노인이 된다는 것은 슬픈 일인 것이다. 또한 가난이 고통스러워 부자가 되길 원하지만 부자가 되어서는 이를 지키기 위해서 더 큰 고통이 따른다는 것은 분명 우리의 기대가 기만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 삶에 대한 기대를 버려라. 삶에 대하여 기대한다는 것은 더 많이, 더 좋은 것을 소유하려는 의식 외에 달리 그 무엇이 아니다. 행복은 소유를 버리고 지족함에서 비롯된다. 소유보다는 무소유를 즐기는 법을 배워라. 큰 것은 큰 것대로 행복이 있을 것이고, 적은 것은 적은대로 행복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행복 그 자체는 크고 작음이 없다. 그럼으로 행복의 첫걸음은 지족(知足)이 된다. ‘지족’이란 머리의 문제가 아니라 가슴의 문제다. 이를 체증(體證)하도록 하라. 성경은 “구하라, 그러면 얻을 것이다.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행복과 진리는 구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두드린다고 열리는 것이 아니다. 자연스러워져라. 무소유가 되라. 모든 기대를 버릴 때 그기에 행복이 따르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공(空)삼매와 무상(無相)삼매를 말씀하시고 마지막으로 무원(無願)삼매를 말씀하신 것도 바로 이런 의미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넷째 세상에는 절대적으로 자주(自主)라는 것은 적어도 주어진 세간에 존재하는 한 결코 바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요구가 그것을 끝내 구하려고 한다면 바로 그러한 존재가 고(苦)가 되는 것이다. 그럼으로 고정된 것, 불변한 것을 구하지도 바라지도 말라. 모든 것은 변하고 인연 따라 오고 간다. 사라지는 것을 슬퍼하지도 말고, 부서지는 것을 애달아 할 것도 없다.

사라지고 부서지는 것은 <부분>이지 <전체>가 아니다. 헤어지고 만남은 <부분>이지 <전체>가 아니다. <나>와 <너>는 부분이지 <전체>가 아니다. 그럼으로 <나>와 <너>에 집착하지 말라. <전체>가 되라. <나>와 <너>가 아닌 <우리>가 되라. <나>와 <너>를 초월할 때 그기에 고통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럼으로 고성제가 주는 메시지는,

(1).우리는 고통을 받고 있으며, 그리고 그것을 알고 있다.

(2).우리는 불행의 원인을 인식하고 있다.

(3).우리는 불행을 극복하는 방법이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4).우리는 불행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떤 생활규범을 따라야 하며, 현재의 생활관습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 집성제(集聖諦)의 메시지


집성제에서 고(苦)는 욕망과 집착에서 생기는 것이고, 이 욕망과 집착은 무지(無知) 또는 무명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중생들은 무지로 인하여 자기가 아닌 것을 자기와 동일시한다. 그러나 집착은 인간 고(苦)의 원인이 될 수밖에 없다. 부처님께서는 고의 근본원인을 육체에서 구하지 않고 내면적인 번뇌, 즉 무명에 있다고 하셨다. 무명에 의하여 움직이는 것은 무명에 의한 타율적인 행동임이 틀림없다. 위대한 선사(禪師)나 조사들이 모두 자주(自主)를 부르짖는 것도 바로 연유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고의 원인을 무지라고 지적하시고 그에 대한 합리적인 수행방법으로 도성제(道聖諦)를 말씀하신 것이다.


인생이 고통스러운 원인은 번뇌 특히 갈애로 야기된 업에 연유한다. 갈애와 업은 한마디로 인간의 욕망인 것이다. 그런데 욕망은 여러 가지 유형으로 일어난다. 따라서 고통도 그에 따라 여러 유형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고통의 강도나 지속되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고통이란 점에서는 같다. 서양에서는 술이 만취한 사람을 <돌과 같이 되었다(STONED)>라고 표현한다. 돌은 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의식이 없는 것은 시체와 같이 굳은 것이다. 이는 인간의 단계도 식물의 단계도 아니다. 마지막 단계다. 이에 대표되는 것 중 하나가 만트라(mantra: 주문)의 암송이다. 아무런 자각 없이 만트라를 계속 암송할 때 그것은 술과 같이 무의식을 가져다준다. 매우 깊은 쾌락을 느낄 수도 있다. 사이비 종교집단에서는 이와 같은 수단으로 사람들을 유혹하여 환희에 빠트려 재물을 착취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꿈속에 느낌과 다르지 않다. 이는 환희가 아니다. 이를 계속하면 어떤 술보다 더 강한 마취제 작용이 일어난다. 그대는 내면은 완전한 무의식에 빠져 돌과 같이 된다. 또 다른 하나는 마약이 아니면서 마약과 똑같은 효과를 내는 것이 바로 권력이나 특권이다. 정치가는 권력이나 특권에 취해 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술과 같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권력을 얻게되면 그는 더 이상 제정신이 아니게 된다. “절대권력은 사람을 타락시킨다”고 어느 철학자가 말했듯이 권력은 사람을 마취시켜 타락시킨다. 권력은 일종의 마약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쾌락을 주고 그 대가로 그대의 모든 의식을 앗아간다. 그리고 끝내는 그대의 육신까지도 앗아간다. 고통의 악순환에 떨어지게 된다.

 

마약의 효과를 나타내는 또 다른 것은 재물과 돈이다. 부자는 절대로 자아를 돌아볼 여유나 필요성을 갖지 않는다. 그럼으로 예수도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더 어렵다”고 한 것이다. 부자들이란 욕망이란 굴레 속에 갇혀 무의식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또한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일을 하지만 자기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다. 완전한 무의식에 빠져 있다.


어느 여인이 간호사로 20여년을 근무하다가 결혼을 했다. 결혼식을 마치고 신혼여행 중에 복통이 일어났다. 직업이 간호사라 주사기와 몇 가지 상비약은 항상 준비하고 다녔다. 그런데 갑자기 신랑이 복통을 일으키자 무의식중에 주사기를 꺼냈다.

그러나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래서 호텔보이를 불러 이렇게 물었다.

 “주사를 어떻게 놓지요”


애욕과 사랑은 미끼와 같다. 자연이 진정으로 요구하고 있는 것은 종족의 번식이다. 그러나 인간은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면 인간은 번식할 수 없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은 사랑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사랑은 곧 자연이 만들어 낸 속임수다. 그럼으로 생리적이거나, 본능적인 속임수에 희생되면 고통이 된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그것을 의식하면서 사랑할 수 있다면 그때는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

 

어느 영화에선가 외계인들이 서로 사랑을 나누는 방식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 것을 본적이 있다. 지구인들은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남녀간의 육체적 사랑을 나누지만 그들 외계인은 육체가 아니라 텔레파시로서 서로 사랑을 나누고 희열을 느끼는 것을 보았다. 육체적인 교섭은 고통과 희열이 함께 이루어지지만 그들은 사랑 속에서 고통대신 희열만을 느끼고 있었다. 진정한 사랑은 고통이 따르지 않는 사랑이다. 그때는 사랑 그 자체가 분열되지 않은 통합적인 힘이 된다. 그러면 사랑은 바로 그것이 자각이 된다. 그리고 사랑 속에서 그대는 더욱더 깨어있게 되며, 상대방을 이용하거나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돌보아 주고 나누어 갖게 된다. 상대방에게 자유를 주며 상대방의 자유를 통해서 그대 자신을 자유롭게 한다. 사랑을 하면서 깨어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깨어 있는 자는 해야할 일을 하면서도 매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때 그는 이 세상 속에 살면서도 이 세상의 일부가 되지 않으며, 이 세상은 그 속에 있지 않게 된다는 뜻이다. 사랑은 소유가 아니며, 행위가 아니다. 욕망은 소유이며 행위자가 있게 된다. 갈애는 바로 욕망이다. 욕망 속에는 “나”가 있기 때문에 고통이 있는 것이다.


고통은 번뇌다.

팔리의 <청정도론>에서는 번뇌란 ‘스스로 오염된 것, 또는 상응법을 오염시키기 때문에 번뇌다.'라고 했다. 이것은 번뇌 즉 kilea 라는 말을 ‘물들이다. 더럽히다.’ 라는 말고 같은 어원에서 파생된 말인데 범어의 klea는 kli(괴롭히다)에서 비롯된 말이다. 또 번뇌를 '염오의(染汚意, kliamanas)'라고 한다. 이것은 '물들이다'라는 의미다.

마음이 고통을 받는 것은 일체 경계에 스스로 물들고 오염되고 오염시키기 때문이다. 그 문은 바로 육근(六根)이다. 그럼으로 마음이 밖으로 나가려고 할 때 그 문을 닫아야 한다. 욕망의 출입문에 빗장을 쳐야하는 것이다.


밖으로 향하는 우리 마음의 문은 왜 닫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걸까?

마음이란 매우 교활하고 영리하며 논리적이기 때문이다. 매우 훌륭한 합리주의라고 할 수 있다. 마음은 무엇을 하고 싶어할 때는 항상 이유를 만들어 낸다. 그러나 모든 이유는 거짓이다. 내면 깊숙이 들여다보면 그것들이 이유가 아니라 하나의 변명임을 발견할 수 있다.

 

사람들은 화를 내고 싶어할 때 변명할 구실을 찾는다. 그 변명은 이유가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속여 그것 때문에 자기가 화를 냈다고 한다. 그러나 변명은 변명일 뿐이다. 사람들은 직장의 상사에게 낼 화를 집으로 돌아와서 아내에게 풀어버린다. 상사에게 화를 낼 수는 없다. 자기가 손해를 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한다. “상사에게는 참아야 하겠지. 그래야 지금처럼 직장 구하기도 힘든 처지에 해고당하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상사 앞에서는 미소를 지으며 분노를 참는다. 그런 다음 집으로 돌아와서는 다른 어떤 사람에게 그 분노를 던진다. 아무런 손해도 입지 않고 분노를 던질 수 있는 더 약한 자를 찾아야만 한다. 그래서 아내에게나 아이들에게 화를 내는 것이다.

 

요즘은 여성의 천국시대가 되어가고 있다. 반면에 남편들은 모두가 공처가들이 되어가고 있다. 함부로 화를 냈다가는 언제 법원으로부터 접근금지명령이나 구치소 신세를 질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화를 내도 크게 뒤탈이 없는 것에다 화를 푼다. 개나 고양이에게도 함부로 화풀이를 하지 못한다. 잘못하면 미개인이나 동물학대죄로 쇠고랑을 찰지도 모른다. 그래서 생명이 없는 값싼 유리컵이나 낡은 라디오같이 부수어져도 별 지장이 없는 것에다 화를 낸다. 때로는 차를 미친 듯이 몰면서 발에다 분노를 몽땅 집중시켜 액셀레이터를 밟기도 한다. 그럼으로 화풀이를 대신하고 있다.

 

심리학자들은 자동차 사고의 거의 50%가 화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한다. 자동차 사고는 교통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의 내적인 교통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50%라는 것은 너무도 커다란 비율이다. 화가 나 있을 때 사람들은 더욱더 속도를 낸다. 분노를 속도감으로 풀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서도 이렇게 생각한다. “바람이 상쾌하군. 그리고 아침 공기는 더 상쾌해. 이 상쾌한 분위기에서 신나게 달리는 드라이브를 멋있는 일이야.”

사고는 그렇게 일어나는 것이다. 고통은 그렇게 야기되는 것이다.


그럼으로 마음이 바깥 세계로 나가려고 문을 만들 때 즉시 그 문을 닫아야 한다. 마음은 바깥 세계로 나가려고 매우 교활한 방법을 쓴다. 그럼으로 욕망을 없애려면 마음이 어디를 통해서 바깥 세상으로 도망치려고 하는지를 지켜보아야 한다.

프로이트는 마음의 모든 작용은 연상(聯想)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연상, 바로 그것이 ‘문’인 것이다. 어떤 개를 바라본다고 할 때 이 개만으로 그쳐야 한다. 더 이상 나갈 필요가 없다. 그러나 갑자기 그대는 어릴 적에 잘 알았던 개를 생각해 낸다. 그 개는 어떤 소녀의 것이었다. 그대는 그 소녀와 사랑에 빠진 일이 있었다. 이제 연상 작용이 계속 비약된다. 이제 개는 그 이상 그곳에 없다. 개는 단지 하나의 열쇠 역할을 한 것이다. 연상작용은 더 진행되어 나간다. 그대는 그 소녀를 사랑했으나 그녀를 소유하지는 못했다. 그때 모든 다른 종류의 소유라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모든 다른 소녀들을 생각해 낸다. 커다란 끈이 이어져 나간다. 한가지 일에서 다른 것으로 계속해서 비약해 간다. 마음은 광란의 미로(迷路)로 움직여 들어간다. 끝없이 뻗어간다. 한가지 생각이 다른 생각을 끌어오고 그 다른 생각이 또 다른 생각을 끌어오고 …… 이런 식으로 수백 수천만의 생각이 연결된다.


마음의 연상작용은 복잡하다. 그것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뻗어간다. 욕망이란 바로 이런 연상작용으로 업을 짓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된다. 연상의 여행은 끝이 없다. 연상은 하나의 문이다. 그 문을 발견해야 한다. 문은 많이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똑같은 문으로 들어와서는 언제나 똑같은 고통을 당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것이 반복되는 것인지도 알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계속해서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문을 닫아라. 처음에는 매우 힘들 것이다. 마치 죽음과 같이 느껴질 것이다. 마음의 문을 닫는다는 것은 죽음과 같다. 그러나 그것은 죽음일 뿐 아니라 부활이기도 하다. 십자가이며 동시에 부활인 것이다. 낡은 것이 죽고 새것이 태어나는 것이다. 망심이 죽고 진심이 태어나는 것이다. 어둠이 그치고 빛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는 그대 어떤 행위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단지 그대가 그대 중심에 서서 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밖으로 향한 마음의 문을 닫는다는 것은 그대가 그대 본연의 자리에 뿌리를 내리라는 의미다. 그러면 아무런 문제도 없게 된다. 그대는 다시 세상으로 돌아 올 수도 있다. 그러나 완전히 달라진 상태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때 세상이 그대를 방해하지 않는다. 아무런 문제도 없게 된다. 눈과 귀를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고,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나 다 할 수 있다. 일단 그대의 존재에 뿌리를 내리고 중심을 잡아 정착하게 되면 누구도 방해하지 않는다. 그대는 세상에 남아 있어도 세상은 그곳에 없다. 어두운 밤길을 걸어도 내면의 빛은 그대를 떠나지 않는다. 이제 거기에 외적인 어둠으로 생기는 문제는 없을 것이다. 거기에는 오로지 환희만이 있을 것이다.

3.멸성제(滅聖諦)의 메시지


멸(滅)은 적멸(寂滅)을 뜻한다. 적멸은 일체 고통이 사라진 열반의 세계다. 이런 열반의 세계는 낙원이요, 이상향의 세계다. 사람들은 열반이 어디에 있는가? 하고 묻는다. 현대적으로 말하면 다소 뉘앙스가 다르긴 하지만 신의 세계가 어디에 있는가하는 질문과 같다. 그렇다면 우리가 말하는 그 신(神)은 어디에 있는가? 신은 <안> 과 <밖>이다. 오직 신밖에 없기 때문이다.『신은 존재한다.』라는 이 말은 쓸데없는 말이다. 신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 신은 <존재> 그 자체이다.『집은 있다』―이렇게 말할 수 있다. 집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집의 경우는 <있다>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신은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오직 신밖에 없기 때문이다. 신은 언제나 있어왔고 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은 <있음(isness)>, 그 자체다. 신은 존재, 그 자체다.

 

열반의 세계란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법성게>에서 “일찍이 변동한 적이 없는 것을 이름하여 부처라고 한다(舊來不動名爲佛)”라고 한 것도 바로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선사들은 ‘중생이 부처요, 부처가 중생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나, <금강경>에서 “일체 중생을 다 열반에 들게 하드라도 단 한 사람도 구원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이다. 낙원이 따로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처가 어느 깊은 별궁에 있는 것이 아니요, 열반이 하늘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현대인들은 굳이 <신>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는가? 우리는 <신>이란 이 말을 아주 상징적으로 사용하고 있다.『신은 있다』고 말할 때 그것은『모든 존재는 영혼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뜻이다.『존재는 결코 죽지 않았다.』는 뜻이다. 경전의 표현을 빌리자면 『모든 존재는 불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 불성은 불생불멸이다.』라는 말이 된다. 따라서 이는 사랑으로 충만하며, 자비, 자각, 그리고 양심 등이 그것과 밀착되어 있다는 뜻이다. 존재에 대한 물음이 가능하며 그 반응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존재와의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대는 그것을 <너>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리고 여기 기도가 가능하게 된다. 염불이 가능하게 된다. 그리고, 사랑이, 자비가 가능하게 된다.

 

이 때문에 우리는 <신>이란 말을, 불교에서는 <열반>이란 말을 쓰고 있는 것이다. 존재는 살아 있는 꽃이다. 불성은 살아 있는 꽃이다. 결코 죽은 바위와 같지 않다. 그것은 그대에게 응답한다. 그것을 사랑한다면 그것으로부터 사랑이 그대 쪽으로 넘쳐흐를 것이다. 그대가 그것 쪽으로 간다면 그것 또한 그대 쪽으로 올 것이다. 그대가 그것을 찾아 헤맨다면 그것 또한 그대를 찾아 헤맬 것이다. 존재는 결코 무관심하지 않다. 불성은 두루 하지 않은 곳이 없다. 그대가 존재를 사랑하게 되면 존재도 그대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존재는 성스럽다』『신은 존재한다』『사사물물(事事物物)이 곧 부처다』라고 말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를 기억하라. 이런 말은 진리를 시적(詩的)인 방법으로 말하는 것이다. 사실적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시적 표현이다. 그리고 종교는 바로 이 존재와의 로맨스이다. 그렇다. 그것은 사랑 쪽에 가깝다. 결론을 얻으려고 논쟁하는 것보다 사랑 쪽에 훨씬 더 가깝다. 그럼으로『신은 <안>이면서 <밖>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럼으로『불성(佛性)은 원륭(圓隆)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구도에의 이 길은 <안>으로부터 시작해야한다. <안>에서 신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밖>에서 결코 신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대 자신 속에서 그를 보지 못한다면 저 나무 속에서, 별 속에서, 새들 속에서 결코 그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 그대 자신 속에서 그를 느낄 수 없다면 나무나 바위 속에서 어떻게 그를 느낄 수 있겠는가? 그대 존재의 중심축(center)은 신에게 가는 가장 가까운 문이다. 그 문을 통하여 들어가지 않는다면 어떤 곳으로도 결코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신은 <안>이면서 동시에 <밖>이다. <안+밖>이다. <안팎>이다. 오직 신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에게로 가는 여행은 그대 존재의 한가운데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첫째 <안쪽>을 보아야 한다. 첫 시작부터 밖에서 신을 찾는다면 그대의 신은 한갓 이미지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거짓일 뿐이다. 그럼으로 <금강경>에 이르길『80종호로도 나를 구하지 말고, 32상으로도 나를 찾지도 말며, 소리로써도 나를 구하지 말라. 이는 모두 삿댄 짓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이 점을 깊이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신을 그대 안에서 보지 못하고, 밖에서 본다면 그것은 꿈이다. 그대 감정의 투사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으로 이런 식으로는 시작하지 말라. 여행의 출발은 눈을 감고 해야 한다. 그리고 두 눈을 뜨고 여행을 끝내야 한다. 첫째 명상 속에서 눈을 감아야 한다. 자기자신 속으로 깊이깊이 들어가야 한다. 문득 그대 영혼이 깊은 잠에서 깨었을 때 그대 존재의 한 가운데에 도달했을 때, 그(神)가 어디에 있는 지를 알았을 때 두 눈을 떠야 한다. 그리고 모든 곳에서 그를 발견해야 한다. 도처에서 그를 만나야 한다. 어느 밀실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다.

 

그럼으로 <안>에서부터 시작하라. 밖으로 신에 대한 관념을 투사하지 말라. 신이 있는지 없는지 그대는 모른다. 열반이 있는지 없는지 그대는 모른다. 그대는 오직 신이라는 이 단어만을, 열반이라는 이 단어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신을 이야기하는, 열반을 이야기하는 그런 성직자들이나 큰스님들(?)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그들이 그대 관념 속에 심어 준 관념으로서의 그 신만을, 그 열반만을 알고 있을 뿐, 그대가 크리스찬이라면 예수를 관념화시키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며, 그대가 불교도라면 부처님을 관념화시키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 관념의 투사현상으로써 예수나, 부처를 보기는 또한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환각이다. 노이로제 증상에 지나지 않는다. 마음은 얼마든지 멋진 환각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대 마음이 만들어 낸 이 환각 앞에서는 환각 아닌 실체조차 무색해져 버린다. 그러나 매일 밤 꿈속에서 그대는 이런 짓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대 마음은 환각을 만들어 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환각을 만들어 낼뿐만 아니라 그것들이 실체인 것처럼 보이게 하기도 한다. 매일 밤 그대는 꿈을 꾼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그것은 현실이 아니라 꿈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밤이 되면 또 꿈을 꾸게된다. 그리고 그것이 꿈이라는 것을 새까맣게 잊어버린다. 그것은 현실인 것처럼 생각한다. 그것이 설령 이치에 맞지 않는 현실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이 꿈이라는 것을 그대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꿈속에서 그대는 아내와 이야기하고 있다. 그때 갑자기 아내가 말(馬)로 변한다. 그런데도 그대 마음속에는 전혀 의심이 일어나지 않는다. 꿈속에서는 이와 같이 그것이 꿈이라는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다시 아침이 되면 그대는 꿈에서 깨어난다. 모든 것이 꿈이었다는 것을 알고 웃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밤이 되면 그대는 꿈을 꿀 것이다. 그 꿈의 희생자가 될 것이다.

 

이것이 꿈에 대한 마음의 기능이다. 영사기 기사로서의 마음의 기능이다. 꿈에 대한 마음의 이 기능은 극장의 영사기 기사의 기능과 같다. 그대는 영사기 기사를 볼 수 없다. 그대 앞에는 스크린이 있다. 텅 빈 스크린의 흰색이 있을 뿐. 그때 그대 뒤에서 기사가 필름을 돌린다. 스크린에는 갖가지 환각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환각은 빛과 그늘의 그림자일뿐. 그대는 이 환각 때문에 넋을 잃는다.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면서……. 그대는 실재다. 스크린에 나타나고 있는 환각은 거짓이다. 그러나 그대는 지금 그대 자신을 완전히 잊고 있다. 스크린에 나타나는 환각을 실재처럼 믿고 있다. 그대는 알고 있다. 이 환각이 실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환각을 보는 순간 그만 까맣게 잊어버리게 된다.

 

극장에 가서 이를 시험해 보라. 좋은 명상이 될 것이다. 스크린에 나타나는 환각을 볼 때 이렇게 생각하라.『저것은 실재가 아니다. 저것은 환각이다……』그러나 잠시 후면 이를 까맣게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환각을 실재처럼 느끼게 될 것이다. 그대 자신을 잊어버리게 되면 꿈이 실재가 된다. 그대 자신을 기억할 때마다 이렇게 생각하라.『나는 실재다』 그리고 그대 자신을 흔들어 깨워라. 그러면 스크린의 환각은 실재가 아닐 것이며 그대 아닌 모든 것이 실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그대가 잠들면 그럴수록 거기 정비례하여 이 세상이 실재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잠에서 깨면 그럴수록 이 세상이 점점 더 비실재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이 세상이 비실재적이라면 그대의 그 관념은 무엇인가? 그대는 신을 투사한다. 그리고 지옥을, 천국을 투사한다. 이런 것들은 모두 그대 관념의 투사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대 영혼이 무의식적으로 됨으로써 그것들이 실재처럼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럼으로 도처에 있는 존재로서 그를 에워싸고 있는 존재로서 신을 생각하는 사람은 여행의 출발이 빗나간 것이다. 그가 도대체 무엇을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오직 스스로를 자기최면에 걸리게 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은 전의 꿈보다 훨씬 더 비실재적인 차원이다. 일종의 노이로제 증상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정신분석학의 개척자인 프로이트는『종교란 노이로제의 집합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했다. 생각해 보면 그렇다. 종교란 확실히 노이로제의 집적현상이다. 그러나 붓다는 예수는 결코 노이로제적이 아니었다. 붓다와 불교도의 차이는 무엇인가? 붓다는 그의 내부로부터 출발했다. 그러나 불교도들은 불교라는 그 관념으로부터 출발한다. 기독교도 마찬가지다. 예수는 그 자신의 존재 내면을 보았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보고 있다. 밖을 보고 있다. 이 점이 다른 것이다. 그럼으로 모든 것은 그대 내면에서 출발해야 한다. 밖을 향해서 구하지 말라. 밖에서 구하면 그대는 또 다른 노이로제 환자가 될 뿐이다.


4.도성제(道聖諦)의 메시지


인생은 필연이며 운명적인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인간의 삶은 숙명적이 아니다. 그럼으로

 

  사고의 씨앗을 뿌려 행위를 수확하고,

  행위의 씨앗을 뿌려 습관을 수확하고,

  습관의 씨앗을 뿌려 인격을 수확하고,

  인격의 씨앗을 뿌려 운명을 수확할 수 있다.


도란 지혜를 얻는 것이다. 지혜는 인격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각에서 이루어진다. <인격>과 <자각> 이 두 개의 말을 기억하라. 사회는 인격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부처님을 위시하여 동서양의 모든 위대한 성자들은 인격이 아니라 자각을 강조하고 있다. 인격이란 무엇인가? 인격은 자각의 외곽일 뿐이다. 그대의 의식이 깨어난다면 그대는 저절로 좋은 사람이 될 것이다. 여기 인격을 고치려고 억지를 쓸 필요는 전혀 없다. 그러나 자각이, 의식이 없을 경우 그대의 그 인격이란 무엇인가. …… 거짓이다. 그대 주위에 달라붙어 있는 거짓일 뿐, 성격은 진실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대를 속박할 것이다. 그대는 이것을 비껴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그대와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좋은 일이다.> 사회는 이렇게 말한다. 그래서 그대는 그 일을 한다. 전혀 내키지 않지만 하나의 의무로서. 그러나 속으로는 그 일과 전혀 반대되는 것을 하고 싶을 것이다. 속으로는 전혀 반대되는 짓을 할 궁리를 하면서도 겉으로는 그 일을 하는 체 하고 있다. 어떻게 전혀 다른 두 세계가 있을 수 있는가. 그대는 이중으로 속박된다. 이것이 소위 <인격>이다. 이 상태에서 인간은 극심한 분열을 일으킨다.

 

<이것은 좋은 일이다. 이 일을 하라. 이 일을 하지 않으면 그대는 나쁜 사람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그대를 위협한다. 그대는 두려워서 할 수 없이 그 일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대 마음속으로는 그것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대 자신을 따를 수는 없다. 왜? 두렵기 때문이다. 남들의 이목이 두렵기 때문이다. 두려움은 자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두려움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나약함뿐이다. 두려움은 그대를 약자로 만든다. 도의 길에서 멀어지게 된다.


자각의 길에는 3가지 단계가 있다.

 

하나는 자기자신에 대한 자각이다.

둘은 객관적인 이 세계에 대한 자각이다.

셋은 자기자신과 이 세계 사이에 끼어들어 올 환영에 대한 자각이다.

 

이 세 가지 길을 구체적으로 부연한 것이 바로 팔정도다. 팔정도란 바로 이 3가지 길을 8가지로 부연한 것이다.


그렇다면 팔정도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불교윤리의 목적은 인간의 말과 신체적 행동에 대한 자연스러운 정화에 있다. 이것을 계학(戒學)이라고 한다. 팔정도 가운데 세 가지 요소가 불교인의 행동을 규율하고 있다. 그 세 가지는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이다. 엄격한 선의 수행자는 적어도 오계(五戒)라 알려진 다섯 가지 근본윤리 개념들, 즉 살생하는 것, 도둑질하는 것, 부정하게 성적(性的)으로 탐닉하는 것, 거짓말하는 것과 마약이나 술과 같은 흥분과 부주의의 원인이 되는 것을 마시는 것을 금하는 것 등을 준수해야 한다. 선의 수행과정에서 수행자들은 성관계를 삼가고 순결을 지킬 것을 요구받는다.

이러한 행동계율은 불교인의 삶의 방법에 대한 디딤돌인 것이며, 또한 그것은 정신개발의 근본인 것이다. 선(禪) 혹은 정신집중에 전념하는 사람은 우리의 정신생활을 풍부하게 해주고 그것을 안정되게 하며, 고요하게 만드는 덕에 대한 사랑을 가꾸어야 한다. 이렇게 정신의 최고의 정화를 추구하는 자는 욕망을 태워 없애기 위해 진정한 금욕고행을 실천하여야 하며, 이렇게 생각하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다른 사람들은 해를 끼칠지라도 나는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며,

다른 사람들은 살생을 할지라도 나는 불살생자가 될 것이며,

다른 사람들은 그릇되게 재물을 얻는다 하더라도 나는 그러하지 않을 것이며,

다른 사람들은 음란하게 살지라도 나는 순결하게 살 것이며,

다른 사람들은 중상비방하고 험담에 빠질지라도 나는 오직 조화를 고무시키는 말과 좋은 말과 듣기 좋고 사랑이 충만하여 마음을 기쁘게 해주고 예의바르고 명심해둘만한 가치가 있고 시기에 알맞은 적절한 말들만 말할 것이며,

다른 사람들은 탐욕적이라 할지라도 나는 탐내지 않을 것이며,

다른 사람들은 사물을 그릇되게 파악할지라도 나는 사물을 완전히 올바르게 파악할 것이며, 또한 나는 강력하고도 겸손하며, 진실과 정직에 관해서는 확고하며 평화롭고 정직하고 만족하며 관대하고 또한 모든 것에 진실하게 대할 것이다.

그리고 또한 나는 언제나 진리를 완전히 알 수 있는 현명한 통찰력과 주의를 간직할 것이며, 덧없는 집착에 의해 움직여지지 않을 것이다.]


그럼으로 그는 결코 생각 없는 무리와 같이 노예처럼 행동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으로 부처님께서 설하신 행동계율은 단순한 부정적 금지가 아니라 선행에 대한 긍정이며, 인류의 복지와 행동을 위한 좋은 의도로 포장된 길인 것이다. 이러한 도덕원리들은 사람들 사이의 통일과 조화와 상호이해를 촉진시킴으로 해서 사회를 안정되게 만드는데 그 목적이 있다.


또한 계율은 삼매의 개발에 도움을 준다. 팔정도 중 마지막 세 가지 요소들, 즉 정정진(正精進)과 정념(正念)과 정정(正定)은 집중의 집단을 구성하고 있다. 또한 이것은 정학처(定學處)라고 불린다.

 

계율을 지킴으로서 정신적 수양을 실행하게 된다. 한적한 곳에서 불퇴전의 노력으로 마음을 한가지 문제에 집중 명상하여 자기 마음에 낀 불순한 것들을 씻어 없애고 점차 장애물을 극복함으로써 정신적 집중(定)을 얻게 된다.

 

지고한 정신의 집중은 지혜나 직관을 얻는 방법이 된다. 지혜는 팔정도의 첫 번째 원칙인 정견(正見)과 정사유(正思惟)로 이루어진다. 이것은 혜학(慧學)의 수련이라고 한다.

 

이 팔정도의 세 가지 수행법(三學)으로써 부처님의 가르침 속에 언급되어 있다. 이들 중 어느 것도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목적을 위한 방법인 것이다. 셋 중에 어느 하나도 다른 둘과 독립해서 적용할 수 없다. 세발 달린 솥이 그 중 하나의 다리라도 무너져버리면 땅에 쓰러지듯 이 셋은 서로 도와 작용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계(戒)는 절제된 행동으로서 정(定)을 증진시키며, 정(定)은 계(戒)에 의해 지지되어 많은 효과와 이익을 가져온다. 정(定)은 다시 혜(慧)를 정진시키니, 혜는 미망을 제거하여 생명을 여여하게 한다. 다시 말해서 모든 생명과 사물은 생멸을 지니고 있다고 보는 데에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점진적인 수련과 실천으로써 수행자는 모든 삿댄 것을 여의고 그것들을 제거함으로서 해탈에 이르게 된다. 해탈이란 모든 악의 근원이 되는 삼독(三毒: 탐진치)을 근절시키는 살아 있는 경험인 것이다. 삼독은 계정혜의 수련을 통해서 제거되는 것이다.

 

삼독심을 완전히 제거해 버림으로써 열반의 서광이 비치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그러한 상태는 언어를 초월한 고요와 사상을 초월한 금강과 같은 무애의 경지, 일체번뇌가 사라진 경지이며, 안전과 안락한 곳, 불멸의 영광, 적절한 행복, 그리고 어떤 것에 의해서도 흔들리지 않는 순수하고 측정할 수 없는 깊고 완전한 평안, 무상의 진리세계를 말한다. 이것이 바로 명상생활의 최고의 결과요 최고의 월계관이다. 이렇게 함으로서 생노사를 여의게되고 성스러운 청정한 생활을 여의게 되고 모든 것이 원만히 성취되어 더 바랄 것이 없어진다.

 

이렇듯 계정혜는 서로 떨어진 것들이 아니라 이미 밝힌바 있는 선(禪)의 길이기도 한 팔정도의 통합적 구성요소인 것이다.

  

인간의 마음속에 버릇, 번뇌들이 잠복해 있을 때 그것들이 잠재해 있고 숨어 있다고 말한다. 그것들은 만족되어지지 않는 한 잠복해 있다. 육감과 더불어 다섯 감각 기관은 필요한 양식을 눈에 보이는 물건, 소리, 냄새, 맛, 촉감과 정신의 대상물의 형태로 제공한다. 이 여섯 종류의 양식은 유쾌할 수도 있고 불쾌할 수도 있다. 어느 경우이던 이렇게 자극을 받으면 곧 표면에 나타난다. 이런 습벽의 표출을 발기(發起)라고 한다. 이렇게 습벽, 번뇌들이 눈을 뜨고 일어나면 그들은 달아나려고 출구를 찾는 경향이 있다. 만약 우리가 체계적인 정사유(正思惟)를 기울이지 못하고 표출된 습벽들을 진정시키지 못하면 이것들은 말이나 행동을 통하여 또는 이 두 가지 문을 다 통하여 달아나는데 이것을 난행 또는 부정업(不正業)이라 부른다. 이 숨은 습벽을 극복하고 습벽의 지배에서 마음을 해방시키는 세 가지 수단이 바로 계정혜이다.


인간은 계를 통하여 언어나 육체적으로 침착해지고 차분해지려하나 마음은 그렇지 못하다. 이는 정(定) 즉 삼매가 부족한 것이다. 계가 마음의 평정에 큰 도움은 주지만 마음을 컨트롤하지는 못한다. 현명한 주의력의 도움으로 삼매는 버릇이 밖으로 새어 나오는 것을 막음으로서 버릇의 두 번째 형태를 가라앉힌다. 그러나 삼매도 잠재해 있는 버릇은 제거할 수 없다. 모든 충동과 버릇을 근절시키는 것은 직관인 혜(慧, vipassana)를 통해서 이다. 이제 인간은 무서운 것에 당황할 필요가 없으며 덧없는 사물의 마력에 휩쓸리지 않는다. 인간은 더 이상 현상을 그릇되게 판단하지 않는다. 지혜만이 부여할 수 있는 완전한 면역을 통해서 모든 실수를 저지르는 능력을 초월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윤회전생을 벗어나는 해탈이다.


중생이 있기 때문에 부처가 있고,

고통이 있기 때문에 해탈과 열반이 있는 것이다.

고통의 뿌리는 삼독에 있으니 이를 멸해야 한다.

삼독은 만가지 고통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고통이 없다면 열반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머리로 살려고 하지말라. 가슴으로 살도록 하라.

지식은 ‘나(我)’가 있기 때문에, 반야는 ‘무아(無我)’이기 때문에 일어난다.


오온은 찰나 찰나에 생멸한다. 무상하다. 그럼으로 삶의 지속기간은 한 순간뿐이다. 삶이란 과거도 고통이요, 미래도 고통이다. 그럼으로 과거에도 미래에도 얽매이지 않을 때 바로 지금이 보람이요, 행복이 된다. 바로 그 지금이란 어느 때인가? 구도의 길에 나설 때이다. 내면의 탐구를 시작할 때이다. 


의식을 향해 가는 작용은 이해를 특징으로 하고,

지혜는 단절(斷絶)을 특성으로 한다.

구도의 길은 2가지 큰 길이 있다.

하나는 신뢰하는 일이고,

둘은 바른 믿음(淨信)이다.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하고, 이 가르침이야말로 반드시 궁극의 깨달음으로 이끌어 줄 것이라는 것을 확신함으로써 붓다에 귀의하는 생활을 시작할 수 있다. 그것이 구도의 길이다.


시기가 이른 다음에 비로소 행해지는 노력이란,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는데 지나지 않는다. 미리 행해지는 노력이야말로 해야할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허기가 진 다음 논밭에 추수하려 가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목마른 다음 샘을 파려는 것은 진실로 어리석은 자들이 하는 짓이다. 죽음에 이르러서야 부처를 생각하고, 예수를 생각하고 절이나 교회를 찾는 사람은 이와 같은 사람들이다. 그럼으로 인생의 황혼이 접어들기 전에 욕망의 문을 닫아걸고 진리의 길에 나서라. 사성제란 사바세계의 고통을 멸하고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영원한 진리의 가르침이요, 현실에서 낙원으로 가는 불멸의 이정표를 말하는 것이다.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