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을 아는 자만이 부처를 보리라

2005. 10. 2. 23:14야단법석

 

            무상(無常)을 아는 자만이 부처를 보리라.

                                 


1.무상한 인생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가을과 겨울이 그 뒤를 잇는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던가. 열흘 가는 꽃도 없지만, 아침에 핀 꽃잎이 저녁에 시들어 떨어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찬 서리에 온 잎이 다지고 엄동설한이 닥쳐 천지만물이 얼어붙는다고 해서 대자연의 생명에 끝장이 오는 것도 아니다. 다시 얼었던 땅이 녹고 메마른 가지에서는 새싹이 돋아나지 않는가?

 

그러기에 금년에 피어난 꽃은 과거의 무한한 봄을 두고 피어났던 그 꽃이요, 우리 눈앞에 있는 저 어여쁘게 물든 단풍잎은 미래의 무량 겁에 걸쳐 나타날 영원한 모습이다. 따라서 겨울이 갔다고 간 것도 아니며, 봄이 왔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어 줄 것도 아니다.

 

어찌 자연만이 그렇겠는가? 오늘 따스한 햇볕 아래 밭을 일구고 있는 농부는 몇 십년 전에 손가락을 빨면서 아버지의 밭 일구는 것을 바로 보고 서 있던 그 소년이요, 다시 몇 십 년이 흘러가면 또 오늘같이 따스한 봄날에 저 농부의 아들이 어른이 되어 밭을 일구리라.


그런데 말이다. 정녕코 모든 것은 새봄의 꽃잎 마냥 피고 또 지는데, 도대체 나는 무엇이며,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간다는 말인가? 나이 든 사람이라면 아마도 살다보면 어느 보름달이 휘영청 밝은 밤에 홀로 깨어나 주변을 돌아보고는 감상에 젖어 고독이 엄습하는 이런 경험을 한두 번은 했을 것이다.


옆에 누워 있는 사람들이 낯선 사람같이 느껴지고, 힘들여 장만한 세간살이가 모두 허망한 잡동사니처럼 느껴지는 그런 느낌을…….

그리고 낙조가 지는 호숫가에서, 가시지 않은 태양 빛이 저 산등성이 위에 하늘을 붉게 물들 때, 알지못할 외로움이 뼈 속에 스며들고, 허무한 느낌이 가슴을 텅 비게 하는 그런 그 기분이 든적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런 생각도 잠시 스쳐 갔을 것이다.


『그렇게 검든 내 머리카락도 어느새 백설로 바뀌었구나! 그런데 지금까지 그 긴 시간 동안을 무엇을 했단 말인가? 이렇게 살다가 허무하게 죽어야 하나? 도대체 나는 누구이며 왜 여기 있는가?』하고.


잠시도 머물지 않고 흘러가는 것이 인생이다. 흐르는 시냇물보다도, 날아가는 화살보다도 빨리 흘러가는 것이 인생이다. 청운의 푸른 꿈은 안개처럼 사라지고 산을 허물 듯한 청년의 기개는 잠깐 사이에 두더지가 파놓은 뒤켠의 흙두덩이 옮기기도 힘겨워지는 것이 인생이다.

청년의 윤기 있는 검은머리는 봄날 산등성에 녹다말은 잔설마냥 흰 세치머리가 늘어가는 것이 인생이다. 어찌 그뿐이랴. 곧은 허리는 굽어져 수양버들이 되어가고, 갓핀 깻꽃같이 분홍빛 윤기가 흐르던 고운 피부는 어느새 쓰다버린 헤어진 수세미처럼 변하는 것이 인생이다. 상아(象牙)같이 흰고 건강한 치아는 온통 남의 이로 바꾸어져 개밥에 도토리 구르듯 입안에서 음식은 이리 구르고 저리 굴러다닌다. 훤한 이마는 어느새 빨래판처럼 날마다 골만 깊어져 가고, 우렁찼던 목소리는 대밭을 스치는 바람소리모양 쉰 소리를 내고, 총명한 눈은 어물전 망태기 속에 들어있는 물고기 눈처럼 허멀게지는 것이 우리들의 인생이다. 쭉 뻗은 건장한 팔다리와 우람했든 몸은 굽은 물푸레나무 지팡이에 의지하지 않으면 걷지도 못하는 것이 우리가 가야할 우리의 인생이 아닌가?


주위를 돌아 보라. 언제나 옆에 계실줄 알았든 부모는 어느새 이 세상사람이 아니고, 냇가에서 물장구치면서 함께 개구장이짓을 했든 소꼽친구들, 외로울 때 벗이 되어 주었든 그렇게 다정했던 친구, 친지들도 하나 둘 영원히 다시 보지 못할 곳으로 떠나가고 있다. 젊었을 때에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든 장미보다 귀엽고 아름다웠든 내 연인도…….

내 사랑한 사람들이 이렇게 하나둘 이 세상을 떠나고 있다. 회자정리(會者定離)라 했던가? 만남은 정녕코 헤어짐이라……. 태어난 인생은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 분명한데도 어쩐지 나만은 죽음이 그렇게 쉽게 오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미련의 안개에 싸여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그 안개가 걷히면 당신을 느낄 것이다. 우리네 삶이란 진실로 외롭고 고독하고 허무한 것임을.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보라. 두통이 심하여 우연히 병원에 들렸다가 의사로부터 불치의 암이 이미 악성이 되어 당신의 수명이 길어야 두세 달밖에 살지 못한다고 판정을 받았다고 가정해 보라. 지금까지 죽음이란 남의 일이요, 나는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순시간에 허물어지고 죽음에 대한 공포가 당신의 남은 인생을 완전히 바꾸게 될 것이다. 죽음은 많이 보았다. 친구의 죽음에서부터 부모의 죽음까지를. 그때는 단지 서글프다는 막연한 생각이나 센치한 느낌만 들었을 뿐 그렇게 심각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의 죽음이 아니라 남의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망상 나 자신의 죽음을 예고 받는다면 그때는 달라 질 것이다.

 

생각해 보라. 친구의 친지의 초상집에서는 고스톱도 치고 술타령도 벌렸다. 그런데 나의 죽음을 맞이하는 그날을 통보 받고서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고스톱, 술타령이 나의 그 죽음 앞에 무슨 흥취가 있을까? 3개월밖에 살수 없다고 판정 받은 사람이라면 그에게 돈이 무슨 필요가 있으며, 출세가 무슨 필요가 있으며, 명예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기도 언제간은 죽는다는 그 사실을 머리로서는 인정하면서도 이는 남의 죽음이요, 나의 죽음이 아니라고 여긴다. 절대로 이를 가슴으로는 쉽사리 받아드리지 않는다. 가슴으로 이를 받아 드리지 않기 때문에 상가(喪家)를 나온 그 순간에 다시 세 속의 안개속에 갇히게 된다. 재물, 권세, 애욕, 권리, 명예 ……등등을 찾아 헤매게 되는 것이다. 분명 인생의 무상함을 받아드리고 나도 머지 않아 죽는다는 것을 안다면 이것은 분명 부질없는 욕망이요, 미망의 안개임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러치 못하기 때문에 나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미망에 사로잡혀 하루하루를 출세심, 시기심, 투쟁심, 갈등 등등으로 아등바등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언제간은 분명 사라질 이 몸뚱아리를 나라고 믿고 부단한 애착을 느끼고, 분별심과 갈애심을 일으켜 여름철 하루살이 마냥 욕망의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역사 속의 위대한 인물도 나와 다르지 않는가? 사생아로 태어나 만승천자의 위에 오른 진시황은 어디에 있으며, 천상(天上)의 이슬을 담아 만세를 꿈꾸었던 한 무제는 어디에 있는가? 양떼나 말을 키우던 유목민족의 아들로 태어나 대륙을 휩쓸던 징기스칸도, 시(詩)한 수를 짓기 위해 로마를 불태우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든 폭군 네로황제도, 한갓 코르시카 섬에서 태어나 황제의 지위를 얻어 유럽을 정복한 나폴레옹도, 세리(稅吏)의 아들로 총독이 되어 수백만의 유태인들을 학살해 가면서 세계정복의 야심을 키운 희대의 독재자 히틀러도…… 그들은 도대체 지금 어디에 있는가?

 

위대한 인물들이라고 그렇게 칭송을 받든 그들은 아침에 받은 신문이 금새 휴지통속에 버려지듯, 무상한 시간 속에 속절없이 묻혀진 이들이 아닌가? 그들도 돌이켜 보니 한갓 우리네 범부들과 같이 미망의 꿈속에 산 사람들이 아닌가?


우리가 지금까지 무심코 스쳐갔던 길거리의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 늙고, 병들고, 허리는 고부라져서 지팡이에 의존하여 하루하루 구걸하면서 살아가는 그들과 먹고살기에 그렇게 걱정 없이 지낸다고 자부하는 나는 죽음 앞에서 무엇이 다른가를. 이런 저런 이유로 팔다리를 잃어 불구자가 되고, 눈을 다쳐 장님이 된 그들과, 말 못하는 벙어리와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와, 불치의 병으로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저 불쌍한 사람들과 사지가 멀쩡한 나는 죽음 앞에서 무엇이 다른가를. 호화롭고 번지러한 장례식이 죽음 앞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

 

생각해 보라. 진실로 사람이 한평생 산다는 것은 허망한 꿈에 불과하지 않는가? 욕망이란 꿈, 그 꿈속에서 깨어나지 못한 체 살아가는 이 허약한 인생이 바로 나의 인생이 아닌가? 그럼으로 언제가 사라질 나의 인생이란 저 뜰 앞에 핀 한 송이 이름 없는 들꽃보다도 못한 것이 아닌가? 그래서 현인들은 이렇게 말했던가?

『솔로몬의 부귀영화도 한갓 이름 없는 한 송이 들국화보다도 못하다.』라고.

 

2. 욕망의 실체란 무엇인가?


사람들에게 물어 보라. “사람은 왜 사느냐” 고.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너무 바빠서 이런 질문 자체를 잊어버렸다. 사람들은 모든 것은 변하고 사라진다는 무상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하루를 목적 없이 생활 속에 분주하게만 살아간다. 그래서 그들은 고작 이렇게 답할 것이다.

『사람은 살기 위해서 먹고, 먹기 위해서 산다.』고.

 

이렇게 사는 사람은 무상을 모르는 사람이다. 이들은 삶에 있어서 지극히 낮은 형태의 삶을 사는 사람이다. 생각해 보자. 먹기 위해 사는 삶의 가장 낮은 형태는 미생물인 아메바의 삶이다. 아메바란 동물은 단세포 동물이다. 기관이라야 고작 먹는 입만을 갖추고 있다. 몸 전체가 입뿐이다. 아메바는 몸 전체가 입의 기능밖에는 갖추고 있지 않다. 아메바는 그에게 접근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먹을 수 있는 것은 닥치는 데로 먹어치운다. 그의 몸은 먹을수록 커진다. 그리하여 너무 커서 더 이상 주체할 수 없게되면 그의 몸은 두 개로 분열된다. 세포분열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분열된 두 마리의 아메바는 또 닥치는 대로 먹는 작업을 계속한다. 이와 같이 아메바는 먹기 위해 살고 살기 위해서 먹는다.

 

주변을 둘러보라. 이 아메바와 같은 삶을 살고 있는 많은 식충(食蟲)이 같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식도락가(食道樂家)”니 “미식가(美食家)”하고 그렇게 불리는 사람들을 제쳐놓고서라도 이런 아메바와 같이 살아가고 있는 사람을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진리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삶이란 주어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삶은 생존하기 위해서만 있는 것이 아니다. 무언가 삶 이상의 것을 위해서 생존하고 있는 것이다.


또 이런 사람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정치가나 권력에 미친 사람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속성은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하는 것이다. 왜 그들은 정치나 권력에 미치는가? 그들의 마음속에 열등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존재를 돋보이고 싶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도 바로 잡을 수 없으면서 이 세상 전체를 바로 잡으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애고(ego)가 강한 인간들이다. 자아 집착 의식이 강한 자들이다. 그들은 어떤 방향으로 던지 갈 수 있는 인간들이다. 돈 쪽으로 마음이 기울면 그는 돈을 모으기에 혈안이 될 것이다. 매스컴에 요란하게 떠들든 정치인들의 비자금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라. 그들은 최고 권좌에 있면서도 수천억의 돈을 숨겨두지 않았는가? 왜 그리 필요 했겠는가? 돈은 힘의 상징이 되기 때문이다. 그들이 권력 쪽으로 간다면 그들은 멈추지 못할 것이다. 권력의 최고자리에 오르기 전까지는 죽어도 그 자신을 멈추지 못할 것이다.

 

동물들을 관찰해 보라. 거기에는 절대적인 명령계통이 있다. 개미나 꿀벌들을 보라. 그들을 통치하는 절대권리자가 있다. 여왕개미, 여왕벌이 바로 절대권력자요, 통치자로 그들 속에 군림하고 있다. 원숭이들을 보라. 모든 원숭이 무리 속에는 분명 대장 원숭이가 있다. 가을 하늘을 날아가는 기러기 떼에도 대장이 있다. 그 통치자는 그가 속한 무리들을 지배하고 명령하고 있다. 여우나 늑대무리 속에도 그들을 다스리는 대장이 있다. 이와 같이 남을 지배하려고 하는 것은, 남을 정복하려고 하는 것은 동물적인 본능이다. 그러나 진정한 사람은 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정복하려 한다. 현명한 자는 알고 있다. 지배욕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파멸뿐이라는 것을. 이는 구태여 역사를 들추지 않더라도 알 수 있는 자명한 사실이 아닌가?


사람에게는 또 묘한 본능적 습성이 있다. 그 본능적 습성이란 한번 유혹에 굴복하면 둘째 번에는 더 쉽사리 굴복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본능적 습성은 인간의 바른 진심(眞心)을 흐리게 하는 근본 원인이 되기도 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인간의 삶에 있어서 5가지가 있다. 부처님은 이를 오욕(五欲)이라고 말씀하셨다.

 

오욕이란 재물에 대한 욕망, 음식에 대한 욕망, 이성에 대한 애욕, 자기의 이름을 찾는 명예욕, 쉬고 싶은 수면욕을 말한다. 이는 곧 인간의 본능이라고 할 수 있는 근본 욕심을 말하는 것이다. 그 뿌리는 탐진치(貪瞋痴)의 삼독이요, 삼독은 “나”라는 것을 내세우기 때문이다. 오욕 중에서도 재물욕과 애욕이 제일 강하다.


사람들이 살아간다는 것은 넓게 보면 세상과 나의 관계다. 세상과 나의 관계란 결국 세상의 것을 얼마나 내가 소유하고 또 점유하느냐의 관계에 불과하다. 인간의 삶이란 것은 결국 이 관계 속에서 이루지는 과정 속에 머물다 가는 것에 불과하다. 그럼으로 사람들이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 모든 물건을 내 소유물 즉 재산으로 만들고 싶어한다는 욕망이 그 근원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소유물과 나와 관계는 어떠한가? 이 점이 중요하다. 물건을 소유한다고 우리가 말할 때, 그 소유관계는 생명이 없는 것과 관계를 맺는 것이 된다. 잠시만 생각해 보라. 우리가 소유한 돈, 토지와 건물, 명성, 사회적 지위, 지식, 자녀 기억 등등은 모두가 “과거”에 축적된 것이 아닌가? 과거는 죽은 것이며,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생명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를 상기함으로써 감상에 젖는다. 우리는 과거 속에 이루어진 것에 의존하여 지금을 살고 있다. 그럼으로 지금의 나라는 것은 현재의 나가 아니라 과거의 축적일 뿐이다. 과거의 나는 이미 흘러갔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나가 아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나”라고 하는 것은 결국 “나는 과거의 나다(I am what I was)”라고 하는 것이 된다. 보다 분명한 것은 모든 물건은 생명이 없다는 것이다. 생명이 없는 것은 죽은 것이다. 내가 소유한 것은 물건이다. 내가 자랑하고, 내가 가진 것은 모두 물건이다. 따라서 소유의 관계는 곧 죽음과 관계를 맺는 것이 된다.

 

죽음은 어둠이다. 어둠은 악마요, 사탄이요, 마구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소유한다고 하는 것은 결국 어둠의 악마와 관계를 갖는 것이 된다. 그럼으로 소유나 점유는 인간의 살아있는 지혜를 지닌 진심(眞心)을 흐리게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경(經)의 말을 빌리자면 “무명(無明)이 불성(佛性)을 가리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물건을 소유하려고 발버둥치는 이유가 무엇일까? 만약 지금 소유하려고 하는 물건이 영원하지 못하고 금방 변하고, 사라지는 것이라면 그 물건을 소유하려고 할 것인가? 사람들은 변하고 사라질 물건을 영원히 변하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다는 망상 때문에 그것을 소유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을 보라. 그들은 자기를 과시하기 위해서 자기자랑을 이렇게 한다. “나는 빌딩, 증권, 부동산……등등을 가지고 있다.”고. “나는 무엇을 가지고 있다”는 이 말은 무엇을 뜻하고 있는가? 만약 주체인 “나”와 객체인 “대상”이 찰나에 변한다는 사실을 가슴으로 받아드린다면 이런 말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따라서 이 말 속에는 주체도 “나”도 영속적이며, 객체인 “재물”도 영속적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체인 “나”가 영속적일까? 또 객체인 “재물”이 영속적일까? “나”는 언제가 죽을 것이다. “나”는 내가 뭔가를 소유하는 것을 보증해 주는 사회적 지위를 잃을지도 모른다. 재물도 영속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파괴될 수도 있고, 잃어버릴 수도 있으며, 또 그 가치가 없어질 수도 있다. 무엇을 영원히 소유한다는 표현은 결국 영원하고 파괴할 수 없는 실체라는 환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예컨대 일례로서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의 재산을 자식들에게 물려주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환상에 뿌리 깊게 연유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소유한 그 재산이 영원함으로 그 재산을 소유한 나도 영원한 존재라고 여기는 환상에 빠지는 것이다. 말하자면 재물과 내가 동일시되어서 법이 유언의 효력을 지켜준다면 나의 재산이 대대로 대물림되듯이 동시에 “나”라는 것도 그 재산을 통해서 더불어 영속적으로 존재한다는 환상에 빠지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나의 재산을 통해서 나의 불멸(不滅)을 믿는 것이다.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 왕들이 죽은 뒤에 미이라로 만들어 무덤 속에 온갖 보물을 함께 안치한 것도 부(富)와 권력을 이용해서 불멸의 삶을 추구했든 것도 모두가 소유를 통한 이런 영원성 즉 불멸의 환상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재물은 확실히 인간에게 묘한 환상을 불러 이러 킨다. 자동차를 하나의 예로 들어보자. 부자이든 그렇지 못하든 간에 요즘 사람들은 자주 차를 바꾼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렇게 차를 자주 바꾸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여기에는 인간의 욕망에 대한 갖가지 심리적 요소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그것은 자동차 소유주와 자동차 사이에 내포된 비인격적 요소 때문이다. 차는 그 소유주의 마음에 드는 구체적인 물건이 아니고 지위의 상징이며, 힘의 연장이며, 자아(自我)의 구축물이다. 자동차를 취득함으로써 소유주는 실제로 새로운 자아의 단편(斷片)을 취득한 셈이다. 예컨대 동창회나 어떤 모임에 가는데 만약 당신이 80년도에 나온 포니와 같은 낡은 구식 자동차를 타고 간다고 생각해 보라. 같은 모임의 동료가 신형의 그랜저나 캐디락, 또는 벤츠 같은 값비싼 차를 타고 나온 것을 보고는 마음이 어떻겠는가? 누가 무어라 하지 않았는데도 왠지 위축감을 느끼고 자신이 초라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호텔에 들어가 보라. 정문에 주차는커녕 호텔보이에게 바로 쫓겨날 것이다. 그러나 신형 최고급의 값비싼 차를 타고 한 번 세워보라. 그 호텔보이는 충실한 하인모양 당신에게 인사를 하고 자동차 문까지 열어 줄 것이다. 그러면 자신도 모르게 우쭐한 마음이 들게 되고 마치 유명인사나 된 것같은 기분을 느낄 것이다. 자동차는 그저 생명 없는 기계로서 단지 운송수단일 뿐인데 당신의 기분은 그 자동차로 인하여 마치 부자도 되고 유명인사도 된 듯한 느낌을 느낄 것이다. 그럼으로 당연히 당신은 새차를 동경하여 사게되고 따라서 그 자동차를 통해서 새로운 “나” 즉 자아(自我)를 하나 만들게 되는 것이다.

 

두 번째 요인은 새차를 6년마다가 아니라 1년이 체 안가서 새로 구입함으로써 취득에 따른 쾌감이 증가된다는 것이다. 새차를 자기 것으로 하는 행위는 처녀를 내 것으로 하는 행위와 같은 느낌을 가질 것이다. ― 그것은 지배감각을 강화하고 그것이 빈번해 질수록 쾌감이나 드릴도 더욱 커지게 되기 때문이다.

 

세 번째 요인은 빈번히 차를 바꾼다는 것은 ‘거래를 하는’ 다시 말해서 교환에 의해 이익을 보는 빈번한 기회를 갖는 것을 의미한다. 교환의 이익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금전적인 이익뿐만 아니라 신분상승에 대한 우월감을 느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차에 대한 안목이 있다면 값싼 중고차나 사고 난 차를 사서 이를 수리하여 새것인 냥 매매하면 차액을 남길 것이다. 그 기에는 쾌감이 따른다. 또한 이런 저런 연고로 자동차 세일즈맨을 알게되어 그로부터 부탁을 받아 새차를 구입할 경우 당신의 왠지 그 자선이나 보시를 한 것처럼 뿌듯한 기분을 느낄 것이다. 비록 당신이 필요에 의하여 하나의 운송기구를 구입한 것에 불과할 지라도. 이것이 오늘날의 남자와 여자들 마음속 깊이 뿌리박고 있는 만족감이라는 것이다.  

 

네 번째 요인은 먼저의 자극은 바로 단조로워지고 고갈해 버리기 때문에 ‘새로운’ 자극을 경험하고 싶다는 욕구(欲求)이다. 새차를 사서 한 1년 동안은 닦고 문지르고 광내고 온갖 정성을 차에 쏟지만 한 2년을 타다보면 처음 마음과 달리 왠지 타든 차가 싫증이 나게되는 것이 사람들의 보통 마음이다. 그래서 차종을 바꾸거나 더 고급스러운 차를 구입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새차를, 새로운 차종으로 바꾸게 되는 것이다. 당신이 억만장자와 같은 부자라면 이번에는 차대신 자가용 비행기나 모터보트 내지 핼기를 구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분명 기성세대뿐만이 아니고 젊은 세대도 마찬가지다. 아니 더할지도 모른다. 오늘날 젊은 세대는 새로운 자동차는 물론 일반 신변잡화까지도 그 취득과 소유에 더 안달해 하고 있다. 젊은 세대는 한 번 산 물건이 오래 지속되는 것을 그 보상으로 기대하지 않는다. 젊은 세대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데에서 진정한 기쁨을 나타내는 소비패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소비심리란 왜 일어나는가? 소비는 재산 소유의 한 형태이며 그것도 아마 오늘날의 풍요한 산업사회의 가장 중요한 형태일 것이다. 소비는 여러 가지 특질을 갖고 있다. 즉 그것은 우선 불안을 제거해 준다. 왜냐하면 가지고 있는 것을 빼앗길 염려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 더 많이 소비할 것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이전의 소비가 곧 그 욕구 충족적 성격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현대의 소비자들은 다음과 같은 공식으로 자신을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존재한다=내가 가지고 있는 것 및 내가 소비하는 것.” 그래서 오늘날 젊은이들은 물론 기성세대도 새로운 것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서로 먼저 구입하려고 안달하고 있는 것이다. 재산에 대한 욕망은 이렇게 갖가지 심리작용으로 작용한다.


해방이후 우리의 살림살이는 “오래된 것은 아름답다”는 것이 표어처럼 느끼고 살았다. 그래서 찌어진 옷이나 양말은 꿰매어 신고 다니는 것이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다. 교복은 선배가 입던 것을 물려받아 입는 것이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었고, 고장난 라디오나 기계는 고쳐 쓰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드려졌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이러한 옛것에 대한 애정 즉 보존보다는 소비가 강조되고 있으며, 모든 물자의 구입은 ‘쓰고는 내버리는’ 것이 자랑이 되었다. 새로 산 물건이 자동차이건 옷이건 소모품이건 간에 잠시 쓴 뒤에는 싫증이 나서 ‘낡은 것’을 처분하고 최신형으로 사기를 열망하고 있다. 언제가 뉴스에서 이런 사건을 들은 적이 있다. 기차역이나 고속버스 터미널의 유실물 분실센터에서는 잃어버리고 다시 찾아가지 않은 값비싼 물건이 넘쳐 어떻게 처리해야할 지를 모르겠다고 주인을 찾는 캠페인 광고기사를 내적이 있었다. 현대인들은 잃어버리면 다시 찾으려 하지 않고 그 물건을 새로 산다. 기계가 고장이 나면 수리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 구입한다. 현대인의 의식구조는 이제 “취득”은 “일시적 소유”와 “사용”에 불과하며, 사용하고 나서는 폐기 처분하거나 더 좋은 모델과의 유리한 교환을 통하여 새로 취득하여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이것이 소비자 구입의 악순환을 구성하고 있다. 그래서 텔레비는 물론 온갖 매스컴에서는 하루도 쉬지 않고 요란스럽게 광고를 내고 있고 소비자는 몽유병자모양 이를 따라 상점에 가는 것이다. 오늘날 삶에 있어서의 생활표어는 “새로운 것이 아름답다.”라고 바꾸어져 버렸다. “절약과 검소함”이 미덕이 아니라, “소비가 미덕”이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흥청망청 날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느끼는 즐거움 중 물건을 소유하는 것보다도 더 큰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살아 있는 존재를 소유하는데 있다. 역사를 한 번 거슬러 올라가 보자.

인간은 본래 모계(母系)사회였다. 그러나 소유의식이 강하게 부각되자 부계사회(父系社會)로 옮겨가게 되었다. 부계사회란 곧 가부장제(家父長制)를 말하는 것이다. 가부장제(家父長制)사회란 무엇인가? 가장이 한 집안을 통솔하는 사회다. 가부장제가 존재하는 한 가장 미천한 계급의 가장 비참한 남자들일지라도 당연히 재산의 소유자가 될 수 있다. 가장은 아내와 자식들에 대하여 절대적인 지배자로서의 기분을 맛볼 수 있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동물적인 견지에서 본다면 가부장적 사회의 남자가 자녀를 많이 갖는 것은 소유권을 더 많이 획득하기 위해 일할 필요도 없고, 또 자본의 투자 없이도 인간을 소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되기 때문이다. 아이를 낳는 모든 고통이 여자의 것임을 고려할 때 가부장제 사회에서 아이를 만든다는 것은 여성에 대한 노골적인 착취라고 여성 행방운동자들이 주창하는 것도 이런 면에서 볼 때 사실 부정하기란 어려운 이야기다. 그러나 여인이 자라서 어머니가 되면 어머니대로의 독자적인 형태의 소유권을, 즉 어린 시기의 자식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여자의 입장에서나 남자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이 공전(空轉)은 끝없는 악순환을 이룬다. 남편은 아내를 착취하고, 아내는 어린 자식을 착취하며, 청년기에 남자는 이윽고 연상의 남자들에 끼어 여자를 착취하는 등등으로.

 

그러한 착취의 일환은 오늘날에 와서는 이성에 대한 소유와 지배욕망으로 강하게 부각되어졌다. 애욕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애욕은 끝없는 쾌락을 얻기 위해 줄다름질 치고 있다.

그럼으로 부처님은 <사십이장경>에서

『이성에 대한 욕망보다 강한 애욕은 없다. 이성에 대한 욕망은 그 크기가 끝이 없다. 다행히도 그것이 하나이기 망정이지, 만약 둘이었다면 천하에 도를 닦을 사람은 한사람도 없을 것이다.』

라고 했든 것이다.


애욕의 실체란 무엇인가? 애욕의 실체는 쾌락에 대한 탐욕이다. 쾌락은 희열(喜悅)과 그 의미가 다르다. 쾌락이 본능적이며 육체적인 것이라면 희열은 이성적(理性的)이며 정신적인 것이다. 경(經)의 말을 빌리자면 “법열(法悅)”이요, “법의 희열”이다. 이는 동서양이 다르지 않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로 쾌락주의를 창시한 에피쿠르스(Epicuros. B.C. 342?~270)도 “순수한 쾌락”이 인생의 최고 목적이라고 주창했다. 그러나 이 말에 대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순수한” 이란 말을 빼고 “쾌락”이란 말만을 받아드려 그 의미를 기쁨이나 희열로 잘못이해 하고 있다. 그가 말한 순수한 쾌락의 의미는 “고통의 부재(不在)”와 “영혼의 평정(平靜)”을 의미하는 것이었는데 사람들은 쾌락이란 하나의 탐욕에서 다른 탐욕으로 끊임없이 옮겨가는 욕망의 만족으로 착각하고 있다.

 

쾌락에 대한 욕망은 극히 강렬할 수도 있고, 사회적으로 성공을 거둠으로서 느낄 수도 있다. 돈을 많이 버는데서 느낄 수도 있고, 복권이 당첨됨으로써 느낄 수도 있고, 부부의 성 관계로서 느낄 수도 있고, 마음껏 먹는데서 느낄 수도 있고, 경주에서 이김으로서도 느낄 수도 있다. 음주, 황홀, 마약이 가져오는 마음의 격앙상태, 새디즘을 만족시키거나 살아 있는 것을 죽이거나 난도질하는 격정을 만족시키는 것에서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정신적인 것도 아니요, 이성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육체적이며, 밑빠진 독에 물을 붙는 것과 같이 부어도 부어도 차지 않는 허망한 욕망이요,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실체가 없는 무지개와 같은 것이다. 쾌락주의를 창시한 에피쿠로스가 쾌락의 의미를 “고통의 부재(不在)”와 “마음의 평정”으로 정의한 것은 바로 이런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또한 욕망의 충족으로서는 쾌락이 인생의 목적이 될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며, 또한 그런 쾌락은 반드시 불쾌감이 뒤따르며, 모든 쾌락은 그 절정에 이르면 슬픔이 뒤따른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며, 또 그 욕망은 끝내 충족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인생을 쾌락추구에 쏟아 붓는 것은 허된 욕망의 노예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을 그 진정한 목적인 고통의 부재로부터 멀어지게 하기 위해서 쾌락의 정의를 그렇게 한 것이다. 이를 부처님께서는 <아함경>에서

 『모든 물질은 무상하다. 무상한 것은 고통이며, 고통은 영원한 “나”라는 실체가 없다. “나”라는 실체가 없다면 나의 것이라는 것도 있을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느끼고, 생각하고, 실천하고, 분별하는 것도 무상하고, 무상한 것은 영원한 나가 없기 때문에 그것은 괴로운 것이다』

(色無常 無常卽苦 苦卽非我 非我者亦非我所  如是受想行識無常 無常卽苦)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성간의 애욕에 대한 의미를 좀더 깊이 살펴보자. 애욕의 궁극적 목적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애욕에 대한 쾌락을 추구하게 만드는 궁극적 원인은 자연이 스스로를 보존하고 영속하려고 하는 종족보존의 기만성에 있는 것이다. 그 종족보존의 수단이 겉으로는 이성간의 애욕으로 위장되어 드러나는 것이다.

 

교학에서 말하는 삼계(三界) 또는 삼유(三有)라는 것 중에서 유애, 욕계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삼계란 욕계, 색계, 무색계라고 하고, 삼유란 욕유, 색유, 무색유이다. 욕계란 욕망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욕망의 세계는 애욕이 가장 강하다. 그것은 근원적 욕망이다. 그럼으로 욕계는 욕유라고 하고 또 애욕으로 대치되는 것이다. 색계란 물질세계를 말한다. 이를 색유라고 말할 때 이는 인간이란 개체가 존재하려고 하는 본능을 말하는 것이다. 애욕이 생물학적으로 종(種)이란 포괄적 의미에서 생명보존이라고 한다면 이는 개체의 생명존속을 의미하는 것이다. 무색계란 정신세계를 말한다. 무색유라고 하면 이는 개체가 자유롭게 존속하려고 하는 각종 명예나 정신적 안정감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것을 추구하는 세계다. 일본학자들은 이를 번영욕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그럼으로 인간이란 지위에서 한 걸음 물러나 애욕이란 것을 생각해 보면 이는 자연이 스스로의 종족보존을 위해 인간을 기만하는 고단위 속임수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 고단위 속임수의 목적은 어디에 있는가?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살아 있는 동식물은 개체의 생존본능을 가지고 있다. 동물은 때가 되면 종족번식을 위하여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짝짓기를 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을 것이다. 동물은 단지 종족을 보존하는 본능적 욕망으로만 모든 행위가 이루어진다. 식물도 마찬가지다. 꽃이나 나무는 종족의 번식을 위하여 벌이나 곤충을 유혹하고, 바람을 이용하고, 씨앗을 다른 곳으로 퍼트리기 위해 열매를 맺을 뿐이다. 그 형태는 천차만별이지만 목적은 오로지 자기 종족번식에 있을 뿐이다. 그럼으로 동물과 식물은 종족번식의 법칙에 따를 뿐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인간과 달리 쾌락을 추구하기 위하여 짝짓기를 하거나 씨앗을 퍼트리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인간은 동물이면서 예지(叡智)를 가지고 있다. 흔히 철학적용어로 이성(理性)이라고 불리는 그것이다. 부처님은 이를 불성(佛性)이라고 했고, 반야(般若)라고 했다. 본능적 욕구는 개체생명이 살아지면 함께 살아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는 시간적 제한을 받는 육체적인 욕망이다. 그런데 이성(理性)이나 불성은 그 속성이 영원한 것이다. 영원한 것은 시간적인 제약을 벗어나 있다. 따라서 이성은 본능적인 것이 아니고 또 자연적인 육체적 욕망이 아니다. 그럼으로 이성은 동물적 욕구나 본능적 욕구를 거부한다. 만약 자연이 인간에게 단지 종족보존의 법칙만을 강요하여 따르게 한다면 이성을 지닌 인간은 이를 거부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인간은 자연의 속임수에 넘어가는가? 자연은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키기 위하여 인간에게 종족보존에 대한 그 보답으로 쾌락을 부여하였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인간은 종족보존의 수단으로 애욕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쾌락을 얻기 위해 자연의 속임수에 넘어가는 것이다. 마치 어린아이를 사탕으로 유인하여 치과의사에게 다려가듯.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자연이 인간을 기만하는 숨은 목적은 생존보존이었지만, 인간이 추구하는 목적은 생존보존이 아니라 쾌락추구에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갖가지 성범죄가 유행하고 변태적인 성 윤리가 난무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성간의 사랑행위가 단지 생존보존의 수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애욕에 대한 쾌락추구에 두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쾌락의 속성이란 자극적이고 강렬하면 강렬할수록 더 짜릿한 쾌감을 주기 때문에 인간은 말초신경을 자극을 위하여 더 자극적이고 더 강렬한 새로운 쾌락의 대상을 갈망하기 때문이다. 그 쾌락의 대상이란 처음에는 사람에게서 찾지만, 그것으로 만족스러운 쾌락을 느끼지 못하면 사람을 다른 대체물로 바꾸어 쾌락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 산업사회가 겪고 있는 갖가지 변태성 성범죄와 마약, 마리화나, 이유 없는 폭력과 살상행위 등이 아니겠는가? 일찍이 사회심리학자나 정신분석가들이 지적한 새디즘(sadism)이나 매조키즘(masochism)과 같은 비윤리적인 성 윤리가 바로 이것을 대변해 주고 있다.

새디즘이란 무엇인가? 상대방에 대하여 잔학한 가혹행위를 함으로 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매조키즘이란 무엇인가? 새디즘과는 반대로 상대방으로부터 잔혹한 가혹행위를 받으면서 쾌감을 느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둘의 형태는 다르지만 변태인 것은 동일하며 또 그 목적은 둘다 오로지 육체적 성적쾌락을 얻는데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싫증이 나면 쾌락에 대한 갈애는 마침내 인간이 아닌 동물이나 마약과 같은 더 자극적인 것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애욕의 왜 고통인가? 애욕은 쾌락 때문이요, 쾌락은 욕망의 자기충족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욕망은 그 끝이 없다. 그럼으로 끝이 없는 인간의 욕망은 고통일 수밖에 없다. 만족 없는 쾌락은 고통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애욕에 대한 욕망이란 뿌리가 윤택해지면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그늘을 만들 듯, 애욕이 깊으면 그렇게 무성하게 자라 인간의 바른 이성을 가린다. 또한 애욕은 무심히 버린 작은 담배꽁초의 불씨가 온 산천을 잿더미로 만들 듯 그 크기를 알 수 없는 것이 바로 애욕의 실체요, 늙어서 육신의 죽음을 맞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는 것이 바로 애욕의 속성이다. 피가 뜨거운 동물은 그 피가 식을 때까지 애욕의 늪에 들어가기를 갈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연에 속아 쾌락을 사랑이라고 미화(美化)하여 이성(異性)에 대한 갈애로 몸부림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지나보면 태양이 뜨면 사라지는 아침이슬과 같이 허망한 것이 애욕의 실체가 아닌가?


낯선 경험의 새로운 쾌락은 달콤하고 부드럽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마치 가랑비가 솟옷을 끝내 흠뻑 젖게 만들듯 우리들의 바른 마음을 미망속에 살프시 들어와 속속들이 젖게 한다. 애욕의 첫 씨앗은 작지만 그 씨앗이 자라 나무가 되면 무성한 잎과 가지를 내어 그늘을 만들 듯 우리의 진심을 덮어 버린다. 애욕의 씨앗은 마치 암과 종기와 같아서 보이지 않는 몸 안에서 자라나지만 우리의 생명을 위태롭게 한다. 작은 불꽃이 퍼져 온 산천을 태우듯 애욕은 모든 착한 마음과 행실을 불태워 버린다. 그럼으로 애욕에 빠진다는 것은 마치 시퍼런 칼날을 밟는 것과 같아서 깊이 밝으면 밝을수록 더 큰 상처를 입게 되는 고통이 따르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무상한 이 삶 속에서 애욕의 늪으로 발을 빼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애욕이란 한 번 감옥에 들어간 본 사람은 더 많은 것을 그곳에서 배워 더 큰 죄를 범하듯, 한 번 쾌락을 맛본 자는 더 큰, 더 자극적인 쾌락을 탐닉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한 그루 사과나무에 수백 개의 사과가 열릴 듯 애욕은 수천개, 수만 개의 쾌락의 열매를 낳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애욕은 사람이 늪에 발을 들여놓으면 깊이 들어갈수록 더 헤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쾌락이 충족될 때마다 그의 저항력은 그 쾌락의 늪에 빠진 만큼 감소되고, 마음의 눈이 어두워져 죄에 대한 자각을 상실하기 때문에 헤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으로

『자신을 지배한다는 것은 인간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경지이며 따라서 자신의 정욕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아주 슬픈 일이다.』

 

라고 서양의 철학자 존 밀턴(john milton)도 말했든 것이다. 어찌 이것이 단지 슬픈 일로만 그치겠는가?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사람은 가도 그 죄업은 따라 간다.』고.

 

그 죄업이 몰고 가는 곳은 어디인가? 돼지나 소와 같은 축생의 세계요, 귀신이 들끓는 악귀의 세계 곧 아수라의  세계요, 시뻘건 쇳물이 끓고 독가스가 길을 막는 지옥의 세계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신다. 그러나 슬프게도 허무주의나 쾌락주의에 빠져 윤회를 부정하고 죄짓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겁내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태양계와 같은 은하계가 23개나 있다면 당신은 믿겠는가? 우리는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지식으로 알고 있지만 우주선 위에서 본적은 없다. 보지 않았기 때문에,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윤회와 죄업도 그러한 것이다. 의심이 나면 거대한 우주를 보라. 그 장엄한 크기에 비한다면 당신의 몸은 좁쌀만도 못하다. 그러나 그대 육체의 내면을 한 번 살펴보라. 수천 억의 세포가 군(群)을 이루고, 그 세포의 구성 분자나 원자는 수천 억이 넘는다. 그대 대장 안에 살고있는 박테리아는 당신의 적은 육체가 거대한 우주가 되어 있지 않은가? 우주의 극대(極大)에 비하면 내몸은 극소(極小)가 되고, 내몸의 극소(極小)에 비하면 극대가 되는 이 불가사의함을 한 번 생각해보라. 그럼으로 극대와 극소의 이 끝없는 심연 속에 자리한 인간의 본성이 단순히 육신이 사라진다고 없어지겠는가?

 

업을 부정하는 사람은 그림자를 생각해 보라. 그림자는 실체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그림자는 빛이 있으면 사람을 따라 다니지 않는가? 사람이 가면 그림자도 가고, 사람이 멈추면 그림자도 멈추듯, 이 생(生)이 가면 지은 바 행위도 가고, 다음 생을 받아 머무면 따라서 그 쾌락에 대한 행위의 과보는 그에게 머물게 될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어리석은 마음으로 생의 윤회를 부정하고 오욕의 늪에 발을 드려놓는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다. “젊어서 즐기지 않으면 늙어서 언제 즐기겠는가? 죽으면 썩어질 이 몸뚱아리 살아 있을 때 한 번 신나게 놀다가 가자.”고. 그러나 이렇게 인생을 보내고 나면 분명 뒤에 가서 남은 것은 후회와 고통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놀지 못하는 자에게도 남는 것이 있다. 바로 한(恨)이 그것이다.

 

한(恨)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이 못 다한 욕망이다. 그 욕망이란 다름 아닌 오욕의 씨앗이요, 애욕의 열매인 쾌락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 쾌락의 끝은 어디인가? 그것은 고통의 쇠사슬이 아니겠는가? 그럼으로 욕망의 실체는 이루면 고통이요, 못 이루게 되면 한(恨)이 되는 것이다.

 

3. 무상(無常)을 아는 자 부처를 보리라.


제행무상(諸行無常)이요, 제법무아(諸法無我)라 ―모든 것은 찰나에 변하고 잠시도 머물지 않으며 모든 것은 영원한 실체가 없는데  …… . 양파껍질 모양 벗겨도, 벗겨도 알맹이는 없는 무상한 이 삶 속에서 사람들은 스스로 어리석게도 오늘도 불나비 모양 부귀영화라는 욕망의 불을 지핀다.

 

 그런데 그 욕망의 대상은 과연 영원한 것인가? 생각해 보라. 영원히 늙지 않는 사람이 있으며, 죽을 때 돈을 가지고 가는 사람이 있던가? 영원한 권세가 있던가? 영원히 허물어지지 않는 건물이 있던가? 변하지 않든 산천(山川)이 있던가? 사람도 자연도 모든 것은 잠시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찰나찰나에 변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이를 영원한 것으로, 절대로 변하지 않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 잠시도 머물러 있지 않고 찰나찰나에 변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영원한 것이 아니라면 어찌 영원한 “나”와  영원한 “나의 것”이라는 것이 있겠는가? 모든 것은 무상(無常)하며, 변화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 어떠한 것에도 “영원한 나” 와 “영원한 나의 것”이 없다는 이 사실 ― 그것은 부처님이 이 세상에 나타나셨거나 안 나타나셨거나 관계없이 이미 정해져 있는 참다운 진리가 아닌가?


그런데 이런 욕망의 삶을 버리고 영원 속에 살아간 무수한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그들을 역사를 통해서 현인(賢人)이라 부르고 성인(聖人)이라고 부른다. 그 가운데 가장 으뜸은 고타마 싯달타였다. 그는 왕자로 태어나 모든 부귀영화를 버리고, 아름다운 아내, 사랑하는 자식까지도 버리고 출가하여 무상의 의미를 깨달은 사람이 되었다. 열반이란 영원한 삶을 획득한 사람이었다. 그가 걸어간 구도의 첫길은 무엇인가? 위대한 세계의 정복자를 꿈꾸었던가? 아니면 지상의 억만장자였던가? 아니다. 그가 추구한 것은 오로지 “나”를 찾기 위한 길이었다. 태어나서 늙고, 병들고, 죽어가야만 하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무상한 굴레에 갇힌 삶의 의미를 찾아 이를 벗어난 영원한 삶을 추구한 것이다. 그는 진실로 무상을 깨달은 사람이기에 불타(佛陀)라고 했다. “불타”란 깨달은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무상을 깨달았기 때문에 열반을 얻은 사람이라고 한 것이다.


무상이란 무엇인가?

무상이란 말은 우리가 느끼는 허무한 감정과는 다른 것이다. 아침에 핀 꽃이 저녁에 시드는 것을 보고 무상을 느꼈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이는 무상의 본래 의미를 망각하고 허무적인 감정을 말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무상(無常)이란 “변화”를 말하며 이는 한 순간도 머무름이 없거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무상인 것이다. 무(無)란 없다는 뜻이고, 상(常)이란 영원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럼으로 찰나의 짧은 시간 속에도 잠시도 머물지 않는 것이 무상인 것이다. 이는 우리가 감정적으로 느끼는 허무감 내지 공허감 등의 그런 니힐리즘(nihilism)이나 센치한 감정을 말한 것이 아니다.


무상이란 또한 영원한 것이 아니라고 해서 어떤 특별한 한 순간에는 머물지만 다른 모든 순간에는 머물고 있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도 옳지 못하다. 어떤 특별한 순간이 머무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면 다른 모든 순간들도 그렇게 여겨져야 한다. 만약 어떤 것이 찰나라는 짦은 순간에만 변하지 않고 있다면 모든 사물들은 언제나 움직이지 않고 남아 있을 것이며 변화란 불가능할 것이다. 예컨대 올챙이는 어느 한순간 동안은 올챙이로 있다가 어느 순간에 갑자기 개구리로 변하는 것이라면 올챙이는 어디까지나 올챙이지 개구리가 될 수 없을 것이고, 개구리 또한 올챙이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올챙이란 존재 내지 실체가 있다면 그것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영원한 것이 변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영원한 실체나 존재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태어나 한 찰나에도 머물지 않고 개구리로 변해 가는 올챙이란 존재는 올챙이가 아니면서 또한 개구리도 아닌 것이다. 이는 단지 실체나 존재가 아닌 사건이나 행위에 불과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올챙이는 무상한 찰나 속에 인연 따라 변해 가는 하나의 사건이나 행위이기 때문에 “올챙이”이니 “개구리”이니 하는 것은 이름만 있을 뿐 그 실체가 없는 것이다. 무상이란 이렇게 어느 순간에도 머물지 않기 때문에 무상인 것이다. 이는 우리가 실제로 눈으로 느끼느냐 못 느끼냐는 별개의 문제다.


우리가 “장미가 저기 있다”고 할 때 이 의미는 장미가 저기에 “존재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럼으로 “지금 있다”는 존재나 현존의 개념은 머문다는 개념과는 불가분의 것이다. 따라서 존재한다는 것은 일종의 계속됨이거나 '머물고 있는 실체'이어야 한다. 머무름이 없다는 것은 존재함도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사물들이 순간적이라면 다시 말해서 찰나에도 머물지 않고 변하는 것이라면 그들은 틀림없이 영원한 실체가 없는 것이다. 영원한 실체가 없는 것을 부처님은 무아(無我)라고 말씀하시고 또 공(空)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럼으로 실제로 변화하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은 이른바 머무름의 순간이 곧 머무름이 없는 바로 그 순간이 되는 것이다. 당신이 젊어진다는 것은 노화된 세포가 죽고 새로운 싱싱한 세포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새 세포는 늙은 세포에서 시작되고, 늙은 세포는 새 세포에게 이어진다. 새 세포의 탄생과 늙은 세포의 죽음은 동시에 일어난다. 그럼으로 늙은 세포의 죽음이 있어야만 새로운 새 세포가 탄생하는 것이 가능하며 사라지는 것은 존재하는 것과 더불어야만 계속적인 생겨남이 가능해진다. 다시 말해서 젊음은 노화의 시작이요, 노화는 젊음의 시작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태어남(生)은 죽음의 시작이요, 죽음(死)은 태어남의 시작인 것이다. 생과 사는 머물지 않고 동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머무름이 없이 머무름이 바로 무상함의 본체이며 나타남과 사라짐의 동시성이 성립되는 것이 바로 무상의 실체인 것이다.

그럼으로 무상함의 의미는 일어남도 아니고 (생하는 것도 아니고) 사라짐도 아니다. 말하자면 불생(不生)과 불멸(不滅)이 동시성이라는 것이 바로 무상의 참뜻이라는 것이다. 사라짐은 나타남과 동시성을 지니며, 나타남은 사라짐과 동시성을 지닌다는 의미다. 다시말 하면 무상의 실체란 사라짐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요, 나타남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럼으로 무상(無常)을 깨달았다는 것은 불생불멸을 깨달았다는 의미와 같은 뜻이 되는 것이다.


위대한 불교학자이며 중국에 불경(佛經)번역자로 이름 높은 인도의 삼장법사인 쿠마라지바(kumarajiva. 344-413AD)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불교의 핵심은 공(空)을 체득하는데 있다. 그런데 공의 원리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사람은 보통 무상(無常)에 대한 논의부터 시작한다. 그러므로 무상이란 공으로 가는 디딤돌이다. 처음에는 무상의 문제가 거론되나 결국에는 필경공(畢竟空)으로 결론지어진다. 이들 무상과 공에 대한 교설은 깊이와 심원함의 정도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해도 실상은 동일한 것이다. 왜 그런가? 이른바 무상이란 순간순간 어떤 것도 머무름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 여기서 부정되고 있는 것은 긴 기간의 머무름이지만 머무름 자체가 완전히 부정되고 있지는 않다. 그러므로 이것은 단지 다듬어지지 않은 무상일 뿐이다. 다듬어진 참된 무상이란 바로 머무름이 곧 머물지 않음이라는 사실을 뜻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존재란 머무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따라서 머무름이 없다면 자연히 존재도 없을 것이다. 비존재란 무상에 대한 미묘하고 놀라운 가르침인 필경공과 동의어이다.』


‘존재란 머무는 것’이란 말의 뜻은 무엇인가? ‘존재’란 궁극적 ‘실체’를 말하며, ‘머문다’는 말은 영원하다는 말이다. 찰나에도 그리고 어느 순간에도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지는 이 현상세계의 모든 사물은 어느 하나도 머물러 있는 것은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서 찰나에도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인간을 포함하여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존재가 아니라 비존재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일체는 무상한 것이다.

 

현상세계의 모든 것이 존재가 아니라 비존재라면 이는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럼으로 공(空)인 것이다. 공(空)이란 무엇인가? 예컨대 장미 한 송이가 여기 있다고 하자. 우리는 그 장미를 본다. 그 장미가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 유(有)다. 그러나 그 장미란 것의 실체는 없다. 장미는 있지만 그 실체가 없음으로 장미는 있지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으로 비유(非有)다. 장미는 존재이면서 존재가 아닌 것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장미란 실체가 없다. 그럼으로 무(無)다. 그러나 장미라는 실체는 없지만 우리가 보고 있으니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럼으로 비무(非無)다. 그럼으로 장미는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고, 비유(非有)도, 비무(非無)도 아니다. 교학의 말을 빌리자면『공이란 자기부정이며, 철저한 초월의 영역이며, 공 자체도 공하며 영원한 실체(자성)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그렇기 때문에 모든 현상세계를 이룰 수 있는 근본이다.』라고 할 수 있다. 공이란 예컨대 이런 것이다. 공(空)한 그것도 공(空)한 것을 공공(空空)이라고 한다. 이를 필경공(畢竟空)이라고 한다. 구극의 공(空)이란 뜻이다. 그럼으로 <반야심경>에서는『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색불이공(色不異空) 공불이색(空不異色)』이라고 한 것이다. 이 말은, “눈에 보이는 모든 현상세계의 사물 즉 존재(色)는 비존재(空)이며, 비존재가 곧 현상세계의 존재이다. 비존재는 존재와 다르지 않고, 존재는 비존재와 다르지 않다.”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어서 공의 성질을 이르기를『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淨), 부증불감(不增不減)』라고 했다. 이를 요약하자면 공(空)의 세계란 생멸도 없고, 번뇌와 무지와 청정함도 없고, 깨달음의 공덕이 늘어남도 줄어듬도 없다는 뜻이다. 그럼으로 무상을 체득한 자는 공을 체득한 자이며, 공을 체득한 자는 불생불멸을 체득한 자가 되는 것이다. 이는 곧 인간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태어난 것(존재)이 아니며 이는 죽음과 다르지 않다는 의미이며, 또한 죽는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비존재)이 아니기 때문에 사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생(生)과 사(死)가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생(生)은 사(死)의 시작이요, 사(死)는 생(生)의 시작인 것이다. 그럼으로 옛 현인들은『생사(生死)는 일여(一如)다』라고 말한 것이다. 그럼으로 무상을 깨달은 자는 생사가 일여하고, 생사가 일여하다면 이는 곧 불생불멸이니 인연의 세계를 벗어난 자가 된다. 그럼으로 무상의 실체는 필경공이요, 영원한 열반의 세계요, 번뇌와 무지를 벗어난 해탈의 세계가 되는 것이다. 이는 깨달음(覺)이니 대해탈을 얻은 자가 되는 것이다. 대해탈을 증득(證得)한 자는 다름 아닌 곧 부처다. 그럼으로 무상을 깨친 자 부처를 본다고 한 것이다.


4.무상한 삶 속에서 영원한 삶의 길을 찿아가라.


사람이 태어난 것이 존재가 아니고, 죽는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면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그 삶에는 목적지가 없는 것이 된다. 삶이 목적지가 없다면 삶은 어느 곳으로 가야할 곳도, 머물 곳도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으로 삶이란 경이로운 것이다. 경이로운 것은 곧 찬양의 대상이 된다. 이는 단지 되어 가는 것을 즐기면 되는 것이다. 그럼으로 삶은 변화일 뿐이며, 하나의 게임이며 장난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삶을 너무 철학적으로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만약 삶을 심각하게 생각한다면 삶을 놓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생(生)을 생각하면 사(死)가 가로막고, 사(死)를 생각하면 생(生)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럼으로 진지해져야 한다. 그러나 심각해져서는 안된다. 진지함과 심각함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심각해 질 때는 수단과 목적, 방법과 성취라는 개념으로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때 목적지가 있고 그 목적지로 가는 길이 있다. 야망이 생기고 욕망이 생긴다. 심각함은 곧 야망이며, 하나의 질병이다. 관심을 이 세상으로부터 돌릴 수도 있다. 오욕으로 물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 야망에 찬 마음은 또다른 세상을 생각한다. 심각함은 종교적인 것이 아니다. 심각한 사람은 자동적으로 철학적인 사람이 된다. 그는 생각을 시작한다. 심각함은 곧 머리와 관계가 있다. 심각한 사람, 사상가가 항상 침울한 얼굴을 짓게 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들은 웃지도 못하고 놀지도 못한다. 항상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삶을 통해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그는 삶 자체를 수단으로 만들어 버린다. 삶 그 자체가 곧 목적인 것이다.


진지한 사람은 완전히 다르다. 진지함은 가슴으로부터 나온다. 진지한 사람은 심각하지 않다. 진지한 사람은 추구하되 목적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추구한다. 찾고자 하는 것을 발견하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리고 발견하지 못한다 해도 그것으로 역시 족하다. 아이는 개를 좇아 달려가다가도 도중에 나비를 발견하면 방향을 바꾸어 나비를 좇는다. 그렇게 나비를 따라가다가도 길가에 핀 꽃이 있으면 나비는 잊어버리고 온 관심을 꽃으로 돌린다. 아이는 심각하지 않다. 단지 진지할 뿐이다. 아이가 어떤 것을 마음에 두면 그는 전체적으로 그것과 함께 있게 된다. 그것이 진지함이다. 나비와 개를 잊어버리면 꽃이 모든 것이 된다.


관심을 하나에 집중할 때 그것이 진지함이다. 그러나 어떤 목적을 얻기 위해서 관심을 하나의 수단으로서 사용할 때 교활하게 된다. 그대는 단지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서 수단으로서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아이들에게는 그 길이 곧 목적지이다. 그리고 종교적인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그 길이 곧 목적지이다. 내가 어디에 있든 그곳이 바로 목적지이다. 내가 무엇이 되었든 그것이 바로 목표이다. 바로 <이 순간> 나의 삶 전체가 나에게로 수렴한다. 어디 다른 곳으로 갈 목적지가 없다. 그대는 이 순간을 전체적으로 받아들이고 즐겨야 한다.


무상을 체득한 사람은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고 어느 곳으로도 가지 않는다. 단지 아침 산책을 할 뿐이다. 그것이 다른 점이다. 그대는 직장에 갈 때 똑같은 길을 지나간다. 그리고 아침 산책을 한다. 길도 같고 집도 같고 모든 것이 같다. 그대 자신도 같고 다리도 같다. 그러나 아침 산책을 할 때 모든 것이 달라진다. 무상의 실체를 알지 못한 사람은 항상 어느 곳으로 가고 있다. 직장이나 가게 등등 항상 목적지가 있다. 그러나 무상을 아는 사람에게는 아침 산책과 같이 어떤 목적지가 없다.


세속적인 사랑은 목표 지향적이다. 세속적인 사랑이란 무엇인가? 오욕의 늪에 빠진 사람이다. 그 목표가 종교이든 무엇이든 심지어 신이더라도 목표 지향적이다. 그러나 비세속적인 사람은 목표 지향적이 아니다. 그는 <지금 그리고 여기>에 살고 있다. 모든 것이 <지금, 그리고 여기>로 수렴된다. 바로 이것이 무한이 된다. 모든 길을 통해서 그 무한으로 가려고 해도 그것은 언제나 도달될 수 없는 것으로 남는다.


그것은 무한의 아름다움이기도 하다. 우리가 어떤 곳에 도달할 때 모든 것은 사라져 버린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알게된다면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스스로 싫증을 내게된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무한한 것은 계속 진행되어 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무한은 하나의 무한에서부터 또다른 무한으로 계속해서 진행되어 나간다. 무한은 정체되지 않았기 때문에 무한이다. 정체되지 않는 것은 곧 무상이다. 무상은 변화이기 때문이다. 머물지 않는 것이 머무는 것이 무상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무상은 불생불멸이라고 한 것이다. 무상의 진정한 의미는 여기에서 살아나는 것이다.


진지함이란 무심(無心)과 상응하는 말이다.

『마음이 없이는 부처도 없다.』라는 말이 있다. 또 『중생이 부처요, 부처가 중생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의 뜻은 부처가 마음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누구 던지 부처를 보기 원한다면 부처를 보기 전에 먼저 그 마음을 보아야 한다. 한 번 그대가 부처를 보았다면 그대는 마음에 대해서 잊어버린다. 그것이 무심이다. 그럼으로 조사들은 무심을 불성이라고 부른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만약 그대가 마음에 대해서 잊어버리지 않으면 그 마음은 그대를 혼란에 빠뜨릴 것이다. 중생임(衆生心)과 불성(佛性)은 물과 얼음의 관계와 같기 때문이다. 세 가지 독에 중독 되면 그것은 중생임이 되고 세 가지 독에서 벗어나서 순수해 질 때 그것은 불성이 된다. 세가지 독이란 무엇이란 탐진치(貪瞋痴)의 삼독을 말한다. 삼독은 무상의 실체를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겨울이 되면 물은 얼음이 되고 여름이 되면 얼음은 물이 된다. 얼음을 없애고 나면 더 이상 거기에 물이 남아 있지 않다. 중생심을 제거하면 거기에 불성은 없다. 얼음의 본성이 바로 물의 본성이다.

무상을 아는 자 불생불멸을 알게 되고 불생불멸을 깨달은 자가 부처가 되기 때문이다. 부처란 무엇인가? 불성을 자각한 자가 바로 부처가 아닌가? 그럼으로 부처는 무상을 깨달아 해탈을 얻고 중생은 무상에 마음을 일어 켜 육도에 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불성인 마음은 부처도 중생도 다르지 않다. 그럼으로 중생은 부처를 해탈시키고 부처는 중생을 해탈시킨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서로 나누어 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통이 깨어 있음을 만들어 내기에 중생은 부처를 낳는다. 그리고 깨어 있음은 고통을 벗어나게 해주기 때문에 부처는 중생을 해탈시킨다. 고통이 없다면 깨어 있음을 만들어 낼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깨어 있음이 없다면 고통을 부정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대가 미혹되었을 때 부처는 중생을 해탈시킨다. 그대가 깨어 있을 때 중생은 부처를 해탈시킨다. 부처는 스스로 부처가 될 수 없다. 그들은 중생에 의해서 해탈된다. 그래서 모든 부처들은 미혹을 아버지로 삼고 탐욕을 어머니로 삼는다. 미혹과 탐욕은 중생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생을 아는 자 사(死)를 피하지 않고, 사(死)를 아는 자 생(生)을 피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생사가 일여이니 중생이 곧 부처요, 부처가 곧 중생이다.


그대가 미혹되었을 때 그대는 이쪽 언덕에 있다. 그대가 깨어 있을 때 그대는 저쪽 언덕에 있다. 그러나 한 번만이라도 진정으로 무상을 깨닫게 된다면 그대 자신의 마음은 텅 비게 될 것이고, 그대가 “나”라고 주장하는 어떤 형체도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때 그대는 진실로 미혹과 깨어 있음의 양쪽을 모두 초월하게 되는 것이다. 그대가 무상을 체득했을 때 불생불멸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한 번 미혹과 깨어있음을 초월할 때 저쪽 언덕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에게 허무한 감성적인 느낌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여래에게는 이쪽 언덕도 저쪽언덕도 없다. 그는 강물의 중간에도 없다. 지식과 깨달음을 구하는 아라한은 강물의 흐름 중간에 있다. 중생은 이쪽 언덕에 있다. 그리고 저쪽 언덕에는 불성이 있다.

 

근본불교에서 말하는 아라한은 누구인가? 그는 구도자이다. 그는 보았지만 부처와 같이 무상을 진실로 체증(體證)한 자는 아니다. 중생은 누구인가? 무상을 체득치 못한 자이다. 그럼으로 중생에게는 허무가 일어나고, 부처에게는 해탈과 열반의 꽃이 피는 것이다. 그럼으로 기억하라. 허무한 무상은 중생에게 일어나고, 불생불멸의 무상은 깨달은 자만이 체득할 수 있음을.


우리가 삶에서 지나간 시간을 생각할 때 무상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왜 그렇까? 왜 부질없이 한(恨)이 서리고, 후회가 일어날까? 도대체 시간이란 무엇일까?

과거, 현재 미래 즉 신간의 모든 개념이 우리의 생활 속으로 파고드는 것은 우리의 육체적 존재, 즉 제한된 인생, 끊임없이 신경을 써야하는 육체적 요구, 생명을 지탱하기 위해서 이용해야만 하는 자연계의 본질 때문이다. 확실히 우리는 영원히 살 수 없다. 죽어야 할 몸이기에 우리는 시간을 무시할 수도, 시간으로부터 벗어날 수도 없다. 밤과 낮, 잠과 깨어남, 성장과 노화의 리듬, 노동으로써 세계를 세울 필요성과 자신을 지켜야 할 필요성이, 이 모든 요인들은 우리가 살기를 바란다면 시간을 ‘존중하도록’ 강요하는 것들이다. 육체는 또한 우리에게 살기를 원하도록 바란다. 그러나 시간을 “존중하는 것”과 시간에 ‘굴복하는 것’은 별개의 것이다. 진지한 마음에서는 시간을 존중하지만 시간에 굴복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시간의 관념에 매일 때 우리는 ‘존중이 아니라 굴복하게 된다.’ 시간에 집착하는 자는 물건만이 물건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물건이 될 수밖에 없다. 시간에 집착하는 자에게는 시간은 우리의 지배자가 된다. 진지한 마음이라면 시간은 그때 우리의 생활을 지배하는 지배자나 우상이 되지 못한다. 오늘날 산업사회에 살고 있는 자신을 둘러보라. 시간은 우리의 최고 지배자가 되고 있다. 상품을 만들어 내는 공장에 가 보라. 그기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행위는 정확하게 ‘시간대로’ 진행되기를 요구한다. 게다가 시간은 시간일 뿐만 아니라, “시간은 돈”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럼으로 인간은 시간의 노예가 되고 또 돈의 노예로 전락되어 그저 그렇게 태어나 그렇게 굴러가도록 만들고 있다. 단지 기계는 최대한으로 이용되어야 하기 때문에 기계는 노동자에게 진정한 삶을 생각할 시간과 노력을 앗아가고 있다. 과학이 지배하는 첨단산업사회는 기계를 통하여 시간은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시간이 우리를 지배하고 우리가 시간에 굴복할 때, 다시 말해서 우리가 시간에 매이고, 시간에 쫓겨다니는 삶을 살 때 우리의 인생은 불생불멸의 삶이 아니라 공허하고 허무한 생멸의 세계로, 윤회의 삶으로 끝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시간이 가져다주는 욕망의 충족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에서 진지한 자라면 그는 시간 속에 있지만 시간에 매이지 않고 진지한 마음으로 불생불멸의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마치 예술가나 작가가 시간 속에 창작을 하지만 그 창작된 작품은 시간을 벗어나 있듯이.

불생불멸의 삶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중생이면서 부처의 세계요, 영원한 열반의 세계요, 아미타불의 세계가 아니겠는가?


5. 무상 속에서 현실을 살아가는 지혜

 

무상을 깨닫고 진지한 마음으로 사는 길은 무엇인가?

첫째는 모든 살아 있는 것에 자비심을 가지는 것이다.

일체 현상세계는 생멸하는 세계다. 존재하는 것은 언제간은 사라지는 것이다. 사람 또한 마찬가지다. 나도 죽을 것이고 너도 죽고 모두가 죽을 것이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그러 긴 시간이 아니다. 인생살이란 살다보면 아침 이슬과 같고, 날으는 화살과도 같은 것이다. 인생살이는 그렇게 짧은 것이다. 그럼으로 이 짧은 인생살이에 자비와 사랑으로 살아도 짧은데, 남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갈등과 투쟁으로 보낸다는 것은 억울하지 않겠는가? 그럼으로 생멸하는 모든 존재에 대하여 자비심을 가져야 한다. 비록 하루를 살다 가는 하루살이라 할지라도 나의 생명이 중요하다면 그 생명 또한 중요한 것으로 받아드려야 한다. 생명의 본질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하물며 나와 같은 인간에 대하여 그 생명을 존중함에 있어서야. ‘나’ 이외의 다른 생멸을 무시하는 것은 인간의 이기적인 욕심 때문이다. 그럼으로 이기적인 욕심을 버린다면 모든 생명은 한결같이 숭고한 것이며, 신성한 것이다. 숭고하고 신성한 것이라면 어찌 경이로움의 대상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자비심과 사랑이란 물질적으로 베푸는 것만이 자비심이나 사랑이 아니다. 자비심과 사랑의 중요한 메세지는 내 주위의 모든 사람과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다. 관심 없이는 어떤 자비심도 사랑도 일어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것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은 생명을 존중한다는 의미와 같은 것이다. 적게는 내 가족으로부터, 그리고 내 이웃에 대하여 관심을 기우려라. 크게는 살아 있는 모든 것뿐만이 아니라 생명이 없는 것에도 사랑과 자비심을 가져라. 동포애, 인류애, 자연사랑이란 바로 이런 관심을 둘 때 그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절대로 생명을 지닌 것이라면 어떠한 것도 그 생명을 소유하려고 하거나 지배하려고 하는 욕망을 버려야 한다. 다시 말해서 자기 이외의 어떠한 인간이나 사물도 내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지 못한다는 이기적인 욕망을 버리고 철저한 독립성과 사물에 집착을 버리고 일어나는 일에 대하여 사랑과 동정을 나누어 갖는 적극적인 마음자세를 가져야 한다.

 

우리의 인생에서 3가지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태어남과 사랑과 죽음이 아니겠는가? 이 3가지는 진실로 인간에 있어서 가장 근원적인 것이다. 그런데 태어남과 죽음은 이미 시작되었다. 당신이 태어났다는 것은 죽음으로 가는 시작일 뿐이다. 그럼으로 여기 그대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한가지 <자비와 사랑>이다. 그러나 그대 영혼 속에서 자비를, 사랑을 잠깨게 하느냐 못하느냐는 전적으로 그대 자신에게 달렸다.


둘째는 무상을 깨달고자 한다면 “나”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

무상한 것은 영원한 실체 즉 “나”라는 것이 없다. 그럼으로 완전하게 존재하기 위해서는 모든 소유의 형태를 자진하여 포기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소유의식은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그것은 바로 “나”라는 실체에 집착하여 일어나는 욕망이 아니겠는가? 그럼으로 소유욕망을 버리지 않으면 무상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그럼으로 부처님께서도 8만 4천가지 번뇌도 그 뿌리는 삼독(三毒)에 있고, 삼독의 근원은 “나”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뿐만 아니라 무상한 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다. 변화란 머물지 않는 것이다. 머물지 않고 변하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고통이다. 말하자면 있어야 할 것이 없어지는 것도 고통이요, 없어야 할 것이 있는 것도 고통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도 고통이요, 미운사람과 함께 있는 것도 고통이다.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지지 못하는 것도 고통이요, 애지중지 하든 물건이 파괴되고 못쓰게 되는 것도 고통이다. 변하는 것은 모두 종국에 고통일 뿐이다. 그런데 일체가 무상한 것이라면 그 고통의 주체자는 없다. 주체자가 없으면 “나의 것”이 존재하는 의미도 없게 된다. 그럼으로 소유하려고 하는 마음을 버리고 모든 것은 나누어 갖는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부처님께서 “무아(無我)”와 “무아소(無我所)”를 말씀하신 것도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셋째는 일체가 무상함으로 생명의 모든 현상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물건과 권력과 모든 죽어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 그 성장에 관련된 모든 것이 신성하다는 경이로움을 느끼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다시 말해서 탐욕, 미움, 환상 등을 가능한 줄이도록 노력하고, 또한 자기도취(나르시즘)를 버리고 인간생존에 내재하는 풀잎에 맺힌 이슬과 같은 비극적 한계를 무조건 받아 드려야 한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성스러운 것이다. 그럼으로 숲을 알고 싶으면 나무부터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부처를 보고 싶으면 사람부터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넷째는 남을 속이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로부터 속지도 않아야 한다. 남을 속이거나 남에게 기만당하는 것은 욕망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럼으로 무상을 알고자 하는 자는 먼저 욕망을 거두어 모든 일에 진지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럼으로 이런 사람은 천진하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단순한 사람은 아니다.


다섯째는 무상의 실체는 불생불멸임으로 자신은 모든 생명체와 하나임을 인식하여야 한다. 따라서 어떠한 이유로서도 자연을 정복하고, 지배하고, 착취하고, 약탈하고, 파괴한다는 목표를 포기하고, 대신 자연을 이해하고 자연과 협력하도록 애쓰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여섯째는 인생의 목표를 설정하고 이에 도달하고자 하는 야심을 버려야 한다. 목표에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운명에 맡기고 항상 성장하는 삶의 과정에서 진지하게 임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완전하게 산다는 것은 자기가 무엇을 달성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에 있지 않고 그 일에 만족감을 느끼는데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곧 나비를 쫓는 천진한 어린아이의 마음과 같이 삶을 영위하라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고 목표달성에 안달하는 것은 고통이며, 욕망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그럼으로 철학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노예로 태어나서 그의 전 생애 동안 줄곧 노예상태로 살다가 간다.』고.

그 노예상태란 무엇인가? 욕망과 번뇌의 노예이며, 육신의 노예이며, 사념(思念)의 노예다. 이들의 양상은 다르지만 갇혀있는 노예라는 점에서 동일한 것이다. 분노가 오면 분노가 되고, 섹스가 오면 섹스가 된다. 그대는 개개의 모든 욕망등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모든 노예상태와 동일시 된다. 그러나 무상의 진정한 의미를 안다면 무상은 그대에게 자유를 준다. 모든 노예상태로부터 자유를 가져다 준다. 그것을 해탈이라고 해도 좋다. 그것을 열반이라고 해도 좋다. 그 이름이 무엇이든지, 무상을 체득한 자는 그 마음에 번뇌가 사라질 것이다. 번뇌가 사라진 그 마음에는 모든 것이 경이롭게 보일 것이며, 따라서 오로지 축복만이 일어날 것이다.

그럼으로 목표달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또한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그대가 무엇을 행하는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대가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이다. 그대의 존재가 횡재수를 바라는 도둑의 기도와 같이 병들어 있다면 그대의 목표 또한 병들어 있는 것이다.


무더운 이 여름날씨에도 불구하고 천성산 용주사를 찿아온 신도 여러분!

진실로 무상을 아는 자 부처를 본다는 이말을 가슴 깊이 새겨 봅시다.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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