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연기법과 달마의 이입사행

2005. 10. 13. 22:27야단법석

 

  미혹한 마음(惑)이 업(業)을 짓고, 업은 고통(苦)을 부른다.

           -12연기법과 달마의 이입사행-



1.업을 탓하지 말라. 업의 고통은 그대의 자각을 일깨우는 스승이다.


사람들은 잘된 일은 모두 자기 자랑으로 쉽게 돌리지만 잘못된 것은 남의 탓으로 돌리기를 좋아한다. 그것도 내 이웃이나 친구에게 돌리는 것이 아니라 조상에게까지 돌리고 있다. 그래서 “잘된 것은 내 탓이요, 잘못된 것은 조상 탓”이라고 말도 생겨난 것이다. 어째서 사람들은 자기의 잘못을 놓고 죽은 조상까지 들먹일까? 돌아가신 양반이 숨어서 내 일을 훼방을 놓고 있단 말인가? 도대체 어디에서 이런 말이 생긴 것일까?


불교를 믿든 믿지 않든 간에 “업(業)”이란 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그 “업”이란 말의 뜻을 일반 사람들은 “나쁜 짓”을 한 의미로만 이를 이해하고 있다. 업이란 말은 본래 불교용어에서 유래된 말이다. 이는 인간이 몸으로, 입으로, 생각으로 짓는 일체 소행(所行)을 가리키는 말이다. 업(業)은 곧 “조작(造作)”을 뜻하는 말이다. 마치 물건을 만드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미 만들어진 물건이 있듯이 전생에 지은 업을 숙업(宿業)이라고 하고, 현재에 짓는 업을 현업(現業)이라고 한다. 그 업은 악한 짓, 나쁜 짓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선(善)할 수도 있고, 악(惡)할 수도 있고, 무기(無記)일 수도 있다. 무기란 앉고, 서고, 눕고 하는 것과 같이 선(善)도 아니고 악(惡)도 아닌 소행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비선(非善) 비악(非惡)인 것을 무기라 한다. 그런데 업은 스스로 홀로 짓기도 하지만 때로는 여럿이 함께 짓기도 한다. 가령 남의 것을 훔친다든지, 미운 놈을 원망한다든지 원수 진 사람에게 복수를 한다든지 하는 것은 단지 그 하나의 이유 만으로서도 혼자서도 할 수 있지만 전쟁과 같은 대량학살이나 지난번 IMF 한파 등과 같은 심각한 경제위기 등은 혼자가 아닌 많은 사람이 여러 가지 이유로 함께 지어진 것이다.  이렇게 홀로 짓는 업을 불교에서는 불공업(不共業)이라고 하고, 여럿이 함께 짓는 업을 공업(共業)이라고 한다.


콩을 심었는데 팥을 얻었다면 아무도 믿지 않겠지만, 콩을 심어서 콩을 거두었다면 어느 누구도 의아해 하지 않는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는 것이요, 심은 데로 거두게 되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당연한 진리다. 사람의 운명도 이와 같이 같다. 콩 심은 데 콩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듯이 인간의 모든 희로애락(喜怒哀J樂)과 생로병사(生老病死)도 그 원인을 지었기에 결과가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 인간의 현재의 삶은 모두 과거의 업으로부터 지은 결과요, 현재의 업은 미래의 결과가 될 것이다. 따라서 미래에 행복한 삶을 누리고 싶은 자는 현재의 착한 업을 많이 지으면 될 것이고, 현재의 고통스러운 삶을 벗어나고 싶은 자는 과거세에 지은 악업을 보상해 나가면 될 것이다. 그런데 다만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부처님이나 아라한과 같은 성인 되지 못해 과거를 아는 숙명통의 지혜가 열리지 않아 현재는 알 수 있지만 미래와 전생의 일을 알지 못한다는 데 있다.


옛날 어느 마을에 가난한 한 선비가 있었다. 그에게는 외아들이 있었는데 머리가 총명하고 지혜가 뛰어났다. 그는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서당에 다니고 있었다. 서당은 마을에서 좀 떨어진 산기슭에 있었는데 그 중간쯤에 수백년 묵은 큰 괴목나무가 있었다. 나무가 얼마나 큰지 대낮에는 마을 노인들뿐만 아니라 소달구지까지 수십 대가 머물 수 있는 큰 그늘이 만들어져 여름철에는 지나가는 나그네까지 그 나무 그늘 아래에 더위를 피하곤 했다. 흔히 성왕당이 있는 곳은 항상 큰 괴목이 있어 낮에는 다니지만 밤에 나다니는 것을 지금도 꺼리듯이 이 마을 사람들도 이 큰 나무에는 귀신이 산다하여 밤에는 나다니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이 도령은 서당에서 늦게 돌아오다 이 나무 아래에서 어여쁜 처녀하나를 만났다. 그런데 소녀는 도령을 보자 수줍음을 지으면서도 피하지 않고 도령을 유혹하듯 교태를 부리지 않는가. 도령은 이상한 생각이 들면서도 과거시험을 걱정하여 소녀에게 끌리는 마음을 억제하고 모르는 척 지나갔다.

이런 일이 있은 후로 늦은 밤 그 괴목나무 밑을 지나갈 때면 으레히 그 아리따운 처녀가 마중이나 나오듯 나무 앞에 서 있었다. 남자는 색에 약하고, 여자는 소리에 약하다고 했던가? 마마자국도 자주 보면 보조개로 보인다고 한다. 하물며 미인을 봄에 있어서랴. 도령은 처음에는 이상한 마음도 들고, 또 무관심하게 지나치려고 했으나 날이 갈수록 아리따운 그 처녀의 모습에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자 그 흔들리는 마음을 뿌리치지 못하고 여자의 유혹을 넘어가 처녀가 가자는 데로 따로 갔다. 처녀는 깊은 산 속에 있는 한 으리으리한 기와집으로 도령을 안내하고는 진수성찬으로 대접했다. 도령은 이 깊은 산중에 이런 큰집이 있고, 어디서 저런 음식을 마련하는지 궁금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 처녀의 미모에 빠져 모든 것을 잊고는 그녀가 붙잡는 대로 행복한 나날을 깨가 쏟아지듯 함께 보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처녀가 몸은 허락하면서도 입맞춤은 굳이 거절하는 것이다. 요즘말로 키스는 절대로 안 하는 것이다. 어느 가난한 여인이 첫아기를 낳고서는 젖이 말라 그 애기에게 젖 한 모금 제대로 먹이지 못하고 아기가 영양실조로 죽자 그것이 한이 맺혀 남편이 죽은 다음 재가했지만 그 남편에게까지 가슴은 못 만지게 했다는 소리는 들었어도 입맞춤을 거절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는데 어째서 그렇까?

도령은 이런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옛 노인들이 한 이야기가 생각났다. 천년 묵은 구미호는 여의주를 입안에 감추고 다니는데, 만약 사람이 이 여의주를 입에 물고 하늘을 먼저 보면 하늘의 일을 다 알 수 있고, 땅을 먼저 보면 땅위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을 미리 알 수 있다고 했는데, 혹시 이 처녀가 구미호가 되어서 여의주를 입안에 감추고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도령은 무서움보다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를 확인해 보기 위해 한 꾀를 생각해 냈다. 밤이 되어 처녀가 금침을 깔고 자리에 눕자 도령은 한숨어린 목소리로 집을 떠나 당신과 지낸지도 벌써 여러 달이 지났고, 또 당신은 모든 것은 다 허용하면서도 입맞춤을 허용하지 않으니 필시 이는 사랑이 식은 것 같기에 내일은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속을 떠보았다. 이 말을 들은 처녀는 당황해 하면서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입맞춤을 허락하겠다고 말했다. 도령을 처녀를 품에 안고 입맞춤을 하는 척하면서 혀를 깊이 처녀의 입안으로 넣었다. 그러자 혀 밑에 무엇인가 닿는 느낌이 들었다. “옳다. 이것이 여의주로구나. 그러면 이 처녀는 분명 구미호임이 틀림없다. 이 여의주를 빼앗아 빨리 달아나야겠구나?” 하고 생각하고는 처녀의 혀 밑에 감춘 여의주를 따서 입에 물고 옷을 대강 추려 밖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불행히도 너무 서둔 나머지 문턱에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하늘을 보기 전에 땅을 먼저 보고 말었다. 그래서 그 도령은 하늘 일은 알지 못하고 땅의 일은 모르는 것이 없이 되었다고 한다.


사람만큼 욕심 많고, 미래에 대한 일을 알고 싶어하는 동물은 없다. 그래서 용하다는 점쟁이나 사주쟁이가 있다는 소리만 들으면 산 넘고 물 건너 찾아다니기를 좋아한다. 사람이란 그렇게 미래의 일에 관심이 많다. 그리고 어떤 일에 호기심이 일어나면 조바심이 나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좋은 물건을 보면 갖고 싶고, 남에게 뒤지면 앞 설려고 하고, 여러 사람들이 모이면 대장이 되려하고, 또 인기 있는 자가 되고 싶어 안달하다가 허망한 삶을 보내기에 인생무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호기심이란 다름 아닌 본능적 욕망에서 기인한 것이다. 어느 철학자가 이 본능적 욕망을 <꼴림>이라고 표현했다. 색을 보면 색에 꼴리듯, 사람들이 부딪치는 경계에 따라 일어나는 마음, 그것이 꼴림인 것이다. 만약 사람들이 이 <꼴림>에 따라가지 않고 그 <꼴림>이 일어나는 근원을 알 수 있다면 우리의 눈과 귀를 유혹하는 번잡하고 요란한 이 세상살이 속에서도, 현대과학이 문명의 이기(利器)라는 명목으로 만들어 놓은 텔레비, 휴대폰 등과 같은 장난감을 떠나 고요하고 편한 한 삶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설령 그렇게 도가 높아질 수 없다고 할지라도 최소한 자기의 인생살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고통이나 아쉬움에 대한 미련은 벗어나 살아 갈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의 모든 희로애락은 갖가지 이유에서 기인되지만 그 근본원인은 <나>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며, 이 나라나는 것의 <태어남>이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전생을 덜 먹이면서 <태어남>을 이야기하길 좋아하는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사람과 사람과의 <만남>이 있고, 그 만남으로 인하여 악연(惡緣)도 되고, 선연(善緣)도 되어 기쁨과 슬픔과 고통과 번뇌가 교차하는 것이다. 이것을 부처님은 인연이라고 했다.


사람의 인연은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다. 그 인연의 끈이 검으면 악연(惡緣)으로 고통스럽게 살아가야 하고, 그 인연의 끈이 희면 행복스럽게 살아간다. 도대체 그 인연의 끈은 어디서 누가 만든 것일까? 세계인구는 현재 60억을 넘었다고 한다. 60억 인구 중에 한 명으로 태어난 어떤 이는 부모와 자식간에도 철천지원수가 되는가 하면, 어떤 이는 남의 칭송을 들어가면 살아간다. 어떤 이는 신혼여행에서 교통사고로 첫날 밤도 지내보지 못하고 죽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듣도 보도 못한 낯선 이국 땅의 파란 눈의 코쟁이와 결혼하여 행복하게 아들딸 낳아가면서 살아간다. 어떤 이는 억만장자의 집에 태어나 평생을 호의호식하면서 지내는가 하면 어떤 이는 쥐꼬리만한 박봉에 찌들려 오늘은 내일 먹을 것을 생각하고, 내일은 또다른 내일 먹을 것을 생각하고 살아간다. 어떤 사람은 잠을 자다가 느닷없이 산사태를 만나 영원히 잠들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길을 가다가 가스관이 폭발하여 비명횡사하기도 한다. 어떤 이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한푼이라도 벌기 위해 이른 꼭두새벽에 시장에 나가 좌판을 벌리고 있는데 어떤 이는 파리채 같은 골프채를 들고 벌근 대낮에 젊은 아가씨를 대동하고 희희낙락하고 놀러 다니고 있다. 어떤 이는 단돈 천원으로 수억 원의 복권에도 당첨되는가 하면 어떤 이는 수억 원을 사업에 투자했는데도 알거지가 되기도 한다. 인연이란 정말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럼으로 고통이 크고 슬픔이 깊은 사람일수록 “도대체 전생에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인연으로 태어났는가?”하고 숙업의 인연을 자주 넋두리하게 된다. 정말 숙업의 인연이란 있는 것일까? 있다면 도대체 전생의 어떤 인연의 끈이 지금의 나를 인도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도대체 무엇이며, 어디서, 왜 여기 왔고, 또 어디로 가야한단 말인가?


부처님은 대각을 이루신 곳은 붓다가야 라 한다. 이곳은 당시 신흥국가로 부상하고 있었든 마가다국의 우루벨라의 세나 마을을 흐르는 네란자라강 부근이 된다. 당시 마가다국을 다스리든 왕은 빔비사라왕이었다. 빔비사라왕은 늙도록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영험한 곳을 찾아다니며 기도를 드리며 아들 하나 점지해 주기를 조상신과 하늘에 빌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떤 선인(仙人)이 찾아와서 왕에게 이르기를 “비부라산에 있는 한 선인(仙人)이 있는데 그 사람이 죽어서 당신의 아들로 태어날 것이다.”라고 일러주었다. 빔비사라왕은 반신반의하면서 혹시나 하여 사람을 비부라산에 보내 사실관계를 알아보도록 했다. 그런데 정말 그 산에는 한 선인(仙人)이 살고 있었다. 선인이란 수행이 높은 구도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사자가 돌아와 사실임을 보고하니 왕은 한 편으로 기쁘면서도 또 한 편으로 조바심이 생겼다. 선인이라면 도를 닦은 사람인데 도대체 그가 언제 죽을 지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혼자 곰곰이 생각해보니 자기는 하루하루 늙어 가는데 저 사람은 오히려 더 젊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 사람이 언제 죽을까 하고 생각하니 조바심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몰래 자객을 보내 그 선인을 암살하고 말았다. 그 선인이 죽자 다음날로 부인인 위데희왕비는 곧 아기를 잉태하였다. 때가 되어 아기가 태어나자 연회를 베풀고는 관상쟁이들로 하여금 점을 치게 하니 "아기가 원한을 품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름은 ‘아잣타삿투(Ajãtsattu)’라고 불리게 되었다. 아잣타삿투란 ‘미생원(未生怨)’이라는 뜻이다. ‘태어나기 전에 원한을 품은 자’라는 뜻이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이 아이는 반드시 부모를 죽일 운명을 타고 태어났다’고 했다. 이 말을 들은 빔비사라왕은 화가 나서 높은 누각 위에서 연회를 베풀다가 그 누각 위에서 아기를 던져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시신조차 거두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다. 왕비는 늦게 얻은 하나뿐인 자식이라 그 슬픔과 고통이 말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빔비사라왕 몰래 그 아기의 시체를 시녀들에게 거두게 하여 하였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아기는 한 손가락만이 부러졌을 뿐 죽지 않았다. 왕비는 이 사실을 감추고 빔비사라왕 몰래 아잣타삿투를 키웠다. 아잣타삿투가 장성하자 그는 부왕(父王)의 신하들을 포섭하여 반란을 일으켜 빔비사라왕을 감옥에 가두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그리고 감옥에 갇힌 부왕에게는 어느 누구도 몰래 음식을 반입해 주는 자는 죽인다고 왕명을 내렸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인 위데희 왕비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면회할 수 없도록 했다. 아잣타삿투 왕자는 아버지인 빔비사라왕을 굶어 죽게 만든 것이다.

위데희 왕비는 면회를 갈 때마다 먹지 못해 하루하루 말라 가는 남편인 빔비사라왕을 보고는 슬픔과 비애를 느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하루는 한 꾀를 생각해 냈다. 왕비는 몸을 깨끗이 씻고는 온 몸에 꿀을 진하게 바른 후 거기에다 영양이 풍부한 갖가지 곡식을 미숫가루처럼 분말로 만들어 그 위에 발랐다. 그리고 나서 면회를 갈 때마다 빔비사라왕으로 하여금 이를 핥아먹도록 했다. 빔비사라왕은 위데희왕비의 재치로 굶어 죽지 않고 근근히 생명을 부지할 수가 있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난 후 어느 날 아잣타삿투 왕자는 감옥에 가둔 부왕의 일이 생각났다. 이제는 굶어 죽었겠지 하고 감옥에 들어가 보니 아직 부왕은 살아있었다. 아잣타삿투는 화가 나서 옥졸들을 심문하니 옥졸들은 겁이라서 왕비가 한 일을 실토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잣타삿투는 이 사실을 알고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부왕과 어머니 위데희까지 모두 참형에 처하라고 명령했다. 모든 신하들은 겁에 질려 어느 누구도 감히 반대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어느 현명한 대신 하나가 이르기를 “일찍이 아들이 아버지를 죽인 역사는 있어도 어머니를 죽인 일은 없습니다. 대왕이시여, 어머니이신 위데희왕비만을 죽이지 마소서”하고 애걸했다. 아잣타삿투는 이 말을 따라 부왕인 빔비사라왕은 죽이도록 하고 어머니는 깊은 지하감옥으로 유폐시켰다.

아잣타삿투는 한 때 새로운 교단을 조직하려고 야심에 찬 데바닷타의 꼬임에 빠져 그와 합세하기도 하였다. 데바닷타는 부처님을 죽이려고 술취한 코끼리로 하여금 부처님에게 돌진시키고, 산 위에서 돌을 던져 부처님의 발에다 피까지 흘리게 한 사람이다. 

아잣타삿투는 왕위를 찬탈한 후 인접국가를 하나하나 정복해 나갔다. 석가족을 멸망시킨 코살라 왕국의 비두다바왕을 정복하는 등 계속 전쟁터 속에서 인생을 보내다가 알 수 없는 종창이 발생하여 부처님의 교화로 쾌유되기도 하였다. 이런 인연으로 아잣타삿투왕은 자기의 부왕을 죽이고 어머니를 감옥에 가두는 등의 인륜까지 범하는 죄업을 지었지만 부처님의 교화에 힘을 입고 부처님의 교단에 귀의하여 교단의 외호자(外護者)가 되었다. 그는 불경을 첫 번째 결집하는 대 사업을 완성하기도 하였지만 말년에는 전쟁에 패하여 외로운 유랑자가 되어 불멸후 24년에 세상을 떠났다.


우리는 태어나 지금 살고 있지만 왜 <내>가 태어났는지 알 수가 없다. 어떤 인연으로 지금의 부모와 인연을 맺어 이 땅에 태어났는지 알 수가 없다. 무슨 인연으로 원수를 맺고, 착한 사람도 되었다가, 악인으로 전락하는지, 슬픔과 기쁨이 교차하는 그 인연의 쌍곡선을 알 수가 없다. 알 수 없는 인연으로 우리는 태어났고, 태어난 그 환경 속에서 알 수 없는 인연의 끈을 따라 그렇게 살아간다. 그 알 수 없는 인연을 부처님은 업(業)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그 업은 어디서 시작되었는가? 하나님과 같은 조물주가 있어 인간의 운명을 점지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인간의 삶은 숙명적이라 인간으로서 피할 길은 없는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삶이라면 정말 허무한 것이 인생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새장에 갇힌 새처럼 혼자서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의 굴레라면 이런 삶은 일찍이 마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정녕 인간의 삶이 숙명적이라면 인간의 모든 노력이 무슨 필요가 있으며, 종교가 무슨 필요가 있으며, 진리가, 도덕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만약 그렇다면 공자와 소크라테스 등과 같은 그런 성인의 가르침은 왜 배우고, 달마가 왜 갖은 고초를 겪으며 히말라야의 백년설을 넘어 중국으로 왔겠는가? 어찌하여 수많은 선지식들이 진리의 탐구를 위해 인생을 바쳐 운수행각을 하며 노력하고 있는가? 이것은 정녕코 허무한 것이 아닐 것이다. 인간의 운명은 정해진 어떤 숙명적인 것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는 그 업을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부처님이 이르시길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멸함으로 저것이 멸한다.』

라고 하셨다. 모든 것은 원인이 있어 결과가 나온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서 삼라만상도 인간의 운명이란 것도 모두가 연기적이라는 것이다. 태어남도, 죽음도, 기쁨도 슬픔도 모두가 연기적인 소산(所産)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고 끌어가는 업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는가? 부처님이 이르시길,


『무명(無明)으로 말미암아 행(行)이 있고, 행을 말미암아 식(識)이 있고, 식을 말미암아 명색(名色)이 있고, 명색을 말미암아 육입(六入)이 있고, 육입을 말미암아 촉(觸)이 있고, 촉을 말미암아 수(受)가 있고, 수를 말미암아 애(愛)가 있고, 애를 말미암아 취(取)가 있고, 취를 말미암아 유(有)가 있고, 유를 말미암아 생(生)이 있고, 생(生)을 말미암아 노사(老死)가 있다.』 


고 하셨다. 소위 12연기설이 바로 이것이다. 인간이란 존재는 무시 이래로 이 연기의 법칙을 따라 태어남과 죽음이 있고, 행복과 슬픔과 괴로움이 있다는 것이다.


2. 연기론과 실상론


가령 여기에 지금까지 보지 못한 이상한 물건이 하나 있다고 생각해보자. 그러면 우리는 두 가지 질문을 갖게 된다. 하나는 이것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고, 다른 하나는 이것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하는 것이다. 진리의 탐구방법도 이와 마찬가지다. 하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간에 존재하는 삼라만상은 도대체 그 실체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고, 둘은 그것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하는 탐구이다. 앞에 것은 공간적(空間的) 관찰이요, 뒤에 것은 시간적(時間的) 관찰이 된다.


공간적 관찰이라고 하는 것은 만물자체의 참된 모습(진상)에 대한 의문으로 출발하여 그 자체의 진실상을 파악하는 것이다. 이를 실상론(實相論)이라 한다. 서양철학에서 말하는 실체(實體)나 본체(本體)를 탐구하는 것이 실상론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삼라만상의 본질을 규명하는 것이다.


시간적 관찰이라고 하는 것은 그와 같은 만물이 성립되는데는 어떠한 경로를 거친 것인가 하는 의문에서 시작하여 그 처음과 끝을 규명하는 관찰방법이다. 이를 연기론(緣起論)이라 한다. 서양철학에서는 이를 현상론(現象論)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삼라만상의 성립의 유래 즉 생성문제를 탐구하는 것이 연기론인 것이다.

삼마만상이 존재하는 이 우주를 불교에서는 “세계(世界)” 또는 “세간(世間)”이라고 부른다. 서양철학에서는 동물의 세계, 식물의 세계, 그리고 광물의 세계로 나누지만 불교에서는 이 세계를 유정세간(有情世間)과 기세간(器世間)으로 구별한다.

유정세간이란 인간을 포함하여 생각과 감정을 지닌 것들의 세상이라는 의미다. 이것은 곧 동물계(動物界)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을 또 정보(正報)의 세계라고 부른다. 그 의미는 모든 동물들이 업을 지어서 그 업력의 과보(果報)로서 생(生)을 받는 것이니 이는 곧 유정의 육체와 정신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유정의 세계를 다시 구체적으로 분류한 것이 소위 오취(五趣)설이다. 오취(五趣)라 하는 것은 지옥, 악귀, 축생, 인간, 천인을 말하는데, 이에 아수라(阿修羅)를 더하여 육취(六趣)라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이 세계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런 유정들이 있음으로 해서 성립되는 것으로 만약 이 유정이 없다면 세계성립의 원동력을 잃게 되어 그 성립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기세간(器世間)이라 하는 것은 유정이 거주하여 생활하는 생활의 터전 곧 소의처(所依處)를 말하는 것으로 이를 의보(依報)라고 한다. 즉 유정이 그의 정보(正報)인 각자의 몸을 받아 생활의 무대로 하는 처소이니, 이것은 일체 유정이 홀로 스스로 지은 업(不共業)이나 공동으로 지은 업(共業)의 업의 결과로 감수하는 산하(山河) 대지(大地)의 환경과 의복 음식 등의 소유물을 말하는 것이다. 교학적으로 이를 좀더 깊이 분류한다면 이 기세계는 욕계, 색계, 무색계의 삼계로 분류되고 또 욕계는 다시 지옥, 악귀, 축생, 인(人), 천(天)의 5종으로 나누어지며, 인계(人界)가 다시 사주(四洲)로 분립되고, 천계(天界)는 육욕천으로 분류되니 이를 소위 삼계(三界) 오취(五趣) 육도(六道)라 하는 것이다. 색계는 다시 초선(初禪), 2선(禪), 3선(禪), 4선(禪)으로 나누니 이것을 색계 사선천(四禪天)이라 하며, 또 무색계(無色界)는 공무변처(空無邊處), 식(識)무변처, 무소유(無所有)처, 비상비비상(非想非非想)처로 나누니 이것을 4무색천(無色天)이라 부른다.


욕계라는 하는 것은 우리 인간들이 살고 있는 세계다. 이를 욕계라 하는 것은 수면욕, 음식욕, 음욕 등을 갖추고 이 세간에 출생하여 이 근본욕으로서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까닭에 이와 같이 부른 것이다. 색계라 한 것은 우리 인간과는 달라서 3욕이 없고 오직 뛰어난(殊勝) 형색(形色)만을 관(觀)함으로서 생활할 수 있는 곳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색계라 하는 곳은 3욕(欲)을 멀리 떠나 형색등 일체의 물질적 요소를 배제한 오직 순수한 정신에만 의하여 생활하는 곳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서양철학에서는 이 우주를 정신세계와 물질 세계로 양분하고 있는데 불교에서는 인간의 욕망세계와, 물질세계와 정신세계로 삼등분한 이유가 무엇인가? 색계는 물질세계요, 무색계는 정신세계임은 동일한데 어째서 부처님은 욕계라는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놓았는가? 존재라는 것은 감각적으로 지각되는 물질적 존재와 이성적(理性的)으로 사유되는 정신적 존재가 있다는 것은 쉽게 이해될 수 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욕계란 정신적인 것도 물질적인 것도 아닌 욕구를 본질로 하는 존재의 세계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눈, 귀, 코, 혀, 몸 등으로 지각된 존재를 욕구를 가지고 인식할 때 우리에게 존재로 인식되는 세계인 것이다. 가령 마마자국이 보조개로 보이는 것은 마마자국이 변하여 보조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눈에 들어온 마마자국이 아름다운 여인의 보조개로 보고자 하는 욕구로서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욕계란 그와 같이 우리의 욕구가 심리적으로 만들어 내는 분별작용으로서 존재하는 세계인 것이다. 

이러한 연기론과 실상론의 탐구는 불교 교리의 핵심이 되어 불교교단의 발달과 더불어 갖가지 연기설과 여러 가지 이름으로 그 실체를 파악하고 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인식의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부처님이 증득한 진리가 어떠한 표현방법으로 표현되던지, 논리적이든 간에 이 2가지 부분에 대하여 이것을 인식할 인식문제가 중요한 것이다. 즉 제법(諸法)의 본체문제라든가 또는 제법의 생성 즉 현상문제 등은 나에게 인식될 대상에 불과한 것으로서 이것을 인식할 인식주체가 없어서는 무의미한 것이다. 깊은 산 속에 진귀한 금과 은이 쌓여 있더라도 이를 내가 가서 캐내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듯이, 아무리 위대한 진리라도 그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주체 곧 <나>가 없으면 무의미한 것이다. 그럼으로 모든 진리는 내마음의 인식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삼계는 유심소조(唯心所造)요, 만법은 유식소변(唯識所變)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삼계도 내 마음이 짓는 것이요, 모든 대상의 분별도 오로지 내 알음알이의 변화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럼으로 불교철학에 있어서 이 인식문제는 연기론과 실상론에 앞서 가장 중요시 여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만유의 본체론 탐구하는 실상의 문제는 우리의 이성(理性)을 근거하고, 만유의 현상을 생성문제로 탐구하는 연기론은 우리의 감성을 근거를 하는데 반하여 인식론은 인식의 주체를 근거하는 지혜론 이기에 부처님의 가르침의 정수(精髓)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를 간략히 도식하면 다음과 같다.


          

실상론

실체(實體)문제

본체론

이성(理性)의

 대상

연기론

생성(生成)문제

현상론

감성(感性)의 

대상

지혜론

인식(認識)문제

인식론

인식주(認識主)의 문제


일체 만유가 어떻게 생성되어 지금에 있는가 하는 관찰법을 불교에서는 연기론이라 한다. 기독교와 마호메트교 같은 유일신을 내세우는 종교에서는 전지전능한 유일 절대 신의 존재를 인정하여 이 절대신이 우주만유를 창조한 것이라 말한다. 또 인도의 바라문교에서는 유일의 범천(brahman)으로부터 이 우주만물이 전개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불교는 본래부터 우주창조 조물주적 신격(神格)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면 우주와 일체 만유는 어떻게 현상되는 것인가? 부처님은 이를 연기라 했다. 이를 따라 <불교행집본>권4에서는『모든 존재는 인연을 따라 생하고 그 인연을 따라 사라진다(諸法從因生 彼從因滅)』고 했고, 또 <입능가경>권2에서는『만유는 인연으로 생한다(一切法從因生)』고 했다. 일체만유는 서로 인(因)이 되고 서로 연(緣)이 되어(互爲因. 互爲緣) 존재한다는 의미다. 이것이 소위 연기의 이법(理法)이라는 것이다.


연기라 하는 것은 인연생기(因緣生起)를 뜻한다. 인연이 화합하여 생기 하는 것이므로 이는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율(因果律)에 틀 속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인과율에 의하여 연기하는 일체만유의 연기설에는 관하여서는 여러 가지 연기설이 있다. 즉 일체 만유의 생기의 원인을 일체 유정이 조작하는 바의 업력에 있다고 보는 것을 <업감(業感)연기>라 칭하고, 그 생기의 원인을 일체유정의 알음알이(心識)의 근원에서 구하여 이를 아뢰야식이라 하고, 각자가 본래 갖춘 이 아뢰야식이 변현하는 바이라고 설하는 것은 <아뢰야(阿賴耶)연기>라고 칭한다. 또한 일체제법이 실재적인 본체 즉 진여의 존재를 인정하여 그 본체로부터 생기 한다고 설하는 <진여(眞如)연기설>이 있고, 또 이와 같이 현상계의 본체를 인정하는 이상 현상이 곧 본체요, 본체가 즉 현상이니 일체현상은 현상 그대로가 즉 본체의 활현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니 이것을 일러 <법계(法界)연기> 또는 <무진(無盡)연기>라고 칭한다. 또 법계가 구체적인 실체를 지수화풍공식(地水火風空識)의 6대(大)를 인정하고 이 법계를 삼라만상 그대로가 즉 대일여래의 온몸(全身體)이라 설하여 이 우주만유는 대일여래의 실체로부터 연기한다고 주장하는 <6대연기설>이 있으며 또 이 법계의 근본을 추궁하면 그것은 원래 <일활불(一活佛)>의 세계로서 일체의 현상은 모두 이 하나의 불세계(一佛世界)로부터 연기한 것에 불과하다고 설하는 <불계연기설(佛界緣起說)> 등이 있다.

  

3.12연기의 해설


연기법은 불교교학에 있어서 실상법과 더불어 중요한 근본교리다. 그래서 불교의 성장과 더불어 시대에 따라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그 중에서도 인식의 주체 즉 일체 유정이 생사고해에 윤회하는 상태를 인과관계에 의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소위 12연기설이다. 

연기법을 깨달은 자는 부처가 된다고 한다. 부처님이 대각(大覺)을 이루신 것도 이 연기의 법칙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부처님이 이 땅에 나오시기 전에도 연기의 법칙을 홀로 깨달은 자를 일러 “벽지불”이라고 칭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연기법을 깨닫는다는 것은 곧 삼라만상의 본질을 깨닫는 것이 되기 때문이며, 부처란 다름 아닌 만유를 실체를 깨달은 자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깨달은 연기의 법은 무엇인가? 부처님이 이르시길,

[만일 이것이 있으면 곧 저것이 있고, 만일 이것이 생하면 저것이 생하며. 만일 이것이 없으면 곧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면 곧 저것이 멸한다.]

라고 했다.

"만일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라고 하는 것은 생각건대 동시적 의존관계를 나타내는 것이고, "이것이 생하면 저것이 생한다."고 하는 것은 아마도 이시적(異時的)인 의존이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여간 동시적이던 이시적이든 일체법은 반드시 무엇인가에 의존하여 존재하는 것이며, 절대적 존재라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 된다. 그런 의존관계에 있어서 이시적으로 말하면 앞에서 행한 것 인(因)이라 하고, 뒤에 따르는 것을 과(果)라 하며, 동시적으로 말하면 주된 관념을 인(因)이라 하고 종속되는 관념을 과(果)라 한다. 그러나 그 속에서는 앞에서도 서술한 바와 같이 일정한 법칙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 역시 결국은 한쪽의 사고방식에서 볼 때 그러한 것이고,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면 하나의 인(因)인 것이 다른 것의 과(果)이고, 하나에 대해 주(主)인 것이 다른 것에 대하면 종(從)이 되어 절대적 인(因)이라거나 절대적 과(果)라고 말할 만한 것이 없다. 즉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이 세계는 시간적으로 무수한 이시적(異時的) 인과관계와 공간적으로 살펴본 무수한 의존관계부터 짜여져 이루어진 것으로서 모두는 무한한 그물 망을 끌어당겨 서로 의존하여 만나고 있다는 것이 바로 제법인연관(諸法因緣觀)의 정신일 수밖에 없다. 불교에서 말하는 유위법이라는 것은 실로 인연으로 생한 세계를 가리키는 것이며, 세계가 무상변천을 그치지 않는 이유도 그것이 관계 위에서 성립하여 그 속에 영원함(恒常)이 없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인격적 창조신을 배척했던 것도 신을 인정하는 세계에서는 여러 가지의 불합리가 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또 하나의 이유로는 이런 인연관의 결과로서 그것을 인정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연기관(緣起觀)은 인연관이라고도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초기경전인 <아함경>에서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깨우치기 위한 많은 가르침을 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회자하는 것은 바로 12연기법이다. 12연기법은 유정의 삶, 쉽게 말해서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윤회의 과정과 그 윤회를 벗어나는 해탈과정을 설명한 것이다. 그래서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된다. 하나는 유전문(流轉門)이니, 이는 순관(順觀)적 관찰을 말하는 것이다. 유전문이란 무엇으로 말미암아 노사(老死)가 있는가 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생(生)에 이르고, 생으로부터 유(有)에 이르고, 내지 차차로 무명(無明)에 이르는 윤회의 과정을 설명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환멸문(還滅門)이니 역관(逆觀)적 관찰이다. 이를 또 환관(還觀)이라고도 한다. 환멸문이란 윤회를 벗어나 해탈로 가는 길로서 무명에서 노사까지 역으로 관찰하는 것(逆觀)이다. 즉 무명이 멸함으로 행이 멸하고에서 출발하여 생이 멸함으로 노사의 멸함에 이르기까지 역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가)유전문(流轉門)의 입장에서의 해석


1)노사(老死): 늙음(老)과 죽음(死), 근심과 슬픔(憂悲), 고통과 번뇌(苦惱)는 사람이 살아가는데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어느 누구도 늙지 않는 이가 없고, 태어난 이상 죽지 않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그렇다면 늙고 죽는 이것은 무엇으로 말미암은 것인가? 이것이 관찰의 시작이다.


2)생(生): 우리들에게 늙음과 죽음 즉 노사(老死)의 고통이 있는 것은 결국 태어났기(생) 때문이다.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늙는다는 고통도 없고, 죽음이라는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것이 곧 노사의 조건으로서 다음에 생(生)이 오는 이유가 된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우리들에게 태어남(생)이라고 하는 것이 있을까? 여기서부터 진정한 연기적 관찰이 시작된다. 우리들이 태어나기 위한 조건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부처님에 의하면 그 가장 중요한 조건은


3)유(有)다. 유(有)란 추상적으로 말하면 '존재"라고 할 수가 있다. 존재라고 하는 것이 없으면 태어난다고 하는 일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부처님의 교설에 의하면 태어나기 위해서는 삼계가 없으면 안 된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욕유(欲有), 색유(色有), 무색유(無色有)의 이른바 의보(依報. 器界), 정보(正報, 有情界)가 있는 것이 즉 우리에게 생(生)이 있는 이유가 된다.


욕유(欲有))란 무엇인가? 이는 욕계(欲界)라고도 하는데, 욕유의 핵심은 다름 아닌 애욕이다. 애욕이란 일반적으로는 육체적 쾌락에 대한 욕구이지만 좁게 말한다면 오로지 이성(異性)에 대한 욕구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요컨대 생명이 자손에 대해 지속과 확대를 실현하고자 하는 본능을 말하는 것이다. 나무로 비유하자면 이는 종(種)의 개념으로 뽕나무, 버들나무, 사과나무 등으로 분리되기 이전에 나무라는 것으로 존재하고자 하는 본능적 욕망인 것이다.


색유(色有)란 무엇인가? 색유는 색계(色界)에 해당되며, 이는 유욕(有欲)과 같은 말이다. 유욕이란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워(Schopenhauer, Arthur,1788~1860)가 말하는 <살고자 하는 의지(意志)>에 상당하며, 오로지 개체를 지속하고자 하는 욕구를 말하는 것이다. 나무로 비유하자면 뽕나무는 뽕나무답게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이며, 버들나무는 버들나무답게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인 것이다.


무색유란 무엇인가? 이는 무색계(無色界)라고 하는데, 일본불교학자들은 번영욕이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이는 욕망도 아니고 물질도 아닌 정신적 세계를 뜻하는 것이지만 그 내용을 보면 권력 또는 재력에 대한 욕망으로서 즉 자유롭게 살고자 하는 욕구를 말하는 것이다.


삼유와 의보와 정보가 필요한 것은 욕망의 세계이든, 물질의 세계이든, 정신의 세계이든 존재하고자 하는 주체의 본능 욕구와 그 존재가 생존하기 위한 환경적 욕구가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삼계는 무엇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의 경계가 되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가 이것에 집착하는


4)취(取)가 있기 때문이다. 취(取)라고 하는 것은 “추구” 또는 “집착”의 의미로서 경전에서는 이를 4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즉 욕망에 대한 집착인 욕취(欲取), 사상적인 것에 대한 견취(見取), 도덕적 것에 집착하는 계취(戒取), 자아의식에 대한 집착인 아취(我取)를 말한다. 요컨대 이것은 자아에 대한 집착을 기초로 하여 그 욕망을 수행하려고 하는 의지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집착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삼유(三有)의 경계에 떨어지는 것이다. 만약 집착이 없으면 설혹 삼계가 물리적으로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들이 세계일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 곧 유(有)와 취(取)의 관계이다. 그러나 이 집착이 일어나는 것은 또한 그 근본이 있으니 그것은 곧


5)애(愛欲)이다. 더욱이 이 욕애(欲愛)야말로 부처님이 사성제(四聖諦)의 법문을 설할 때 그 집제 즉 현실계의 본원(本源)이라고 밝히신 것이 바로 여기에 해당된다. 이는 개체 생존욕(有欲)을 중심으로 하여 성욕, 번영욕의 방향으로 갈라지는 것으로서 바로 생명활동의 본원력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 이르러 주의논적(主意論的) 견지에서는 부처님이 설한 연기관의 체계는 일단 완결된다. 왜냐하면 욕(欲)의 본원은 욕(欲) 자신으로서 살고자 하는 생명욕 이상으로 소급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들에게 살고자 하는 욕(欲)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취착(取着)이 있고, 취착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생존(有)이 있고, 생존이 있으므로 말미암아 생(生)이 있고, 생(生)이 있으므로 말미암아 노사(老死)가 있다는 것은 곧 사제(四諦)의 법문 중 앞의 2제(諦, 즉 고제, 집제)의 정신이 아닐 수 없다. 연기관은 요컨대 사성제에 있어서 앞의 2제(諦)의 관계를 세부적으로 밝힌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고제와 집제를 밝힌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렇다고 하면 이상의 5지(支)에서 우리는 고성제(苦聖諦)의 관계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더나아가 이 욕을 현상적으로 고찰하여 심리할동 중 한 현상, 즉 의식적 활동의 하나라고 본다면 이 욕(欲)이 일어나는 데에는 역시 이것을 가능케 하는 다른 심리적 조건이 있어야 한다. 이것을 밝히려고 한 것은 곧 이하의


6)수(受)와, 7)촉(觸)과 8) 육입(六入)이다.

애욕은 원래 생명활동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이지만 이것을 심리활동의 일종으로 보는 한 그것은 특수감정의 일종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배후에 일반감정을 예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말해서 애(愛)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감정이 없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 수(受, 감정)를 그 일지(一支)로 한 이유이다. 하지만 부처님에 따르면 이 감정 즉 수(受)라는 것도 그 자신만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자극에 대한 좋은 것과 싫은 것 즉 호악(好惡)의 반응으로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감정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감각을 필요로 한다. 즉 감정은 감각에 의존한다고 하는 것이 일곱 번째로 촉(觸)을 세운 이유이다. 앞에서 남자는 미색에 약하고, 여자는 청각에 약하다는 말은 곧 안촉(眼觸)과 청촉(聽觸)에 약하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다시 이 감각은 감각 기관에 의지하여 일어난다고 하는 것이 여덟 번째로 육입(六入)이다. 장님이 미색에 반할 수 없듯이, 귀먹거리가 소리에 반할 수 없듯이, 우리의 감정은 6개의 우리 몸의 감각기관인 육관(六官)이 따르는 이유가 된다.


이상의 3지(支)는 요컨대 제 5지(支)인 욕(欲)이 활동하는 이유의 심리적 조건을 추구한 것으로 이렇게 하여 마침내 감각적인 인식기관에까지 도달하였다. 따라서 경험론적으로 말하면 적어도 욕(欲)의 조건으로서의 연기체계는 여기서 일단락 지워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감각기관으로서부터 시작하여 욕심의 활동에 이르기까지의 심리적 경과는 위의 조건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육관(六官)은 다시 무엇에 의존하는 것일까? 이것은 곧 다음의


9)명색(名色)에 의존한다. 명색이란 육체(身, 色)와 정신(心, 名)을 총괄한 말로서 이른바 심신 합성의 조직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육입과 명색의 관계는 육관이 성립하는 심신 전체의 조직에 의존하므로 이것을 떠나서는 성립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또다시 명색은 무엇에 의존하는 것일까? 명색은 생명조직의 전체이지만 요컨대 오온의 유기적 복합체이기 때문에 이것을 조직체로서 가능케 하는 원리가 없어서는 안 된다. 여기에 곧 부처님이 인식론의 입장에서 명색 가운데에서의 인식주관을 독립시켜 일지(一支)로 한 것이 곧


10)식(識)인 것이다. 식(識)도 본래 명색 중의 일부이지만 명색을 인식체로서 취급하는 한 식(識)은 그 중심인 것이며 따라서 명색 전체의 성립은 식(識)에 의존한다고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점은 흡사 가족이 남편과 아내와 아이들로 성립되지만 그 중심은 주인에게 있는 것과 같다. 따라서 거꾸로 생각해 보면 식(識)이 성립하는 조건은 객관으로서의 명색이 있기 때문이며, 명색을 떠나 식(識)만이 홀로 존재할 수는 절대로 없다. 다시 비유하자면 가정이란 가장이 있기 때문에 아내와 자식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불교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자는 이 식(識)을 윤회의 주체로 삼고, 이 식(識)이 윤회하는 것으로 말하지만 이는 불교를 바로 알지 못하고 또한 연기법을 제대로 알지 못한 것에 기인한 것이다. 이 식(識)이란 것은 소위 일반사람들이 말하는 정신이요, 영혼이란 말과 상통하는 것이다. 이런 정신이 윤회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절대 불멸의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이데 이는 단지 연기에 따른 것으로 어떤 실체적 존재가 아닌 것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예는 경전의 곳곳에서 나오지만 그 중에서도 무엇이 윤회의 주체가 되느냐 하는 질문에 다제비구가 윤회의 주체를 식(識)이라고 주장했다가 부처님으로부터 크게 꾸지람을 받았다고 하는 <아함경>의 윤회이야기는 불교를 공부하는 자라면 모르는 자가 없을 것이다. 부처님이 식(識)과 명색(名色)의 관계를 마치 갈대 묶음이 서로 기대고 서 있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설한 것도 실로 이러한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현실적 활동의 조건을 관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한, 이상의 10지(支)로써 이미 연기관의 대요가 완성된 것이다. 왜냐하면 주어진 노사로부터 시작하여 그 조건을 추구한 결과 마침내 가장 근본적인 인식론에까지 도달했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대연경>을 비롯하여 제 경문에서 10지만을 세운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건대 이것만으로는 단지 현실의 설명에 불과하다. 이것만으로는 그 무엇 때문에 생사가 무궁한가를 밝힐 수 없을 뿐 아니라, 여기에는 생명의 본질이 인식보다는 오히려 의지에 있다고 하는 석존의 근본정신이 나타나 있지 않다. 이 점을 다시 근본적으로 밝히려고 한 것이 곧,


11)행(行)과 12)무명(無明)이다. 다시 말해서 무엇에 의존하여 식(識)은 그 인식활동을 영위하는가 하면 요컨대 그 뿌리에 <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식(識)은 결국 의지의 목적을 수행하는 기관일 뿐이라고 하는 것이 식(識)과 행(行)의 관계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행이란 드러난 입장으로 보면 신구의(身口意)에 활동을 일으키는 원동력이고, 감추어진 입장으로 보면 의지의 성격으로서의 업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마침내 최종으로 이 의지의 근본소의를 찾아 도달한 것이 곧 무명이다. 즉 우리들에게 생명활동이 있는 것은 그 근저에 무시 이래의 맹목적 의지가 있기 때문이라고 귀결한 것이 연기의 마지막이 된 것이다.


이제 이 12연기를 단계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5단계로 분리됨을 알 수 있다.

(1)노사←생←유

(2)유←취←애

(3)애←수←촉←육입←명색

(4)명색↔식

(5)식←행←무명


제1계열은 오로지 주어진 사실과 운명에 관해 관찰한 것이다. 즉 모든 개체의 존재 즉 일정한 신분(有)을 획득하여 차차로 늙고 죽어 가는 사실을 관계적으로 서술한 것이다.

제2계열은 그 일정한 신분을 획득하기에 이르는 경과를 주의논적(主意論的) 입장에서 고찰한 것이다. 주의논적이라는 말은 지성이 아닌 의지를 존재의 근본원리 또는 실체라고 보는 생각을 말한다. 심리적으로 말한다면 의지를 심적 생활의 근본기능으로 보는 입장을 뜻하는 말이다.

제3계열은 그 근본욕(根本欲)의 발동에 대한 심리적 경과를 밝힌 것이다.

제4계열은 인식론적 입장에서 심신(心身)의 조직 및 활동의 근원을 밝힌 것이고,

제5계열은 인식발동에 이르는 심리적 경과를 밝힌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12인연은 무명의 근본욕을 기초로 하여 식(識)과 명색(名色)의 인식관계로부터 애(愛)를 발생하기에 이르는 심리적 경과를 밝히고, 그럼으로써 욕(欲)의 창조적 결과로서의 유(有)에 결부시키려고 한 고찰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12연기는 반드시 시간적 순서를 따른 고찰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대부분은 동시적 의존관계를 나타낸 것이다. 요컨대 유정의 조직 및 활동의 관계를 여러 입장에서 관찰하여 주(主)요소, 종속요소와 점차로 연관시킨 결과가 곧 12지로 된 것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나)환멸문(還滅門)의 입장에서의 해석


연기의 주제는 노사(老死)에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유(有; 존재)에 있다고 해야한다. 왜냐하면 노사란 결국 이 유(존재)가 찰나찰나 그 스스로를 변화시켜 가는 경과를 일생에 배대한 것이고, 더욱이 운명이라고 하는 입장에서 명명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기관의 목적도 결국은 하나의 유(有)가 끊임없이 그 스스로를 변화시켜 가는 경과와 원동력을 밝히려고 하는 것일 뿐 다른 것이 아니다.


이러한 견지에서 무명(無明), 행(行) 등의 역할을 살펴보기로 하자.

존재의 최종 근원이 살고자 하는 의지에 있음을 밝히려고 한 것이 첫 번째 무명이다. 이것은 그 자신으로서는 아직 맹목적인 것에 지나지 않지만 일단 발동하게 되면 이른바 오온(五蘊)이 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 제1지로서의 무명은 요컨대 생명활동의 원리로서 잠시 이것을 정적(靜的)으로 관찰한 것이기 때문에 다시 이것을 동적(動的)으로 관찰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곧 제2지인 행(行)이 따르는 이유다. 원래 무명 그 자신은 동적인 것이어서 행과 무명은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지만 위치 문제상 잠시 제2위(位)로 한 것이다. 유(有. 존재)가 끊임없이 활동하며 그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그 근본이 있는 것이다. 요컨대 유(有)가 변화하는 것은 유(有)의 근저에 정지해 있지 않고 움직이는 무명과 행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순히 이 무명, 행에 의해서만 인도되는 유(有)의 활동은 아직 맹목적이지 않을 수 없다. 그 활동을 비추는 빛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인도하는 기관으로서 다시 말해서 암흑을 비추는 빛으로서 생긴 것이 곧 제3의 식(識)이다. 여기에 이르러 생물활동은 심리활동이 되고, 유(有)가 이것에 의하여 그 목적을 수행할 수 있는 지위에 도달하게 된다. 여기에 이르러서도 물론 근저에는 앞의 2지(支)가 항상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하여 인식 즉 주관의 빛이 일어나면 이와 동시에 당연한 규정으로서 대상으로서의 객관이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곧 명색(名色)이다. 하지만 이것은 요컨대 유(有)가 인식의 약속으로서 스스로를 안팎으로 나눈 결과일 뿐, 유(有)의 입장에서 보면 식(識)도 자기이고, 명색도 자기이므로 이것을 자타로 구분할 수가 없는 것이다. 부처님은 엄격한 의미에서 세계와 인간을 구별하지 않고 이들을 똑같이 세간(世間 loka)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결국 이 식(識, 주관)과 명색(名色, 객관)을 일단(一團)으로 한 곳에 유(有)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무명에서 시작하여 명색에 이르는 생명활동은 발생적으로 보면 일단 이것으로 하나의 완성을 이루었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여기에 이르러 지성(知性)과 의지성(意志性), 주관과 객관을 구비한 구체적 유(有)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상의 4지는 근본무명이 어떠한 경로를 거쳐 구체적인 유(有)가 되는가를 밝힌 형식론이다. 다시 그 유(有)가 다양하게 활동하여 장래를 규정해 가는 경과를 밝히기 위해서는 이것을 거듭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육입(六入), 촉(觸), 수(受), 애(愛), 취(取)는 그 심리활동의 모습을 밝힌 것이다. 다만 그 활동은 앞의 4지에서 성립한 유(有)의 각가지 상에 다름이 아니라는 것을 미리 알아두어야 한다. 즉 육입, 촉, 수(受)는 식과 명색 사이의 감각적 인식관계를 밝히고자 한 것이고, 애(愛)와 취(取)는 그 인식에 기초한 의지의 반응으로서 결국은 무명과 행의 의식적 활동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최후의 취(取)로서 특히 유(有)자신을 규정하는 것으로 삼은 까닭은, 취는 의식적으로 보면 욕(欲)의 집착이지만, 무의식적 활동으로 보면 생명의 성격인 업(業)일 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온은 업에 의해서 결합한다는 의미에서 오취온이라고 지칭하고 있는 데에 비추어 보더라도 분명하다. 다시 말해서 이 취(取)에 의하여 유(有) 자신이 스스로를 그것에 응하여 변화하는 것이 곧 취를 연(緣)하여 유(有)가 있다고 하는 의미이다. 그 변화를 특히 일생에 배대하여 생각한 것이 생(生), 노사라고 하는 것은 이미 서술한 바와 같다.

위의 내용을 간략히 말하자면 무명, 행, 식, 명색의 4지는 동적으로 보면 생멸활동이 심리활동에로 나아가는 경과를 밝힌 것이지만 정적으로 보면 요컨대 유(有)의 완비된 성립요소라고 이해해야 한다. 이에 대해 육입, 촉, 수, 애, 취의 5지는 그 성립요소가 심리적으로 활동하는 모습을 밝힌 것인데, 이 활동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유(有)가 참다운 구체적인 유(有)일 수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이 활동에 의하여 유가 스스로를 다양하게 변화시켜 가는 것이 생, 노사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관찰해 내려오면 연기관의 주된 목적은 훗날 크게 주창된 현재의 모든 업은 과거에  지은 업의 결과라고 하는 이세일중(二世一重)이라든가, 현재의 업은 과거의 업의 결과요, 현재업은 미래업의 원인이 된다고 하는 삼세양중(三世兩重)이라고 하는 것 같은 이른바 분단생사의 문제가 있지만, 12연기법은 이러한 규정을 밝히려고 한데 있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그 진의는 이른바 찰나생멸의 법칙을 밝히려고 한 데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12연기법은 단순히 시간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시간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위에서 설명한 유전문을 무시간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연기라는 개념에 시간성이 배제된 것은 중생들의 시간에 대한 관념이 이와 같이 무시간적으로 연기한 것을 시간 속에 인식하는 무지를 드러내기 위한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존재는 시간적으로는 동시에, 공간적으로는 한 곳에 연기에 있는 것인데 이것을 중생들은 모든 사물이 각각 다른 공간을 점유하고 무한한 시간 속에서 이시적(異時的)인 인과관계를 통해 변화한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중생들은 존재만을 인식의 대상으로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도 존재화 시켜 과거, 현재, 미래로 분별하는 것이다. 그러나 <금강경>의 말씀과 같이 “과거심도 불가득이요, 미래심도 불가득이요, 현재심도 불가득이다” 우리의 체험은 항상 한 곳에서 동시에 일어나기 때문이다. 연기라는 개념은 이렇게 동시에 한 곳에서 일체의 존재가 연기한다는 사실을 표현하는 개념이므로 이것은 만유가 벌어지는 실상을 표현한 개념인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이 연기한다는 사실, 즉 일체의 법이 동시에 한 곳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의 자각이 곧 진리에 대한 자각인 것이며, “연기를 보면 법을 보고, 법을 보면 연기를 본다”고 하는 부처님의 말씀과 같이 12연기법의 진의는 찰나성에 그 진의(眞義)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분단생사의 문제는 이 찰나생멸이 규정에 의하여 스스로를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 이 점에 있어서의 부처님이 제일의적(第一義的)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4.12연기의 메시지


12연기의 핵심적 의의는 전술한 바와 같이 유(有)에 있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인간이라는 무상한 존재의 의의를 밝히는 것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12연기의 교설이 왜 필요한 것일까? 이는 인간이란 존재가 천국이나 서방정토를 그리기보다는 현재에 받고 있는 고통의 문제해결이 더 절실하기 때문에 종교를 찾고 천국이나 극락세계를 찾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고통이란 무엇인가?

<고통>이란 말을 고대 인도인들은 <베다나(vedana)>라고 표현했다. 이 <베다나>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로서 2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고통>이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지식>이라는 뜻이다. 인도의 고대 성전으로 지금까지도 종교철학의 최고봉으로 불리는 베다(veda)라는 경전의 이름도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이다. 고대 인도인들은 고통이 곧 지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고통>과 <지식>의 원천이란 두 가지 뜻을 <베다나>란 한 말로 사용했던 것이다.

<고통>과 <지식>은 어떤 관계가 있기에 그들은 이 말을 사용한 것일까?

이제 그 이유를 한번 살펴보자. 가령 우리가 고통을 당하게되면 즉시 그것을 알게된다. 위장(胃腸)이 내 몸에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위가 아플 때이다. 위장은 전에도 분명히 내 몸안에 존재했었다. 그러나 우리가 아프지 않으면 우리는 위장이 내게 있는지 조차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우리는 매일 폐(肺)로 숨을 쉬지만 폐가 있느지 의식도 하지 못하고 살아가다가 어느날 호흡이 가쁘고 기침이 나고 얼굴색이 변하고 열이나면 폐가 있음을 자각한다. 그럼으로 의학에서는 건강을 말할 때 "신체가 없다고 생각되는 것"을 건강이라고 정의한기도 한다. 우리가 우리의 신체 각 기관에 대하여 의식하고 있지 않을 때가 곧 우리가 건강한 때라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 신체기관에 잘 알고 있다면 그 기관은 무엇인가 이상한 것이다. 왜냐하면 무엇인가 잘못되었을 때에만 우리는 의식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고통으로 지식이 발동하기 때문이다. 생활도 마찬가지다. 자동차를 몰다가도 엔진이나 다른 부분에서 이상한 소리가 조그만 들리면 그때서야 자동차가 무엇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듯이, 무엇인가 잘못되고 있을 때에만 우리는 그것을 의식하게 되고, 그 병을 자각하여 자기를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어느 조사는 그의 어록(語錄)에서 “고통과 악연(惡緣)을 너의 선지식으로 삼아라”라고 했다. 이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말한 것이다. 고통과 악연을 선지식으로 받아드린다는 것은 육체의 고통으로 말미암아 내 육신을 돌아보고, 삶의 고통으로 말미암아 지금까지 미망에 빠진 자신을 자각하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럼으로써 인간은 육신의 병이 깊을수록 병을 고치는 그길에 더 정진할 것이며, 삶의 고통이 클수록진정한 구도의 길을 나서게 될 것이다.


달마대사의 어록에 진리에 들어가는 길과 그 실천에 대한 가르침인 이입사행(二入四行)이라는 것이 있다. 2가지 입(入)이란 하나는 원리적인 방법이며, 둘째는 실천적인 방법을 말한다. 원리적인 방법이란 경전에 의해 불교의 대의를 알고, 일체 중생은 범부이건, 성인이건 모두 평등한 진실의 본질을 지니고 있지만 다만 바깥 경계로 인한 망념에 사로잡혀 그 본성을 제대로 발현할 없다는 것뿐임을 확신하는 것이다. 만약 망념을 떨어버리고 본래의 진실로 돌아가 신심을 통일하여 벽과 같은 조용한 상태를 유지하며, 자신이건 타인이건, 범부이건, 성인이건 동일하게 하나인 곳에서 굳게 안주하여 동요하지 않고, 또한 결코 언어에 의한 가르침에 의존하자 않는다면, 그야말로 암묵한 가운데서 진리와 완전히 합일되어 분별을 가할 필요도 없이 조용히 가라앉아 작위가 없게 된다. 이를 원리적인 방법이라고 부른다.


다음에 실천적인 방법이란 네 가지 실천을 말하는 것이다.

첫째는 전세의 원한에 보답하는 실천이며,

둘째는 인연에 맡기는 실천이며,

셋째는 물(物)을 구하지 않는 실천이며,

넷째는 있어야 할 모습대로 있는 실천이다.


먼저 전세의 원한에 보답하는 실천이란, 수도자들이 만약 고통을 만날 때 자기 마음속에 다음과 같이 반성하는 것이다.


『나는 아주 먼 옛날부터 무한한 시간에 걸쳐 진정한 나를 잃어버리고 본질을 벗어나 말단만을 쫓아 많은 미망(迷妄)의 세계에 방황하고, 많은 원한과 미움을 일으켜, 한없이 남과 대립하여 사람을 해쳐왔다. 지금의 내가 비록 죄를 짓는 일이 없다고 하더라도 이 고뇌는 모두 내 자신이 지은 전세(前世)의 죄업이 맺은 결과이며, 신이나 악마가 나에게 준 것이 아니다.』


라고 생각하여 이를 달게 받아 참고 견디어, 결코 원망이나 변명을 하지 않는 것이다. 어떤 경전에, <괴로움을 만나도 걱정하지 말라. 왜냐하면 너의 의식은 스스로 깊이 근본에 통해 있으니까>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생각이 일어 날 때 사람은 본래의 원리와 서로 접촉하게 되며, 원한을 계기로 하여 진리에 나아갈 수 있다. 그러므로 원한이 보답하는 실천을 권장하는 것이다.


두 번째의 인연에 맡기는 실천이란 일체 중생은 자아(自我)가 없으며 모두 인연의 힘에 좌우되고 있으며, 고락을 같이 감수하는 것도 모두 어느 것이나 인연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만약 바람직한 좋은 보답이나 명예 등을 얻더라도 그것은 모두 자신의 과거의 숙명적인 원인이 가져오게 한 것이며, 지금은 마침 그것을 얻긴 했지만, 인연이 다하면, 또다시 무(無)로 돌아가는 것이므로 아무 것도 기뻐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세간적인 성공이나 실패는 모두 인연에 의한 것이며, 자신의 마음 그 자체는 아무런 증감도 있을 수 없는 까닭에 기쁜 만남에도 동요되지 않으면 암묵한 가운데 진리에 맞는 것이다. 그럼으로 인연에 맡기는 것은 실천을 권장하는 것이다.


세번째의 물(物)을 구하지 않은 실천이란 세상사람들은 항상 미망에 빠져 있어 어떤 경우에도 재물과 명예 등을 탐내어 이것을 구하고 얻고자 하지만 지혜 있는 자는 진실을 깨닫고 본질적으로 세속과 차원을 달리 한다. 마음을 인위적인 모든 행동을 멈추고 행동 또한 운명의 움직임에 맡기며, 모든 존재를 실체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며, 물질적인 욕망을 지니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중생의 삶이란 마치 불붙는 집과 같이 위태롭고 육체가 있는 한 사람은 모두 괴로운 것을 잊지 않는 마음가짐이 물(物)을 구하지 않는 실천인 것이다. 그럼으로 <잡아함경>의 <어색희락경(於色喜樂經)>에 이르기를,

『물질을 사랑하고 즐겨하는 것은 곧 괴로움을 사랑하고 즐거워하는 것이요, 괴로움을 사랑하고 즐겨하면 곧 괴로움에서 해탈하지 못한다. 이와 같이 느낌, 생각, 지어감, 의식을 사랑하고 즐겨하는 것은 곧 괴로움을 사랑하고 즐거워하는 것이요, 괴로움을 사랑하고 즐거워하면 곧 괴로움에서 해탈하지 못한다.』

라고 한 것이다. 마음으로 희구(希求)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진리의 실천인 것이다.


네 번째의 있어야 할대로 사는 실천이란 만물이 본질적으로 청정하다는 원리를 있어야 할대로 사는, 즉 법이라 이름 짓는 것이다. 이 근본원리로 보면 모든 현상은 모두 빈 공(空)이며, 거기에는 더러움도 없고, 집착도 없고,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으며, 이것과 저것의 대립도 없는 것이다. 어느 경전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법(理法)은 생존자로서의 실체를 지니지 않는다. 생존자로서의

더러움을 초월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법(理法)에는 자아가 없다.

자아의 더러움을 초월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혜 있는 사람이 만약 이 진리를 깊이 체득할 수 있다면 그는 반드시 있어야 할대로 살아 갈 것이다. 무릇 존재 그 자체는 인색한 일이 없으므로 육체나 재산을 들여서 베푸는 덕을 실천하고, 마음에 아까워하는 일이 없다. 그는 자신과 상대와 베푼 물건과의 삼자가 애당초 모두 공(空)임을 잘 알고 있는 까닭에 아무 것도 즐기지 않으며, 아무 것에도 사로잡히지 않고, 다만 세속적인 더러움을 청정하기 위해서만 모든 생물을 도와 인도하면서, 더구나 그러한 상대성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이야말로 바로 자리(自利)인 동시에 또한 이타(利他)이기도 하며, 또한 더욱 깨달음의 길을 장식하는 것으로도 되는 것이다. 베풀음의 덕이 이와 같은 이상 6바라밀에 대해서도 역시 마찬가지다. 망상을 제거하기 위해서 6종의 바라밀행을 실천하면서도 더구나 행하는 바 없이 행한다면, 이것이 곧 있어야 할대로 사는 실천이다.


“이것이 생하면 저것이 생하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이 멸한다”는 연기의 도리는 사물의 성립에 대한 동시성(同時性)과 이시성(異時性)을 밝히는 데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제법연기의 이시적(異時的) 유동성(流動性)에서 비로소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진리를 간취할 수 있고, 또 제법연기의 동시병존(同時竝存)의 관련성에서 제법무아(諸法無我)의 진리를 비로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모든 것은 고통이라는 일체개고(一切皆苦)의 진리를 더하면 바로 삼법인의 교리가 되는 것이다. 1111111십

12연기의 도리(道理)도 <나>라는 존재가 영원한 존재가 아니며, 영원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한 찰나에도 머물지 못하고 변하는 무상(無常)한 존재임을 단계적으로 설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중생들은 이 무상한 연기의 도리를 모르기 때문에 업을 짓고, 그 업으로 인한 죽음이란 고통을 더욱 심각하게 느껴는 것이다.


죽음이란 무엇이며, 죽음은 왜 있는 것일까?

영국의 철학자인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은 “죽음이 없다면 종교도 없다”고 했다. 이것이 진실이라면 “종교가 있기 때문에 죽음이 있다.”는 역설도 성립된다. 그렇다면 종교는 무엇인가? 종교는 죽음의 부활이기 때문이다. 생(生)이 있음으로 사(死)가 있다면, 사(死)가 있음으로 생(生)이 있는 것이다. 그 생(生)의 의미를 주는 것이 바로 종교인 것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열반과 해탈이란 자아의 죽음에서 일어나는 다른 생을 말하는 것이다.


인도에서는 죽음과 시간에 대하여 똑같은 단어를 쓴다. 곧 죽음이나 시간을 깔라(kala)라고 하는 말을 같이 사용한다. 이는 곧 시간은 죽음이며 죽음은 시간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시간이 흘러간다 함은 곧 삶이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으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시간에 대한 두려움이 된다. 그리고 시간에 대한 두려움이란 삶을 전체적으로 살지 못한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다시 말해서 시간은 그대가 올바로 삶을 살지 않을 때 문제가 된다. 삶을 올바로 사는 사람에게는 시간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에게서는 시간에 대한 공포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소크라테스는 독약을 마시면서도 죽음이라는 미지의 세계에 환희를 느꼈고, 부처님을 위시한 위대한 성인들도 모두가 죽움을 피하지 않고 도리어 죽움을 기다렸든 것이었다.

죽음을 기다린다는 말은 자살과는 다르다. 이는 삶을 전체적으로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삶을 전체적으로 살 때 죽음은 삶의 크라이막스가 되는 것이다.

그대는 세속이라는 작은 물결 속에 지금까지 살아왔다. 먹고 마시고 잠자고 걷고 사랑하고…… 등등 작은 생활 속에서 살아왔다. 이제 제일 큰 물결이 닥쳐온다. 죽음이란 미지의 큰 물결이 닥쳐온다. 그럼으로 기쁜 마음으로 맞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전체성 산 사람은 죽음이 오더라도 맞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죽음 그 자체의 죽음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깨달은 사람은 아무 것도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고 하는 것이다. 그들은 무상의 도리를 알기 때문이다. 죽음이란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무기력하게 된다. 그러나 그대가 죽음을 두려워할 때 그 죽음은 매우 강력하게 된다. 죽음에게 힘을 주기 때문이다. 한(恨)이란 것이 그런 것이다. 애착이란 것이 그런 것이다. 이루지 못한 욕망이 그런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산 삶은 죽음으로부터 힘을 빼앗는다. 그럼으로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순간순간 무엇을 하든지 간에 전체적으로 사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산다는 것은 요란한 소리가 아니다. 일전에 어느 상품 씨앰송 작곡가가 일요대담에서 자기의 선(禪) 수행과정을 설명하는 이야기 중에 “설거지 할 때도 오로지 설거지만을 생각하라”는 주부들에 권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가정의 주부를 보라. 설거지를 하는 동안 수 만가지 생각을 짓는다. 남편 출근준비, 자식등교문제, 계모임, 동창회 모임, 그리고 내일 갚은 부금과 적금 등등을. 그럼으로 마음이 산란해 지고, 번뇌가 일고 고통이 있게 된다. 전체적으로 산다는 것은 설거지하는 주부가 설거지에만 정신을 쏟듯 그렇게 단순한 일이다. 목욕을 할 때에도 전체적으로 하는 것이다. 전체적이란 다름 아닌 깨어있다는 의미의 다른 표현인 것이다. 선사들이 말하는 <평상심>이라는 것도 깨어있는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위가 아플 때만 위가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할 때도 이를 늘 자각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세상에 대한 것은 모두 잊어버리고, 앉아 있을 때 앉고, 걸을 때 걷고, 항상 동요하지 않아야 한다. 샤워 밑에 앉아 있을 때는 전존재가 머리 위로 떨어지도록 하고, 머리 위에 떨어지는 물방울과 하나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집안을 청소하고 음식을 준비하고 접시를 닦고 아침 산보를 가는 일, 이 모든 것을 전체적으로 하는 것이다. 마치 한 마리 토끼를 잡는데도 신중을 기하는 사자마냥.


12연기법은 고정된 어떤 실체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란 존재의 무상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무상(無常)이란 곧 우리들이 고집하는 우리의 육체와 정신 모두의 상주성을 부정하는 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무상한 삶을 두고 어떤 사람은 유(有)에 빠져 낙관주의자가 되고, 어떤 사람은 무(無)에 빠져 허무주의가 된다. 그러나 인생은 허무도 아니고 낙관도 아니다. 그러면 진정한 인생은 무엇인가? 부처님은 공(空)이요, 무상(無相)이요, 그리고 무원(無願)의 삶이라고 했다. 바램이 없는 삶일 뿐이라는 것이다.

희망을 가진 사람을 우리는 낙관주의자라 부른다. 그는 먹구름 속에서 햇살을 볼 수 있다. 그는 밤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새벽이 가까워 오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또다른 반대쪽에 허무주의가 있다. 그는 밝은 햇빛 속에서조차 먹구름을 예감하고 있다. 그는 또 말할 것이다. "아침은 밤의 끝이다." 그러나 이 둘은 서로 반대편에 서있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이 양자의 관심은 다르지만 그 마음은 둘다 같다. 먹구름 속에서 빛나는 햇빛을 본다. 먹구름이 햇빛 주위로 모여든다. 그대는 부분만을 보고 있다. 구분이 거기 있다. 취사선택이 있는 동안 그대는 결코 전체를 보지 못할 것이다. 부처님은 낙관주의자도 허무주의자도 아니다. 삼조 승찬대사의 <신심명>의 첫귀도 “분별하는 마음을 버리는 것이 곧 도에 이르는 길이다(至道無難 唯嫌揀擇)”라고 했다. 부처님은 단지 <바램>을 버린 것이다. 허무주의와 낙관주의는 동전의 앞뒤와 같다. 이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이요, 이해하기 힘든 세계다. 그러나 이를 알어야 한다. 적어도 지금의 생에서 알려고는 노력해야 한다.


연기설이 무상을 말하는 것은 연기설이 자연적 인과법칙이 아니라, 우리들이 영원하다고 고집하는 존재를 부정하는 가르침이다. 결국 우리들이 영원하다고 고집하는 존재는 객관적인 원인에 의존하는 존재인데 실은 객관적인 원인을 떠나서 자기 스스로 성립하는 것과 같은 영원히 독립적으로 서있는 존재가 아님을 말하는 것이 연기설인 것이다. 인간이란 존재(有)는 홀로 독립자존한 것이 아니다. 그럼으로 우리의 삶은 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자연과 사람이 더불어 존재한다. 그럼으로 더불어 사는 삶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하잘 것 없는 것으로 여기는 들판의 이름 없는 풀하나 조차 나와 동떨어진 어떤 것이 아니다. 이는 한송이 바나나를 먹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과 자연이 연관되어져 있는가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바나나를 파는 사람, 이를 여기까지 수송해 준 사람, 그것을 가꾼 사람, 바나나의 열매, 바나나가 익기까지 물과 신선한 공기와 토양과 태양이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럼으로 일체는 연기적으로 서로 인(因)이 되고 과(果)가 되어 연관되어진 존재임을 자각하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보호하고, 서로 협조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원인이 있을 때 결과가 있다.』라는 연기의 법칙은 가령 우리가 도자기를 보고 도자기라는 것이 있다고 즉 도자기의 상주(常住)를 고집하는 한 우리들과 관계하는 법칙이지 우리들과 관계가 없는 자연적인 인과법칙은 아닌 것이다.

12연기설의 인식론이란 우리들의 주관적인 고집과 집착이 객관적인 원인에 의존하고 객관적인 원인을 떠나서 독립자존 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말해서『저것(원인)이 있을 때 이것이 있다.』란 말은『객관이 있을 때 주관이 있다.』라고 하는 것에 불과하다. 객관이란 바로 당신이 처한 환경이 될 수도 있고, 욕구의 대상인 어떤 물건이나 명예나 체면과 같은 어떤 것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은 그대의 주관이 일어나지 않으면 의미 없는 것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마치 그대가 실의에 빠져 기차로 여행을  떠나고 있을 때 창밖에는 아름다운 경치가 전개되지만 그대가 그것을 의식하지 않는 한 그들은 존재하지 않은 것과 같은 것이다. <심신명>에 “허물이 없으면 법이랄 것도 없고, 생하지 않으면 마음이랄 것도 없다. 주관은 객관을 따라 멸하고, 객관은 주관을 따라 사라진다(無垢無法, 不生不心 能隨境滅 境逐能沈)”는 말이 있듯이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객관이라는 현상세계에 끄들임이 일지 않을 것이다. 그럼으로 매사에 고요한 마음을 지니도록 하여야 한다. 그것이 미혹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니, 미혹이 없는데 어찌 업을 지을 수 있겠으며, 지은 업이 없는데 무슨 생사윤회의 고통을 받겠는가.


12연기법이란 인생의 무상과, 무아, 변역의 법을 말하는 것이다. 이들은 상대적인 것을 벗어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상대적인 것은 모두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름이란 단지 상대적인 분별에서 생겨난 명사에 불과한 것이다. 생(生)이 있기에 사(死)가 있는 것이며, 남자가 있기 때문에 여자라는 말이 생긴 것이다. 만약 생이 없고, 남자라는 존재가 없다면 사(死)라는 말과 여자라는 말이 어떻게 생겨났겠는가? 그럼으로 상대적 것을 단지 상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뿐 이것에 집착하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상대적인 것을 의식하면 분별이 생기고, 분별이 생기면 욕망이 일고, 욕망이 일면 업을 짓고, 업을 지음으로 끝내는 죽음과 같은 고통에 갇히게 된다.


이 세간은 유(有) 혹은 무(無)에 집착하기 때문에 생로병사 우비고수뇌(憂悲苦愁惱)로부터 해탈하지 못한다. 12인연법은 <나>라는 존재에 대한 유무의 관념을 벗겨내는 진리인 것이다. 그럼으로 <나>라는 유(有)에도 집착하지 말고 또한 <나>라는 무(無)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 나에 집착함으로 마음이 움직이고, 마음이 움직이니 바램이 생기고, 바램은 의지를 낳고, 의지가 업을 낳고, 그 업이 고통을 낳는 것이다.


<오분율(五分律)>권5에 이런 말씀이 있다.

『일체의 태어나는 것은 모두 죽고, 수명은 반드시 종말을 이른다.

업에 따라 보(報)를 받는다. 선과 악은 각각 과(果)를 초래한다.

복(福)을 닦으면 하늘로 상승하고, 악(惡)을 행하면 지옥으로 들어간다.

도(道)를 닦으면 생사를 끊고서 영원히 열반으로 들어간다.

허공에 있지 말고, 바다 속에 있지 말며, 산이나 바위 속에 들어가 있지도 말라.

어디에서도 이것을 벗어나 죽음을 받지 않는 일은 없다.

제불(諸佛), 그리고 연각(緣覺), 보살, 성문(聲問)이라 할지라도

역시 무상(無常)의 몸을 버린다. 하물며 범부들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일체는 연기적이고 상대적이기 때문에 중도에 불과하다. 12연기법은 곧 중도로 가는 이치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집착을 없애는 도리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인생은 실체가 없지만 그러나 그 지은 행위만은 남는다. 업의 주체는 없지만 업은 살아 있는 것이다. 행위자는 없지만 행위는 살아 있는 것이다. 이것을 자각한다면 진정코 연기법을 아는 자가 된다.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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